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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아름다움의 세계(BC4세기~AC 1세기)
3)위대한 완성 헬레니즘의 자연 모방..
알렉산더의 사후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페르가몬 같은 대도시들은 경쟁적으로 해상무역과 상업에 투자하며 번영을 누렸다..
자본을 획득한 부유층과 왕실은 예술의 후원자로 등극하면서 예술가들은 부와 명예를 위해 많은 작품을 만들어내며 기술적, 창의적으로 긍정적인 예술의 확대 재생산이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런 분위기에 로도스의 거상, 밀로의 비너스, 라오쿤 군상등 후기 헬레니즘 3대 작품이 탄생했다.
*로도스의 거상(ό Κολοσσός 'Ρόδιος/Ο Κολοσσός της Ρόδου)
그리스의 로도스 섬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청동 거상.
높이는 받침대를 제외하고도 30미터가 넘었다고 한다. 항구 입구 양쪽에 발 하나씩 딛고 선 형태라는 전승도 있지만 물리적으로 무게를 지탱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라틴어 콜로수스(Colossus)는 고전 그리스어 콜로소스(κολοσσός)를 거의 그대로 받아적은 것으로, 그 자체로 '큰 상(像)'이란 뜻이다.
로도스의 거상은 승전기념물이다. 안티고노스 왕조의 안티고노스 1세는 기원전 314년 제3차 디아도코이 전쟁이 발발하자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 폴리오르케테스에게 아테네를 점령하는 것을 시작으로 패권을 확장하는 데 집중하게 하였다.
기원전 307년, 헬레폴리스까지 동원하여 로도스를 침공하였으나, 이집트 태수였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로도스를 지원하였고, 로도스도 강력히 저항한 탓에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포위 공격을 이겨낸 로도스는 포위군이 남기고 간 장비들을 처분한 돈으로 도시의 수호신인 헬리오스에게 봉헌하기 위해 기원전 292년부터 기원전 280년까지 청동으로 거상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로도스 거상이다.
거상은 완공된 지 56년이 지난 기원전 224년에 지중해 동부를 강타한 지진으로 쓰러졌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거상 재건 비용을 지원하겠노라 약속했지만 델포이의 신탁에 따라 로도스 정부는 재건하지 않고 쓰러진 채로 놔두었다.
800여 년이 지난 서기 654년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파 무아위야 1세가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로도스를 뺏은 후 에메사의 유대인 상인들에게 고철로 팔아버렸는데, 그 청동 조각들을 운반하는 데 낙타 900마리가 넘게 필요했다고 전해진다.
거상은 세상에서 사라졌지만 후대에 세워진 여러 거상들에 영감을 주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미국 뉴욕의 자유의 여신상이다.
2015년 12월 로도스의 거상을 다시 세우자는 구상이 나왔다. 에게해를 바라보며 두 다리가 부두 양쪽에 걸쳤고 오른손에는 거대한 등을 든 형상이다. 단순한 재건이나 복원이 아니라 현대 건축으로 세우는 것이라 거상 내부에는 도서관, 박물관 등 각종 편의시설을 넣을 계획이라고 하였으나 그리스의 경기 침체와 재정 위기로 인해 무산되었다.
피라미드, 올림피아의 제우스상등과 함께 세계 7대불가사의로 거론되기도 한다.
*밀로의 비너스(영어: Venus de Milo, 프랑스어: Vénus de Milo, 그리스어: Αφροδίτη της Μήλου)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조각상 가운데 하나로 기원전 130년에서 10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스 신화에서 사랑과 미를 관장하는 여신인 아프로디테(로마 신화의 비너스)를 묘사한 대리석상으로 길이는 203cm이다.이 작품은 헬레니즘 시대의 작품이다. 이 조각상은 1:1.618의 황금 비율이며 8등신이다. 이 작품은 두 팔이 없지만 전문가들은 다양한 연구로 왼팔은 사과를 꽉 잡고 있는 형태였고 오른팔은 배에 있는 흔적으로 흘러내리는 옷을 잡고 있는 형태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루브르 박물관의 3대 작품이라고 선정 될 만큼 그 예술성이 위대하다고 평가된다.
밀로의 비너스는 1820년 4월 8일 당시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밀로스섬의 농부 요르고스 켄트로타스에 의해 발견되었다. 며칠 후 프랑스 탐험가이자 해군 장교 쥘 뒤몽 드위빌(Jules Dumont d'Urville)이 이 조각상의 중요성을 인식했으며 당시 오스만 제국 주재 프랑스 대사였던 샤를 프랑수아 드 리파르도(Charles François Riffardeau de Rivière)를 설득해 조각상을 구입했다. 이 조각상은 1821년 루이 18세에게 헌납되었고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821년 당시의 모습을 드로잉 한 스케치도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왼팔이 좀 더 남아있는 모습이다.
루브르의 마케팅으로 가치의 과대포장, 멜로스섬 주민들의 반환소송, 부러진 팔에 따른 완결성 논란등이 야기되고 있지만 예술성은 인정받는 분위기이나 혹자들은 동시대의 다른 작품에 비하여 극적인 요소와 감정적인 표현이 부족하다고 폄하하기도 합니다.
라오쿤 군상은 전술하였기에 작년 루부르 인증샷으로 갈음합니다.
곰브리치는 "가망없는 싸움의 고통에 절망하면서도 노력하는 몸통과 두팔, 사제의 얼굴 표정과 두아이의 필사의 몸부림, 이 모든 소동과 움직임을 하나의 군상으로 응결시키는 수법"에 찬탄한다고 기술~~
헬레니즘의 예술가들은 고통속에 팽팽하게 긴장된 근육을 콘트라포스트 자세로 만들어 신체의 긴장감과 고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으며 라오쿤 군상은 당시 조각가들이 인체의 동적표현에 대한 깊은 연구와 성찰을 보여주는 표본으로 많은 전문가와 애호가들에게 헬레니즘의 정수로 꼽히고 있습니다.
사료에 따른 기록이 분명하지 않아 제작자와 제작시기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중~^
군상의 극적이고 감정적인 요소는 르네상스와 바로크시대에서 인간의 감성을 더욱 강렬하게 표현하는 것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되기도 했습니다.
헬레니즘 시대가 도래하면서 예술과 필연적으로 결부되었던 주술성, 종교와의 연관성은 거의 상실되었으며 예술가들은 자신의 테크닉에 주력하고 주류 수요자들은 여유를 누리기 위해 예술 작품을 수집하고 장식하였습니다.
이제는 서양사회에서 보편성과 일반성으로 치부되는 저술가들이 예술가들의 작품과 생애를 글로 쓰고, 그들의 일화와 기행을 책으로 만들어 관광객들에게 소개하게 된것도 헬레니즘 시대의 풍속도..
지금도 일화들은 면면히 전해내려오고 있으면서 활자와 구전의 인류사회에서의 영속성을 증명하고 있기도~~
고대의 예술가들은 사실상 조각가보다 화가가 압도적으로 많았으나 극소수로 전해오는 미술서적이 전해주는 정보외에는 소재의 한시성으로 파악할 방법이 없다.
화가들은 일상 생활 속의 주제를 소재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고 전해들을 뿐 남아있는 그림은 폼페이가 발굴되기 전에는 전무하다고 보아야한다!
BC146년 코린토스 전투에서 로마가 그리스에 승리하면서 지중해의 패권은 로마에게로 넘어가고 그리스는 로마의 속주로 전락한다.
모든 문화를 흡수 발전시킨 로마는 "그리스의 예술적, 문화적 유산을 흡수하면서 그리스 문화를 로마 전역에 확산"시킨다.
로마의 귀족은 그리스의 문화를 동경하여 희소성이 있던 그리스 고전주의 조각들을 모방 제작하였으며 우리가 보는 그리스 조각품들은 대부분 로마에서 만든 복제품들이다.
당시 회화에는 오리엔트에서 흡수한 프레스코화가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벽화가 남겨지고 18세기 발굴된 폼페이 유적에서 발견된 장식적인 벽화와 모자이크화가 일부 공개되면서 회화에 대한 연구도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곰브리치도 헬레니즘 시대의 로마 미술을 폼페이를 사례로 거론하며 설명합니다.
"폼페이와 인접지역의 화가들은 헬레니즘의 화가들이 이룩한 업적으로 도시 전역에서 자유자재로 그리고 있었음을 발굴된 유적들이 증명하고 있다."라고 언급하며 "꽃을 꺾고 있는 처녀"와 "목신의 머리"의 발견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폼페이(Pompeii)
현 이탈리아 캄파니아주 나폴리 근처에 위치한 도시이자, 역사적으로 유명한 고대 로마 제국의 도시.
'멸망한 도시들' 가운데 손꼽히는 도시로, 본래 농업을 통해 생산한 포도를 포도주로 만들어 상업이 활발했으며 로마 귀족들의 휴양지로 매우 번성했던 도시였다. 하지만 서기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인해 단 18시간 만에 완전히 잿더미가 되어 오랫동안 역사에서 소멸한 도시 중 하나로 1592년 폼페이 위를 가로지르는 운하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건물과 회화작품들이 발굴되어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이탈리아에서 관광업계 관련이 아닌 이상 그냥 '폼페이'라고 부르면 지금 사람들이 살고 있는 폼페이 신 시가지를 가리킨다. 유적 쪽 폼페이는 폼페이 발굴지(Scavi di Pompei, 스카비 디 폼페이)라고 부르며, 캄파니아 지역 사철인 치르쿰베수비아나로 방문시에도 반드시 폼페이 역이 아닌 스카비 디 폼페이 역에서 내려야 쉽게 찾을 수 있으니 유의해야 한다.
옛 폼페이 주민인 테렌티우스 네오 부부의 초상화
꽃을 꺾고 있는 처녀, 스카비아이 벽화 일부 BC1세기..
오리엔탈 시대 불화같은 분위기가 물씬~~
목신의 머리, 헤르쿨라네움 벽화 일부 BC2세기..
이 시기 벽화에서 벌써 음영을 표현한 분위기~~
폼페이 유적중 프레스코화 일부..
제가 방문했을때 복원을 이유로 폐쇄되었던 "베티의 집"도 2022년 리뉴얼 오픈했다고 합니다..
건축이 아니라 제대로 된 복원이기를 응원하면서 옮겨봅니다.
안도다다오의 건축 분위기가 느껴지는
건물 외관..
폼페이의 시스티나 성당'으로 불릴 정도로 고대 폼페이의 대표적인 유적인 '베티의 집'이 20년간의 복원 작업을 마치고 10일(현지시간) 베일을 벗었다.
'베티의 집'은 폼페이의 거상이었던 아울루스 베티우스 콘비바와 아울루스 베티우스 레스티투스의 대저택을 그들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둘은 한때 노예 신분이었으나 와인 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며 경제적으로는 가장 높은 위치에 올랐다.
둘이 형제라는 설도 존재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고 이탈리아 안사(ANSA) 통신 등 현지 언론들이 전했다.
'베티의 집'은 그 당시 폼페이에서 가장 부유한 상인의 대저택답게 매혹적인 벽화와 호화로운 정원으로 유명하다.
'베티의 집'에 있는 아기 헤라클레스 벽화
거실에 해당하는 펜테우스 방
중앙에 패널화 형태로 배열된 벽화는 그리스 신화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중 하나는 제우스신의 아내인 헤라 여신이 풀어놓은 뱀에 몸이 감긴 아기 헤라클레스를 묘사했다.
현관 오른쪽 기둥에는 한 남성이 자신의 성기와 돈 보따리를 저울로 다는 모습이 벽화로 그려져 있다.
성기가 지나치게 크게 그려졌는데, 당시에는 이것이 행운의 상징으로 여겨졌다고 안사 통신은 설명했다.
'베티의 집'은 폼페이 말기의 주택 인테리어의 유행 양식과 당시 폼페이 부유층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유적으로 고고학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는다.
이탈리아 나폴리 서남쪽에 있는 폼페이는 서기 79년 인근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사라진 도시다.
당시 가장 번성했던 도시로 꼽히던 폼페이는 순식간에 폐허가 됐다.
'베티의 집'은 19세기 말에 발굴돼 일반에 공개됐으나 2002년 긴급 복원 작업을 위해 문을 닫았다.
2016년 부분 개방됐으나 2020년 다시 폐쇄됐다. 고고학자, 복원가, 건축가, 구조 엔지니어, 조경사까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20년간 매달린 끝에 마침내 복원 작업을 마치고 오는 11일 일반에 공개된다.
저명한 고고학자인 가브리엘 주흐트리겔 폼페이 고고학공원 소장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가장 도전적이고 복잡한 건축 현장 중 하나였다"며 "'베티의 집'은 폼페이의 역사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베티의 집 복원 벽화..
BC3세기부터 지중해에서 신흥발호했던 로마는 세력이 거대해질수록 문화적으로 그리스에 종속되고 경도되었으며 코린토스 전투에서 승리후 급기야 헬레니즘 문화의 마지막을 로마가 책임지게 된다.
결국 헬레니즘 미술은 비잔티움의 함락으로 동로마가 멸망하기동안의 유구한 세월동안 로마의 확장과 함께 하면서 미술과 문화로 흡수되어 로마 미술을 발전시킨 자양분이 됩니다.
그리스 미술은 로마 그리고 후대 미술사로 이어지면서 유럽전역에 미적 이상을 전파하는 거대한 유산이라는 생각으로 무질서하면서 말만 많았던 헬레니즘 까지의 미술사를 마감하고 다음 시간에는 "세계의 정복자들"편으로 이어 보려고 합니다.
세잔의 사과정물화와 폼페이의 정물화..
회화에 포함되는 거의 모든것이 폼페이의 벽화에 있다.
지금까지는 문헌에서도 검색할수 없었던 정물화, 풍경화도 등장하여 미술학자들은 헬레니즘의 혁신으로 평가한다.
전술했던 오리엔트의 풍경은 인물을 묘사하기 위한 배경에 지나지 않았으나 헬레니즘의 미술가들은 이미 오랜 세월전에 도시의 거주자들에게 전원의 향수를 선사하는 그림을 그리면서 자연모방으로 헬레니즘의 끝자락을 화려하게 장식했습니다.
곰브리치의 책이 폼페이 유적이 본격화 되기전에 출판된 저서로 폼페이 벽화 몇점을 말미에 첨부해 보았습니다.
트로이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 왕비 헬레나를 처음 만나는 모습을 담은 프레스코 벽화.
한 벽화에는 그리스 신화 속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나를 처음 만나는 장면이 묘사돼 있다. 파리스가 헬레나를 유혹하면서 트로이 전쟁의 불씨가 됐다.
또 다른 작품에는 그리스 신화의 태양신 아폴론이 트로이의 공주 카산드라에게 구애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헬레나의 어머니 레다가 백조로 변신한 제우스와 함께 있는 벽화도 눈길을 끈다.
놀라울 정도로 사실적인 폼페이 정물 벽화들~~
프레스코는 벽면에 석회를 바른 뒤 수분이 마르기 전에 채색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인류 회화사에서 가장 오래된 그림 기술 또는 형태로 평가된다.
가브리엘 추흐트리겔 폼페이 고고학공원 소장은 가로 15m, 세로 6m의 연회장 벽에서 발견된 이들 작품이 기원전 15년에서 서기 40∼5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했다.
그는 "연회장 벽을 검게 칠한 건 기름 램프의 그을음을 감추기 위한 목적으로 보인다"며 "당시 폼페이인은 해가 진 뒤 연회를 위해 이곳에 모였고 와인을 몇 잔 마신 뒤 깜빡이는 불빛 속에서 그림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폼페이에서는 당시 "문란한 성생활"을 보여주는 작품들도 다수 출토되었는데
나폴리 박물관 비밀의 방에서 예약제로 성인에 한하여 공개중이다..
사진은 염소를 유혹하여 정사중인 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