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작은 꿈 외 12편
나의 고백은 고요한 작은 호수.
그 속에 한 소년이 어른이 되고파
작은 꿈을 키운다
어른이 되려면 마지막에 먹는다는
에덴 과일을 찾는다
소년아! 너는 모를 거다 거다
그 과일이 맛이 좋다 하더라만
그 맛 속에 죽음의 맛도 들어있단다
오, 소년을 애먹이는 과일이여!
오, 보기 좋은 유혹의 과일이여!
오, 행복을 비웃는 신기루의 과일이여!
소년아!
의지에 따르더라도
감정에는 속임을 당하지 말지어다.
고려자기의 비밀
한 젊은 도자기공이 오늘도 한탄한다
오늘도 한숨지으며 도자기를 굽는다
원망스럽소, 고려시대 조상들이여!
고려자기 청자의 거시기 색깔
비밀 보따리에 싸매고
왜 떠나셨나이까
후손들에게 기법 전수해주고
떠나간들 어디에 덧나나요
아, 고려자기 청자 비밀 애달프도다
아직도 무덤 속에서 안녕하신가요
오늘도 젊은 도자기꾼
조상 탓하며 고려자기 빚으며
오늘도 한탄만 하고 있다
굽던 도자기에 환청이 흘려나온다
젊은 도자기꾼이여, 오해를 풀라
우리가 안 가르쳐 준 게 아니라
젊은 그대들이 안 배워서 그렇다네.
어느 가을비 오는 날
가을비는 진종일 내리고
우수를 담은 낙엽들이
아스팔트 길 위에 뒹군다
아무리 착하려 해도 견딜 수가 없다
끓어오르는 격정이 사그라지지 않는 밤
쓴웃음으로 넘겨버릴 수도 없다
지난 세월의 이야기들이
찬바람 추풍 속에 스쳐간다
서로 주고받던 그 날의 옛 이야기들
추풍 속에 낙엽이 되어 스쳐간다
하찮은 관념의 시간에
미련을 낙엽처럼 버리지 못하고
그 옛날이야기들 슬픔처럼 토해낼 때
자책을 해봐도 지워지지 않는 흔적들이다
산산조각 흩어진 낙엽 같은 이야기들
누군가 낙엽으로 쌓은 성벽 위에
관념의 찢긴 깃발을 홀로 세운다
그 날의 함성을 깃발에 매달고
멍든 깃대에 맥박을 넣는다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나무는
청춘도 사랑도 다 마셔버리고
옛 시절 젊은 그들 이름도 다 잊어버리고
올 가을에도 낙엽을 떨군다
젊은 날의 함성들 젊은 날의 이야기들
이제는 낙엽 되어 성벽을 이루는데
가을비가 진종일 내린다.
가을 잎새
누가 너에게서 떠나려 한다
흐느끼는 한 점의 바람처럼
약속 한마디 남김도 없이 떠난다
가을 잎새들은
녹의를 벗고 홍의를 갈아입고
서로가 그저 뜬 구름처럼
서로 떠나보내고 헤어지려고 한다
가을 잎새들이여
저 허상의 날개 짓들을 보라
한 때는 즐거웠고 한 때는 슬펐지
너희가 만났던 일순 일순이
우연히 하나 둘 하염없이 떠나갔다
내년 피는 새 잎들은 너희가 아닐진대
너희는 내년에 새잎으로 만나자는
헛된 약속에 헛된 날개 짓을 하면서.
홍대 골목길
눈을 감고 나 홀로
홍대 앞 골목길을 걷는다
인해人海 속에 난 한 마리
피라미가 되어 버린다
바다 속의 인어를 사모하는
유선형 고기 떼들이 골목길로 밀려온다
잔챙이 고기떼 속에
인어 한 마리 섞여서 밀려온다
산호초 꺾으려 온 인어 한 마리
수압에 못 이겨 잡어들 난무 속에
동그라미 그리며 물 밖으로 솟는다
떼구르 구르고 솟구쳐 버린다
그만 그만 솟구쳐 버린다
전라의 맨몸을 보고
홍대 골목길 잡어들에게
큰 구경거리 났겠다.
침묵
야밤 중에 괘종시계가 종을 친다
고요히 잠든 나의 침묵을 깨어놓는다
침묵 속에 잠든 우아한
나의 생각들이여!
저 시계의 종소리에 깨어나라
아, 나의 침묵이여!
나의 마비된 침묵이여!
누가 그러했듯이
난 널 위해 성벽으로 삼고 싶다
오, 우아한 나의 생각들이여
나는 널 위해 철벽으로 삼고 싶다
우아한 생각들의 일부는
돌맹이가 되고
우아한 생각들의 일부는
밤하늘의 별들이 됐으면 좋겠다.
꿈속에서
나는 언제나 꿈속에서
빙빙 돌아가고 있다
수백 년 수천 년 동안이나
나는 도대체 무엇일까?
한 마리의 솔개인가
한 때의 회오리바람일까
부질없는 꿈속에서 보낸 시간
날마다 쓰레기처럼 쌓여간다
나의 꿈은 소박하다
이것은 이미 죽어버린 소년이
무덤 속에서 되찾는 작은 꿈이다
나는 꿈속에서 침묵을 꿈꾼다
침묵을 가지고 소년의 무덤 위를 덮는다
그대들은 침묵을 버리지 않아도 좋다
뒤이어 올 사람들이 소년의 무덤 앞에서
다시 침묵하게 될 터이니까.
한강 여름밤의 꿈
고달픈 여름에 황혼 빛을 먹여주면
한강은 머리를 숙이고 푸른 빛 멈추고
퇴색된 자신의 모습을 응시한다
젊음을 이미 다 떠나보내고
새 늙음을 싣고 한강 물결은 스쳐간다
그 물결 위 강변차도
자나가는 차량 엔진소리 요란하다
분별없는 자동차들의 소음
산발하는 헤드라이트
빛과 소리의 광란 쇼를 하는데
오늘 밤도 한강 둔치길 벤치 위에
잘 곳 잃은 한 젊은 커플
벤치를 침대삼아 마주 누워있다
열대야의 밤 열기 속에
잠 못 이루며 그래도 젊은 한 커플
여름밤의 큰 꿈을 꾸려하고 있다
아마도 그 꿈 개꿈은 아니겠지.
운명運命
너에게만 운運이 따랐지
잔꾀도 타고 났지만
승리한 너는 언제나
칭찬을 받는다
나에겐 그런 운運도 잔꾀조차 없었다
이젠 길을 묻고, 날자를 세고, 남은 여생
그럭저럭 술 마시며 보내고 있다
그러다가 나의 운이 지치면
승리한 너의 거대한 고독의 성벽 위에
나의 못 난 운을 앉히고
너의 승리한 운을 훔쳐보게 한다
이제 난 내 못난 운을 버리고
먼 길을 떠나려 한다
안녕, 잘 있거라
나의 못난 운이여
언젠가 주인 생각 떠오르면
운명의 배를 타고 오렴
황천의 부둣가에서
나의 운運과 나의 생명生命이
운명의 배를 타고
멀리 황천바다 함께 가자꾸나.
파도
푸른 얼굴과 하얀 웃음이
서로 으스러지게 포옹을 한다
구경하고 있는 난
갑자기 벌린 조개껍질이 되어 버린다
파도가 어둠 속에서 노래를 한다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삶이 있다.
안녕히
마비된 울분이 하늘에 어둠을 뿌린다
기한부 실의와 절망
하소연하는 너의 미담을 듣고
동료를 추억하는 우정
어둠 속에 씨앗이 움튼다
위안 받는 유예를 과시하는 연기를 하며
아, 이토록 비틀거리는 마음으로
어둠을 박차고 밤비를 맞는다
그녀의 얼굴 빛 속에 칼날진 시선을 꽂는다
등골에는 염분이 쫄아 서걱거린다
내 주변 둘러 싼
꽃들도 이미 씨방을 감춘지 오래다
안녕히!
안녕히!
안녕히!
어둠 속의 울분이
가한부 실의와 절망이
자기의 목소리로 인사하며
칠흑 암흑 속으로 굿바이
보이지 않는 손짓하며 떠난다.
기다림
행여나
기다림 속에 어제도 보내고
행여나
오늘도 기다림에 하루가 간다
그래도
잊을 수 없는 기다림은
속절없는 이내 가슴을 옥조여 간다
정녕코
오랜 날 정들여 온 기다림
차마 떨칠 수 없어
행여나
내일을 기다리는 작은 가슴은
포도 위에 비 젖은 낙엽처럼
사뭇 오늘도 애를 태운다.
겨울 첫눈
슬프도록
예쁜 첫눈이 아침부터 내린다
첫눈이 내린다
검은 죽음을 쥐잡듯이
움켜 쥔 흰 눈은
땅 위에서 떠나지 못한다
아무리 색칠해도 채색하지 않고
절망의 자막도 없이
맛보기 예고편도 없이
얼어붙은 동토凍土 위에
하얀 스크린 치고
겨울의 본 영화를
상연하려 하고 있다.
월산 이 상 완
전남 고흥 출생(1945), 수필가, 서울대 언어학과 졸(1974), 카이로 아메리칸 대학원 수료 아랍어 및 고대 이집트문화사 전공(1977∼1979), 미국 죠지타운 대학원 졸(이슬람문학 및 중동관계 전공)(1984∼1986), 주이집트, 주리비아, 주미대사관 및 주호놀룰루 총영사관 근무(20년),바로영어전문학원 경영(서울:992∼2012), 《한강문학》(2020) 추대등단, 한강문학 편집위원,저서:《사하라》(김영사, 1987), 현)향토사연구 및 SNS 블로거, 발표작품:〈조선시대 천재 이야기꾼-어우당 유몽인〉, 〈오리정에 묻힌 슬픈 로맨스-화가 나혜석 이야기〉, 〈한국 미술계 큰 별이 지다-화가 천경자 이야기〉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