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황혼이 하는 말
은석 조 명 철
황혼을 바라본다. 하늘과 바다에 웅장하고 화려한 그림을 그렸다. 뭉치고 흩어지고, 뛰고 날고, 서고 눕고, 어느 화공이 이렇게 화려한 듯 강렬한 그림을 그렸단 말인가. 기기묘묘한 형상들이 검붉은 웃음을 터뜨리며 춤춘다.
생동하는 그림이다. 생령 사령이 그림 잔치를 열었나 보다. 하루 일을 마치고 지구 뒤편으로 넘어가는 의식 절차라니! 이렇게 장엄할 수 있을 것인가? 내 나이 구순, 인생 여정이 막을 내리려는 시간 앞에 섰다. 한국인으로 태어나 한국인으로 살아온 날들이 언뜻언뜻 스쳐 간다.
나는 일제 강점기에 태어났다. 고통을 안고 세상에 나온 셈이다. 여덟 살 때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학교에선 일본어 쓰기를 강요당했다. 우리말을 쓰다 들키면 벌금을 낸다. 돈이 없으면 변소를 청소하는 괴로움을 겪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아침 학교 정문에 들어서면 동방요배東方遙拜를 해야 하고, 조회 시엔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를 외웠다. 일본 천황에 대한 경배요, 일본 천황의 백성이 되겠다는 맹세였다.
방공호를 파는 일도 어린이들의 몫이었다. 곡괭이질도 삽질도 힘에 부치니 호미나 괭이로 운동장 귀퉁이 굳은 땅을 파야 했다. 손이 부르트게 힘을 다했지만, 정해진 작업량을 다하지 못하면 담임선생은 종아리를 후려쳤다. 아파서 울면 더 때린다. 그것을 단련이라 했다. 이제 생각해 보면 그 선생은 철저한 황국신민 교육의 선봉장이 아니었나 싶다.
4학년 때 8.15광복을 맞았다. 마을 청년들은 북을 둥둥 울리고, 태극기를 흔들고, 해방가를 부르고,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돌았다. 나도 친구들과 함께 신이 나서 뒤를 따랐다. 일인 교장은 밤에 몰래 도망쳤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이젠 학교에서 우리말을 써도 된다는 것이다. 억압에서 벗어난 기쁨을 만끽하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광복의 기쁨은 잠시였다. 제주엔 4.3사건이 일어났다. 외국 유학에서 돌아온 사람들,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물든 지식인의 반정부 투쟁이라 했다.
마을마다 성을 쌓고 보초를 서고, 죽이고 죽는 아비규환, 삶의 보금자리는 불태워지고, 상부상조의 미덕은 사라졌다. 설상가상 마을에 이질까지 창궐해 수많은 어린이의 목숨을 앗아갔다.
슬픔과 고통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6.25남침 전쟁이 일어났다. 북한의 공산화 통일전쟁, 국토는 거의 빼앗기고 병력이 모자라 중학생까지 전선으로 나가야 했다. 전장에서 스러져 간 꽃다운 생명들은 몇몇이며, 피란길에 버려진 어린 생명들은 또 몇몇이던가?
하늘에 사무치는 어린 생명들의 울음소리, 아비규환이었다. 천우신조라고나 할까? UN군의 참전으로 잃었던 국토를 되찾았다. 하지만 금수강산은 피비린내로 가득 차고, 삶터는 쑥대밭이 되었다. 한국은 세게 최빈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휴전 협상으로 전쟁은 멎었다. 그러나 장기 집권을 노린 3.15 부정선거는 국민을 분노케 했다. 대도시를 중심으로 반정부 시위가 일더니 대학가로 번졌다. 드디어 거리를 휩쓰는 젊은이들의 노도 같은 시위는 4.19 학생혁명을 불렀다.
정권이 교체되었다. 하지만 정쟁과 무능으로 나라의 앞날엔 먹구름이 끼었다. 이를 지켜본 군부가 목숨 걸고 5.16쿠데타를 감행한다. 그리고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새역사 창조의 깃발을 들었다.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라는 새마을 운동 노래가 국민의 마음을 흔들어 깨웠다.
도시에도 농촌에도 밀물처럼 번진 새마을 운동, 아침마다 새마을 노래가 울려 퍼지면 사람들은 빗자루, 괭이, 삽, 호미 등을 들고나와 거리를 쓸고, 마을 안길도 넓히고, 초가지붕도 슬레이트로 바꾸고…, 낙후한 삶은 새로워지기 시작했다. 체계적인 새마을 교육으로 애국심이 불타올랐다. 아침 하늘에 솟아오르는 태극기를 보며 눈물을 흘렸던 시절, 그것은 혁명이었다.
정부는 대일 청구권 자금과 차관을 더해 국가 발전 기금을 조성하고, 농수산업의 발전, 중공업 기반 조성을 위한 포항제철 건설, 경부고속도로 건설, 그리고 수출 산업을 일으켰다. 외화를 벌기 위해 간호사로, 광부로, 월남 전선으로, 열사의 땅 중동 건설 노동자로 뛰쳐나갔다.
오늘의 십 대 경제 대국 건설에 초석을 놓은 역군들이다. 오랜 세월 외세에 눌려 기를 펴지 못한 한민족,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뜨겁게 손을 잡았다. 이렇게 신바람 나고, 국민이 하나 된 때가 또 있었을까?
놀랍다. 세계에 유일한 분단국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 세계 10대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첨단 신기술이 세계 표준이 되고, 5세대 전투기 KF21이 대량생산을 앞둔 나라로 도약했다.
한국인의 IQ가 세계 최고임도 스위스 쮜리히대학 IQ 조사 연구에서 밝혀졌다. 한글이 세계 최고 문자임도 이미 인정받았다. 세계인의 언어를 가장 많이 기록할 수 있는 한글, IT 시대에 가장 적합한 과학적인 한글, 그래서 세계문자올림픽에선 언제나 1위를 차지한다. 세계 곳곳에 한글학당이 서고, 한국을 배우러 오는 외국인은 일취월장이다.
그런데 국가를 이끄는 정치는 어떤가? 당리당략에 매몰된 근시안적 정치, 상대를 죽어야 내가 산다는 소아병적 정치, 그로 하여 국민의 속을 뒤집고 화병火病을 키우고 있다.
내로남불의 정치를 청산해야 한다. 보수 진보가 무슨 소용인가. 정치는 국민을 편안케 하는 것이라 했다. 농부가 굳은 땅을 갈아엎어 비옥한 땅을 만들 듯, 스마트한 정치인이 출현해 시대착오적 구태, 편향정치를 갈아엎을 일이다. 한국의 장점을 극대화하고, 미래 비전을 제시, 여야가 손잡고 나간다면 ‘가까이 있는 사람은 기뻐하고, 멀리 있는 사람은 찾아오는’ 나라가 될 것이다.
아시아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인도의 시성 타고르는 ‘동방의 등불’이란 예언 같은 시를 우리에게 이미 선물했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기에 /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 그 등불 한번 다시 켜지는 날에 /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후약)
한국에 이미 등불은 켜졌다. 세계인들은 그 등불을 바라보고 있다. 그 등불을 지키고 키울 일만 남았다.
석양을 바라본다. 황혼의 이야기를 듣는다. 꿈틀거리는 석양 속에 한국이 용트림하고 있다. 코리안이 송별하는 태양은 내일 아침 다시 코리안의 환영 리에 찬란하게 떠오를 것이다. 행복을 느낀다. 진정한 행복이란 자기가 가진 것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