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교구 소속 본당.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 58-2 소재. 1927년 4월 29일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성 베네딕도 · 아기 예수의 성녀 소화 데레사.
혜화동 본당이 설립되기 전 동소문(東小門) 지역의 신자들은 1909년 백동(柏洞, 현 혜화동)에 정착한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의 성당 주일미사에 참례하거나, 1918년경에 설정된 동소문 밖 공소의 공소예절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27년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이 함경남도 덕원(德源)으로 이전하게 되자 서울 대목구장 뮈텔(G.-C.-M. Mutel, 閔德孝) 주교는 코친차이나(월남 지역) 교구의 르 쿠브르(Le Couvre) 신부가 희사한 돈으로 백동의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 건물을 매입하여 본당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1927년 4월 29일 시잘레(P. Chizallet, 池士元) 베드로 신부가 초대주임으로 임명되면서, 서울 대목구의 세 번째 본당인 백동 본당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베네딕도회가 아직 완전하게 철수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시잘레 신부는 서울 대목구 주교관에 머물다가 10월 18일에야 본당에 부임할 수 있었다. 그는 성당을 따로 건립하지 않고 옛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 성당을 사용하였으며, 사제관은 사우어(B. Sauer, 辛上院) 주교가 사용하던 거실을 활용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1929년 초에는 남자 신자 20여 명이 모여 ‘혜화동 청년 친우회’를 창설하고 자선 사업과 전교 사업을 전개하였다.
2대 주임 서기창(徐起昌) 프란치스코 신부 재임기인 1929년에는 옛 수도원 성당을 백동으로 이전한 소신학교에 양보하고, 대신 수도원 부속 건물이던 목공소를 성당으로 개조하여 9월에 라리보(A.J. Larribeau, 元亨根) 주교의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하고 주보를 ‘성 베네딕도’로 정하였다. 1932년 9월에는 신자들이 모금한 성금으로 종을 마련하였으며, 1929-1933년에는 안나회와 여자 성가대, 혜화동 소년회 등이 조직되었다. 3대 주임 오기선(吳基先) 요셉 신부 재임기인 1937년경에는 종현(현 명동) 본당과의 경계 조정으로 관할 구역이 종로 3가 지역까지 확장되었고, ‘어린이들에게 우리 말과 글을 배우게 하여 민족의 얼을 심겠다’는 취지로 1937년 4월에 ‘혜화유치원’을 설립 · 개원하였다. 유치원이 개원하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이 파견되어 원아 교육과 본당의 전교 활동 등에 참여하였고, 1938년 3월에는 ‘가톨릭 여자 청년회’가 발족되어 본당 활동을 활성화하였다.
이와 같이 혜화동 본당의 기반이 확고해지면서 4대 주임 생제(P. Singer, 成載德) 베드로 신부 재임기인 1942년 5월에는 첫 번째 자본당(子本堂)인 제기동 본당이 설립 · 분할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유아 영세를 받은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철저히 주입시키기 위해 주일학교 상급 학년을 대상으로 영세 허원 재신식(再新式)을 실시하였고, 1943년 12월에는 ‘성가 소비녀회’를 설립하였다. 이어 1945년 5월에는 두 번째 자본당인 미아리(현 길음동) 본당을 분할하였고, 1946년 6월에는 제1회 성체 거동 행사를 거행하였으며, 12월에는 청년회를 지도하던 조창희(趙昌熙, 베네딕도) 보좌 신부가 본당 청년들의 사목을 위해 “청년 미사”를 편찬하였다. 1947년경에는 본당을 보다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자문 기구인 ‘본당 유지 위원회’를 조직하였고, 같은 해에 신자 의사들의 친목 단체인 ‘가톨릭 의사회’를 발족하여 전교뿐만 아니라 생명이 위독한 환자들에게 대세를 주는 등의 봉사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8년 6월 생제 신부가 전임되면서 파리 외방전교회를 대신하여 메리놀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본당 사목권을 인수받아 활동하게 되었다. 그러나 5대 주임 크레이그(H. Craig, 奇厚根) 후고 신부는 부임 직후 교통사고를 당해 치료차 미국으로 귀국하였고, 1948년 8월 6대 주임으로 부임한 더피(P. Duffy) 파트리치오 신부도 1950년 6월 한국 전쟁이 발발한 직후 미국으로 귀국하였다.
1950년 9월 서울이 수복된 후 11월에 7대 주임으로 정원진(鄭元鎭) 루카 신부가 부임하면서 한국인 신부들이 본당 사목을 맡기 시작하였다. 1952년 4월에는 전쟁으로 폐쇄되었던 혜화유치원을 다시 개원하였고, 본당 설립 25주년 은경축을 거행하였다. 그리고 성당 건물이 낡고 협소하여 많은 신자들을 수용할 수 없게 되자, 1954년 3월에는 ‘신축 성당 건립 기성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성당 신축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후 1955년 4월에 종로 본당이 설립되어 종로 3가 지역을 이관하였고, 10월에는 세 번째 자본당인 돈암동 본당을 분할하였으며, 1956년 6월에는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도봉리 산 66의 1번지 임야를 매입하여 본당 묘원으로 조성하였다. 그리고 1958년 6월에 성당 신축 정초식을 거행하면서 본당 주보성인을 기존의 ‘성 베네딕도’와 더불어 ‘성녀 소화 데레사’로 정하였고, 1959년 2월에는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방학리 산 65의 1번지를 매입한 뒤 묘원 사용 인가를 받았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혜화동 본당은 본당 시설을 신축하는 등 발전 기반을 다지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8대 주임 장금구(莊金龜) 요한 크리소스토모 신부 재임기인 1960년 5월에는 성당과 사제관(1층)을 완공하여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주교의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또 1961년 3월에는 본당의 주요한 소식을 담은 ‘혜화동 성당 주보’ 창간호를 발간하였으며, 10월에는 유치원의 학급이 증설됨에 따라 유치원 후관 원사(141평)를 신축하였다.
이어 9대 주임 류수철(柳秀徹) 도미니코 신부 재임기인 1963년 5월에는 회장단을 구성하였다가 이듬해 3월 운영 위원회로 개칭하였고, 1965년 8월에는 경기도 포천군 소흘면 이동교리 산 14-1 야산에 묘원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에는 유치원 본당(3층)을 신축하였고, 11월에는 수녀원(2층)을 완공하였으며, 사제관도 2층으로 증축하였다.
10대 주임 이계중(李啓重) 세례자 요한 신부 재임기인 1970년에는 강당(2층)을 증축하였고, 1972년에는 성모상 건립 및 조경 공사를 완료하는 등 성당 주변 환경을 단장하였다. 그리고 11대 주임 박귀훈(朴貴勳) 요한 신부 재임기인 1973년 8월에는 기존의 운영 위원회를 ‘사목 위원회’로 개편하였고, 1975년 5월에는 네 번째 자본당인 성북동 본당을 설립 · 분할하였다. 12대 주임 박희봉(朴喜奉) 이시도로 신부 재임기인 1975년 12월에는 새 사제관(2층)의 축복식을 거행한 뒤 ‘순교 복자 79위 시복 50주년 기념 사제관’으로 명명하였고, 1976년 11월에는 본당 설립 50주년을 기념하여 자축 기념 음악회를 개최하였다. 이어 1977년 1월에는 본당의 역사를 담은 “백동 반세기”를 간행하였고, 7월에는 ‘103위 순교 복자 성화’를 제작하였다. 또한 1979년 7월에는 성당 제대 후면 벽을 도자(陶磁)로 장식하였으며, 1980년 3월에는 성당 오른쪽 유리창을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하였다.
13대 주임 이기명(李起明)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재임기인 1980년 7월 13일에는 본당 주보 ‘혜화’ 1000호를 발간하고, 1001호부터는 서울대교구 홍보국에서 발행하는 ‘서울 주보’로 통합 발행하였다. 이어 7월에는 성모상, 예수 성심상, 성 요셉상을 기증받아 성당에 안치하였으며, 8월에는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를 구성하여 총회장이 기존의 사목 위원회와 신설 사도직 단체 협의회를 통괄 운영하게 하였다. 그리고 1981년 3월에는 수녀원(3층)을 준공하였고, 9월에는 성모회에서 복자 김대건 신부상을 기증하였으며, 1982년 5월에는 성모 동산을 새로 조성하였다.
한편 1982년 서울시의 지하철 4호선 공사 계획에 따라 본당의 대지 일부가 수용되어 부득이 성서 · 성물 보급소, 숙직실 등이 철거되자, 본당에서는 교육관을 신축하기로 결정하고 동성중고등학교에서 필요한 대지 일부를 확보하였다. 교육관 공사는 9월의 기공식을 거쳐, 1983년 5월에 김수환(金壽煥, 스테파노) 추기경의 집전으로 ‘준공 감사 미사’를 봉헌하였다.
14대 주임 이상훈(李相勳) 리노 신부 재임기인 1985년 10월에는 동성중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체육 대회와 백일장을 겸한 ‘백동제’(柏洞祭)를 개최하여 주일학교 학생들 간의 친교와 일치를 도모하였고, 청년 연합회 주최로 제1회 ‘백동 문화제’(柏洞文化祭)를 개최하여 청년들의 공동체 형성과 의식 계발 및 청년 문화 개발에도 노력하였다. 1987년 10월에는 본당 설립 60주년을 기념하여 6월에 설치된 파이프 오르간 축성식과 기념 미사 등을 거행하였고, “백동 60년사” 발간 및 60주년 기념 자축 음악제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1989년 11월에는 소규모의 전례 행사, 교리 강좌 등을 위해서 지하 성당(현 소화 성당)을 완공하였고, 1991년에는 성당 왼쪽 유리창을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하였다.
15대 주임 박순재(朴舜宰) 라파엘 신부 재임기인 1991년 10월에는 성모 동산의 성모상을 성당 계단 왼쪽으로 옮기고, 요셉상을 계단 오른쪽에 안치하였다. 아울러 도로변 담장 안쪽에 십자가의 길을, 오른쪽 성당벽에 로사리오의 길을 조성하였으며, 1992년에는 소공동체 운동 활성화를 위해 본당 구역을 4개 지구 8개 구역으로 개편하였다. 1993년 3월에는 청동으로 대형 십자가를 제작하여 종탑에 설치하였고, 5월에는 지하 성당을 보수한 후 정식으로 ‘소화 성당’이라고 명명하였다. 이어 9월에는 제1회 ‘본당 공동체의 날’을 개최하여 기념 미사, 백동 사진전 등을 열었고, 1994년 10월에는 강당을 2층에서 4층으로 증축하고 ‘백동관’으로 명명하였다. 그리고 신자들이 지속적으로 성체 조배를 할 수 있도록 새 성체 조배실을 마련하였고, 1995년 5월에는 만남의 장소인 ‘샘터’를 조성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16대 주임 염수의(廉洙義) 요셉 신부 재임기인 1996년 4월에는 소화 성당 성체 안치소에 ‘게쎄마니의 기도’라는 설치 미술 작품을 완성하였고, 11월에는 성당 앞 계단에 새로 한국인 성모상과 요셉상을 제작하여 안치하였으며, 12월에는 본당 소장의 성미술을 도록으로 엮은 “우리와 함께 머무소서”를 제작하였다. 1997년 3월에는 정문 오른쪽에 성물 보급소(2층)를 완공하여 ‘분도의 집’으로 명명하였고, 9월에는 “백동 70년사”를 간행하였으며, 10월에는 본당 설립 70주년을 기념하여 기념 미사, 체육 대회, 연주회 등 다채로운 행사를 개최하였다.
17대 주임 나원균(羅元均) 바오로 신부 재임기인 1999년 6월에는 혜화유치원 60주년을 기념하여 기념 미사, 전시회, 바자회를 개최하였고, 8월에는 수녀원을 보수하였다. 그리고 2000년 9-12월까지 대희년 사목 계획으로 남성 구역 모임의 활성화를 위해 구역별로 미사를 봉헌하였으며, 10월에는 성당 대보수 공사를 시행하였다. 18대 주임 김철호(金哲鎬) 바오로 신부 재임기인 2004년 10월에는 어머니와 자녀가 함께 하는 성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실시하였으며, 12월에는 혜화동 본당 소식지인 “백동”을 창간하였다. [출처 : 양인성, 한국가톨릭대사전 제12권, 2006년]
2006년 3월 2일에 서울에서 첫 번째로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30호로 지정된 혜화동 성당은 본당 설립 당시 성당이 아니라, 1960년 5월에 새로 지은 건물이다. 문화재청은 아직 50살도 되지 않은 혜화동 성당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한 배경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붉은 벽돌조 종탑의 대비를 통한 균형미, 비대칭 입면구성 등은 당시 고딕 양식으로 정형화되어 있던 성당 건축의 틀을 깨는 것이다. 1960년대 이후 건축되는 근대적 성당 건축의 모형이 되는 기념비적 건물이다. 또한 조각가 김세중의 부조 작품으로도 유명하며, 종교사적ㆍ건축사적ㆍ미술사적 가치가 있다.”
한마디로 한국교회 건축사에 새로운 획을 긋는 기념비적 성당이라는 설명이다. 오늘날 세워지고 있는 다른 성당들과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근대적 건축미를 자랑하는 혜화동 성당이 1960년에 세워진 건물이라고 하면 다들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성당 건물만 문화재가 아니다. 소장하고 있는 성미술품 모두가 문화재급이다. 어느 것 하나 대가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없다. 서울대교구 정웅모(鄭雄謨) 신부는 저서 “교회미술 이야기”에서 “이 성당 건립에 내로라하는 가톨릭 예술가들의 정성이 하나로 집결됐기 때문에 이 성당을 건축하면서 한국교회 미술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성당 건립은 1950년대 후반 서울대학교 미대 학장으로 재직 중이던 장발 루도비코(張勃, 1901-2001년, 장면 전 국무총리의 동생) 화백의 지휘로 이뤄졌다. 설계를 맡은 건축가는 이희태 요한(李喜泰, 1925-1981년) 씨로 ‘절두산 순교 기념관’의 설계자이기도 하다. 그는 기존 성당의 개념을 거부하고 자신의 개성을 살려나간 독창적인 건축가였다.
성당을 정면에서 바라볼 때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현관 위에 있는 ‘최후의 심판도’ 화강석 부조이다. 1961년 김세중 프란치스코(金世中, 1928-1986년) 서울대 교수가 원도를 작성하고 장기은(張基殷, 1922-1961년) 교수와 함께 조각한 이 부조에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로라”(요한 14,6), “천지는 변하려니와 내 말은 변치 아니하리라”(루카 21,33)는 성경 구절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4명의 복음서 저자 상징이 좌우에 자리 잡고 있다.
혜화동 성당에 있는 수많은 성물들 가운데 일반 신자들에게 가장 익숙한 것으로는 제대 앞 오른쪽 벽면에 걸려 있는 ‘103위 순교 성인화’(1977년, 285×330㎝)를 꼽을 수 있다. 1984년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103위 한국 순교성인 시성식을 계기로 한국교회의 공식 성인화가 되다시피 한 이 그림은 문학진(文學晋) 토마스 화백이 10개월 동안 전례 · 역사 · 복식 전문가들의 자문을 얻은 뒤 한국적 주체성을 살려 103위 한 분 한 분의 표정을 특색 있게 그려낸 것이다. 시대와 신분이 각기 다른 순교자들이 기쁨에 가득 찬 모습으로 천국 개선을 기다리는 이 그림은 보는 이에게 푸근한 감동과 평화를 안겨준다.
혜화동 성당에서 꼼꼼하게 살펴봐야 할 성미술품은 한둘이 아니다. 일일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대작만 꼽아도 이남규 루카(李南圭, 1931-1993년) 교수의 유리화 29점이 있고, 권순형(權純亨) 프란치스코 교수가 ‘성사’라는 주제로 제작한 제대 뒤편 도자 벽화가 있다. 김세중 교수가 1958년에 청녹색 대리석으로 제작한 제대는 당시 본당 사목회장이었던 장면 요한(張勉, 1899-1966년) 전 국무총리가 본당에 기증한 작품이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부활 성수대도 빼놓을 수 없다. 이종상(李鍾祥) 요셉 화백이 1994년에 제작한 성수대 위에 임영선(林永善) 교수가 제작한 예수 부활상을 얹은 합작품으로, 상반신 예수 그리스도가 가시관을 쓴 채 못 자국이 선명한 두 손을 포개 얹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밖에도 최종태(崔鍾泰) 요셉 교수, 최봉자 레지나 수녀 등 내로라하는 성미술 작가들의 작품이 즐비한 ‘교회 미술의 보물창고’가 혜화동 성당이다. 전문적 식견은 없더라도 차분한 마음과 여유로운 시간을 갖고 하나하나 음미한다면 작품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 숨결을 느끼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또한 혜화동 성당은 젊음과 문화의 거리인 대학로와 붙어있는 만큼 젊은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평화신문, 2007년 10월 14일, 남정률 기자의 기사를 중심으로 편집(최종수정 2011년 1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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