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저 옵서!”-‘어서 오세요!’, “폭삭 속았수다”-‘매우 수고 많으셨다’눈이 시릴 만큼 새하얗다. 은빛 되어 빛난다. 겨울 천국이다. 제주도-백동흠

[쌩떽쥐베리]

제주 올레 다시 올레

[사람 사는 이야기-백동흠]

2011년 01월 22일 (토) 14:58:53

백동흠 .

폭삭 속았수다

살을 에는 듯한 매서운 겨울 바다 바람, 나무와 갈대 숲에 흐드러지게 눈 꽃이 피어 있다. 눈이 시릴 만큼 새하얗다. 은빛 되어 빛난다. 겨울 천국이다. 꿈에 그리던 조국 제주도 !

28 년 전 신혼 여행 후 처음이다. 장성한 아들 딸과 함께 모처럼 온 가족 여행이다. “혼저 옵서!” 제주도 인사말이 정겹다. ‘어서 오세요!’
뉴질랜드 인사말 “기아오라!” 만큼 친근한 맛이 난다. ‘Welcome!’
“폭삭 속았수다” 먼 길 온 사람한테 웬 그런 말씀? ‘매우 수고 많으셨다’ 구요.

신혼 여행 후 지금까지의 생활도 멀리 뉴질랜드에서 온 것도 수고 많았다는 뜻 이란다. 바닷가에 우뚝 솟은 봉우리 사발 엎어 놓은 듯한 성산 일출봉 꼭대기 바위에 서서 내려다 본 검푸른 바다와 새하얀 세상! 유네스코 지정 세계 자연 유산에 등재된 절경답다.

제주도 바닷가와 산과 들에 펼쳐진 여러 갈래의 트래킹 걷기 코스인 '제주 올레길'이 저마다의 특색을 띤 채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제주 올레길 14 코스 중 협재 해수욕장 해변로는 너무도 맑고 싸아한 느낌이다.

남 태평양이 부럽지 않다. 파란 잉크색 섞인 에머럴드 빛 바다다. 까만 화산암 돌들에 세차게 부서지는 하얀 거품과 푸른 물결… 검푸른 파도 출렁거림으로 바닷물이 끊임없이 정화 작용을 하고 있다. 그렇담, 우리보다 바다 더러 수고했다고 건넬 말 아닌가. “폭삭 속았수다, 바다야!”

▲ 김영갑갤러리 두모악 풍경(사진출처/ 김영갑갤러리 홈페이지)

예술은 풍토를 먹고 사는가

겨울 제주의 원초적 갸름한 곡선과 자연 색감이 만들어내는 풍광은 압권이다. 가슴 탁 트이는 시원한 바다 바람과 작열하는 햇빛이 주는 자연 에너지가 넘쳐난다. 치열한 인생 고뇌와 자기 분야의 열정적 세계에 푹 빠진 예술가들에겐 영감이 끊임없이 솟아나는 풍토였나 싶다.

조선 시대 추사 김정희, 소 그림으로 천재적 역량을 보인 이중섭 화가, 그리고 제주의 속살 같은 모습을 20 여 년간 촬영한 김영갑 사진 작가… 이들이 남긴 작품을 보노라면 우리네 삶과 오늘을 재 조명케 해 준다.

각자 기념관이 특색 있다. 당시 현실은 참 고달팠어도 혼이 담긴 작품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보듬어 주고 활력 에너지를 채워 준다. 제주 올레길 3 코스 중 김영갑 두모악 갤러리가 눈길을 끈다. 불치의 루게릭 병으로 마지막 6 년간은 힘들게 혼자 투병하며 제주도를 혼신의 힘으로 담아내다 두모악에 잠들고 만 사진 작가, 밥은 굶어도 필름이 떨어지면 못살았던 남자, 제주도에 미친 김영갑!

제주의 천기를 누설했기에 신의 노여움으로 그 심한 고통을 감수해야 했을까. <그 섬에 내가 있었네>에서 그는 말한다.

“시작이 혼자 였으니 끝도 혼자다. 울음으로 시작된 세상, 웃음으로 끝내기 위해 하나에 몰입했다. 흙으로 돌아갈 줄 아는 생명은 자기 몫의 삶에 열심이다. 지금 내가 서있는 이 곳이 낙원이요, 현재가 이어도다. 지금 여기서 이 물음에 답을 얻지 못한다면 어디를 가나 방황하고 절망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람들은 또 다른 이어도를 꿈꾸며 살아갈 것이다”

사는 것은 기술이요, 웃는 것은 예술이다

한 겨울 눈 보라 칠 때 60대 할멈들이 해녀 물질하는 모습을 상상이나 하겠는가. 그토록 치열하고 진중한 삶의 무게를 어디에 견줄 수 있단 말인가.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과 실제 행하는 내면의 깊이는 얼마나 다른가. 한 발짝 다가가 연민의 마음으로 들여다 보면 극과 극의 세상은 다 하나로 통한다.

그 내면 속살 드러내는 웃음을 본인보다 어쩜 그렇게 잘 그려낼 수 있을까. 그래서 예술가다. '통즉불통,불통즉통'(痛卽不痛,不痛卽痛). <동의보감>에 나오는 말이다. “아픈 것은 통하지 않기 때문이요, 아프지 않은 것은 통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예술가들이란 소통의 메신저가 아닌가. 얕은 껍데기 감정으로 쉽게 좌지우지 하지 않고 한 발짝 깊이 가슴으로 들어가 역지사지(易地思之)한 그 마음이 아름답다. 바쁜 일상 생활에 어느 날 문득 쉼표를 찍고 싶을 때 제주도에 온다면 꼭 한번 들어가 볼만한 곳이다. 제주 올레길 3 코스 중 김영갑 두모악 갤러리. 삶의 기술이 예술로 승화한 터다.

Slow Life 와 간세다리 여행

제주도에 올레길을 만든 서명숙 씨 이야기를 들어보면 참 가슴 찡한 점이 많다. 뉴스 취재 경쟁과 마감시간의 절대 조건인 ‘빠름’을 생명으로 산 기자생활 20 여 년. 시사저널, 오마이뉴스 편집장을 역임한 그녀는 일상에 지쳐 50세를 한 달 앞두고 빠름에서 탈출한다.

그리고 머리 식힐 겸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800킬로미터에 도전한다. 스페인의 와랑와랑(제주도 방언 ‘이글이글’)한 태양아래에서 간세다리(제주도 방언 ‘게으름뱅이’)처럼 걷는다. 그리고 순례중에 한 여행가로부터 듣는다. “당신의 나라에 당신의 길을 만들어라”

그 말을 화두로 삼아 산티아고에는 없는 바다를 끼고 걷는 길을 그녀의 고향, 제주에 만든다. 맑고 푸른 제주의 바다와 바람을 안고 걷는 길에 ‘제주 올레’라는 이름을 붙인다. 바깥 거리에서 대문까지 집으로 통하는 아주 작은 골목길이 ‘올레’다. 즉 세상으로 나오기 위한 최초의 길이 바로 올레다.

그녀는 드디어 세상과 통하는 소통의 길을 만든 것이다. 오랜만의 가족 나들이로 발길 닿는 대로 쉬엄 쉬엄 놀멍 쉬멍 가는 길, 올레길을 걸었다. 세상 짐을 잠시 내려놓고 걸으니 평화와 새 힘을 풍성히 채워 준다. 제주도를 한 바퀴 돌면서 쉬고 싶은 곳에 머물며 이야기하고, 은갈치 조림 같은 제주 토산 음식도 먹고, 아이들과 못 다한 이야기도 나누다 보니 밤도 짧다. 2박 3일이 바람처럼 흘러 갔다.

실상은 고국에 연로하신 어머님 아버님 뵈러 간 길이다. 서울에서 일하고 있는 아들 딸이 깜짝 이벤트라고 중간에 마련해준 이번 제주도 가족 여행이 참 의미있고 고맙게 느껴진다. “폭삭 속았수다, 아그들아!” 고맙 데이. 언제 다시 올까. 그래도 마음은 제주 올레 다시 올레.

백동흠/ 프란치스코, 뉴질랜드에서 택시기사로 일하고 있으며 틈틈이 글을 쓰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