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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0816 (화)
- 아름다운 길, 가로수 이야기 (6) - 느티나무 ②
- 식물이야기 (67)
제가 좋아하는 식물 중에 여름이면 꼭 피어나는 “박주가리”가 은은한 향기를 내뿜고,
삼출엽(三出葉)의 “사위질빵”이 귀여운 하얀 꽃을 뽐내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이어 “느티나무 이야기” 다섯 편 중 두 번째가 계속됩니다.
9. 음식재료
< 느티떡 >
- 이른 봄에 어린잎을 채취하여 떡에 섞어 “느티떡”을 쪄서 먹기도 합니다.
즉, 연한 느티나무 잎을 따서 멥쌀가루나 찹쌀가루와 섞어 버무린 다음 팥고물을
켜켜이 얹어 찐 설기 떡(시루떡)으로서 사월 초파일에 먹는 대표적인 계절식인데
이때가 제일 맛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 느티나무는 3~4월에 어린 새싹이 나오는데 독이 없고 향이 좋아 떡에 섞어
찌면 느티나무 잎 향기가 집안에 가득하다고 합니다.
- 또한 조선 정조 때의 시인이며 역사학자인 “유득공(柳得恭 : 1749~1807)”의
《경도잡기(京都雜記)》에 보면, “부처님 오신 날”인 4월 초파일 풍습에
“느티떡”을 해 먹는다고 했습니다. 즉, “손님을 초청해 모셔놓고 음식을
대접한다. 느티떡, 볶은 콩, 삶은 미나리 등을 내 놓는다. 이를 두고 부처님
생신날 먹는 맨밥, 즉 불신여소(佛辰茹素 = 채식-菜食)이라 한다.
고기를 일체 먹지 않기 때문에 느티나무, 느릅나무, 시무나무 같은 싹을 따다가
쌀가루에 버무려 떡을 쪄 먹는다. 4월 초파일 경이면 느릅나무 과 식물들의
새싹이 돋아난다.“
* 《경도잡기(京都雜記)》
조선시대 한양(漢陽)의 문물, 제도, 세시(歲時), 풍속 등에 대한 기록입니다.
* 설기 떡(시루떡)
멥쌀가루를 켜를 짓지 않고 한꺼번에 시루에 안쳐 깨끗하게 찌는 떡을 말하는데
쌀가루에 섞은 재료에 따라 이름이 달라집니다.
즉, 고물을 넣지 않으면 백설기, 검은콩이나 청대콩을 섞으면 콩설기, 붉은 팥을 삶아서
섞으면 팥설기, 쑥을 섞으면 쑥설기라고 합니다.
- 백설기
“흰무리”라고도 합니다. 17세기경 여러 가지 음식조리서가 등장하였는데 “백설기”의
명칭은 《규합총서》에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티 없이 깨끗하여 신성한 음식이란
뜻에서 어린이의 삼칠일, 백일, 돌의 대표적 음식이고, 사찰에서 재(齋)를 올릴 때
또는 산신제, 용왕제 등 토속적인 의례에서 쓰입니다.
* < 규합총서(閨閤叢書) >
1809년(순조 9) 빙허각(憑虛閣) 이씨(李氏)가 엮은 생활 경제 백과사전으로 의식주에
관련된 문제들을 정리, 체계화한 책입니다.
조선 순조 때 《임원경제지 林園經濟志》를 저술한 실학자 서유구(徐有榘)가 이씨의
시동생이 됩니다.
책의 내용은 매우 다양한데, 장 담그는 법, 술 빚는 법, 밥과 떡 뿐만 아니라 반찬 류의
제조와 그리고 누에치기, 길쌈, 염색, 수놓기, 옷을 만들고 수선하는 바느질 방법 또 논밭을
일구는 법, 꽃과 대나무의 관리, 가축의 사육방법에 대한 내용도 있으며, 아이를 기르는
요령, 구급법, 약을 먹을 때 주의사항 등 가족들의 건강 문제와 집의 방향에 따른 길흉,
재액막이와 더불어 무당에게 속지 않는 방법 등을 싣고 있습니다.
백과사전의 성격을 띠고 있는 이 책은 단순히 부녀자들을 위한 가정백과가 아닌 조선시대
여성 실학자이며 경제학자가 지은 책으로서 의식주와 관련된 방대한 내용을 쉽게 풀어쓴
훌륭한 실학서로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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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천연기념물
- 느티나무가 우리나라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경우는 총 17건으로,
- 그중 가장 처음으로 지정된 것은 1962년 제95로 지정된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도계리”의 “긴 잎 느티나무”인데 역시 마을의
서낭당나무입니다. 이 나무는 학교운동장에 있는데 마을사람들이 서낭당나무를
다른 나무로 바꾸려하자 나무가 노하여 천둥과 번개를 친 일도 있다고 합니다.
- 그리고 이어서 다음의 느티나무들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즉,
“제108호(전남 함평군 대동면 향교리)”, “제161호(제주 남제주군 표선면 성읍리)”,
”제192호(경북 청송군 파천면 신기리)“, “제273호(경북 영주시 안정면 단촌리)”,
“제274호(경북 영주시 순흥면 태장리)”, “제275호(경북 안동시 녹전면 사신리)”,
“제276호(경남 남해군 고현면 갈화리)”, “제278호(경기도 양주군 남면 황방리)”,
“제279호(강원 원주시 흥업면 대안리)”, “제280호(전북 김제시 봉남면 행촌리)”,
“제281호(전북 남원시 보절면 진기리)”, “제283호(전남 영암군 군서면 월곡리)”,
“제284호(전남 담양군 대전면 대치리)”, “제382호(충북 괴산군 장연면 오가리)”,
“제396호(전북 장수군 천천면 봉덕리)”, “제407호(경남 함양군 함양읍 운림리)” 등의
총 17건인데 보시다시피 제주도를 포함하여 전국에 걸쳐서 잘 자라고 있습니다.
< 천연기념물 제9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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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연기념물 제 27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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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느티나무 길
- “느티나무”가 가로수로서 유명한 곳은 대부분 느티나무 단독의 가로수 길이
아니고, 다른 나무들과 함께 섞여서 있습니다.
- 함께 있는 나무들은 거의 “왕벚나무”, “은행나무”들과 함께 있는데
서울 인근에는 다음과 같은 길들이 있습니다.
“종로구 삼청동 길”, “덕수궁 길”, ”여의도 윤중로“, ”중랑천 제방길“,
“안양천 산책로”, “서울대공원 산책로” 등등입니다.
*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
- 이곳에는 우리카페 회원이신 신 사장님께서 사신다고 알고 있고
또 다른 몇 분도 살고 계시는 것으로 들었습니다.
- 이 동네의 이름인 “정자동”은 한자로 “亭子洞”이라 쓰는데, 옛날 조선시대에 한 왕손이
이곳에 와서 큰 느티나무 옆에 정자(亭子)를 짓고 살았다고 해서 동네이름이 이렇게
붙었다고 하더군요.
- 그래서 지금도 이곳에 “느티마을”이 있고 또 “도로 명 새주소”도 통틀어 “느티 길”이
생긴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분당 내에서 집값이 가장 높은 이곳을 하나의 길로 주소를 만들면,
집값문제로 어려움이 있지나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 “도로 명 새 주소”가 서양식으로 되어 편리한 점도 있으나, 우리의 역사, 문화, 민속 등이
얽힌 우리 땅이름이 사라진다고 하는 등의 반대도 있어서, 여러 곳에서 말이 나오고
있는데 제대로 시행되려는지 걱정입니다.
# 사실 외국에서 우리나라로 우편물을 보낼 때 가장 힘든 것이 너무 긴 주소 때문이라고
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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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느티나무에 얽힌 이야기
< 다음은 “느티나무”와 관련된 이야기들 중 몇 가지만 추려서 말씀드립니다. >
- 시원한 느티나무 밑에 있으면 나른한 졸음이 오고 잠깐 동안이지만 일한 뒤에
오는 피로를 풀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느티나무 하면 “쉴 휴(休)”자가 생각나는데 즉, “휴(休)는 사람(人)이
나무(木) 그늘 아래 서 있는 것을 나타낸 글자“라고 합니다.
이런 목적의 정자목으로 느티나무만한 수종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 서양에서 월계수(月桂樹 = 감람수-甘藍樹 = Laurel = Bay)를 신성시하듯
우리나라에서는 느티나무를 신령한 나무로 받들어 오고 있습니다.
즉, 때로는 영목(靈木)으로, 귀목(貴木)으로, 또 신목(神木)으로 귀하게 여깁니다.
- 《산림경제(山林經濟)》를 보면 “느티나무 세 그루를 중문 안에 심으면
두고두고 오랜 자손까지 부귀를 누린다. 신방(申方 = 서남서쪽) 서남간에
심으면 도적을 막는다.”고 했습니다.
*《산림경제(山林經濟)》
조선 숙종 때 실학자 유암(流巖) 홍만선(洪萬選:1643∼1715)이 농업과 일상생활에
관한 광범위한 사항을 기술한 소 백과사전 적인 책으로 이 저술을 바탕으로 순조 때
서유구(徐有榘)의 대저(大著)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 우리나라의 시골마을에는 대개 동구 밖에 한두 그루의 큰 느티나무가 심어져
있습니다. 여기에는 금기(禁忌)의 전설도 가지가지입니다. 옛날부터 잎이나
가지를 꺾으면 목신(木神)의 노여움을 사 재앙을 입는다고 하여 얼씬도 못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아름다운 나무 모양과 긴 수명을 유지시킨 비결이 되었습니다.
즉, 전설을 만들어 금기를 역작용으로 나타나게 해 함부로 베지 못하게 한
지혜로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봄에 일제히 싹을 틔우면 풍년이 들고, 그렇지 못하면 흉년임을 미리 알 수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위쪽에서 먼저 싹이 트면 풍년이 들고 밑쪽에서 싹이
트면 흉년이 든다고 점쳤습니다.
- 지방에 따라서는 느티나무에 치성을 드리면 사내 아기를 얻는다는 전설이 많아
아낙네들의 소원목이 되기도 했습니다. 또 밤에 나무에서 광채가 나면 동네에
행운이 오고, 밤에 나무에서 우는소리가 나면 동네에 불행이 온다고 믿어 두려워
하기도 했습니다.
- 마을사람들은 오래된 큰 나무 앞에서 정월 보름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마을의
무사 안녕을 빌었고, 전염병이 유행하면 또 제사를 올려 병마와 액운을
물리쳤다는 전설이 여러 곳에서 있습니다.
-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은 뜰에 심어진 느티나무 줄기가 시드는 것을 보고
앞으로 자신에게 곤란한 일이 닥칠 것을 예감했다고 합니다. 예감은 적중하여
후에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되어 파직되었으나 다행하게도 복직되었습니다.
느티나무와의 교감을 통해 앞일을 예견했던 셈이겠습니다.
- 중국 전한(前漢)의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 BC 179~ 123)이 쓴
《회남자(淮南子)》에는 계절마다 나무 한 가지를 선정했는데, 느티나무를
“9월의 나무”에 넣었다고 합니다.
즉, 1월은 버드나무, 2월 살구나무, 3월 자두(오얏나무), 4월 복사나무,
5월 느릅나무, 6월 가래나무, 7월 소태나무, 8월 산뽕나무, 9월 느티나무,
10월 박달나무, 11월 대추나무, 12월은 상수리나무를 꼽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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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 서석동 효자 느티나무 >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오래된 느티나무에는 거의 모두
얽혀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전라도 광주 서석동의 “효자 느티나무” 이야기를 올립니다.
- 아주 오랜 옛날 만석이라는 효자가 살았다.
- 병든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만석은 착하고 부지런할 뿐만 아니라 효성이 지극하여
마을사람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았다.
- 그러던 어느 날 늙은 어머니는 원인모를 깊은 병에 걸렸고 사방으로 약을 구해도
소용이 없자, 만석은 마지막으로 만병통치라는 산삼(山蔘)을 찾아 나서기로 하였다.
-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무등산에 올라 석 달이 넘게 찾아 헤매었으나
산삼은 보이지 않았다.
- 100일이 되어도 찾지 못하자, 낙심하여 산을 내려오는데 어디선가 만석을 부르는
신비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분명 뒤에 서있는 커다란 느티나무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 만석은 느티나무에게 예를 올리고 어머니를 살려 주실 것을 간청했고,
- 느티나무는 어머니를 살릴 약을 줄 터이니 만석의 두 눈을 빼어 달라고 하였다.
- 오직 어머니를 살리고 싶은 효자 만석은 두 눈을 뽑아서 느티나무에게 바쳤다.
- 이러한 만석의 효성에 감동한 느티나무는 스스로 잎을 떼어 만석에게 안겨주고
만석의 눈도 고쳐주었다.
- 이 느티나무가 준 잎을 달여 마신 어머니는 물론 병이 깨끗이 나았다.
- 이때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효자 느티나무”로 부르고 신령한 나무로 여겨
지금까지 보호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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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신재(康信哉) 님의 “젊은 느티나무” ***
- 소설가 “강신재” 님이 1970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젊은 느티나무”는
당시 많은 반향을 일으켰는데 살펴봅니다.
< 줄거리 >
- 시골 외갓집에서 아버지와 사별한 엄마와 단둘이 살던 미모의 고등학생 숙희는 엄마가
모 대학교수와 재혼을 하게 되어 서울로 이사 오게 되는데, 새로 가족이 된 이복오빠인
대학생 현규와의 사랑을 그린 것으로, “비누냄새”처럼 산뜻하고 순수한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금지된 사랑을 하는 가슴 아프지만 상큼한 내용입니다.
- 어쩌구 저쩌구 해서 이복오빠를 피해서 시골로 내려간 숙희는 오빠가 찾아와서
“느티나무”를 잡고는 “사랑도 중요하지만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지금 당장은
우선 서로의 본분에 충실하고, 공부에 집중한 후에 훗날을 기약하자”고 말을 하고,
숙희도 그러마고 약속을 합니다.
- 현규가 돌아가고 나서 숙희는 “젊은 느티나무”를 끌어안고 아프고 슬픈 마음을 다스리며
웃음을 짓습니다.
< 기억에 남는 표현 >
#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냄새가 난다.”
- 야릇한 느낌을 주는 이 표현은 그래서 당시 젊은 남자들은 여자 친구를 만나러 나갈 때,
꼭 비누로 세수하고 나갔습니다.
- 목욕을 하면 더 좋겠지만 당시에는 집에서 목욕이나 샤워를 할 만한
시설이 있는 집이 별로 없어서...
# 또 그 때는 전쟁이후의 시절이라서 지금과 조금 다른 표현을 썼는데요,
즉 “쇼오츠 = 지금의 셔츠“, ”샤쓰 = 지금의 와이셔츠“ 등등입니다.
< 느티나무가 뜻하는 것 >
- “젊은 느티나무”는 이들 연인의 기쁨을 품은 슬픈 맹세를 듣는 증인이 됩니다.
- 푸르고 싱싱한 잎들이 무성한 “젊은 느티나무”는 '젊음'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제목이 순수한 열정을 간직한 두 청춘 남녀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 또 “느티나무”가 상징적 의미의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고 두 주인공을 잇는
중요한 매개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 강신재(康信哉) 님 (1924 ~ 2001) >>
서울 출생, 경기여고를 거쳐 이화여전 가사과에서 수학했습니다.
1949년 김동리(金東里)의 추천으로 「얼굴」, 「정순이」를 『문예』에 발표한 후 작품 활동을
시작했는데, 초기에는 「안개」(1950), 「팬터마임」(1958)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주로
남녀 관계의 애정 모랄을 리얼하고 감각적인 수법으로 그렸습니다.
또한 기성의 도덕률에 얽매인 여성의 운명과 사랑의 심리를 섬세하고 감각적인 문체로
그리고 있습니다.
작품으로는 「임진강의 민들레」(1962), 「파도」(1963),『희화』(1958)를 비롯하여
『청춘의 불문율』(1966), 젊은 느티나무(1970), 『파도』(1970), 황량한 날의 동화(1976), 『사랑의 묘약』(1986), 간신의 처 (1989) 등이 있습니다.
1959년에는 단편 「절벽」으로 한국문협상을 수상했으며, 1967년에는 「이 찬란한 슬픔을」로
제3회 여류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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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느티나무 이야기 ②”를 마치고 다음에는 <부록>으로 “느티나무에 얽힌
개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정자동 느티마을에 살면서 옛날에 느티나무가 많았나 보다고만 생각했는데 오늘 정자동, 느티마을의 유래에 대해 아인 학당에서 좋은 공부를 했읍니다. 앞으로도 좋은 가르침 계속 부탁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몇 줄 되지도 않는데 잘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왕이면 그 왕손의 이름 등 좀 더 자세히 올릴 것을... 하고 후회하고 있습니다. 글을 올릴 때미다 저의 기준으로 제가 관심있는 내용만을 올려서 항상 마음에 걸렸는데 신청곡이 없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기본은 제가 기획을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길을 가다가 또는 책을 읽다가 그리고 방송이나 신문을 보다가 언뜻 스치는 내용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느티나무가 있는 동구 밖 정자에는 밤에 혼자로는 잘 안 갔던 기억이 납니다. 나무에 귀신이 붙었다고도 하고, 밤이 불면 무슨 귀신 소리도 난다고 해서 무서웠던 기억도 납니다. 소개해 주신 느티 떡도 기억이 납니다. 조사하시느라 수고가 많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식물관련 책을 조금 가지고 있다 보니 자료조사에 보통 다섯 개 이상의 책이나 다른 자료를 참고합니다. 이왕이면 좀 더 체계있게 만들려다 보니 그렇습니다. 느티 떡은 요즘도 느티나무나 느릅나무 어린 잎으로 만들어 먹는 고장이 있습니다. 어려웠어도 우리 선조들은 참으로 지혜롭고 멋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느티로 떡을 다 해먹는군요. 귀를 밝혔습니다. 제가 살던 동네는 차 내왕이 많았던 신작로라 느티 나무 기억은 많지 않고, 저희 집 뒤뜰에 심겨져 있었던 큰 감나무가 생각납니다. 어려서 그랬는지 감나무가 너무 높아서 올라갈 엄두도 내지 못했고, 감도 그리 많이 열리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웬 송충이들은 그리 많은지..ㅎㅎ
요즘도 느티떡을 해 먹습니다. 느티나무는 작을 때에는 별 특징이 없어서 그리 크지 않은 느티나무는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제 고향이 감으로 유명하고 저도 감나무와 같이 자라서 감과 곶감에 얽힌 추억이 많은데 지금도 충북 영동 감이 유명하고 또 그곳은 가로수로 감나무를 심어 놓아서 가을이면 멋있습니다. 요즘은 나무들에 벌레가 예전만큼 많지 않습니다. 벌레 막는 기술이 발달해서 그런가 봅니다. 송충이는 나중에 솔나방이 되는 것인데 어릴 때 학교에서 단체로 송충이 잡았고... 그런데 번데기를 먹는다면 송충이도 잡아서 튀기거나 구워서 먹는 것으로 홍보하면 사람들이 다 잡아먹을 터인데,,, 하고 생각했었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