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3부 - 시련을 통해 배우는 노래 때때로 우리의 생애에 알 수 없는 시련과 재난이 닥쳐올 때가 있습니다. 믿음이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어려운 고난과 시련이 닥칠 때면 믿음이 흔들리면서 과연 하나님께서 나의 길을 인도하고 계신가 하는 시험과 의심에 빠지기 쉽습니다.
종종 시련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섭리의 과정에 포함되어 있을 때가 많습니다. 혹시 시련을 당하고 계십니까? 모든 소유를 잃고 어려움에 처하게 되셨습니까? 믿었던 친구가 떠나가 외로움에 떨고 계십니까? 질병으로 마음과 몸이 괴로워 신음하고 계십니까? 재난으로 한숨을 쉬고 계십니까? 시련 속에 있는 당신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의 말씀을 보내 드립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으면 하나님의 조용히 속삭이며 위로하시는 음성을 들으실 것입니다.
시련은 근거 없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시련이 닥쳐 비록 괴로움 속에 떨고 있을 때에라도 우리는 잠깐 시간을 내어 겸손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시련과 슬픔은 아무 근거 없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시련은 자신의 잘못으로 초래되기도 하고, 혹은 아무 잘못이나 실수 없이 우연히 닥칠 수도 있습니다. 시련이 왜, 어떻게 해서 오는지 정확한 원인을 규명해낼 수 없을지라도, 우리가 알 수 있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시련을 통해 우리를 연단시키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신다는 것이며, 우리는 시련들을 통해 귀중한 교훈들과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시련과 고난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단을 위해 사용하시는 도구입니다. 우리는 시련을 당할 때에 불평하지 말고 조용히 하나님을 신뢰하며, 주님 앞에 겸손히 낮추고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시련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강한 것인지 아니면 곧 흔들려 없어질 약한 믿음인지를 드러내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애 3:33)십니다. 그분께서 시련과 환난을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히 12:10)기 위해서입니다. 주님께서는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9)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련이 유익이 됨을 배우며, 주님의 징계를 경시하지 말고, 하나님께 책망받을 때 낙심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시련의 단련은 우리에게 유익합니다 주님과 같은 성품을 닮고 그분의 생애와 같이 살아가려고 애쓰는 그리스도인 생애의 매 발걸음마다 노력과 자아희생과 수양이 요구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너무 쉽게 낙심해 버립니다.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친 많은 사람들이, 전에 결코 경험하지 못했던 장애물을 만나고 시련과 난관에 둘러싸이게 되면 놀라고 실망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같은 품성을 소유하기 위하여, 또한 주님의 사업에 적합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바치고 헌신하며 기도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기도하기 전보다 본성에 있는 모든 악을 자극하는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 처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자기 속에 그런 것이 들어 있었는지 전혀 의심해 보지도 않았던 결점들이 나타나고, 매사가 꼬인 실타래처럼 얽혀 힘들고 난처한 상황에 빠지면 그리스도인들은 옛날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부르짖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다면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닥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이런 일들이 생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시련과 장애는 주님께서 택하신 훈련의 방법이며, 또한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정하신 성공의 조건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성품을 우리들 자신이 아는 것보다 더 잘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은 잘 지도하기만 하면 그분을 위하여 사용될 수 있는 능력과 가능성이 있는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각기 다른 위치와 여러 가지 환경에 처하게 하시는 섭리로써, 지금까지 알지 못한 채 감추어져 있던 결함들을 그들의 성품에서 발견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그런 결함들을 교정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사업에 적합해지도록 훈련받을 기회를 주십니다.
때때로 그분께서는 고난의 불이 그들을 엄습하도록 허락하심으로써 정결해지게 하십니다. 우리가 시련에 당면해 있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계발시키기를 바라시는 귀중한 무엇이 우리 속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만일 그분께서 우리 속에 그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우리를 연단하는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가치없는 돌을 용광로 속에 던져 넣지 않으십니다. 대장장이가 쇠와 강철을 불 속에 던져 넣는 것은 그것들이 어떤 종류의 금속인지 알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한 사람들이 어떤 기질의 사람들이며 그들이 당신의 사업을 위하여 적합한 자들이 될 수 있을 것인지의 여부를 시험해 보고자 그들이 고난의 풀무 속으로 들어가도록 허락하십니다.
장인은 그릇이나 도자기를 만들려고 먼저 진흙을 가지고 형체를 구상합니다. 그는 흙을 이기고 빚다가 그것을 떼어서 찧고 또 눌러서 뭉칩니다. 그러다가 물로 축이고 다시 말립니다. 그는 얼마 동안 손을 대지 않고 그것을 놓아두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장인은 그릇을 만드는 일을 계속합니다. 진흙으로 모양을 만든 다음, 깎고 다듬어서 햇빛에 말리고 솥에서 굽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사용하기에 알맞은 그릇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빚어 만들기를 원하십니다. 마치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는 것처럼 우리는 그분의 손에 놓여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 자신을 바침으로 예수님에 의하여 꼴 지어지는 것입니다.
시련 속에서 배우는 노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2,13). 만일, 어떤 새에게 노래를 가르치려는 주인이 있다면, 다른 음성의 노래들이 들려 오는 밝은 대낮 동안에는 새장 안에 있는 그 새에게 노래를 가르치기가 힘들 것입니다.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여러 소리와 환경은 그 새가 주인이 가르치려고 애쓰는 그 노래를 배우는 데 방해가 됩니다. 그런 경우에 새는 노래의 한 절 한 절씩을 여기저기에서 떼어내어 짤막짤막하게 부르는 흉내만을 낼지언정 결코 단독으로 완전한 곡조를 다 부르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새장을 덮고 그 새가 하나의 노래만을 들을 수 있는 어두운 곳에 두면 그 새는 주인의 노래를 잘 배우게 됩니다. 어두움 속에서 그 새는 되풀이해서 그 노래를 부르려고 노력하게 되고, 그리하여 마침내 그 노래를 배워 완전한 곡으로 부르게 됩니다. 그런 다음에 그 새를 밝은 곳으로 내어 놓으면, 그는 자기가 배운 노래를 거기에서 부를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르치시고자 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시련과 고통과 아픔과 외로움 속에서 배우는 노래가 있습니다. 우리가 고난의 그늘 아래서 그것을 배우게 되면, 우리는 그 후에 언제나 그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마지막 남은 무리인 하나님의 참 성도, 곧 십사만 사천이 부르는 노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사만 사천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계 14:3).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닷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계 15:3).
마지막 환난을 통과하고 구원을 얻어 하나님 앞에서 찬양할 십사만 사천은 노래를 부를 것인데, 그 노래는 곧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입니다. 왜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일까요? 그것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 홍해를 가르고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찬양하는 노래이며,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셨던 믿음의 경험의 노래인 것입니다. 마지막 백성들은 누구나 자신만의 노래, 하나님이 구원하신 역사에 대한 자신만의 간증의 노래가 있어야 합니다. 십사만 사천이 부르는 경험의 노래는 모든 시련을 믿음으로 견디고 아픔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의 기이함과 감사함을 배운 후 부르는 노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련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보석을 만들고 계십니다 때로 시련을 겪지 않았더라면 인생의 의미를 결코 배우지 못했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고난을 통과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변하지 않았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생의 고난은 우리의 성품에서 불순물과 거친 것들을 제거해 내는 하나님의 일꾼들입니다.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돌 같은 우리들이 채석되어 깎이고, 끌로 새기어지고, 갈리고 다듬어지는 것은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 그리고 모난 돌을 가는 회전 연마기 속에 들어가 갈고 닦여지는 경험도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들어간 돌은 하늘 성전의 제자리를 채우는 데 부족함이 없게 준비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쓸모없는 물건을 위해서는 주께서 그처럼 신중하고 철저한 작업을 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그분의 보석만이 궁전의 식양대로 다듬어집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보석입니다. 그들은 그분을 위하여 밝게 빛나야 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빛이 흘러나가게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광택은 그들이 어떤 연마의 과정을 거쳤느냐에 좌우됩니다. 그들은 깎이고 닦이기로 작정하든지, 혹은 깎이지 않은 채 남아 있기를 선택하든지 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전에 한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다는 판단을 받으려면 갈고 닦는 모든 과정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갈고 닦으시지 않으시면 보통 자갈 이상의 빛을 반사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너는 내 것이다. 내가 너를 샀다. 너는 지금 한 덩어리의 거친 돌에 불과하지만 너 자신을 내 손에다 두면, 내가 너를 갈고 닦아 빛나게 할 것이며 너의 광택은 내 이름에 영광을 돌릴 것이다. 어떤 사람도 내 손에서 너를 빼앗지 못하게 할 것이다. 내가 너를 나의 귀중한 보화로 삼을 것이며, 너는 나의 대관식 날에 내 면류관에 기쁨의 보석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치없는 재료에는 시간을 별로 들이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귀한 보석만을 모든 거친 곳을 잘라 내시고 궁정의 식양을 따라 연마하십니다. 이 과정은 참으로 혹독한 시련이기 때문에 인간의 교만을 꺾어 놓습니다.
주님께서는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깊숙한 곳을 잘라서 품성의 교만을 제거하십니다. 거친 표면을 잘라 내시고 모든 거친 면을 다 갈려 나가게 하신 후 그 돌을 빛 가운에 들고 비추어 보실 때, 주님께서는 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이 반사되어 나오는 것을 보십니다. 그리고는 이것은 나의 보석 상자에 넣을 가치가 있다!라고 선포하십니다. 그 경험이 아무리 혹독할지라도 그것은 매우 축복된 경험인데, 그것은 그 돌에다 새로운 가치를 주고 생명의 빛을 비추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보석으로 다듬어지는 과정을 감사히 여기며 시련과 고난을 잘 통과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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