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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이야기 |
경산정은 권용보의 정자이다. 선생의 나이 46세 되던 1896년(건양1)에 건립하였으며, 스스로의 몸가짐을 신중히 하고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자기 수양의 공간으로 삼았다. |
건축 구성 |
경산정은 정면3칸, 측면1칸 반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흙을 다져 기반을 쌓고, 당(堂)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이른바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 구조를 취하였다. 정자의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퇴칸을 두고, 양쪽 온돌방의 출입문 앞에는 쪽마루를 두었다. 그리고 전면의 토석담장 사이에는 사주문을 세워 정자로 출입케 하였다. |
현판 |
경산정(?山亭) |
누정이야기 |
- 누정이야기 |
영양의 누대와 정자들은 일월산에서 뻗어 나오는 지맥들과 인연을 맺고 있다. 그만큼 일월산은 영양의 누대와 정자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탁동한(卓東澣)은 「경산정기(耕山亭記)」에서 경산정과 경산정 주변의 풍광을 세밀하게 묘사하였는데 기문 초반에 일월산에서 경산정까지의 지맥들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귀인봉(貴人峯)이 있다. 그 봉우리 중간쯤에 석은대(錫隱臺)가 있는데, 생각건대 이곳은 당시의 귀인(貴人)이 이곳에 은거해서 그렇게 부른 듯 하다. 구불구불 내려와 감싸안은 듯이 넓어졌다가 또한 굽어진 것이 여덟 아홉구비로 청계천 물줄기가 흘러 머금은 것이 용추(龍湫)를 이루고, 그것이 모여 세심대(洗心臺)가 되고 팔선대(八仙臺)와 상기대 (上起臺)가 된다. 옥산(玉山)의 봉우리는 서로 포개져서 7, 8리에 걸쳐 빼어나니 이곳 동천(洞天)은 넓고도 아름답고, 계곡은 조밀하고도 깊숙하다.” 또한 일월산 줄기와 청기천이 함께 내려와 기포리에 와서 양쪽 기슭으로 절벽이 우뚝 솟았으니, 이곳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위치한 경산정은 ‘때로는 벗들과 술을 기울일 만 하고,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기도 하며,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다가 흥이 나면 거문고를 연주하며 흥취를 돋울 만한 좋은 입지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
관련인물 |
- 권용보(權龍普, 1828~1908) |
권용보는 장곡(藏谷) 권태일(權泰一)의 후손으로 1828년(순조28)에 태어났다. 선조인 권태일은 본래는 권춘란(權春蘭)의 동생인 권춘계(權春桂)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권춘란이 아들이 없어 후사를 잇지 못하므로 권춘란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평소에 검소하고 사치를 즐겨하지 않았으며, 일찍이 벼슬을 사양하고 은거하며 학문과 수양에 뜻을 두었다. 또한 조상의 아름다운 행적을 기리며 후진을 양성하는데 힘써 이름있는 제자들이 많이 배출 되었다. 늘그막에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고, 뒤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시종원시종(侍從院侍從)으로 승진되어 삼대(三代)가 추증받았다. |
주변경관 |
- 주변경관 |
기포리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구름이 조금이라도 드리우면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곳이다. 이곳에서도 경산정은 정자의 뒤편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청기천이 흘러 산속바람의 청량함과 물 위로 스치는 바람의 상쾌함이 만난다. 이것은 주변경관의 다채로움을 만들어 주고, 보완해 주기도 한다. 보다 편리한 사람들의 생활을 위하여 보가 만들어지고 다리가 놓이고, 둑이 쌓여 원형이 바뀌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
마을이야기 영양 > 영양청기권 > 청기면 기포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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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갯마을이 합쳐져 이룬 마을, 기포리(基浦里) | |
기포리는 본래 영양군 청이면(靑二面)의 지역이었다. 1914년에 이르러 행정구역을 고칠 때에 골개머리 · 멧개울 · 안맷개울 · 탑생이 · 옥생이 · 포두 등을 합하여 기포리라고 부르게 된 것이 기포리란 이름의 시작이다. 이 동네는마을 북쪽으로 재를 넘으면 당리(唐里)가 나오고, 마을의 앞뒤가 산으로 꽉 막혀서 비교적으로 해가 떠 있는 시간이 짧은 편이다. 산 아래로 청기천을 따라 이어진 밭들이 마을 안의 경지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마을은 청기천을 굽어보는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않고 여러 줄기로 흘러내려 그 모양새가 마치 부채살이었기 때문에 지명을 몇 개울로 불렀다가 오늘날에는 메깔로 부르게 되었다. 맷깔의 안쪽 골짜기에 위치한다 하여 불리우게 된 안맷개울 또는 내기포(內幾浦) 부락은 지금은 안맷깔보다는 골매깔이란 이름으로 불리어진다. 골갯머리 혹은 내포두(內浦頭)라고 불리는 부락이다. 논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산촌부락이다. 옛날에는 이 곳에 탑이 있었다 한다. 그리고 옥생이 혹은 옥산(玉山)이라고 불려지는 부락은 경주의 토함산 저리가라 할 정도의 옥을 생산하였는데 이 옥으로 구슬도 만들고 피리도 만들었다 한다. (晦谷古宅)이 정자에서 남동쪽으로 500m 가량 떨어진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정자로 들어 오는 사잇길 입구에는 권춘란의 후손으로 일제강점기 때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고, 6.25동란 때에는 난을 피하지 않고 선현들의 유적을 지킨 권오봉(權五鳳) 선생의 유적영모비(遺蹟永慕碑)가 위치하여 엄숙함을 가져다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