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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독립 의사(獨立 義士) 열전(列傳)
◦ 시대적 특징
을미사건으로 한국인의 배일사상이 고조되어 독립협회가 결성되었다.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방조약이 조인되고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개칭하고
조선총독부를 설치하니 독립운동은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일제의 찬탈에 대한 독립운동은 불길처럼 타오르고 그칠 줄을 몰랐다.
유명무명의 독립투사들은 국외와 국내에서 장렬한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쳤으니
이분들의 애국정신을 우리 후손들이 영원히 숭모하지 않을 수 없다.
◦ 의병항쟁
‧ 1895년~1907년 초기 의병항쟁을 의병 1기로 본다.
을미의병은 대한제국의 군대해산에 따른 군인들의 항쟁으로 시작
‧ 1907년~1910년의 의병활동은 2기로 본다.
경기지방에서 발생해 남부지방으로 확산
의병활동이 맹렬했던 지방은 광주, 전남의 함평, 장성, 담양, 장흥, 고창으로
점차 전국적으로 확산
‧ 1910년 이후 의병 3기로 만주, 노령, 연해주까지 파급
군사적 조직의 독립투쟁으로 확대되었다.
◦ 기미독립운동
‧ 미국의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아 상해에 망명한 지사들이
1919년 2월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였다.
만주, 미국, 시베리아에도 대표단을 파견하여 독립을 호소하였다.
‧ 1919년 2월 28일 동경 유학생 600여명이 기독교 청년 회관에 서 모여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서와 결의문을 채택하여 독립 운동자들에게 자극을 주었다.
‧ 국내에서 천도교의 손병희, 기독교의 이승훈, 불교의 한용운 등
민족지도자 33인이 중심이 되어
고종 장례일인 3월 3일을 앞두고, 전국 각지에서 모여드는 기회를 이용하여
태화관에서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3.1 운동은 전국의 남녀노소 학생 상인 농민 노동자가 가담되어(일본 측 통계 200만)
1500여 회에 걸쳐 독립만세를 불렀다.
일본 관헌에 체포된 자가 46,948명, 피살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
◦ 6.10만세 사건과 광주 학생 운동
‧ 1923년 9월 1일 일본에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일본은 한인 폭동설을 조작하여 5000여명을 학살한 일이 있었다.
‧ 1926년 4월 26일 조선 최후의 왕인 순종이 승하했다.
일제에 대한 민족 투쟁이 국내에 격화되고 있던 차에 사회주의 운동자들을 중심으로
순종의 장례일인 6월 10일을 기준으로 반일 시위를 계획하였다.
지도력 있는 인사들이 사전에 검거되어 가두시위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학생들의 민족적 시위의 연속으로 동맹휴학이 계속 일어났다.
1929년 광주에서 기차 통학을 하던 일인학생이 한국여학생을 희롱하는
모역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11월 3일 양측 학생의 격돌사건이 시가전 양상을 띠게 되고, 일본인 교사까지 가담하여
한인학생을 탄압하자 항일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930년까지 시위에 참가한 학교 194개교,
참가 학생 수 54,000명, 퇴학처분 582명, 무기정학 2,339명, 피검자 1,642명이다.
국외‧국내에서 독립투사들의 항전에 힘입어 1
943년 11월 27일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1945년 4월 얄타회담과 7월 26일 포츠담 선언에 의해 한국의 독립인 확인되었다.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전쟁은 끝나고 조국은 광복되었다.
항일투쟁 70년간의 광산김씨 독립운동가에 대하여 요약하였다.
광산김씨 독립투사 열전
32세
성택(1874~1914 문정‧의랑공파) 전남 보성군 겸백면
‧ 1909년 4월 고흥 강동 전투와 8월 과역전투에 의병장으로 참전
‧ 1910년 돌산 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체포 10년 언도, 국립묘지 안장
33세
좌겸(1851~ 문정‧문간공파) 북제주군 한경면 판포
‧ 이응호 등 12동지가 집의계를 조직하고 제주 오라면 연미동에 조설대를 설치.
일제의 치욕을 벗어나기 위해 항쟁
34세
기균(1891~1953 양간‧전리판서) 전북 정읍
‧ 최익현과 창의하여 임병찬과 더불어 의병을 모집, 순창에서 일군과 전투.
총에 맞아 일본군에 잡혀 옥고를 치렀다.
기택(1900~1959 양간‧전리판서) 전남 함평군 월야면
‧ 1919년 4월 8일 문장리 장날 지방민을 선동하여 독립만세 집회를 열었다.
‧ 죽창으로 무장하여 일본 헌병 파견소와 면주재소를 습격하였다.
체포되어 목포 형무소에서 1년 복역
석윤(1877~1949 문정‧문간공파) 제주시
‧ 기우만, 고사훈과 합세하여 조설대 12동지의 한사람
‧ 일제 창씨개명의 강권에 종족의 보존을 염려 1943년 임오보 발간에 주무역임
35세
병구(1858~1943 문정‧문간공파) 제주 도평동
‧ 조설대를 중심으로 애국운동,
3.1운동 때 제주도 봉기를 주도한 뒤 지하활동을 전개
‧ 독립운동 자금을 수집하여 김사규를 통해 상해 임시 정부에 전달
병로(1865~1946 문정‧문간공파) 제주도 조설대 12동지의 한사람.
영오(1858~1910 문숙‧삼사)
‧ 경술국치를 당하자 동지를 규합하여
김창봉의 군막에 들어가 왜적을 섬멸하는데 앞섰다.
어산 싸움에 패전하자 집 뒷산에서 낫으로 목을 베어 자진하였다.
‧1 990년 8월 15일에 건국훈장 애족장 수여
재관(1888~1958 양간‧전리공파) 전북 고창군 고수면 월계리
‧ 1905년 최면암의 의병진에 참여
‧ 1908년 기삼연 등의 호남 의병 창의대와 합동으로
고창 전투에서 5-6차례 전투를 치렀다.
‧ 1913년 경술국치 후 새로 조직한 독립 의군부 창립에 가담하여
참모관 직책으로 첩보활동에 종사하였다.
‧ 고종 황제 인산(因山)때 고창에 망월대를 축조하여 2년 복을 마쳤다.
‧ 1980년 8월 15일 대통령 표창
재규(1893~1963 양간‧전리판서) 전북 정읍군 소성면
‧ 경술국치 이후 도산 안창호 선생을 따라 독립운동
‧ 만주를 무대로 독립운동, 공적을 추모해 유적비가 있다.
재문(1902~1951 양간‧전리판서) 전남 함평군 대동면
‧ 1919년 상경하여 독립만세 운동에 참가하고 고향에 돌아와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1920년 3월 26일 함평보통학교 학생들과
함평 장터에서 독립운동을 전개, 20명이 구속되었다.
동년 4월 산내면 장터에서 독립운동을
지휘하다가 체포 3년형을 대구교도소에서 보냄
‧ 출옥 뒤 상해임시정부의 김철과 연락, 독립자금 조달
‧ 함평읍 기산공원에 군민이 세운 비에 이름이 기재되어있다.
36세
구현(1861~1922 양간‧퇴촌공파) 경남 의령군 화전면
‧ 1919년 3월 20일 응현 등 20여명이 덕교리 마을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면장을 구박하여 앞세우려다 경찰에 검거 진주 지원에서 8월형을 받다.
마리아(1892~1944)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 1906년 서울 정신 여학교 졸업 1913년 정신여고 교사로 재직 중
만족교육에 전념하면서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금에 전념
‧ 1915년 동경 여자 학원 입학
1918년 독립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 옥고를 치렀다.
‧ 동경에서 2.28 독립선언에 가담하고 선언문을 국내에 전달하고
책임을 수행하여 3.1 독립운동의 계기를 조성하였다.
‧
서대문 감옥에서 출옥하여
대한 애국 부인 회장직을 맡아 독립 투쟁을 하다가 검거되어 3년 형
‧ 1920년 중병에 걸려 병원에서 지내다가
탈주에 성공하여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 대의원으로 활약하였다.
‧ 1923년 미국에 건너가 시카고 대학 사회학과 이수, 뉴욕에서
신학 공부를 하다가 13년 만에 귀국
‧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이에 황거하여 투쟁하다 지병이 재발되어
1944년 평양 기독교 병원에서 별세
‧ 1962년 3.1 에 건국공로훈장
‧ 김마리아 기념 사업회에서 보라매공원에 동상 건립
문헌(양간‧총제)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 봉현과 같이 양지 주재소를 위시하여
일본 기관의 주택을 습격 파괴하고 경찰에 체포
‧ 서대문 형무소에서 혹독한 고문과 박해를 이기지 못하고 1년 만에 옥중 사망
보석(1914~ 문정‧문민공파) 광주 북구 누문동
‧ 광주 제일 고등학교 2년에 재학 중 광주학생 독립운동에 가담
봉현(1887~1930 양간‧총제공파)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 1919년 독립만세 운동을 주동하여 안성군 각 면을 석권하면서,
일가들 외에 이근수 등과 함께 안성군 각 면의 주재소를 습격하여 파괴하고
일인들의 집을 찾아 방화하고 추방하였다.
‧ 일경에 체포되어 7년형을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 모진 고문과 마음의 고통으로 출소한지 얼마 안 되어 1930년에 사망하였다.
수(1890~1943 양간‧전리공파) 경남 합천
‧ 파리 세계평화회의에 우리 독립정신을 전달하기 위해 유림들만이 서명한
“파리 장서” 사건에 참여함으로 독립 운동에 가담하였다.
‧ 1927년 집근처에 “청계정사”를 짓고 후손들에게 나라의 역사를 가르쳤다.
의심을 받아 일경에 체포되어 추궁을 받다가 음식을 전폐하고 세상을 떠났다.
응현(1889~1970 양간‧퇴촌공파) 경남 의령군 화정면 덕교리
‧ 1919년 고향에서 동지 김구현, 조균영 등과 함께
3월 20일 덕교리를 중심으로 독립만세운동,
당시 면장인 강재언에게 같이 참여하기를 권했으나 불응하자 소동을 일으키니
일경에 체포되어 8월형을 복역하였다.
‧ 1926년 6.10 만 세 때 동지 조균구 둥과 사전에 모의하다가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36세
이현(1920~ 문정‧문민공파) 광주시 북구 누문동
‧ 1943년 보안법 위반 혐의로 평양 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
‧ 1982년 12월 16일 자주독립운동에 기여한 공으로 대통령 표창
익현(1871~1944 양간‧총제공파 ) 경기도 양평
‧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투사들과 합류
‧ 1921년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고국에 잠입하여 소임을 다하였다.
‧ 다시 청진에 잠입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는 동안 오른쪽 눈을 읽고 귀향
‧비밀 조직으로 활동하였기에 상세한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직순(1881~1908 문숙‧화평)
‧ 1904년 고흥 마을의 의병장이 되어
보성, 광양의 의병장 안규홍과 합세하여
왜병과 항쟁할 때 맨손으로 많은 적을 섬멸하였다.
‧ 1908년 5월에 왜병에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내 입을 열지 않으니
총검으로 찔려 죽으니 나이 27세였다.
‧ 1980년 8월 14일 대통령 표창 추서
창현(1916~1950 문숙‧판도) 충남 청양군 청양읍
‧ 일본 군대에 지원할 것을 강요받았으나 한민족으로 “왜군에 지원할 수 없다.”며
추상같은 호령으로 버티었다.
‧ 1950년 7월 23일 북괴의 총검에 장렬히 순국하였다.
‧ 1963년 1월 11일 반공정신을 높이 사 내각수반 표창
호현(1892~1919 양간‧전리) 경남 의청군 진동
‧ 1919년 기미독립운동 시에 진동에서 변상태 등 지방 유지들과 같이
면민 500여 명이 모여 만세운동을 하다가 순절하였다.
‧ 삼진(진동‧진북‧진전) 지구 8의사 중의 한 분이다.
희인(1890~1949 사온직장공파) 경기도 연천군 중면
‧ 대한제국 토지조사국 서기로 근무하다가 3.1독립만세 직전에 독립운동 차
상해로 밀항 중 일경에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37세
영기(1871~1919 양간‧전리) 경남 합천 문양면
‧ 1919년 서울에 다녀온 강홍렬로부터 독립선언문을 전달받고
3월 19일 합천 장날 오후 4시경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니 500여명의 군중이 호응하였다.
일경이 이 운동에 가담한 심재기 등 17명을 구속하고 군중을 해산시켰다.
20일 오후 7시에 구금한 사람을 구출하기 위해 12명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선두에 지휘하니 수 백 명의 군중이 합세하여 농기구로 무장하여
경찰서를 습격하여 돌진하였다.
이 때 일본경찰의 발포로 인해 순절하시니 당년 48세였다.
‧ 1980년 대통령 표창 수여, 합천군 대월면에 애국지사 비가 세워져 있다.
영기(1902~1984 양간‧전리) 충남 부여군 홍산면
‧ 1932년 대구 사범학교에 취임하여 조선어와 한문을 가르쳤다.
재임 중 반일사상자로 의심받던 중
조선어 시간에 시조 단군과 단기연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문예부를 중심으로 비밀결사를 지도하여 학생들이 졸업 후에도
유대를 맺도록 하였다.
‧ 1940년 비밀독서 회원들의
「반딧불」이라는 표제가 달린 출판물이 압수되어 관련자가 체포됨에
「다초당」이라는 비밀결사 모임까지 폭로되어 검거 선풍이 일었다.
1941년 8월 사건의 배후 지도자로 체포되어 대전 형무소에 투옥되었으나
제자들의 무협의 주장으로 석방되었으나 실직과 사찰로 고통을 겪었다.
‧ 묘소에는 제자들의「추모비」가 건립되어 있고
대구사법학교와 경북고등학교에 기념비가 있다.
영남(1926~ 문숙‧상호) 전남 화순
‧ 1943년 징병으로 일군에 입대하여 훈련 중 황일 운동에 뜻을 품은
동지 5인을 규합하여 막사에 불을 지르고 화약고를 폭파하려 했으나
사전에 발각 체포되었다.
1944년 3월 군법회의에서 2년형을 선고받고
일본 사세호 형무소에 복역 중 8.15 광복으로 출소하였다.
‧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고 국가 유공자로 우대
영두(1884~ 문정‧녹사) 전남 광산군 지황면
‧ 22세 때 망국의 한을 품고 해외에 도피, 임시 정부에 가담하여 중국, 서구등에서
독립투쟁을 10년간 벌이다 해외에서 사망하였다.
영수(1914~1944 양간‧전리) 전북 고창군 대산면
‧ 1936년 독립운동 단체인 비밀결사대에 가담하여 40여명을 규합하여 활동
‧ 1940년 김해 주둔 일본 헌병대를 습격하려다가 일경에 탐지되어
동년 12월 17일에 검거되었다.
7개월간 고문과 조사를 받고
1941년 전주 지방 법원에서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1년 6개월 언도.
‧ 1944년 2월 12일 전주 형무소에서 옥중 사망
‧의사를 추모하기 위해 고향 청년들이 기금을 모아 “추모비”를 세웠다.
대통령 표창
영숙(1886~1952 양간‧의정공파) 충남 논산군 양촌면
‧ 1910년 중국에 망명하여 대종교 교주 윤세복 등과 함께 봉천성 환인현에
동창학원을 설립하여 이극로 등과 함께 민족 교육을 통한 독립군 양성
‧ 1942년 일본이 대종교를 탄압할 때
19명의 동지들과 체포되어 15년형을 받았다.
1945년 8월 12일 소련군의 진주로 목단성 감옥에서 풀려났다.
정부는 공의 공적을 기리어 1963년 건국 훈장 국민장을 추서
영주(1900~1946 양간‧총제)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 1910년 3.1 만세운동에 대비하여
이유석‧홍창섭‧이근수 등과 같이 안성군 양성면 과원곡 면에서
천여 명을 동원하여 양면의 주재소와 면사무소, 우체국 등을 불 지르고
전화선을 단절하는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5년형으로 복역
‧ 출감 후 계속 독립운동 자금 조달 등의 활동을 하다가 옥고에서 얻은 병으로
8월 15일 광복을 맞으며 죽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하고 다음해 한 많은 생을 마쳤다.
‧ 1977년 대통령 표창
영업(1869~1908 양간‧사온승) 전남 장흥군 관산면
‧ 을사‧정미 변란 뒤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전남지역의
의병진에서 계책을 세웠다.
‧ 1907년 호남 창의 맹소를 세움에 기삼연, 김준 등 의병장과 합세하여
의병 50명(총 40정)과 더불어 장성 순창에 일어났다.
‧ 1909년 남평 거성동 접전에서 나주‧능주‧영암 세 곳에서 공격해오는
적과 싸워 70명을 사살
‧
1910년 전열을 정비하여 장성 백양사에 머물던 중 내부에 숨어든
첩자에 살해당하였다.
공이 돌아가시자 부인 수원 백씨는 3년 상을 마치고 공을 따라 자결하였다.
‧ 1985년 정부의 도움으로 의사의 묘지 정화사업이 진행되고 묘비를 제막하였다.
‧ 장성군민은 의사를 추모하여 장성군 남산공원에 의정비를 세워 추모하였고
대통령 표창 추서, 광주 표충사 배향
영완(1909~1930 양간‧전리) 전북 고창군 무장면
‧ 3.1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복역 중 21세로 사망
‧ 1977년 대통령 표창 추서
영창(1885~1943 양간‧퇴촌) 경북 안동군 임북면(현 임하)
‧ 기미 독립 선언문이 선포된 뒤
3월 21일에 임동‧입북 두면의 동지인 류연성 외
70명과 함께 임동 장터에서 만세운동 주도
다음날 22일에
임북 사월에서 400여명과 함께 일본 주재소를 파괴한 뒤 체포되어
대구 감옥에서 2년 복역, 1983년 대통령 표창 추서
영필(1896~1975 양간‧공안) 전북 진안군 주천면 주양리
‧ 3.1 운동 때 독립신문과 선언문을 무주‧장수‧진안 일원에 살포하고
만세 운동을 지휘하였다.
‧ 유학생들과 연락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4년 옥고를 치렀다.
영헌(1921~ 양간‧전리) 충남 서천군 마서면
‧ 1941년 배재중 5학년 때 몽양 여운형의 지도아래 독립동지회를 조직 활약
‧ 1942년 팔탄‧시초 초등교사로 재임 시 학생들과 농민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 1944년 7월 서울 종로 광화문 일대에서 민족의 궐기를 호소하는
전단을 살포하다가
강진규의 밀고로 체포되어 2년형을 살다가 8.15 해방으로 출옥
‧ 1986년 독립유공자로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영희(1898~1931 양간‧총제)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 1919년 독립만세 사건으로 투옥 7년형을 서대문 형무소에서 형기를 마쳤다.
‧ 1931년 고문과 박해의 여독으로 사망
‧ 1977년 건국표창 및 대통령 표창
기수(1881~1895 양간‧의정) 충남 논산군 두마면
‧ 1895년 12월 22일 연산 지구에서 동지를 모아 왜군과 교전을 지휘하다가
장렬한 전사를 하니 이때 나이 15세였다.
기수(1913~1948 문정‧문민) 전남 보성군 보성읍
‧ 광주 고보 2년 재학 중에 광주학생 독립운동에 참가하다가 퇴학을 당하였다.
‧ 동지들과「노동청년 독서회」를 조직하여 반일 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1년 6개월을 김천 형무소에서 복역
‧ 1948년 명예졸업장 수여
남수(1899~1945 양간‧밀직부사) 경북 안동군 예안면
‧ 1920년부터 신민회 계통에 참여
소작조합, 노동조합에 참여하여 반일운동을 하였다.
‧「형평사」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경성고무 직공의 파업을 주도하다가 2년형을 언도, 투옥.
‧ 신간회가 조직되자 지하 활동을 하다가 서대문 형무소에 3년 복역
옥살이에 몸이 상하여 광복도 보지 못하고 47세로 사망
돈수(1914~1950 문정‧문민) 전남 보성군 보성읍
‧ 보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광주학생독립운동에 가담하고
노동 독서회를 조직하여 활동
봉수(1913~1980 문정‧문민) 전남 보성군 보성읍
‧ 광주 농업학교 4년 재학 중 광주학생 독립운동 주모자로 퇴학
‧ 1932년 기수등과 노동회를 조직하여 만일전단을 뿌리다가 체포,
징역 10월 집행 유예 3년
‧ 1935년 출판 및 치안 유지볍 위반으로 1년 10개월 복역
‧ 1987년 대통령 표창 추서
상수(1899~1957 양간‧전리) 전북 고창
‧ 1919년 3월 15일 고창 장날 유지들과 같이 주동하여 군중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돌리다가 검거되었다.
석룡(1901~ 양간‧사온승) 평북 정주군 안흥면
‧ 1926년 상해임시정부의 호위, 난동분자 단속, 일본 중요시설 파괴 및
주요 인물 격살을 목적으로 조직된 병인의용단 대장
‧ 1929년 6월 순종의 국장 때
기관 파괴, 고관 암살을 목적으로 잠입하다가 체포되어
사형에서 7년 감형으로 5년 옥고 치름.
‧ 광복 후 신익희‧이시영 등과 임정요인과 환국하여 건국준비위원으로 활약
석숭(1914~ 양간‧사온승) 평북 정주군 안흥면
‧ 1929년 광주 학생 사건으로 선천 경찰서 체포
‧ 1934년 조선 유학생 사건(왜경 구타)
‧ 1947년 조선 민주당 사건으로 피검 구치
석호(1909~1986 양간‧사온승) 평북 정주군 안흥면
‧ 신의주 고보사건, 신의주 철도 호텔 폭파사건, 선천군 약수터 사건
‧ 강파‧이덕용 등이 수감중인 김석룡‧고준태 두 동지를 구출하려는
자금 지원에 참여
38세
양수(1896~1971 양간‧퇴촌) 전남 순천
‧ 1919년 2월 8일 동경유학생 600여명이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독립선언을 요구하는 결의문 채택에 참여
용근(1917~ 문정‧문민) 전남 강진군 작천면
‧ 계랑서당의 교사가 되어 친구 및 서당 생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다가 6월형을 선고받아 복역
‧ 1941년 목포 온금학원 교원으로 비밀 결사에 가담했다가 징역 2년 복역
익수(1880~1920 양간‧직제) 전남 무안군 해계면 양매리
‧ 1905년 11월 동지 민종석 등 88인이 결의 동맹하였다.
‧ 1906년 충청 정산군에서 400여명으로 의병 활동을 시작
2월에 부여에 입성하여 병기를 빼앗아 무장하였다.
남포군 새재에서 왜적을 무찌르다.
4월에 홍주에서 군사가 천명이나 되었다. 홍주 전투에서일군에 패전
‧ 1907년 익산군 동지 수십 명과 결사대를 조직하여 군산에서 적을 무찔렀다.
‧ 1909년 익산군에서 체포되었으나 탈출, 논산에 체포되었으나
또다시 탈출하였다.
동년 일군이「조선폭도 대 토벌」작전을 전개함에 따라
일군의 토벌대에 체포되니 의병 수는 50여명이었다.
‧ 서대문 형무소에 복역하다 1917년 병보석 뒤 3년 후인 1920년 11월 1일에 사망
‧ 1980년 대통령 표창 추서
익수(1881~1950 양간‧의정) 충남 논산군 연산면
‧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가담, 비밀 임무를 수행
‧ 안동‧봉화‧정선‧삼척 등지에서 독립군 군자금을 모집하여 안상훈에게 전달
창수(1901~1979 양간‧의정)
‧ 항일운동, ML당사건으로 10년 투옥, 보석 후 만주로 피신
현수(1914~ 양간‧의정) 충남 논산군 부적면
‧ 중국 군관학교 졸업 후 김구 주석의 지휘를 받아 독립투쟁을 전개
‧ 왜군 헌병을 저격하고
왜경의 밀정 이갑룡(당시 재 중국 한인 거류민 단장)을 저격하다
체포되어 사형언도를 받고 복무 중 무기로 감형되었다.
서대문‧대전‧공주‧전주 형무소에 복역 중 9년 6개월 만에 광복으로 풀려났다.
‧ 6.25때 행방불명
철수(1893~1986 양간‧의정) 전북 부안군 벽산면
‧ 일본 유학중 한국 유학생은 물론 중국‧인도‧대만에서 온 유생들과 뜻을 모아
반일제국운동을 위해 신아동맹당을 결성하였다.
‧ 1921년 상해 임시정부로 가 초대 국무총리 이동휘를 중심으로
연해주 한인 사회당과 협력하고 고려 공산당을 창립하였다.
‧ 1923년 귀국하여 제 2차, 3차 조선 공산당을 결성하고
모스크바 국제당에 가입하였다.
독립군 양성을 위해 소련 정부의 양해로 연해주에 독립사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을 위해 연해주 어업권까지 승인을 받았다.
‧ 1929년 왜경에 체포되어 10년을 복역 후 다시 감호라는 명목으로
4년형 수감 중 8.15해방을 맞아 출옥하였다.
39세
용숙(1915~ 문정‧문민) 전남 보성읍군 보성읍
‧1930년 5월 1일
숙부 봉수의 지도로 광주학생 독립운동에 가담 노동 독서회를 조직
‧만보산 사건에 동맹투쟁으로 학교 내에 침투하여 일본인 교사 배척,
만보산 사건 진상 폭로 등 동맹 후학을 선동하다가 3년 때 퇴학
용묵(1869~1921 양간‧의정) 충남 연산
‧ 활동 무대가 주로 경북 울진군 근남면이다. 영동 일대에서 “축지법”을 쓰는
“노랑장군”이라는 전설로 통하고 있다.
‧ 1905년 10월 7일 흥부시장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울진군 서면에 있는
불영사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울진 평해 관포 및 무기와 민병을 규합하고
영양 봉화의 세력까지 아울러 병력이 5백에 달하였다.
‧
1906년 영릉의 의병장인 신돌석과 합세로 중군장이 되었다.
일군이 주둔하던 장호관을 습격하여 왜병 백여 명을 죽이고
함선 9척을 파괴하였다.
‧ 1907년 울진 매화 영월 창수면 청송읍 전투에서도 승리
‧ 1909년 안동‧울진‧삼척‧강릉과 합세하여 안동‧예천‧영주‧영양을 순회하며
일군을 소탕하고 태백산맥으로 옮겨서 활동하였다.
‧ 1977년 건국공로표창 추서
용준(1903~1986 문정‧문민) 전남 보성군 보성읍
‧ 3.1운동에 참가 옥고를 치렀다.
용표 (1930 양간‧전리) 전북 고창
‧ 1919년 3월 15일 고창 장날, 유지들과 주동하여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나누어 주다가 체포되어 풀려나와
탄압을 이기지 못해 만주로 떠난 후 소식 두절
용해(1906~1971 양간‧의정)
‧ 태평양 전쟁 시 전국 32인 구속사건으로 원산 형무소에 수감
채중(1908~1970 문정‧문민) 전남 강진군 작철면
‧ 광주 보고 4년에 재학 시 광주 학생 주역으로 활동하다가 체포
‧ 징역 3년 집행유예 12년
‧ 1968년 대통령 표창
용규(1922~ 문정‧문민) 전남 보성군 율어면
‧ 목포 상업학교 4년 중퇴하고 조선 독서회 사건에 가담하여
목포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8.15해방으로 출소
최현숙(낭장공)
‧ 5대 국회의원 용환의 부인
‧ 수피아여고 재학 중 3.1 운동에 가담, 잠시 옥고를 치름
40세
제중(1893~1950 문정‧문민) 전남 담양군 대덕면
‧ 향리 면사무소에 일을 보다가
3.1운동을 계기로 상경하여 남부 5도(경기‧충청‧강원‧전라‧경상)
대표단 5인중의 한사람으로 남부 각지를 순회하며 독립 운동을 지도, 조직
‧ 대동단의 신덕영 선생의 지령에 따라 군자금 모금에 종사하였다.
담양‧광주에서 군자금을 모은 뒤 광주 하숙집에서 은신 중 일경에 체포
‧ 1920년 신덕영도 곡성에서 체포되니 비밀 집단이 와해되었다.
‧ 어머니 여산 송씨는
외아들의 형을 받는 참상을 보다 못해 1921년 자결
대구 감옥에서 10년 형
‧ 1977년 건국포장 수여
41세
선기(1907~ 양간‧전리) 경기도 화성군
‧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 옥고를 치름. 독립유공자 표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