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는 47세, 조방장은 78세
1592년 2월 13일, 낮
“어머니께선 강건하십니다. 형님 안위를 지나치게 염려하시는 것이 유일한 걱정거리이지요.”
이순신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아우 우신이 어머니 안부부터 전한다. 형이 무엇부터 물을지 익히 알고 있는 까닭이다.
우신은 작년 설날 일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오늘과 똑 같이 지난 설에도 이순신은 아산에 가지 못했고, 우신은 형을 찾아왔고, 첫 대화가 어머니 근황에 관한 내용이었다.
“어머니는 무탈하게 안녕히 계시느냐?”
“저보다도 강건하십니다. 조금도 심려치 마십시오.”
작년 정초에도 그랬지만, 오늘도 우신은 아버지에 대해 아무 말이 없다. 이순신 또한 아버지가 어떻게 지내시는지 묻지 않는다. 형제의 아버지 이정은 8년 전인 1583년 향년 73세로 별세했다. 그해 함경도 건원보 권관(종9품)이던 이순신은 근무를 마치고 훈련원 봉사(종8품)로 승직해 귀경했다. 아무튼 이순신 형제는 설날이라 해서 아버지 근황을 두고 말을 주고받을 이유가 없다.
우신은 맏형 희신과 둘째형 요신에 대한 소식도 입에 담지 않는다. 이순신은 우신의 셋째형이다. 모르는 이가 보면 다른 날도 아닌 설날에 만난 이순신 ‧ 우신 형제가 손위 두 형님에 대해 한 마디도 화제에 올리지 않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법도 하다.
그러나 두 사람으로서는 전혀 어색할 것이 없다. 이순신의 두 형도 세상을 떠난 지 오래다. 어머니 변씨가 작년에 이어 올해도 넷째아들 우신, 둘째아들 요신의 아들 봉, 셋째아들 순신의 아들 회를 ‘집안의 가장’이 있는 여수로 보내어 차례를 지내도록 조치한 것은 그 때문이다.
올해로 희수喜壽를 맞는 변씨는 오늘도 아산 집에 머물러 있다. 평균 수명이 30대 중반 정도에 지나지 않던 시대에 부모가 77세에 이르도록 생존해 계시는 것은 무엇보다도 기쁘고喜 또 기쁜喜 일이다. 喜자의 초서가 七을 연이어 쓴 七七과 닮았다 하여 77세를 희수라 한다는 말도 있지만, 어쨌든 이순신은 어머니가 올해로 희수를 맞이한다는 사실이 그저 기쁠 뿐이다.
‘아산에서 어머니 희수연이 열리면 내가 가볼 수 있을까?’
이순신은 조금 전부터 그런 생각에 빠져 있다.
‘두 해 연이어 설날에 어머니를 뵙지 못하다니 너무나 애닯구나不勝懷恨之至 …. 아버지도 아니 계시고, 큰아들과 둘째아들도 잃고 외로우신 어머니를 어찌 이토록 설날까지 홀로 지내시게 한단 말인가?’
조카와 아들의 설날 하례를 듣고서야 언뜻 이순신은 감았던 눈을 뜬다.
이순신이 부리나케 디딤돌로 내려서면서 반긴다.
“봉이가 왔구나! 회도 왔어! 먼 길에 고생이 많았다!”
이순신이 조카 봉의 어깨를 쓰다듬는다. 이순신에게는 조카들이 아들이나 다름없고, 조카들에게는 작은아버지 이순신이 그저 아버지일 따름이다. 두 형이 일찍이 타계하면서 이순신은 조카들을 안아서 키웠다. 정읍 현감으로 발령을 받아 부임하러 갈 때에도 모두 데리고 갔다.
“임지에 조카들까지 거느리고 가는 것은 남솔濫率로 문제가 될 소지가 있으니 재고를 함이 어떤가?”
관리에게 지나치게 많은 식솔이 있으면, 즉 남솔을 하면 보통의 백성들에게 재정적 부담을 끼치게 된다. 10년 전인 1579년에는 부평 부사 한효우가 남솔을 범한 죄목으로 탄핵을 받아 자리에서 쫓겨난 일도 있었다. 한효우의 일은 당시 사대부 사회에 널리 회자되었고, 그 사건을 잊지 않고 있던 한 벗이 이순신에게 충심어린 쓴말을 했다.
“나라고 어찌 남솔로 비난받을 여지를 깨닫지 못하겠는가? 비록 내가 식구를 과하게 이끌고 임지에 간 죄로 벌을 받을지언정 돌볼 이 없는 어린 조카들을 어찌 버리겠나?”
눈물을 흘리는 이순신 앞에서 벗도 말을 잃고 말았다.
간단히 차려진 차례상 앞에서 네 사람이 절을 올린다. 준비는 어제 이순신이 해두었다. 절을 마친 네 사람이 이제 막 음복을 하려는데 조방장助防將 정걸 장군이 왔다. 정걸은 전라 병사 최원이 보내온 설 선물과 각종 화살들은 진해루(여수 진남관) 아래에 놓아두고 편지만 이순신에게 가져왔다. 정걸 뒤에는 전라 병사가 보낸 물건들을 짊어지고 온 군관 이경신과 병사들이 서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