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이름 찾아 떠나는 여행 60>
나제통문(羅濟通門)
무주구천동(茂朱九千洞) 33경 중 제1경인 나제통문은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과 무풍면을 가로지른 산줄기의 암벽을 뚫어 만든 높이 3m, 길이 10m의 인공 석문입니다. 두 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작은 바위산인 석모산 능선으로는 본래 설천과 무풍을 오가던 사람들이 넘어 다니던 고갯길이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1914년) 인근 금광에서 채굴된 금을 용이하게 옮기고 그 지역의 농산물과 임산물을 옮겨가기 위해 무주에서 김천과 거창으로 이어지는 신작로를 개설하면서 차량이 통행할 수 있도록 산줄기의 암벽을 뚫었습니다. 현재 터널로 진입하는 30번 국도는 1925년에 건설되었습니다.
당시 굴 위쪽 마을은 "기미니마을" 아랫쪽은 "이미리마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그 굴의 이름을 '기미니굴'이라 하였습니다. 1963년에 무주구천동 33경을 선정하면서 옛날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다는 유래에서 나제통문(羅濟通門)이라 부르게 됐습니다. 그러나 이 굴로부터 동쪽으로 경상도 경계까지는 30번 국도로 15km 거리 덕산재를 넘어야 합니다. 삼국통일 전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 이 통문이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리고 통문 앞 다리 아래 설천에 있는 작은 소의 이름 ‘파리소’의 유래담도 꾸며낸 이야기입니다.
전투를 벌이다 죽은 신라와 백제 군사들의 시체 위로 파리 떼가 들끓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하며, 바위에는 이를 한자로 적은 ‘蠅沼’(승소)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고, 안내판에 적혀 있습니다. 모두 거짓말입니다. 바위에 커다랗게 새겨진 한자 두 글자는 승소가 아니라 ‘鶴潭(학담, 학이 있는 연못)’입니다. 삼국통일 전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 이 통문이었고, 김유신이 백제를 평정할 때 이 굴을 지나갔다는 것까지 만들어진 것입니다. 1967년에 만든 무주군지(적성지)에는 “동굴 입구는 옛날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니 당시 무기 쟁탈전에 대해선 말하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천여 년이 지나자 굴 동쪽과 서쪽 백성들은 풍속과 관습에 차이가 있는 것 같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1957년에 펴낸 무주군지에는 “일제 때 산을 뚫어서 통로가 되어 지금은 수레와 말이 끊임없이 이어진다.(日治時鑿山通道)”고 한 바 있습니다. 두 기록의 내용이 다른 까닭은 1957년과 1967년 사이인 1961년부터 명승고적 33군데를 골라 무주구천동 관광지 개발이 시작된 데 있습니다. 그냥 기미니굴이라고 하는 것보다 근사하게 갖다 붙인 이름이 ‘신라와 백제가 통하던 문’, 나제통문(羅濟通門)이었습니다. 돈벌이를 위해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 국경 출입소’였다며 역사왜곡을 서슴지 않았던 것입니다. 관광이 돈이 된다는 걸 알게 된 행정관청에서도 군지(郡誌)에다 옛일을 엉뚱하게 기록했고 1996년에는 고등학교 국사 국정교과서에 역사를 왜곡하는 내용이 실리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구천동 33경을 주도한 사람은 당시 육군 대령이었던 김남관이었습니다. 구천동의 아름다운 자연에 매혹돼 고향 무주를 발전시키겠다며 절경을 골라내고 길을 낸 사람이었습니다. 구천동 초입에 그를 기리는 공적비가 있습니다. 구천동 33경(景)은 제1경 나제통문에서부터 덕유산 정상인 향적봉(香積峰 ・ 제33경)까지 70리 길에 펼쳐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