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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과 청송심씨 안효공 심온과의 관계
박태서 (2006-02-19 오전 7:48:57) Hit : 265 Vote : 25
청송심씨들은 6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안효공 심온선생의 죽음이 박은으로부터 온것이라고 여기고 있다.
조선조 개국후 태종 이방원이 왕권 강화를 위해 왕의 외척들을 제거한 정책을
개인의 사감으로 오해를 하고 있다..
흡사 “나무는 보고 숲을 못본다” 는 이야기가 있는것 같은경우다
평소에 심온선생과 좌의정 박은과의 사이는 별로 좋은사이는 아닌것 같다.
조선왕조 실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고
태종18년에 태상왕이 임금에게 선위(태종에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줌)하려고 하였으나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하였다.
박은(訔)이 <그 뜻을> 짐작하여 알고 심온沈溫에게 이르기를,
“요사이 임금의 의향을 그대가 아는가. 또 말하기를,
“임금의 처사는 잘 되지 않는 것이 없으니, 끝내 아무 일이 없을 것이라.
하였는데, 그 뜻은 내선(內禪)한다 할지라도 아무 탈 없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심온(溫)이 박은(박訔)의 말을 임금(세종)에게 알리니, 임금(세종)이 박은訔의 말을 옳게 여기지 아니하고,
더욱 심온(溫)과 말한 것을 옳게 여기지 아니하여 곧 태상왕(태종)에게 계하였다.
태상왕이 선위한 뒤, 임금(세종)이 태상왕(태종)께 사뢰기를,
訔이 어느날 심온(溫)에게 내선한다는 일을 말하였으니, 이것으로 보면, 박은(訔)은 순결한 신하가 아닙니다.하니, 태상왕(태종)이 말하기를,
“내가 장차 내선하겠다는 말을 하였고, 박은(訔)이 직접 이것을 들은 까닭에 그런 말을 한 것이라.
하였다.심온(沈溫)이 죄를 받게 되자, 박은(訔)이 태상께 계하기를,
“심온(溫)이 이조 판서가 되었을 때 자기 사람을 많이 등용하였습니다.
하니, 태상은 듣고 잠자코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사람들이 비웃기를,
“박은(訔)은 자기 반성은 할 줄 모르고 심온(溫)의 세력부린 것만 허물하는가.
하였다. 김점(金漸)이 항상 조정에서 訔을 보면, 반드시 큰 소리로 말하기를,
“그대의 등용한 사람은 다 그대의 집에 드나들던 자요, 우리들의 부탁한 사람은 모두 들어주지 아니하니 옳은 일인가,하니, 訔이 대답할 말이 없었다.
訔이 비록 친척을 많이 등용하였으나, 조정의 명사를 다 뽑아 썼으므로, 남들이 심히 원망하지 아니하였다. 訔은 취마(뀄摩)의 재주가 있고, 임금의 의향을 잘 맞추어 나갔다.
또 "기제잡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도총제 심정은 심온의 아우이었는데 하루는 병조판서 박습과 서로 이야기 하다가
“요즘 호령이 두곳( 상왕 태종과 세종)에서 나오므로 대단히 불편하여 한곳에서 나와 전일한 것만 못하다” 고 허였으니 그뜻은 국군의 대사는 반드시 상왕께 품의하게 되어있으므로 두곳에 거듭 품의할 때 풀편하기 때문이다.
이때 경연에서 강론이 끝나면 입시하였던 대신들이 모두 상왕 宮에 가서 배알하고 경연중에 있던일을 차례로 아뢰고 더욱 세밀한 조사를 하였으며 비록 경연에서 모시는 신하가 아닐지라도 재상 반열에 드는 종관은 모두 들어가 일을 논하는데 참여하게 하였으므로 바깥의 크고 작은일과 오가는 말을 임금에게 아뢰지 않는것이 없었다.
그래서 심정의 말도 나오게 된것인데 그말을 아뢴사람의 이름은 잊었으나 병조정랑인듯하다
임금이 벼락같이 노하여 드디어 국문하라 하였으나
죄인들이 전가하고, 끌어들여 경대부 10 여명에게 까지 연루되었는데
상왕은 생각에 “이것이 어찌 심 정 혼자서 한말이겠는가? 반드시 심 온의 뜻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집사람들이 모두 이런마음을 품었을 것이다”여겼고
우의정 유정현, 성산부원군 이직등이 모두 심온의 평소에 좋지 못한 일들을 말하였므며,
좌우의 사람들도 각각 그의 허물을 말하였다.
평도공도 말하기를
“심온이 국구이므로서 의당 수상이 되어야 하는데, 수상은 직위만 높았지 맡은 사무가 없고. 좌상은 으레 이조.예조.병조판서를 겸임하며 우상은 으레 형조.호조.공소 판서를 겸임 하므로, 심온이 권세없는 것을 꺼려 꼭 좌상의 자리를 얻으려고 하였으니. 권세를 탐내 법을 무너뜨리는 뜻을 여기에서 알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왕이 말하기를
“인정에 누가 권세 잡기를 마다 하겠오 좌상의 이말은 할 필요가 없을것 같소” 하였다.
이런사실로 보면 깊이 원망한데는 유 정현에 있는것 같고
‘혼인 하지말라’는 유명은 박씨 가문에 대해서 였다.
다음기록을 보면 많은 신하들이 심씨의 가족을 관청의 관비(*관가에서 부리는 종)로 보내자고 할때
영의정인 유정현은 심온의 아내와 자녀를 관청의 천비로삼기를 청했으나 . 오히려
좌의정 박은 은 중궁(왕비)의 어머니를 관청의 천비로 본내는것을 반대했다.
세종 08/05/19(임자) / 대언 등에게 공비의 어머니 안씨 일에 관해 말하다 》
대언 등을 명하여 들어와서 계사(啓事)하게 하였다. 임금이 조용히 이르기를,
“무술년(戊戌年)에 강상인(姜尙仁) 등의 공사(供辭)가 심온(沈溫)에게 관련되어 옥사가 이루어지니,
태종께서는 스스로 죽게 명하셨다. 의금부에서 연좌된 심온(沈溫)의 아우와 형인 심징(沈澄)·인봉(仁鳳) 등을 관천(官賤)에 소속시키기를 청하니,
태종께서 말씀하기를, ‘비자(妃子)의 백부와 숙부를 이렇게 처단할 수 없다.고 하셨다.
의금부에서 또다시‘죄인의 처자는 연좌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심온(沈溫)의 아내와 자녀를 천안에 기록하기를 청하였는데, 태종께서 말씀하시기를,
‘옳지 않다.고 하시면서,
이내 박은(朴訔)에게 이르기를,
‘의금부에서 심 온의 아내와 자녀를 천안에 기록하기를 청하니 이를 어떻게 처리하겠는가. 하셨다.
박은이 대답하기를, ‘자기의 죄도 아니고 또한 중궁(中宮)의 어머니이므로,
다른 연좌의 예(例)와 다르니 잡아와서 관천을 삼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하였으나, 그때에
유정현이 의금부 제조가 되어 연좌시키기를 굳게 청하므로,
태종께서 말씀하시기를,‘잠정적 으로 천안에 기록 하겠지만, 그러나 천역은 시키지 말라.
후일에 마땅히 이를 고쳐야 될 것이다.’ 하셨다.
또 신하들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죄인의 딸은 王后가 될 수 없다.’고 하여,
공비(恭妃* 세종의 소헌왕후 심씨)를 요동시키고자 하니,
태종께서 말씀하시기를, ‘어허, 그게 무슨말인가. 공비를 요동시킬 이치는 도무지 없다. 하셨다.
위의 기록을 보면 안효공 심온과 좌의정 박은 은 서로 사이가 좋지는 않았으나
깊이 나쁜 사이는 아닌것 같은데 심온선생이 많은 오해가 있었던것 같다.
태종이 자기가 왕위에 오르는데 큰역활을한
처남 민무구 민무질을 1차 왕자의난때는 공로로 정사공신 2등
2차 왕자의난때는 공로로 좌명공신 1등의 훈호를 받을 정도로 태종이 보위에 오르는데 크나큰 역할을 한 공신이지만 왕권강화를 위해 민무구 민무질을 죽이고 또 다른 동생 민무휼, 민무회 도 자결하게 시켰으며 그들 처자도 변방으로 내쫓음으로서 민씨들을 모두 권좌에서 몰아냈다.
또 심온이 죽게된 큰원인도 태종의 사후 세종의 왕권이 척신인 심씨네에서 휘들릴것을 염려하여 미리 단속한 경우다
심온이 세종 즉위초에 영의정에 올라 사은사로 명나라로 갈 때
많은 신하들이 전별하는 모습을 보고 태종이 왕권에 염려가 될것을 우려했다
위의 사건으로 볼때 민씨네와 심씨네의 불행은
태종이 왕권강화를 위해 일어난 일인데
심씨네의 불행이 박씨네로 부터왔다고 잘못 생각을 하고 700 여년간을 그렇게 믿고 있으니 불행이 아닐수 없다
그러나 옛날부터 많은 학자들은 심씨네와 같은 생각을 하지않고 있다
이익의 성호사설 서문에도 있는것 같이 심씨네가 원한을 품으려면 태종에게 품어야 할것을 박씨네에게 돌리는지 알수없는일이다.
현재의 학자들도 민씨집안과 심씨집안의 불행은 태종의 정책태문이라고 주장한다.
오늘 조선일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기에 많은 분들이 참고 하시기를 바랍니다
조선일보 2006년 2월 18일에서
[이덕일 사랑] 태종과 외척들
국왕이나 왕세자의 장인을 ‘국구(國舅)’라고 하는데, 동반(東班) 정1품에 제수되는 척리(戚里)이다. 왕의 외척(外戚)을 척리라고 부르는 이유는 한(漢)나라 때 장안(長安·서안)의 척리라는 마을에 임금의 인척(姻戚)들이 살았던 데서 기인한다.
조선의 척리는 품계는 높아도 정사(政事)에는 참여할 수 없었는데, 이런 원칙을 만든 임금이 태종이었다. 태종이 부인인 원경왕후 민씨의 친동기 넷을 사형시킨 사건은 유명하다. 민무구·무질은 어린 세자(양녕대군)를 끼고 권력을 잡으려 했다는 ‘협유집권(挾幼執權)’ 혐의로 처형했고, 무휼과 무회도 그 연장선상에서 제거한 것이다.
태종은 상왕 시절 세종의 장인 심온(沈溫)도 제거했다. 영의정 심온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갈 때 전별하는 거마(車馬)가 장안을 뒤덮었다는 보고를 듣고 자신의 사후 세종의 왕권 강화를 위해 제거한 것이다. 심온의 동생인 총제(總制) 심정이 상왕 경호 문제를 언급한 것을 역모로 몰아 죽이고 심온까지 연루시킨 것이다. 이 비정한 외척 제거에 대해 이익(李瀷)이 ‘성호사설’인사문에서 “민(閔)씨·심(沈)씨 두 집안이 함께 흉화(凶禍)를 당하게 되었으니, 대개 먼 장래를 생각함이 매우 깊었던 것이다”라고 긍정했듯이 역사의 평가는 냉혹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한문제(漢文帝)가 처남 두광국(竇廣國)을 쓰지 않고, 외숙인 장군(將軍) 박소(薄昭)를 죽인 것을 들어 높이 평가한다.
그런데 외척의 정사 금지는 꼭 임금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태종 때 양녕대군의 장인 김한로(金漢老)의 처남(妻男)이었던 대호군(大護軍) 전맹겸(全孟謙)이 저자 사람의 생선을 빼앗자 경제 문제를 담당하는 경시서(京市署)는 즉각 고발했고 사헌부도 그를 논박했다. 태종이 양녕대군의 부인 숙빈(淑嬪)을 생각해 용서했으나 두 기관은 재차 고발했고, 태종은 할 수 없이 태(笞) 40대를 때렸다.
대통령 사돈의 음주운전 사고를 뒤덮기에 급급했다는 비난을 받는 현재의 경찰과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본받아야 할 엄격한 근무 자세가 아닐 수 없다.
이덕일·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
입력 : 2006.02.17 18:51 48'
한국명문
박태서님!
안녕하세요? 시비곡직을 떠나서 오늘 님이 올리신 글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史實을 깨닫게 하셨습니
다.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깊은 성찰 없이 어느 누구 하나를 죄인으로 모는 타성에 젖어 왔습니다. 이
제 님의 박학하신 견해로 이 사건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06-02-19 오후 2:54:00
사임당
박태서님, 조선 왕조 실록을 보시면 잘 아시겠지만, `강상인의 옥' 이 일어났을 때, 상왕 태종은, 핵
심 인물인 강상인만 죽이고, 심온의 아우 심청 등은, 그 죄가 강상인에 비하면 훨씬 적으니, 나중에,
괴수 심온이 명나라에서 돌아오면, 서로 대질 심문시키자고 먼저 하명하였는데, 박은이 상왕 태종
에게, 오히려, 핵심 인물인 강상인만 남겨두고, 심온과 대질 심문시키고, 심온의 아우 심청 등은, 참
수시키라고 간언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상왕인 태종은, 이들을 모두 참형시키죠. 또한, 박은은, 조
정 안팎의 인심이, 모두, 심온에게 쏠린다고 말해, 상왕 태종의 사돈 심온 가문의 멸문지화를 더 부
추겼습니다. 왜, 이 사실은 안 올리십니까? 2006-05-05 오후 12:47:00
박태서
사임당님 좋은 지적을 해주셨는데
그러한 사실 기록이 조선왕조실록 어느곳에 있는지 구체적의로 세종 몇년 몇월 몇일에 있었는지
근거를 대시고
박은이 “조정의 인심이 모두 심온에게 쏠린다고 태종에게 말했다는데” 조선왕조실록 어느 곳에
도 그런사실은 없습니다.
족보를 연구하려면 자기 조상의 역사만 공부 하지말고 조선조 역사도 같이 공부 했으면 합니
다.
요즘에는 조선왕조실록 CD 없어도 인터넷으로 실록을 볼수있습니다.
조선조 역사의 전체를 보아야지 단편적인 면만갖이고 역사를 평가하는 조금 부족한 점이 있읍
니다.
심씨네에서 세종초 시대 상항도 파악 못하고 특이 상왕(태종)의 뜻(왕의 권위를 높이고 외척의
세도를 꺽기 위함)을 알지 못해 집안이 쑥대밭이 된것을 왜 화살을 박씨네 집안에 땃하는지 모르
겠다.
그렇다면 태종의 처가인 여흥민씨네는 누구를 탓하는가?
후세의 역사 학자들 모두가 심씨네 집안의 불행은 태종의 뜻하는 바에 의해서 이루어진것이라
고 하는데 역사사실 마저 부정하는것인가. 역사사실에 의거해서 평가하는것이 아니고
조상님들의 전해내려오는 구전을 사실화 해서 역사를 왜곡하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조선조 후기에 내려오면 남인과 서인, 노론과 소론이 정권잡기 위해서 헐뜻고 무고로 고변을 하
여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 사건이 주기적으로 일어나고 왕이 바뀔때 마다 정권이 바뀌고 숙종
같은 분은 환국을 여러번 일으켜 자신의 왕권을 강화 하고 정권바꾸기에 능한 인물이었는데 정
권이 바뀔때 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같는데 이들이 모두 자기의 죽을을 반대파의 정적에게 화살
을 돌렸다면 우리대한민국에 가문간에 원수진 집안이 수없이 많았은 텐데 그런이야기는 어디에서
도 들어본일도 없고
600 여년전의 일을 가지고 지금도 이렇꿍 저렇꿍 이야기 한다는것은 조금 도가 심한것 아닌가.
얼마전 신문에서 보니
파평윤씨 윤관장군 묘역에 심씨네가 산소을 써서 몇백년간을 다투다가 화해했다는 좋은 기사를
보았는데
이제는 청송심씨네에서 화가 풀릴때도 됬는데 아직도 이것을 문제 삼는것을 보니 앞으로도 이이
야기가 몇백년을 더갈지 모르겠습니다. 2006-05-07 오후 3:50:00
사임당
제가 화나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제가 위에서 한 말은, 저도 인터넷에서, 조선 왕조 실록을 보고, 말씀 드린 것입니다.
세종 즉위년 11월 26일 자 실록을 찾아보시면 거기에 나와 있을 겁니다.
그리고, 조선 왕조 실록 세종 11년 3월 17일 자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황희 정승 등이, 애초에, 상왕
태종은, 심온을 죽이려고까지 마음먹은 것이 아니라, 유배에 그치게 하려고, 오히려, 심온이 돌아오
기 전에, 강상인, 심청 등을 모두 미리 죽인 것이라며 심온의 신원을 상소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
리고, 오히려, 태종의 심복인 박은, 유정현 등이, 심온을 강압 심문하여, 심온이 허위자백을 하게 만
들어, 어쩔 수 없이, 태종이 심온을 사사시켰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도 나오구요. 그리고, 조선 왕
조 실록에는 안 나와 있지만, 여러 역사서를 보면, 이 때, 박은이 조정의 모든 인심이 심온에게 쏠려
있다고 고변해, 심온의 사사를 부추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붕당 정치에 의한 원한과 심온 사건으로
인한 청송 심씨와 반남 박씨 간의 원한은, 그 차원이 다르죠... 청송 심씨 문중은, 고려 말, 우왕 (공
민왕의 아들, 신돈의 아들이라고도 함.) 때서부터, 심온의 아버지 심덕부 대서부터, 번성하기 시작
한 가문으로, 이 당시에는, 그 수가 아주 적었습니다. 지금처럼, 청송 심씨의 인구 수가 많아진 것
은, 나중의 일이지요. 그러니, 현재의 인구 수로, 인구 수 대비 문과 급제 비율을 따져, 순위를 매긴
다는 것도 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하여튼, 청송 심씨 족보를 보시면 잘 아시겠지만, 1세조, 즉, 시
조가 심홍부이신데, 심온은 겨우 5세조입니다. 그러니, 심온 집안의 멸문 지화는, 곧, 청송 심씨 전
체의 멸문 지화였거든요? 그러니, 이 사건은, 청송 심씨 가문에 있어서는, 가장 중대한 사건입니다.
물론, 청송 심문이 이렇게 완전히, 멸문 지화를 겪고도, 문종 때, 다행히도, 심온이 완전히 신원되
어, 그 이후로, 정승을 비롯한 당상관 이상의 고위 요직을 가장 많이 배출했지만, 판서와 대제학 배
출 부분에서는, 조선 말기에 가면, 신안동 김씨, 연안 이씨, 여흥 민씨, 대구 서씨, 광산 김씨, 반남
박씨, 풍양 조씨에 뒤지게 됩니다. 물론, 청송 심씨는 최고의 문벌이지만, 심온의 사건이 아니었다
면, 문과 급제와 판서, 대제학 등을 훨씬 더 많이 배출하여, 분명, 청송 심씨는 명실 상부한, 조선의
초일류 최고 명문이 되어 있었을텐데, 심온의 사건으로, 청송 심씨는 매우 큰 타격을 입었던 것입니
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태종 이방원과 태종을 부추겼던, 박은, 유정
현, 조말생, 안헌오 등의 태종의 심복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민무구 형제의 죽음이야, 자기네
들이, 양녕 대군을 둘러싸고, 많은 죄를 저질렀지 않았습니까. 그것에 대한 수 많은 대간들의 탄핵
도 있었고요. 결국, 민무구 형제의 죽음은 자기네들이 자초한 일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러나, 심온
의 경우에는, 군사를, 당시의 왕인, 세종에게 모두 돌리라고 말한 것은, 충성심에서 우러나온, 아주
지극히도 당연한 말인데도, 이를 꼬투리 삼아, 태종과 그 심복들이, 심온을 역적으로 몰아, 자기네들
의 사사로운 감정과 욕심으로, 심온에게 누명을 씌워, 억지로, 죽인 것 밖에 더 됩니까? 그리고, 조
상님들의 구전을 너무 과소 평가하시는 것이 아니실런지요? 실록이란, 그 사관이 속한 당여에 의하
여, 허위와 과장으로 쓰여진 경우가 다분합니다. 오히려, 구전이나 고첩이 더 정확할 때가 많답니
다.
그러나, 님의 말씀대로, 이 문제는, 이미, 거의 600 년이나 다 되어가는 원한 관계일 뿐이니, 이제
는, 이 문제를 가지고, 청송 심씨와 반남 박씨 간에, 서로, 다투거나 금혼한다거나 하는 일은 있어서
는 안 되겠지요...^^ 요즘은, 웬지 모르게, 저도, 반남 박씨들이, 가장, 좋답니다...^^ 앞으로는, 청송
심씨와 반남 박씨간에, 통혼이 빈번하기를 저도, 바랄뿐입니다...^^^ 2006-05-08 오후 10:19:00
박태서
600년전 조상님들의 정적이였던것을 갖이고 계속 논란을 해보아야 끝이 없으나
사임당님께서 근거자료라고 하는 세종 11년 3월 17 일자 기록은 전혀 내용과는 다른이야기이고
세종 원년 11월 26일 자 기록은 인정을 합니다
그러나 그기록이 박은이 심온을 죽이라고 하지는 않았고 강상인 박습을 같은 차원에서 같은 형벌
을 주라고 한것입니다.
역사서에는 정사와 야사가 있습니다
조선조에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을 정부 기관의 기록을 제외한 개인이 쓴것은 모두 야사
입니다.
조선왕조실록외 역사서에 나온 이야기라고 얼버무리는데 그역사서의 출처를 말해보십시오
야사중에 많이 알려진 대동야승이란 책중에 기제잡기 역대 조정이 옛이야기 중에보면
“심온이 국구이므로서 의당 수상이 되어야 하는데,
수상은 직위만 높았지 맡은 사무가 없고.
좌상은 으레 이조.예조.병조판서를 겸임하며
우상은 으레 형조.호조.공소 판서를 겸임 하므로,
심온이 권세없는 것을 꺼려 꼭 좌상의 자리를 얻으려고 하였으니.
권세를 탐내 법을 무너뜨리는 뜻을 여기에서 알수 있습니다” 하였다.
위의 글을 보면 심온이 영의정이란 직위만 높았지 권세가 없음을 탓하며
태종의 심복이고 실세인 좌상 박은과 우상 유정현을 못마땅하게 여긴것 같다.
사임당님께 몇권의 책을 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 이덕일 지음 석필 출판사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박영규지음 들녘 출판사
다시 한번 더 올립니다만
조선일보 2006년 2월 18일에서
[이덕일 사랑] 태종과 외척들
국왕이나 왕세자의 장인을 ‘국구(國舅)’라고 하는데, 동반(東班) 정1품에 제수되는 척리(戚里)이
다. 왕의 외척(外戚)을 척리라고 부르는 이유는 한(漢)나라 때 장안(長安·서안)의 척리라는 마을에
임금의 인척(姻戚)들이 살았던 데서 기인한다.
조선의 척리는 품계는 높아도 정사(政事)에는 참여할 수 없었는데, 이런 원칙을 만든 임금이 태종
이었다. 태종이 부인인 원경왕후 민씨의 친동기 넷을 사형시킨 사건은 유명하다. 민무구·무질은 어
린 세자(양녕대군)를 끼고 권력을 잡으려 했다는 ‘협유집권(挾幼執權)’ 혐의로 처형했고, 무휼과 무
회도 그 연장선상에서 제거한 것이다.
태종은 상왕 시절 세종의 장인 심온(沈溫)도 제거했다. 영의정 심온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갈 때 전별하는 거마(車馬)가 장안을 뒤덮었다는 보고를 듣고 자신의 사후 세종의 왕권 강화를 위
해 제거한 것이다. 심온의 동생인 총제(總制) 심정이 상왕 경호 문제를 언급한 것을 역모로 몰아 죽
이고 심온까지 연루시킨 것이다. 이 비정한 외척 제거에 대해 이익(李瀷)이 ‘성호사설’인사문에서
“민(閔)씨·심(沈)씨 두 집안이 함께 흉화(凶禍)를 당하게 되었으니, 대개 먼 장래를 생각함이 매우
깊었던 것이다”라고 긍정했듯이 역사의 평가는 냉혹한 것이다.
이덕일·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
입력 : 2006.02.17 18:51 48'
역사에는 만약이란것이 없습니다
흔한 이야기로 크레오파트라의 코가 한치만 높았다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이란 역사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가설이고
만약 심온이 죽지않았으면 심씨가 더 흥했을 것이라고요. 꿈입니다.
청송심씨가 명가중에 명가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으나
다른 가문에서 인정해야지 자화자찬만 늘어 놓아야 욕만 됩니다.
아전인수격으로 자기유리한데로만 해석하는 논리는 곤란하지요,
진짜 명문가인 전주이씨. 안동권씨. 남양홍씨. 안동김씨.여흥민씨. 광산이씨. 청주한씨 등에서는
아무말 안해도 누구나가 다인정하는 한국제일의 명문가들입니다.
내가 자가발전한다고 한국제일의 명문가가 됩니까. 2006-05-08 오후 10:22:00
사임당
그렇죠, 이 논쟁은, 아마, 끝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도, 박태서님이 말씀하신 책들은, 이미, 다
읽어봤답니다....^^
그건 그렇고, 맨 밑에, 박태서님이, 진짜 명문가들이라고 하시면서, 열거하신 부분이 있는데, 안동
권씨, 광산 이씨, 청주 한씨는, 이 창에서, 4대 문형 가문이나 문중 8강, 4대 상신 가문 안에 들지 않
는데, 어떻게, 이 가문들을, 진짜 한국 제일의 명문가들이라고 하시는지, 박태서님의 고견을 듣고 싶
습니다....^^ 물론, 명문을, 문과 급제나 고위 벼슬만을 가지고 평가해서는 안 되겠지만, 이 창은, 4
대 문형 가문은, 거의 대제학만으로, 문중 8강은, 당상관만으로, 4대 상신 가문은, 거의 상신만으로
선정했습니다. 즉, 결국은, 고위 벼슬만을 가지고 선정한 것이지요. 한국 제일의 명문가라는 소리를
들을려면, 그래도, 여기에는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닐런지... 또한, 이 창의 운영자님께서, 문중 8강만
을 책으로 발간한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또한, 이 창에서는, 소단위 문중만을 따졌는데, 박태서님
이 선정하신 가문들은, 조선 전체적으로 따진 것인지요? 물론, 전주 이씨, 안동 권씨, 파평 윤씨, 청
주 한씨, 청송 심씨. 이 5가문은, 조선 전체로 따지는 것과 이 창에서처럼 소단위 문중으로만 따지
는 것이, 엄청나게 차이가 많이 난다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2006-05-12 오전 11:57:00
과객
허허허... 600년전 조상님들간의 원한이 그 후손들에게 아직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니 당황스럽습니다.
아니, 슬픈 생각이 듭니다. 정말 끈질기십니다. 그 원한 때문에 통혼도 하지 않는다니 더욱더 경악을 금
할 수 없군요. 종중 대표님들께서 만나 화해의 자리를 마련하시던지... 2006-10-18 오후 1:0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