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은 의외로 간단하다. 글로벌 경제가 유례없는 동반 침체로 접어들었고 이는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다. ‘글로벌 증시 활황’ 소식이 매미 떼처럼 귀를 따갑게 하던 지난 몇 시즌이 지나고 글로벌 기업들의 위험 수준을 평가해대던 리만브라더스가 정작 자기 관리에는 실패, 어이없이 파산을 선언하더니 GM이 대규모 구제 금융 요청에 나서고 미국의 자존심 시티은행까지 국유화되는 사상 초유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미친 듯이 몰아치는 불황-혹은 치열한 변화-의 파고 속에 길을 잃고 익사해버리고 말 것 같은 이 때, 위기에 대처한 디자이너들은 어떤 자세로 무장하고 있을까?
다시 여성의 몸에 시선을 돌리다
일찌감치 예상은 되었지만 2009 가을 뉴욕 패션주간에 펼쳐진 런웨이의 모습은 불황에 대처하는 디자이너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표현 방식은 달라도 소비자와 공감대를 형성, 일단 팔리는 디자인’을 만들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실제로 매혹적인 이브닝 가운으로 명성을 얻은 배즐리미쉬카는 모던한 디자인으로 화려함을 덜어내고 값비싼 장식보다는 샤무즈 같은 편안한 소재에 테일러링 기본에 충실한 디자인을 통해 ‘실생활 속의 소비자’와 한층 가까워지려는 면모를 보였고, 일부 디자이너들은 스페인 댄서풍 오비벨트나 러플, 혹은 니뽄풍 스타일로 멀어져가는 소비자들의 시선을 붙잡으려는 몸짓을 보였다.
또한 화려한 메탈릭 패브릭의 잦은 등장은 경기침체의 어두운 그늘을 벗고 소비자의 욕망을 자극하려는 패션계의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답답한 마음을 풀어주려는 듯 실버 브론즈, 스틸 같은 도도하고 섹시한, 모던한 컬러가 전진 배치 된 것이 이번 뉴욕패션주간의 특징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편안한 실루엣과 테일러링을 중시하는 자세가 런웨이를 가득 채웠고 80년대풍 ‘강한 숄더’의 복귀는 위축된 경기에 당당히 맞서려는(!) 디자이너들의 앙팡진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디자이너들이 위축된 소비자의 마음에 자신감을 되찾아주고 ‘실용적 섹시미’를 통해 패션에 대한 욕망을 지속시키려는 타협적인 태도로 단단히 무장하고 나선 것.
일례로 마크제이콥스와 잭포센은 어깨를 강조한 재킷을 내놓았고 오스카드라렌타는 슬리브에 볼륨을 넣은 드레스를 통해 여성의 당당함을 강조하는 80년대풍 패션 트렌드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많은 디자이너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편안한 니트 카디건과 풀오버를 컬렉션에 포함시켜 불황의 파고에 지친 소비자들의 마음을 감싸 주려하는 듯한 모습도 눈에 띄는 점이었다.
편안하고 실용적인 마이클코스의 오렌지 카울넥 풀오버, 드레스 위에 입기 좋은 트레이즈리즈의 컬러풀한 스웨터코트, 나넷르포어(Nanette Lepore)의 컬러풀한 가디건은 물론 비드와 리본트림으로 장식한 더블니트 코쿹 드레스와 튜닉 그리고 오버사이즈 카디건을 통해 니트의 실험성과 실용성을 마음껏 자랑한 디자이너 크리스티나살미엔의 무대에서 보듯 니트는 ‘불황의 차가움’을 절연해 주는 매력적인 소재가 아닐 수 없다.
한편 ‘Project Runway’ 시즌 4의 우승자 크리스챤시리아노는 스키니 렉 팬트 수트를 통해 파워풀한 여성미를 강조하며 ‘강한 여성상’에 동참했고, 캘빈클라인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프란시스코코스타는 쇼트 골브 이브닝 드레스를 통해 현실을 잊게 하는 관능미를, 랄프로렌은 우아하고 클래식한 레이스 아이템을 통해 사랑스런 여성미를 표현하는 등 디자이너들은 과장된 볼륨이나 구조적 실험에서 벗어나 한층 더 여성의 몸을 찬양하는 자세로 돌아섰다.
한편 어깨를 강조한 디자인 스타일이 전진 배치되면서 팬츠는 더욱 ‘슬림하고 타이트해져’ 몇 년 동안 계속되어온 스키니 진 트렌드가 내심 물러나길 바랬던 일부 여성들의 심적 부담을 더욱 커질 전망이다. 하지만 탄탄하게 강조된 어깨와 잘록한 허리, 굴곡 없이 쭉 뻗은 다리를 강조하는 슬림한 팬츠를 입은 모델의 모습이 너무나 ‘매혹적이어서’ 여성들의 다이어트 욕망을 자극한다.
미셀 오바마의 힘? ‘카멜 코트’의 부활
지난해부터 이어져온 미셀 오바마의 패션 파워는 디자이너들의 런웨이 무대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미국 대통령 취임식 일정을 수행하면서 입은 미셀 오바마의 복고적 아이템-카멜 헤어코트-가 많은 디자이너들의 손에서 다양하게 재해석되고 있다.
나르시스로드리게즈가 디자인했던 미셀 오바마의 카멜 헤어코트는 실용적이면서도 개성적인 그녀의 패션스타일을 잘 살려 화제를 모았는데 마이클코스와 KNY의 무대에서는 클래식한 더블 브리스티드 재킷 스타일로, 데릭램의 무대에서는 더블 컬러의 케이프 형태로, 엘리타하리는 워터풀 컬러 코트로, 토미힐피거는 스윙 코트 실루엣으로 재해석되어 영부인의 패션 파워를 다시금 인식시켰다.
한편 사회/정치적으로 여성의 파워가 커진 1980년대의 영향이 ‘빅 숄더’ 바람을 몰고 온 이때 화려하고 감각적인 네온 컬러 또한 디자이너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디스코테크의 네온 조명을 끌어온 듯한 형광빛 옐로우/핑크/오렌지/블루는 마크제이콥스, 마이클코스, 오스카드라렌타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마크제이콥스는 테크니컬러의 판초, 드레스, 단품류를 통해 아예 네온 컬러 전도사로 나선 모습이었다. 가죽에 대한 디자이너들의 사랑이 더욱 깊어지고 노골화된 것도 2009 뉴욕패션주간의 특징.
매슈윌리엄슨, 나넷르포어, 막스아즈리아 등은 다리 선을 강조하는 레더 팬츠를 선보여 탄성을 자아냈고 젯셋 속의 대변자 마이클코스의 섹시한 블랙 레더 드레스를, 아나수이는 블랙 페이던트 레더 아플리케 장식이 화려함을 더하는 벨벳 자켓을, 또한 로다르테(Rodarte)는 허벅지까지 오는 레이스 레더 부츠를 토해 불황에 빛을 발하는 가죽 아이템의 파워를 과시했다.
그렇다면 얇아진 지갑 사정으로 절제된 소비를 해야 하는 여성들에게 머스트해브 아이템으로 주목받은 디자인은 어떤 것일까? 하이엔드 리테일러나 스타일리스트들이 추천을 참고하면 여성의 몸매를 슬림하게 살려주면서도 실용성이 도드라진 슬림 저지 드레스(데릭램/마이클코스/토미힐피거의 런웨이를 빛낸 아이템이기도 하다)나 커리어적 면모를 살려주는 펜슬 스커트, 여성미를 살려주는 플로럴한 프린트나 모던한 플레이즈/혹은 추상적인 프린트 단품류나 드레스 위에 입을 수 있는 턱시도풍 숄컬러 재킷 등은 어두운 ‘불황’의 터널을 지나야 하는 패셔니스타들의 마음의 짐을 한층 덜어줄 머스트해브 아이템이다.
남자들 “당신의 역량을 보여 주세요”
이쯤 되면 슬슬 의문이 들게 된다. 여성복 디자이너들이 ‘여성적이면서도 강인하고 자신감에 찬 스타일’로 불황에 맞설 동안 남성복 디자이너들은 어떤 자세로 무장하고 있을까?
2009 뉴욕패션주간의 런웨이에 오른 맨스웨어의 분위기는 한 마디로 ‘난 능력 있는 남자’라는 명제에 충실한 느낌이다. 다시 말해 진지하고 전문적이고 고급스러우면서도 적절히 ‘통제된’ 베이직한 수트가 전진 배치된 것인데 이는 한동안 파워를 과시했던 ‘감각있는 남자나 예쁜 남자’의 환상보다는 자신의 능력으로 담담히 불황을 타개해나가는 ‘비즈니스맨적’ 면모가 되살아난 것으로 볼 수 있다. 패션 실험보다는 일하는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충실하자는 ‘것.
실제로 캘빈클라인은 디테일을 배제한 심플하고 슬림한 모노크로매틱 컬렉션을 통해 진중한 남성미를 강조했고, 헤링본, 하운드투스, 트윌, 캐시미어 등 클래식하고 보수적인 소재가 실험성이 끼어들 틈을 사전에 차단했다. 수트와 셔츠, 타이까지 모두 같은 패브릭으로 처리해 통일성을 강조하는 것도 남성복 무대에서 눈에 띄는 부분이다.
한편 첫 맨스웨어를 무대를 선보인 리처드채는 다양한 피코트와 밀리터리, 재킷, 박시한 스쿨보이 재킷을 통해 체제에 순응하는 듯한 ‘정돈된 남성미’를 강조했고 그레이 컬러를 메인 컬러로 하되 절제된 머스터드/플럼 컬러를 배치, ‘능력과 감각’을 동시에 원하는 남성들을 배려하는 자세를 보였다. 전체적으로 남성복은 슬림 실루엣을 이어가되 지나치게 스키니하거나 극단적인 실험성을 버리고 좀더 ‘현실적인’ 모습, 좀더 모노크로매틱해진 모습이 두드러진다.
결국 2009년 패션계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이미지는 ‘자신감에 찬 강인하고 섹시한 여성, 그리고 ‘자신의 능력으로 불황을 타개해나가는’ 실력 있는 남자인 셈인데 이는 불황의 짙은 그늘을 헤치고 나가야 하는 소비자들의 깊은 바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