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횃불, 광덕 큰스님
한탑(金慶萬)|문사수법회 회주
7. 부처님을 몰라보았듯
제가 머리 깎은 뒤, 이렇게 길을 가면 저를 보고 광덕스님이라고 쫓아오는 사람이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 불교계에서는 광덕스님과 김경만(한탑)이는 한 몸이라고 보지, 따로 보지 않는다는 증거이지요. 그러니깐 나를 보고 광덕스님이라고 쫓아오는 사람도 있었다는 것이지요. 결국 그렇게 가까우니까 저에게 광덕스님 폄하하는 말을 하는 거예요. 이미 앞에서도 이야기한 바와 같이 그렇게 불교공부 많이 한 분이 왜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났느냐? 인데 저는 한결같이 대답하기를 만약 딴 사람이 광덕스님처럼 병이 많았다면 벌써 돌아가셨을 것이다. 광덕스님이나 되니까 일흔을 넘긴 것이다. 즉 신묘장구대다라니 4천 독을 하실 수 있는 정진력으로 병을 극복하고 큰 일을 해 내신 분이라고 말하지요.
앞에서도 말씀 드렸지만 여러분 중에서도 다라니 주력을 해보신 분이 있지요. 108독을 하려면 1시간 좀 넘게 걸려요. 1시간 10분 내지 20분 정도 걸립니다. 그렇죠? 그렇게 일천 독을 한다고 하면 시간이 어떻게 됩니까? 일천 독만 하더라도 시간상으로 쉬지 않고 꼬박 11시간 내지 12시간 됩니다. 그런데 일천 독이 아닌 4천 독이면 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세요. 그러니까 자신을 완전히 내던져야 하루에 다라니 4천 독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대단한 일이지요. 도인의 경지가 아니면 넘볼 수 없는 일이에요. 결코 아무나 그런 경지에 저절로 도달하는 것이 아니지요. 어림도 없어요.
큰스님께서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부처님 원력으로, 즉 부처님 생명으로 살았다는 이야기여요. 그런 힘으로 불사를 하고 불사를 이루고 원력을 성취해 간 것입니다. 저는 큰스님 일흔 셋의 한평생을 한결같이 다라니 삼매로 사셨다고 봅니다. 또한 그 힘으로 폐결핵도 나았고, 불사도 이루었고, 한국불교이 새 물줄기도 형성했고요.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어쩌면 사람의 힘이 아닌 듯할 정도였어요.
큰스님께서는 그 후 대각사에 계시다가 서울대학병원에 입원을 하셨어요. 그 소식을 전해 듣고 허둥지둥 달려가 보니까 위를 거의 다 잘라내다시피 했어요. 그래서 큰스님께서는 평생 동안 정상적인 사람의 위보다 4분의 1 정도밖에 안 되는 크기로 살았습니다. 어쨌든 큰스님께서는 폐결핵도 앓았고 위도 잘랐고 담낭도 없어요.
그런 몸으로 종단 일, 동국학원 일, 불광 일 등등, 건강한 사람도 감당할 수 없었던 응대한 대작불사, 한국불교 새 물줄기의 시대적 불사를 원만히 성취한 것을 보면, 대단하다느니 놀랍다느니 하는 말도 오히려 사치예요.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위법망구와 보살 헌신의 원력과 뜨거운 신심, 용맹정진의 힘이었지요.
다시 앞의 대각회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큰스님께서 대각회 중심에 서서 왕성하게 활동하시다가 남해로 가는 바람에 부득불 새 회장을 뽑아야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사명대사’라는 소설은 쓴 법운거사 이종익 박사님을 새로운 회장으로 모셨어요. 저는 역시 총무로 대각회 심부름을 했고요.
한참 세월이 지난 뒤, 큰스님께서는 남해 토굴생활을 마치고 범어사에서 생활하고 계셨습니다. 그때 전 범어사에 가보진 못했는데, 다녀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큰스님의 범어서 소임이 참 재미있었어요. 열중(悅衆)이라는 이름을 띤 직책이었어요. 열중은 모든 대중을 기쁘게 해주는 소임이라는 뜻이었어요. 사내의 모든 대중을 기쁘게 하는 직책을 가진 스님이, 바로 우리 큰스님이었다는 말입니다.
범어사 대중 가운데 개인적이 고민이 있거나, 공부에 장애가 있거나, 사회적으로 괴로운 일이 있을 때, 큰스님을 만나면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대중 각자의 개인적인 일에서부터 심지어 동사무소 호적이나 병적 사항까지도 큰스님이 앞장서서 해결해 주었다고 해요. 저는 다른 곳에서는 이런 직책을 보지 못했어요. 다른 절에서는 열중이란 말조차 없는 것 같았어요. 형제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그 당시 범어사 대중들이 얼마나 큰스님을 좋아했겠습니까? ‘광덕스님 최고다’라는 말이 저절로 이구동성으로 튀어나왔겠지요. 이와 같은 보현행자 광덕스님은 우리 시대의 훌륭한 어른이었고 뛰어난 선지식이셨습니다.
그 후 어느 날, 서울 인사동 거리를 무심히 지나가다가 문득 큰스님을 뵈었어요. 참 오랜만이었지요. 반가워서 한달음에 달려가 인사를 드렸더니 큰스님께서도 무척 반가워하셨어요. 서로 인사를 하고 근황을 여쭈었더니 큰스님께서는 관재구설(官災口舌)에 쫓겨 서울에 오셨다고 해도. 저는 깜짝 놀라, “관재구설이라니요! 그것이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하고 재차 물었더니, 큰스님께서
“그럼 우리 차나 한 잔 하면서 이야기합시다”라고 하세요.
찻잔을 앞에 놓고 저는 다시 정색을 하고 관재구설이 무엇이냐고 여쭈었지요. 그랬더니 큰스님 말씀이
“아, 글쎄 범어사 대중들이 주지를 뽑는데 나한테 주지 맡으라고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어마 뜨거워라 하고 도망 나왔다”는 거예요. 이 일 역시 요즘 형편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점이지요. 어쩌면 주지를 서로 하려고 애를 쓰고 노력을 할 텐데 우리 큰스님께서는 한사코 주지를 안 하려고 애를 쓰고 노력하셨으니 말입니다. 다 듣고 난 저는 그때서야 웃음이 나왔습니다.
사실 길거리에서 관재구설이라는 말씀을 처음 들었을 때는 매우 걱정을 했지요. 그러나 큰스님으로부터 설명을 듣고 나니 마치 비 그친 뒤 햇빛 나듯이 참 상쾌했어요. 그리고 큰스님의 표현이 참 재미있지 않습니까. 요즈음은 주지 서로 차지하려고 야단법석을 떨고 심지어는 차마 못할 짓도 서슴없이 하는데, 우리 큰스님은 주지를 관재구설이라고 말씀하시니, 이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후세의 사표가 된다거나 교훈이 된다는 것은, 말이 아닌 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큰스님의 행적을 보며 다시 느끼게 됩니다. 요즈음 공부보다 주지하려고 애쓰는 스님들이 있다면 이런 이야기를 한 번쯤 꼭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 해요.
그 후 큰스님께서는 봉은사 주지를 하셨는데, 지금의 봉은사는 자동차로 쉽게 가지만, 그때는 뚝섬에서 배도 타고 차도 타고 걷기도 해야 하는 머나먼 길이었습니다. 거기에 주지로 계시면서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를 구성했는데 그 모체 역시 대각회였습니다. 우리 큰스님께서는 만드셨던 대각회가 사실은 우리나라 불교운동의 산실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때 참여했던 저나 다른 회원들이 말을 하지 않고, 또 글을 써서 발표하거나 기록으로 남기지 않아서 오늘날 다른 사람들이 잘 모를 뿐이지만 사실은 대각회가 불교계 전체나 우리 종단에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어요.
우리나라 불교운동의 대표격인 대한불교청년회나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가 대각회를 통해 탄생된 것이나 다름없지요. 그때 대각회 인재들이 커 나가서 폭넓은 활등들을 했던 것입니다. 대불련에 구도부가 있었는데 거기에 앞장섰던 분들이 동국대학교 교수로 있던 박성배 교수였어요. 박성배 교수의 형님 되시는 분이 박성관 씨라고 문교부에 사무관으로 계셨지요. 그분도 우리 대각회의 멤버였습니다. 그분은 나중에 출가해서 정조스님이 되었습니다. 경기도 안성 석남사 주지로 계시다가 얼마 전에 입적하셨어요. 당시에 정부 중앙부처의 사무관은 꽤 높은 직책이었지요.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그 당시는 군수가 사무관일 때입니다. 그분은 문교부 사무관으로 있으면서 우리 대각회 간부를 지냈어요. 그분의 동생이 바로 박성배 교수이시고, 최근 『깨침과 깨달음』이라는 책을 출간하여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저도 읽어보았습니다만 여러분들도 꼭 한 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내용이 충실하고 참 좋은 책입니다. 불교 공부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대불련 구도부는 바로 그분을 지도교수로 모셨지요. 박성배 교수도 큰스님을 굉장히 따르던 분입니다. 주지스님의 이야기를 들이니 박 교수님도 큰스님과의 인연 이야기를 쓰신다고 하더군요.
박 교수님은 대불련 지도교수로 봉은사에서 학생들에게 보현행원을 가르쳤습니다. 학생들을 행원사상으로 무장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쏟았어요. 그때의 학생들은 낮에는 학교 가서 각자 공부하고 저녁에는 봉은사로 돌아와 출가자들처럼 수행했지요. 구도부 대학생들은 봉은사에서 보현행원을 공부하고 기도하고 참선 정진하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일들을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큰스님의 관심은 머리 깎은 출가 불교만이 아니었어요. 즉 특수한 계층만을 위한 불교가 아니라, 일반 사회 사람들이 불교를 믿어야 하고 그러자면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는 판단으로, 일찍부터 젊은 인재를 양성하셨지요. 큰스님은 그런 원대한 목표로 대불련을 이끌고 나가셨어요.
그 당시 분위기는 참으로 굉장했어요. 부처님에 대한 열렬한 신심은 지성인들이 삶을 무척 뜨겁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행동불교를 말했지요. 박성배 교수님 같은 분은 머리 깎고 출가를 할 정도였으니까요. 지금은 하산하여 미국에서 저명한 학자로 활약하고 계시지만 해인사 백련암 성철 큰스님의 상좌가 되어 원조(圓照)스님으로 수행했었습니다. 박 교수님이 원조스님으로 백련암에 계실 때, 저더러 얼른 백련암으로 오라고 해서 그 덕분에 저도 성철 큰스님 문하에서 공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성철 큰스님께서 저를 아주 대견하게 여겨 주셨어요. 저의 거사 불명이 철오(徹悟)였는데 성철 큰스님께서 당신의 이름 한 자를 따서 지어 주셨던 것입니다. 제가 백련암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적에 우리 큰스님은 총무원 충무국장을 맡으셨습니다.
저는 큰스님께서 총무국장을 맡으셨기에 무심코 ‘축하합니다’라고 인사를 드렸더니 큰스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아니 딴사람이 그렇게 말하면 몰라도 어떻게 철오거사님이 축하한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앞으로 고생이 많겠습니다’라고 말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 했어요.
광덕스님 시봉일기 4 위법망구, 송암지원, 도피안사
첫댓글 보현선생님의 댓글을 옮겨 옵니다.
큰스님이 결핵을 물리친 일화에서는 병에 관한 우리 자세에 대한 많은 가르침을 시사합니다. 혹자는 정진 덕분에 결핵이 물러갔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제가 볼 땐 아닙니다. 큰스님은 병에 사로 잡히지 않으신 겁니다. 보통 사람은 병이 오면 병을 낫겠다, 건강해지겠다는 마음을 내는데, 그건 바로 욕심이지요. 병을 맞이할 때 가장 경계해야하는 게 이런 욕심을 내는 일입니다. 욕심을 내면 마음밭 자체가 무너져요. 그렇게 되면 정말 병보다 쎈 치료를 하지 않으면 병은 물러가지 않습니다. 병 또한 나가기 싫어 더 큰 병력을 발휘하지요.-계속
큰스님 일화에서 보듯, 큰스님은 그냥 병을 잊으신 겁니다. 병이야 있건 말건, 내 몸이야 죽든 말든 당신은 당신의 길을 가신 겁니다. 몸에 연연하지 않고 오로지 진리로 마음을 향한 것이지요. 여기서는 참선이 그 방법입니다. 똑같이 참선을 들어도 진리를 향한 마음을 드는 참선과, 깨닫겠다는 참선은 전혀 다른 겁니다. 깨닫겠다는 건 그 자체가 바로 욕심임을 알아야 해요. 상기병이 오는 것도 그런 엉터리 자세로 화두를 들기 때문이지요. 진리 자체로 마음을 향해야 합니다.그래야 병도 낫고 깨달음도 오고 그래요!
어제 건강검진 결과를 받고 보니 큰스님의 경계가 정말 보통의 경계가 아님을 다시 느끼게 됩니다. 병을 병으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의 길로 가신 큰스님께 다시 한번 예경 찬탄올립니다._ 내 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마하반야바라밀.....()_
위의 글을 그대로 옮깁니다.
우리가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큰스님의 관심은 머리 깎은 출가 불교만이 아니었어요. 즉 특수한 계층만을 위한 불교가 아니라, 일반 사회 사람들이 불교를 믿어야 하고 그러자면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는 판단으로, 일찍부터 젊은 인재를 양성하셨지요. 큰스님은 그런 원대한 목표로 대불련을 이끌고 나가셨어요.
큰스님의 보편의 불교, 누구나 할 수 있는 불교를 위한 밑바탕을 위해 애쓰심에 또다시 찬탄드립니다. 그 덕분에 저희들은 앉어서 공부할 수 있으니 정말 더 열심히 해야하는데....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부처님 원력,부처님 생명 그자체로 몸소 실천 하시며 살아가신 큰스님!..내생명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_()()()_
그 많던 구도부 대학생들은 어디에 계시는지요?..._()_
감사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고맙습니다...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