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패산 정상에
전설 하나 만들어 새기고 오다
양승근
4월 14일 토요일 09시 45분, 산악회장과 부천역 홈에서 만나 1시간 30분 이상 전철을 타
고 약속된 망월사역 엄홍길 전시관에 도착해 보니 반가운 얼굴이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15분여 일찍 온 탓인가.
어차피 산행 시작 시점이 예정시간보다 훨씬 늦을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게 된 터라 마
음 바쁠 일이 없었지만 그래도 한 두 사람 정도는 나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없지 않
았었다. 하긴 부천 홈에서도 마찬가지이긴 했다. 인천 쪽에 거주하고 있는 친구들 중 적어도
서너 명 정도는 만나 함께 갈 수 있으려니 했으나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엄홍길 전시관)
하여 산악인 엄홍길 전시관 안으로 들어갔다. 히말라야 14좌 완등, 말하기로야 쉽지만 그
게 어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하루에 고작 너댓 시간 산행하면서 무릎이 어쩌네 장단
지가 어쩌네 하며 올라가네 마네 하는 우리네들 아니던가. 산행인, 아니 산악인 모두의 우상
이 되어 있는 엄홍길 대장의 기념관으로 들어서는 필자의 마음은 위압감에 앞서 숙연함이
먼저 들었다. 등반할 때 착용했던 각종 도구 및 필수품들이 가지런하게 진열되어 있었고 휘
날리는 태극기와 함께 엄 대장의 발 아래 정복 되었던 14좌 사진들이 당당하게 걸려 있었
다. 필자를 비롯한 범인들로서는 감히 꿈도 꾸어보지 못할 사진의 배경이었다.
(엄홍길 사진)
그러고 보면 오늘 이 전시관을 둘러보는 것으로 산행을 시작하는 것 자체가 참으로 큰
의미가 있겠구나 생각하며 둘러보는 것을 끝내고 나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고 고상돈 대장에 대해 회장과 잠시 이야기 나누는데 전시관과는 전혀 색다른 '태조
태종의 相逢地'라는 표지석이 눈에 띈다. 전시관 만큼이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표지
석이다. 웬만한 한국인이라면 다 알고 있을 '咸興差使'라는 낱말의 고리가 풀린 뜻깊은 장소
라는 얘기였다. 참고 삼아 그 내용을 적어보면 <조선 초기에 2차의 亂을 겪은 태조 이성계
는 정치의 뜻을 버리고 오랫동안 고향 咸興으로 은퇴, 無學大師의 끈질긴 설득으로 마침내
한양환궁의 길에 올랐다. 이때 태종은 부왕이 환궁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곳까지 친히 나와
서 맞이 했는데 그 상봉지가 殿座마을이 되었고 당시 이 곳에서 대신들과 政事를 논했다고
하여 議政府라는 지명을 얻었다. 이후 부자 상봉을 계기로 국운융성의 기틀이 마련 되었다>
였다. 실로 家和萬事成, 修身然後에야 治國平天下가 된다는 역사적 산 실증을 온몸으로 새삼
되새겨 보는 순간이었다.
그러구러 한참을 기다리니 산악회 안살림을 맡고 있는 총무 허은희와 언제나 듬직한 사
나이 김진백이 모습을 드러내었고, 할머니가 되어서도 아가씨입네 할 송영자와 송연섭(여),
멀리 고향에서부터 부랴부라 올라온 총동문 사무국장 이재성 친구와 재경동창 총무 안재임
과 회장 김경원, 그리고 힘깨나 쓸 법한 최기원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도착, 오늘의 산행 일
원이 다 집합된 시각이 예정시간을 훌쩍 넘어 11시 10분. 예전 참석인원이 적게는 2~30여명,
많게는 3~40여 명 안팎이던 것에 비하면 너무나 단촐한 인원이었다. 다음 산행 때는 많은
친구들을 볼 수 있겠지 하는 기대를 품으며 예정시간보다 1시간 이상 늦어진 시각에 우리는
산행을 시작했다.
(이정표:천문사 방향으로 가다.)
잠시 올라가다 보니 망월사와 포대능선, 그리고 천문사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우두
커니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사전에 답사한 친구(허은희, 안재임, 송연섭(여))의 안내
대로 천은사 방향으로 산길을 접어든 시각이 11시 20분. 과거 다른 산악회에서 망월사 방향
으로 산행 시작하여 송추계곡으로 내려갔던 기억을 더듬으며 뒤따라 걷는다. 겨울잠 실컷
자고 푸르게 피어나기 시작하는 낙엽수와 잎보다 먼저 피어 미안하고 수줍은 듯 다소곳이,
그러나 화려한 연분홍 진달래도 드문드문 피어서는 연인네 손짓인 양 뭇 사내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렇게 30여분 남짓 걸으며 풍광에 취해 가기 시작하는데 이정표에 0.2km라는 천문사
는 나타나지 않고 빨간색 플라스틱 표주박이 걸려 있는 이름 없는 약수터가 목을 축이고 가
라한다.
(물 맛이 어떻든?)
주변 어디를 둘러봐도 수질 검사를 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데 산악회장이 앞장서 약수물
을 받는다. 그러나 필자는 약수물 대신 준비해 간 생수를 마시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준비해 간 음료가 떨어졌다면 모를까 필자는 대체로 약수물을 애용하지 않는 편이다. 산행
하면서 약수물조차 마음놓고 마실 수 있는 곳이 그리 많지 않다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
다. 화사한 봄처녀 내음을 만끽하는 후각, 싱그러운 녹색의 편한함을 끌어 안는 시각, 나무
들 수액 오르는 소리를 들어내는 청각, 사랑하는 이의 살결을 보듬기라도 하듯 이 나무 저
바위를 어루만지며 느끼는 촉각 등, 대자연을 맛을 욕심스럽게 섭렵하면서도 오로지 약수물
마시며 느끼는 시원한 미각 만큼은 보류해야 하는 현실이니 어찌 아니 안타깝지 않을 수 있
으랴!
(누가 무슨 연유로 세워 놓은 비석일까?)
안타까움에 이어 대자연을 오염시킨 주범의 한 일원으로서 미안함을 금치 못하며 걷는데
난데없이 비석하나가 나타난다. '단군한백검'. 이게 웬 뚱딴지란 말인가. 아무리 주위를 둘러
보며 비석이 서 있어야 할 이유를 찾아 보았으나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자
연훼손'이라는 단어 밖에 떠오르지 않으니 어찌 하오리까? 필자의 안목이 깊지 못하고 넓지
못하고 높지 못한 탓이리라 스스로 자책해야 할 일인지조차도 모르겠다.
(분기 탱천 기암?)
점차 해발의 높이가 높아질수록 기암들이 다가오는데 그들 중 하늘을 향해 불끈 솟아오
른 바위가 눈길을 끈다. 내려다보이는 아래쪽에 산의 발등을 찍어가며 도심 가운데로 뻗어
가는 서울외곽순환도로 공사현장 때문에 솟아난 울화통의 징표인 것 같기도 해서 앞으로 개
통되면 그 도로를 이용하게 될 사람중의 한 사람으로서 미안한 마음이 아니 들지 않는다.
아마도 다음 산행 올 때 쯤에는 터널 모습의 허은 공사현장이 비록 눈 가리고 아옹할망정
생태터널의 모습으로 내려다보일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외곽순환도로 공사현장)
발등 찍힌 아픔을 가슴앓이한 것도 잠깐, 금새 자연의 형상에 취해 이런 저런 이야기, 방
뎅이(시집 가기 전 말 그대로 순수한 처녀의 거시기)가 어떻고 응뎅이(늘 사랑해 주는 서방
님이 곁에 있는 여인네의 거시기)가 어떻고 궁뎅이(할방이 있으되 구실을 못하거나 그나마
도 없는 할망의 거시기)가 어떻고 요런 조런 농담을 나누며 오르다보니 어느 새 12시 30분,
누가 이름을 붙였는지 모르나 저만치 보이는 바위가 미륵바위, 발치를 돌아 오른 바위가 곰
바위라고 먼저 답사를 했던 재임이 일러준다.
(미륵바위?)
그러나 필자가 잘못 짚었는지 모르지만 언뜻 보아 미륵바위 같아 보이지도, 곰의 형상을
닮아 보이지도 않는다. 아마도 보는 각도가 달라서 그렇겠지, 하여 산행기를 쓰면서 등산안
내지도를 보니 오호라 웬걸 미륵바위라 했던 자리 쯤에 '해골바위'라는 빨간 글씨가 눈을 붉
히고 있다. 미륵바위와 해골바위라! 글씨 숫자만 같을 뿐 너무나 엉뚱하다. 아니 미륵이 해
골이요, 해골이 곧 미륵이라던가? 부처가 곧 중생이요, 중생이 부처라는 말이 있드시 말이
다. 그러나 어쩌면 이도 저도 아닐지도 모른다. 재임이 제대로 일러주었는데 필자가 잘못 받
아 들였을지도 모르고 등산 안내지도상의 해골바위와 실제의 미륵바위의 위치를 잘못 일치
시켰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령 잘못 판단 했으면 또 어떠랴! 미륵바위든 해골바위든 모
두가 다 바라보는 사람의 관점에서 비롯 되었을 뿐인 것을.... 전자로 보이거나 후자로 보이
거나 그 바위는 그 바위 모습 그대로 천 년 만 년 뭇 산행인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
을 것인 것을.......
어쨌든 눈요기를 해준 기암에 감사하며 먼저 올라(곰바위)가 있는 경원이를 따라 오른다.
일부 친구들은 그냥 더 오르자 하는데 경원이는 아예 널찍한 너럭바위 같은 곰의 옆구리에
은빛 돗자리를 펼치며 쉬어가자 한다. 하나 둘, 따라 올라 다들 동참한다. 자연스레 각자의
배낭에서 가지고 온 것들을 꺼내놓는다. 산행 시작 전에 나누어 받았던 은희표 김밥에 꽁꽁
얼려온 대봉시에다 오이, 간밤에 서방님과 함께 술추렴을 한 덕분인가 따끈한 북어국까지,
그리고 재성이의 고향표 왕쑥송편이 박스째 나오고, 더불어 필자도 직접 담가온 알콜 도수
낮은 매실주를 내놓아 분위기를 돋웠다.
(기원이가 제일 맛나게 먹는 거 같다?)
어릴 적 그때 그 시절의 세월로 거꾸로 돌아간 듯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가볍게 아침 겸,
점심 겸 요기를 하고 다시 산행을 시작하는데 필자와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까이 오르
던 기원이 뜻밖의 말을 꺼낸다. 발목에 2개, 골반에 4개의 철심을 박고 산행하는 탓에 쉽게
힘들 때가 있노라고. 오토바이 사고 탓이라 한다. 그런 몸으로 힘든 산행까지 감행하는 용기
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토바이 사고 하면 필자도 낯이 설지 않다. 실제 필자도 당해
보았기 때문이다. 기원이처럼 철심은 박지는 않았지만 입 주변, 특히 인중이 걸레처럼 되었
던 터라 한 때 콤플렉스까지 생겼을 정도였었다. 사람과의 대화 도중 자신도 모르게 슬그머
니 인중으로 손이 올라가는 습관이 생겼던 것이다. 성형외과에서 한 차례 레이저 수술을 받
았음에도 아직도 상처의 느낌과 흔적이 남아 있어 가끔 필자를 우울하게 할 때가 있다. 몇
해 전 작고한 바 있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03위 성인 추대식(?)을 거행하기 위해 우리
나라에 방문, 김포공항에 내려오자마자 공항 대지에 키스하는 장면이 TV에 방영되었었는데
그 딱 일 주일 전, 우리나라 땅덩어리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필자가 먼저 오토바이 주행
중 승용차와 충돌하여 헬멧을 쓴 채로 강동대로에 너무나 찐한 뽀뽀를 한 덕택(?)에 생긴
훈장 아닌 훈장인 셈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평생을 함께 가야 할 상처, 아니 보듬고 껴안아
야 할 훈장, 이제 편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또 그러고 있다. 친구야, 기원이 친
구야. 자네도 골다공증 미리 예방했다 손치고 철심과 친구가 되어 생활하게나. 긍정적인 삶
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암이란 고약한 병도 낫게 할 수도 있다지 않던가.
(오호 통재라!)
아픔을 이야기 한 탓인가. 뿌리가 온통 드러난 채 등산로 한가운데에 힘겹게 서 있는 나
무가 눈에 띈다. 아니 드러내서는 안 될 치모를 보여주고 있게 되어 몹시 부끄러운 양하는
듯하다. 산이 좋아 산을 즐기러 온 마당인데 그 드러난 뿌리를 밟고 지나가야 하는 게 너무
안스럽고 미안하다. 필자는 조심조심 뿌리가 닿지 않도록 뿌리 사이사이에 발을 디디면서
또 미안한 생각이 든다. 밟힌 등산화 바닥에 의해 더욱 뿌리가 드러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싶어서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필자는 이 기회에 산을 관리하는 관계기관에게 한 가지 제안
하고 싶다. 나무에 이름을 붙여 명찰을 걸어 놓은 다음 흙이 담긴 봉투 하나씩을 등산로 입
구에서 산행인에게 나누어 주면서 명찰 붙여진 나무를 발견하거든 드러난 뿌리에 가지고 올
라간 흙을 쏟아 덮어 주도록 하는 행사를 하도록 말이다. 아마도 그리하면 산이 좋아 산을
찾은 사람들로서 거부할 사람이 없을 것이고, 또한 등산객들로 하여금 산을 사랑하는 마음
을 더욱 고취시킬 수도 있게 되어 자연을 보호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이다. 기왕
내친 김에 필자의 휴대폰 전화번호부에 기록된 숫자 몇 개를 이 산행기 안에 적어 놓아야
겠다. 우리 어깨동무 친구들도 산행 도중 재선충으로 의심되는 소나무나 잣나무를 발견하게
되면 <<산림당국 (1588-3249)나 산림병해충방제팀 강성도 사무관(042-481-4076)>>을 휴대
폰 전화번호부에 저장해 놓았다가 신고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싶어서다. 소나무의 에이즈라
불리는 재선충의 확산을 막지 못한다면 아마도 애국가의 가사를 바꾸어야 할지 모르지 않겠
는가.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을 <남산 위에 저 스모그 구름모자 두른
듯~~~~~>으로 말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우리는 소나무는 물론 다른 나무라도 잘 가꾸고 보
호해야 하리라. 한데 현재 남산에 소나무가 과연 몇 퍼센트나 분포되어 자라고 있을까?
암튼 요기를 하고 오르기를 1시간여 남짓, 12시 35분에 우리의 어깨동무들은 산불감시초
소가 있는 능선에 도착한다. 왼쪽 포대능선 방향으로 각각의 봉들이 멀찌감치 보인다. 누가
누구랄 것도 없이 다들 아는 대로 한 마디씩 한다. 앞쪽 것이 자운봉고 뒤쪽으로 보이는 것
이 신선대와 만장봉, 선임봉 운운. 멀리 백운대가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 보이는 것 같
기도 하고... 그러나 오른쪽 오봉능선 끝쪽에 있는 봉우리는 오봉임이 분명할 터인데 이름처
럼 다섯 개의 봉우리로 보이지는 않는다. 오봉의 오른쪽 송추남능선 중간 지점에 보이던 봉
에 대해선 누구 한 사람 말하는 사람이 없다. 확인해 보니 여성봉이다. 북한산, 도봉산, 사패
산 모두 한 몸으로 이루어진 산이면서 각자 위치에 따라 이름을 달리 하는 산, 그 산들 중
각 봉들이 하나같이 암봉(陽山)들인데 비하여 여성봉 만큼은 음산(陰山), 즉 여성성을 닮은
육산(흙산)이어서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인가? 언제 송추남능선을 타면서 확인해 보아야 겠
다.
5분여 쯤 산의 능선과 그 능선의 너울들을 감상한 후에 우리는 사패산을 향해 사패능선
을 탔다. 오른쪽 계곡이 회룡골, 왼쪽의 송추남능선과 북능선 사이의 긴 송추계곡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아니 눈바래기로 끝내주는 게 아니라 이 송추계곡은 시원한 청각과 촉각을
선사해 주고 있다. 계곡을 타고 올라오는 시원 바람이 나무가지와 솔잎을 스치는 소리로 필
자의 볼과 목덜미를 휘감고 능선을 넘는다. 어느 시인의 표현으로 인해 명명된 바 있는 '솔
솔바람', 필자가 직접 그 솔솔바람이 되어 온 산을 껴안고 유유자적하다가 뭇 산행인을 만나
면 그 산행인의 숨찬 땀을 식혀주고 남은 열정을 모아 풋풋한 여인네의 가슴 속으로 스며들
어 보고 싶기도 하다. 이는 비단 필자만의 욕심일까?
(자라를 업고 있는 가슴 따뜻한 바위)
(업힌 자라 끌어당겨 놓다)
사패능선을 걸으며 자라를 업고 있는 가슴 따뜻한 바위도 만나 일별을 주고, 마침 해충
한 마리 낚아 채는 순간을 보여주는 듯한 거대한 두꺼비도 디카에 포착하며 아마도 이 두꺼
비는 해충 아닌 익충은 결코 잡지 않으리라 여겨본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께 새집 다오)
긴 산행에 힘이 부친 일부 친구들이 사패산 정상을 밟아 보고 싶으면 앞서 간 친구들을
따라잡으랜다. 원래 애초에 회룡골로 내려갈 계획이었는데 그보다 범골능선으로 내려가는
게 나을 것 같아 그 초입에서 기다리겠단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지 않느냐
는 휴전선 150마일에 관련한 노은상 시인의 싯귀가 떠오른다. 당연지사, 범골능선 갈래길에
서 바로 눈 앞 15분 거리에서 눈바래기로 고지를 남겨 두고 그냥 돌아 내려갈 수는 없는
법, 하여 앞서 간 친구를 따라잡기 위해 허위허위 잰 발걸음을 놓는다. 허나 이게 웬걸, 빠
른 걸음으로 얼마를 걷지도 못했는데 서너 시간 걸려 걸어온 것보다도 더 힘이 든다. '산에
서의 자만은 금물'이라는 경귀를 온몸이 체득하고 있는 순간이다. 그나마 다행히 험하지 않
은 능선길이어서 앞선 친구들을 따라잡고 보니 금새 552m의 사패산 정상이다. 14시 30여
분. 정상에 오르는 순간, 아! 이래서 정상에 서기 위해 산악인들이 목숨까지 담보하며 오르
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사패산! 백두대간 추가령지구대에서 뻗은 한북정맥으로 이남의 산행 지도에는 나와 있지
도 않은 백암산, 철책과 인접해 있어 일반인은 접근 불가한 적근산과 대성산(1175m), 경기
도 포천과 강원도의 경계를 이루는 곳에 위치한 광덕산(1046m), 그 남동쪽으로 능선 5km
지점에 솟아오른 백운산(904m), 국망봉을 거쳐 경기 5악의 하나인 운악산(936m)을 이루고
도봉산에 이르기 전에 솟아 오른 사패산(賜牌山). 동쪽으로 수락산, 서남쪽으로 도봉산을 끼
고 안골계곡과 고찰 회룡사를 안고 도는 회룡계곡 등 수려한 자연공간들이 숲과 기암들로
어우러진 산. 조선시대 선조의 여섯째 딸인 정휘옹주가 유정량에게 시집 올 때 선조로부터
하사 받은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가만, 여기서 잠깐 한 가지 생각하고 넘어가
자. 선조가 이토록 인심이 후해서 나라를 통째로 바다 건너 왜적에게 넘겨주려 했던가? 그
렇지 않고서야 어디 민초들 만인의 산을 자신의 딸 결혼 선물로 하사한단 말인가. 왕이라
하면 만인의 표본이기에 모범을 보여야 할진대 자식의 입장으로서 난감하기 그지 없게 만든
임금의 대표적인 사례가 선조가 아니었던가. 선조 59세이고 광해군이 29살일 때 19살 먹은
어린 계집을 마나님으로 삼았으니 29살 광해군으로서 19살 어머니가 과연 어머니로 받아들
여졌을까? 물론 그 시절 제도가 싸가지(?) 없는 제도였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아무
리 그래도 왕이면 왕의 처신이 있는 법이거늘......... 각설하고..........
(안내판 사진 설명과 뒤쪽의 실제 사진을 잘 비교하여 보시길...)
포대능선과 사패능선으로 갈라지는 곳에서 바라보았던 실루엣의 각종 봉들이 바로 나 여
기 있소, 하는 것마냥 한 눈에 보인다. 더구나 각종 봉들을 쉽게 알 수 있도록 안내판이 방
향까지 잘 조준되어 설치되어 있다. 안내판과 아울러 실제의 봉과 봉이 연결된 실루엣에 맞
춰 사진을 찍다 보니 저 아래 거대한 바위 비탈을 내려가는 연인(?)이 있다.
(세월의 역사와 전설이 담긴 승천바위(?) 끝의 연인(?))
요즘 시절에는 성냥팔이 아줌마(?)도 보디가드를 세우나? 한데 연인이 앞서 내려간 3~40
도 경사진 거대한 바위는 예사 바위 같지가 않아 보인다. 천 년 만 년, 아니 억겁의 세월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비가 올 적마다 빗물이 내려가느라 바위 표면에 깊은 골이
패여 있는 것 같다. 마치 개펄에 골이 생겨 있드시...... 이참에 한번 전설을 하나를 만들어
볼까! 회룡골에 살던 수백년 묵은 구렁이 수십 마리가 어느 날 하늘이 구멍난 듯 쏟아지는
빗줄기를 타고 하늘에 올라 용이 되고자 사패산 정상으로 올라온다. 일부는 빗줄기를 타고
승천하여 용이 되지만 일부는 송추골로 추락하고 만다. 하여 회룡골은 용으로 승천한 뱀이
살았다 하여 회'룡'계곡이라 하고, 그 반대편 송추골은 구렁이가 살던 회룡골에서 범골능선
너머 안골에 살던 유혈목이(花蛇)의 미모에 빠져 외도하느라 내공 쌓기를 게을리한 탓으로
승천하지 못한 채 추락하여 송'추'계곡이라 하였으며, 사패산 정상의 움푹 패인 바위 골은
수백년 쌓아온 구렁이의 내공에 의해 승천하는 순간 생긴 흔적이어서 그 바위를 '승천바위'
라 한다는 말이 수수만만 년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한다. 흐흐, 이만하면 그럴 듯한 전설이 될
수 있지 않을까나? 이에 동의 한다면 사패산의 줄사자가 '賜'가 아닌 뱀사자 '蛇'여야 하는데
선조의 하사품이란 뜻의 賜牌山임이 아쉬운 것에도 동의해야 하리.
(오랜동안에 걸친 빗물 자국일까, 전설에 얽힌 자국일까.)
(정상정복 팀)
정상을 뒤로 하고 하산하여 범골능선으로 내려가는 갈래지점에서 휴식하며 요기를 하고
있는 일행과 다시 만난 시각이 14시 50분, 정상 정복(?) 팀도 합세하여 요기를 끝내고 길을
재촉, 잠시 내려가는데 저만치 솟아 있는 바위를 보며 우리의 어깨동무 한 여인(누구인지는
알고 있으나 여기서는 밝히지 않기로 한다)이 말하기를 '아무개(함께 한 어깨동무 중 한 사
람) 젖꼭지 같지' 않느냐 한다. 듣고 보니 그럴 듯하다. 모두들 흉허물 없이 웃은 것은 필연
적, 웃다가 미처 사진 찍는 것을 놓치고 지나쳐 다른 친구들에게 보여줄 수 없음이 아쉽다.
대신 산을 함께 하지 못한 친구들은 주변에 피어 있는 진달래를 보면서 상상해 보면 되지
않을까?
(바위절벽에서 자라 피어 있는 진달래.
피기 전의 꽃봉오리와 피어 있는 5엽 꽃잎, 필자와 생각이 같을지 어떨지!
바위절벽에 핀 진달래를 보니 4구체 향가가 헌화가가 생각난다.
실명노인이 절벽에 핀 꽃을 꺾어다 수로부인에게 바쳤다는 꽃이
철쭉이라는 말도 있고 진달래라는 말도 있는데 필자의 생각에는 아마도
진달래가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철쭉은 먹을 수 없는 개꽃이고
진달래는 먹을 수 있는 참꽃이기
때문이다. )
어깨동무 한 여인의 그 우스개 소리로 인해 더불어 필자가 생각해 본 바로는 피기 전의
진달래 꽃봉오리가 마치 한껏 거시기해서 도드라진 여인네 젖꼭지 같고, 활짝 핀 꽃잎은 그
진홍빛 젖꼭지의 젖꽃판 같기도 하고, 부끄러운 듯 수줍기만한 여인네의 연분홍 치마 같기
도 하다 이거야! 그 추운 겨울, 옷을 입고 있지 않던 거개의 낙엽목들이 봄이 되면 푸른 옷
을 먼저 입는데 반해 수줍음 많이 타는 진달래는 어인 일인지 황망하게도 발가벗은 채로 진
홍빛 젖꼭지에 한껏 물을 올린 연후에 연분홍 치마를 며칠 입었다가는 그마저 벗어버리고
나서야 푸른 옷으로 갈아 입지 않드냐 이거야! 친구들이 생각하기에 아님 말고 ㅎㅎㅎㅎㅎ
ㅎㅎ.......
(바위 비탈에서의 단체사진)
(용 발자국?)
바위 비탈에서 굵직한 와이어로 된 난간을 부여잡고 마침 뒤따라 오던 이름 모를 여인네
(여인네여, 두고 두고 범골능선 음기 받으시라!)에게 부탁하여 모처럼 단체사진을 찍고 좀더
내려가다 또다시 거대한 기암과 마주하게 되는데 미리 답사한 바 있던 재임이 움푹 들어간
자리를 가리키며 용 발자국이랜다. 허, 이런! 사패산 정상 승천바위에서 승천하기 전에 용이
되었단 말인가? 안골 유혈목이와 회룡골 구렁이의 사랑이 승화하여 정상으로 가기도 전 이
곳에서 승천한 것인가? 까짓 아무려면 어떠랴! 보기에 신비스러움을 더하고 산행인들로 하
여금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도록 해 줄 수 있으면 그뿐.
(능수벗꽃, 한데 아쉽게도 사진이 쪼가 흔들렸나 보이)
회룡골 매표소(올해부터는 매표하지 않음)에 도착하니 16시 14분, 축 늘어지면서 흐드러
지게 피어 있는 능수벗꽃이 오늘 산행하느라 수고 했사와요, 치마자락 살포시 들어올리며
인사하는 듯하다. 한데 그 벚꽃 이쪽 저쪽을 지나가는 무지막지한 구조물이 눈살을 찌프리
게 한다. 산행하면서도 본 바 있던 외곽순환도로 건설 현장이다. 솔직히 도로가 생기면 편하
게 이용할 사람중에 한 사람이면서 자연 경관을 해치며 건설되는 현장을 보니 자연에게 미
안하고 안타까울 따름이다.
(뒤풀이를 한 '산에 산' 오리고기 전문점)
회룡천을 오른쪽을 끼고 잠시 내려가다 역시 오른 쪽으로 꺾어 답사 팀이 힘들게 찾았다
는 '산에산-유황오리전문점'에서 유황오리 로스와 훈제를 곁들인 산행 후의 뒤풀이로 5시간
여의 산행을 마감한다. 자고로 쇠고기는 어쩌다 공짜로 생기게 되면 적당히 먹을 일이고, 돼
지고기는 공돈 생기거든 사 먹을 것이며, 닭고기는 공짜돈이 아닌 쌈지돈으로라도 사 먹어
도 괜찮고, 오리고기는 쩐이 없으면 빌려서라도 사 먹을 만한 이유가 충분하며, 멍멍탕 만큼
은 과부 변돈을 얻어서라도 사 먹으랬다고 하는 말이 있는데 프랑스의 늙은 여(배)우 브리
지트 바르도의 영향인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먹기를 역겨워 하는 사람이 있으니 영양
학적으로 볼 때 안타까울 뿐이로다! 한데 그 오리고기 뒤풀이 값을 산행회장인 칠회가 한턱
쏜다고 하는 게 아닌가. 하니 회비조차 예고한 기본 회비보다 좀 적게 걷으라면서 그 돈은
후일 장거리 산행할 때 쓰자 한다. 참으로 순수한 우리 어깨동무의 회장이 아니고는 그와
같은 마음 씀씀이가 우러나오기 쉽지 않은 일이나 필자의 개인 의견으로는 어느 개인 한 사
람이 쾌척하는 것보다 항상 추렴하여 지출하는 것이 개인이나 전체를 위해서도 훨씬 낫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산행 참석하지 못한 친구들 부럽제?)
(뒤늦게 참석한 선구와 상일이, 그참 웃음 이쁘네. 그려 웃어라이! 웃음이 보약인 게여!)
어쨌든 쩐을 빌려서라도 사 먹어야 할 판인 마당에 공짜로 먹게 생겼으니 산행 뒤끝이
아니래도 분명 입에 착착 달라붙을 터인데 개인 사정으로 산행을 참석하지 못했던 김상일이
와 김선구가 등장해 더욱 괴기 맛을 돋구워 주었다. 모처럼 만에 남자 여섯에 여자 6명을
이뤘으니 어째면 딱 알맞겠다는 둥 우스개 소리도 양념으로 쳐지고 재성이의 모교 소식도
전해진다. 개교 50주년을 기념한 홈 커밍 데이, 즉 모교 방문의 날에 우리 14회가 최다 참가
상을 타 보도록 하자는 말과 함께 그동안 모금운동을 벌였던 학교 발전 기금의 운용 내역을
상세히 소개하는 과정에서 희망의 깃발 나부끼는 이야기도 곁들여 진다. 스쿨버스를 운행하
고, 원어민 교사를 배치하여 영어를 가르치고, 밤샘 독서 교실을 운영하면서 독서 토론과 함
께 논술 지도까지 하다보니 멀리 천안권에서조차 참가 신청이 있을 정도로 성황리에 운영중
이다 보니 폐교 대상으로 지정될 때의 학생수 68명보다 늘어 현재 74명이 되었다는 희망찬
가다. 이 노래 아닌 노래는 괴기 맛을 더욱 맛나게 해 주었고 아직 못내서 미안하다며 현
총동문회의 사무국장이며 14회의 실질적인 살림꾼 재성이에게 수표를 건네는 친구(아직 모
금에 동참한 면면을 공개하지 않은 터라 여기에서도 실명을 쓰지 않았음을 양지해 주기
를...)도 있다. 이 얼마나 멋진 광경이고 모교를 사랑하는 흐뭇한 정리가 아니던가.
친구들아, 홈 커밍 데이에 많이들 참석하여
우리 모교의 발전에 불철주야 고생하는 동문들에게 힘을 실어주도록 하고
또한 모교의 미래에 우리 14회가 희망의 불씨를 지필 수 있도록 하자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