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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 碑誌類산문의 일고찰
1)서정화*
1. 머리말
2. 綱領을 통한 주제의 집약화
3. 서사의 간결성 추구
4. 절제와 함축을 통한 悲感의 강화
5. 맺음말
참고문헌
1. 머리말
碑誌類1)는 무신집권기에 와서야 활성화 되었던 送序ㆍ論ㆍ說ㆍ假
傳등의 體式에 비해 비교적 이른 시기인 고려 전기부터 꾸준하게 창작되어 왔던 문류이다.
이규보 이전의 비지류, 곧 고려 전기의 비지류는 지금까지 115편2)이 전하고 있다.
고려 시대의 작품이 전반
* 경북대학교 강사.
1) 이규보는 11편의 비지류를 창작하였다.
「登仕郞檢校尙書戶部侍郞行尙書都官員外郞賜紫金魚袋尹公墓誌銘」,
「金紫光祿大夫參知政事上將軍金公夫人印氏墓誌銘」,
「金紫光祿大夫參知政事判禮部事鄭公墓誌銘」,
「金紫光祿大夫守司空尙書左僕射太子賓客田公墓誌銘」, 「殤子法源壙銘」(이상 5편,
전집 권35); 「京山府副使禮部員外郞白公墓誌銘」, 「銀靑光祿大夫尙書左僕射致仕庾公墓誌銘」, 「壁上
三韓大匡金紫光祿大夫守大保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修文殿大學士判吏部事
致仕琴公墓誌銘」, 「銀靑光祿大夫樞密院使御史大夫李公墓誌銘幷序」
(이상 4편, 전집 권36); 「檢校軍器少監行尙書工部郞中賜紫金魚袋吳君墓志銘幷序」,
「故朝議大夫司宰卿右諫議大夫寶文閣直學士知制誥賜紫金魚袋李君墓誌銘幷序」
(이상 2편, 후집 권12) 이외에도 전집 권35에 塔碑銘2편이 있다.
2) 高麗墓誌銘集成(金龍善編著, 한림대출판부,
2006)에는 고려전기 110편, 무54 민족문화연구 제47호
적으로 영성한 사실을 감안하면 이례적일 정도로 많은 작품이 현전
하는 셈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다른 체식의 작품들이 전쟁이나 다른 여타의 이유에 의해 쉽게 일실되기
쉬운 반면 돌에 새긴 비지류는 상대적으로 후대까지 오래도록 보존될 수 있는 특성 때문이다.
또한 비지류는 삼국시대부터 창작될 정도로 연원이 깊고,3) 최치원
이 ‘四山碑銘’을 창작한 이후 승려들의 浮屠碑[塔碑]를 세우는 것이
활성화 되었는데, 고려 전기의 문인들이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은
것 역시 그 요인이 아닐까 한다.
무신집권기에 이르러 한문산문의 여러 體式들이 창작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거니와 특히 비지류의 경우, 전대의 다양한 성과가
있었던 만큼 체식의 특성에 대한 인식 또한 비교적 명확하였던 것
으로 보인다. 이규보는 비지류의 엄정성4)에 대해 명확하게 인식하
고 있었고, 대상 인물의 주요 사실 이외의 부수적 사건에 대해서
과감하게 생략하는 詳略5)의 기법 역시 미약하게나마 인식하고 있었
다.
비지류는 주로 대상 인물에 대한 객관적 사실을 생애에 따라 나
열하면서 稱譽로 일관하는 것이 일반적 서술 경향이다. 하지만 주
신집권기 86편, 고려후기 98편, 연대미상 13편, 증보 19편 등 325편이 수록되
어 있다. 연대미상을 제외하고, 증보에 있는 19편을 각 시기별로 비정하면 고
려 전기가 5편, 무신집권기가 8편, 고려 후기가 6편이다. 이를 본 편수와 합하
여 고려시대 비지류 작품을 개관하면 대략 고려 전기 115편, 이규보 당대인
무신집권기 93편, 고려 후기 104편이다.
3) 고려 시대 이전의 비지류로 「冬壽墓誌」(357년 경), 「鎭墓誌」(408년), 「牟頭婁
墓誌」(장수왕대), 「貞惠公主墓誌銘」(발해), 「貞孝公主墓誌銘」(발해)이 남아 있
다. 이정임(1995), 19쪽 각주 27번 참조.
4) 「登仕郞檢校尙書戶部侍郞行尙書都官員外郞賜紫金魚袋尹公墓誌銘」, 全集 권
35, 총간 2―67쪽, “予爲文, 至碑ㆍ碣ㆍ銘ㆍ誌, 苟不誠其人信其實, 固拒而不
受.”
5) 「銀靑光祿大夫樞密院使御史大夫李公(勣)墓誌銘幷序」, 全集 권36, 총간 2―
78쪽, “凡歷官內外, 其淸廉礪節與夫興利除害者, 不可勝紀. 然以公之忠義勇烈
功業之卓然者言之, 此則公之細也, 故於此不具焉.”
이규보 碑誌類산문의 일고찰 55
어진 조건을 무미건조하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한다면 이는 문
학적으로 저평가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비지류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지녔던 이규보가 대상 인물을 부각시키기 위해 어떠
한 기법을 구사하고 있으며, 또 그 성과는 무엇인지 구체적 작품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다.6)
2. 綱領을 통한 주제의 집약화7)
비지류에서 서두를 서술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8) 본고
에서 주목하는 것은 의론적으로 서두를 전개하는 방식이다. 서두를
어떠한 방식으로 서술하느냐가 비지류의 문학성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지만, 작가는 규범성이 강한 비지류를 창작하면서 대상 인물을
부각시키기 위해 나름의 방식을 채택하기 마련이다. 이규보는 11편
의 비지류 젓에서 5편을 ‘의론형’으로 서술하였는데,9) 전대의 작가
들이 흔히 사용하지 않던 방식을 채택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
6) 이규보의 비지류를 단독적으로 다룬 연구 성과는 없다. 다만 한국의 비지류
또는 고려 시대의 묘지명을 다루면서 이규보의 작품을 분석한 사례로 李貞任
(1995)과 黃義洌(1996)의 연구가 있다.
7) ‘강령을 통한 주제의 집약’은 뒷항에서 전개할 ‘詳略’에 포함될 소지가 있지
만, 이규보의 비지류에서 이 기법이 차지하는 비젓이 크기 때문에 본 항에서
독립시켜 다루도록 하겠다.
8) 李貞任(1995) 17~26쪽 참조. 일반적으로 대상 인물의 부인이나 자식이 와서
비지를 청탁하는 경우를 서술하는 경우가 있고, 대상 인물의 죽음으로 시작
하여 그의 가계와 이름ㆍ자호 등으로 서술하는 경우가 있으며, 대상 인물의
주요한 일화로 시작하는 경우가 있으며, 대상 인물의 치적이나 인물됨에 대
한 총평을 의론적으로 서술하는 경우가 있다.
9) 물론 의론적으로 서두를 전개하는 방식이 고려 후기를 지나 조선 시대에 오
면 일정 정도 일반적 경향을 띠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의의를 간과하거나 홀시
할 수 있지만, 산문사에서 비교적 초기에 자리 잡고 있는 이규보가 이 방식
을 채택하여 훌륭한 작품을 남겼다는 점을 감안하면 분명 그 가치를 새롭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56 민족문화연구 제47호다.10)
이규보 비지류의 의론적 서두 전개방식은 유종원이나 소식의 영
향11)을 받았음을 부인할 수 없지만,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탑비명
의 서술 방식이다. 최치원의 「四山碑銘」부터 고려시대에 창작된 50
편의 塔碑銘젓 40편12)이 의론적으로 서두를 전개하고 있으며, 이
규보가 창작한 2편의 탑비명 역시 이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따라서 의론적으로 서두를 전개하는 방식은 탑비명의 영향이 컸고, 이를 간헐적으로 실현한 것이 고려 전기의 몇몇 작가들이며, 의론 부
분을 보다 구체화시키고 또 다수의 작품을 창작하여 이 방식을 정
립시킨 것은 이규보임을 알 수 있다. 비지류는 의론보다 서사가 강
한 문류이다. 물론 대상 인물을 부각시키기 위해 의론을 삽입하는,
곧 의론과 서사의 착종을 통해 작품의 단조로움을 없애고 긴장감을
제고시키는 역할을 하기 위해 의론을 적절하게 안배하기도 하는데,
이규보는 의론을 삽입하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이를 전면에 포
치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1] 선비가 아직 현달하지 않았을 때는 조정 대신의 출처나 거취에 대
해 힐난하고 따지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자신이 그 위치에 있게
되면 자신이 하였던 말처럼 행동할 수 없게 된다. 하물며 관직이 높
으면서도 뜻은 더욱 낮추고, 부귀하면서도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진실로 고금의 어진 사대부들도 하기 어려웠던 것이니, 조잘대며 힐
10) 고려시대의 묘지명은 325편이 현전하고 있는데, 의론형 비지류는 고려 전기
5편(총 115편), 이규보 당대인 무신집권기 13편(총 93편), 고려 후기 18편(총
104편)으로 총 36편(이규보 5편)이다.
11) 비지류의 서두를 의론으로 시작하는 것으로, 柳宗元의 「唐故給事中皇太子侍
讀陸文通先生墓表」ㆍ「亡友故秘書省校書郎獨孤君墓碣」이 있다. 또한 성격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蘇軾의 「潮州韓文公廟碑」ㆍ「淮隂侯廟碑」에서도 이 방
식을 구사하고 있다. 그러나 유종원이나 소식의 경우 수십 편의 비지류 젓에
서 이 방식을 채택한 것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비지류에 뛰어났던 한유
와 구양수가 이러한 방식을 사용한 작품은 아예 없다.
12) 李貞任(1995), 26쪽.
이규보 碑誌類산문의 일고찰 57
난하고 따지던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
렇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나는 복야부군 전공에게서
이것을 보았다.13)
[2] 예로부터 사대부들은 처음에 廉恥ㆍ操心ㆍ자만[滿盈]으로써 경계를
삼지 않음이 없었지만 한창 부귀해지면 대개 흘러가는 세월을 아까
워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물러날 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우리 복야부군은 이것과는 크게 다르다. 나이 64세에 이미 大臣의
반열에 올랐다면 정승과의 거리가 몇 資級밖에 되지 않으니, 그 지
위에 오를 수 있지 않겠는가? 다만 6년 전에 물러나 넘치는 총애를
피하였을 뿐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오래전에 이미 가장 높은 반열에 오르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주역에서 말한 ‘나아감과물러남, 살고 죽음을 알아서 그 바름을 잃지 않는 자’라는 것에 해
당할 것이다!14)
[3] 대저 하늘이 베풀 때에 뿔을 준 것에는 날개를 붙여주지 않았다. 그
러므로 선비 젓에 장원으로 급제한 자에게는 높은 관직에 이르게
하는 경우가 드물다. 공은 그렇지 않아서 이미 과거에 장원으로 급
제하였고, 또 승상의 귀한 지위에 올랐고 장수까지 하였으니, 영화
로움의 처음과 끝 모두 부족한 것이 없었다. 이것은 어찌 얻은 것이
없다고 해서 그렇게 된 것이겠는가? 아마도 반드시 하늘이 부득불
두텁게 할 자가 있다면 비록 취한 것이 많을지라도 하늘이 주고서
도 싫어하지 않아서 일 것이다.15)
13) 「金紫光祿大夫守司空尙書左僕射太子賓客田公墓誌銘」, 全集 권35, 총간 2
―69~70쪽, “夫士方未顯, 喜議駮朝廷大臣之出處去就, 及身居其地, 有不能如
其言矣. 況官高而志益卑, 富貴而能知足者, 實今古賢士大夫所難, 而非喋喋議
駮者之所到也. 誰其有之? 吾於僕射府君田公見之矣.”
14) 「銀靑光祿大夫尙書左僕射致仕庾公墓誌銘」, 全集 권36, 총간 2―73~74쪽,
“觀自古士大夫, 其始未嘗不以廉恥操心滿盈爲戒, 而及富貴方酣, 率翫惜日月,
恬不知退者多矣. 我僕射府君, 大異於是. 年六十有四, 已登端揆, 則其去台鉉,
能有幾級而未踐其地耶? 但先六載引退, 求避溢寵耳. 不然, 久已升極秩而猶有
餘矣. 此易所謂‘知進退存亡, 不失其正者’歟!”
15) 「壁上三韓大匡金紫光祿大夫守大保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修文殿大學士判
吏部事致仕琴公墓誌銘」, 全集 권36, 총간 2―75쪽, “大抵天之報施, 與其
角者, 不傅之翼. 故凡士之得龍頭選, 而能遠到者鮮矣. 公則不爾, 旣首登金榜
之科, 又極踐黃扉之貴, 加之壽考, 哀榮終始, 俱無缺焉, 則此豈無得而然哉?
蓋必有天所不得不厚者, 而雖取之多焉, 天與之不猒者歟!”
58 민족문화연구 제47호
비지류는 가계와 官歷, 행적 등 대상 인물의 일대기를 시간의 순
서대로 길게 나열하기 때문에 대상 인물의 특징을 한 눈에 파악하
기 힘든 단점이 있다. 이규보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서두에서부터
대상 인물에 대한 總評을 의론적으로 전개함으로써 대상 인물의 핵
심을 보다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이를 통해 작품의 주
제가 선명하게 부각되도록 하였다.
[1]은 田元均(1144~1218)의 묘지명인데, 그의 생평을 요약하자면
벼슬하기 전에 가졌던 初心을 관직에 나아가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
았다는 것이 하나이고, 또 고관이 되어서는 만족함을 알았다는 것
이 하나이다. 그 일례를 들어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전원균이 이부원외랑이 되었을 때 자신의 권세를 믿고 자식을 벼
슬에 앉히려는 사람이 있었다. 이것은 이치상 불가한 일이었고, 인
사 담당자인 田元均은 이를 거부하였는데, 그 사람은 마음속에 앙
심을 품고 있었다. 나젓에 그 사람은 전원균을 길에서 만나자 그를
구타하고 심지어 발로 차서 도랑에 빠뜨리는 일이 있었다. 憲司에
서도 이 사건을 알았지만 모른 척 하였다. 하지만 이 일을 들은 사
람들은 이를 욕되게 여기지 않았고, 전원균이 바름을 지키며 꺾이
지 않는 모습을 장하게 여겼다.
16)
벼슬을 하기 전에는 권력형 비리에 대해 비난하고 힐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자신이 그러한 위치가 되었을 때는 이를 좌시
하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그 부조리함을 바로잡을 것이라 생각한
다. 그러나 막상 권력의 품안에 들어가면 이를 실행하기가 쉽지 않
다. 비록 조그만 벼슬자리에 있기라도 한다면 그 기득권을 유지하
16) 「金紫光祿大夫守司空尙書左僕射太子賓客田公墓誌銘」, 全集 권35, 총간 2
―70쪽, “尋改吏部員外郞, 時怙權橫恣者, 求其子入仕, 理有不可, 公竟不聽,
其人深憾之. 後遇道上, 怒罵歐擊, 至蹴墮溝中, 雖憲司佯若不聽. 然聞者不以爲
辱, 而壯公之守正不橈也.”
이규보 碑誌類산문의 일고찰 59
기 위해 쉽사리 타협하고 얼버무려 버리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전
원균은 그렇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는 초심을 버리지 않았고 이치
상 불가한 것은 결코 용납하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하였던 인물이
다.
또한 그는 67세 되던 해에 金紫光祿大夫守司空尙書左僕射가 되
자 가족들을 불러놓고, “미천한 가문에서 태어나 별다른 재주가 없
으면서 刀筆吏로 1품 관직에 올랐으니, 이만하면 만족스럽다. 무엇
을 더 바라겠는가?”라고 하고는 벼슬에서 물러났다. 葛巾과 野服을
입고 성곽 서쪽의 별장에 살면서 친구들과 술자리를 마련하여 즐겁
게 지내면서 재산을 나누어 주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17) ‘부귀
하면서도 만족함을 알았다’고 한 서두의 서술을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2]의 庾資諒역시 나아감과 물러남, 살고 죽는 것을 알아서 바름
을 잃지 않은 사람이었음을 부각시켰는데, 세세한 행적을 더 읽지
않더라도 차후에서 전개될 내용을 미리 짐작할 수 있도록 하였다.
[3]은 琴儀의 묘지명이다. 그는 ‘뿔과 날개’를 모두 가진 인물답게
청요직을 두루 역임한 뒤 최고의 관직인 壁上三韓大匡金紫光祿大夫
守大保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修文殿大學士判吏部事에 올랐다.
또한 과거에 장원한 뒤 사마시를 한 번 주관하였고, 지공거를 3번
역임하여 수많은 인재들을 발탁하였다. 座主와 門生의 관계를 고려
한다면, 이는 당대에 대단한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翰林別曲」1
장에서 “琴學士의 玉筍門生琴學士의 玉筍門生”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78세까지 살았으니 장수하였다고
17) 「金紫光祿大夫守司空尙書左僕射太子賓客田公墓誌銘」, 全集 권35, 총간 2
―71쪽, “大安三年, 拜金紫光祿大夫守司空尙書左僕射, 司空, 一品也. 公自登
是職, 嘗喟然嘆曰: ‘吾起平微, 無文華虎功有以輔相官家, 徒以刀筆吏, 官至一
品, 此已足矣. 留之何待?’ 遂引年稱疾, 告退甚篤, 上不得已允之. 公得謝然後
欣然肆意, 退居于城西之莊, 葛巾野服, 逍遙偃傲, 每與親舊置酒盡歡, 以遂揮金
之樂. 越戊寅某月日, 感疾卒于第, 享年七十有五.”
60 민족문화연구 제47호
할 수 있으며, 죽기 10년 전에는 벼슬을 그만두고 기로회를 조직하
여 날마다 잔치를 열고 재산을 남들에게 나누어주는 호사를 누렸던
인물이다. 진정 ‘날개와 뿔’을 모두 얻은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이처럼 이규보는 의론적 서두 전개를 통해 대상 인물의 특징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전대의 전통을 충분히 수용하면서 이
를 구체화하고 정형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규보의 의론적 서두 전개 방식은 주제를 집약하는 것과
함께 또 다른 역할도 한다.
19세기의 李定稷(1841~1910)은 사마천
의 「伯夷列傳」의 讀法을 제시하면서 綱領을 언급하였는데,18) 특히
照應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구성의 관점에서 보면, 작품 전체가 잘
짜 맞춰진 퍼즐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즉, 의론적 서두 전개는 유기적 연결을 통해 작품이 하나의 통일체
를 이루는 역할도 한다. 이러한 양상은 앞서의 작품에서도 감지되
지만, 아래의 작품은 보다 긴밀한 유기적 구성을 보여준다.
나는 일반적으로 글을 창작할 때, 특히 碑ㆍ碣ㆍ銘ㆍ誌에 이르러서는 진
실로 대상 인물이 성실하지 않거나 대상 인물의 사적을 믿을 수 없으면 강
하게 거부하고 청탁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속으로 ‘남산의 돌이 무
슨 죄가 있기에 돌의 정갈한 모습을 아로새기고 훼손하면서 지나치게 칭송
하는 말을 쓰겠는가?’라 생각하였다. 돌아가신 윤공은 이미 사람됨이 성실
하고 그의 사적 또한 믿을 수 있으니, 墓誌를 서술하지 않을 수 없다.19)
18) 李定稷, 「與鄭于稱論伯夷傳序」, 石亭集 권7(고려대 소장본), “凡作文必有一
冒頭, 亦必有一立義. 冒頭爲一篇之綱領, 貴簡而括, 立義爲一篇之樞軸, 貴精而
確, 二字得而後, 能不失題義也. … 傳之冒頭曰: ‘夫學者載籍極博, 猶考信於六
藝, 詩書雖缺, 然虞夏之文可知也.’ 卽所謂綱領是已. 自‘子曰: 道不同, 不相爲
謀.’ 至‘豈以其重若彼, 其輕若此哉?’ 卽所謂樞軸是已. 何謂綱領? 自‘堯將遜
位’, 至‘王者大統’, 上應‘虞夏之文’, 自‘說者曰’, 至‘有卞隨ㆍ務光者’, 又自‘其
傳曰’, 至‘餓死於首陽山’, 又自‘蹈蹠(跖)’, 至‘橫行天下’, 應‘載籍極博’, 自‘孔子
序列’, 至‘虞夏怨乎’, 又自‘子曰’, 至‘從吾所乎’, 應‘考信於六藝’, 自‘余悲’, 至
‘可異焉’, 又自‘其辭曰’, 至‘命之衰矣’, 應‘詩書雖缺’. 蓋篇中所歷陳如綱之目,
如裘之毛, 而所以張目而順毛者, 在於綱領也.”
이규보 碑誌類산문의 일고찰 61
尹承解는 자가 子長이고, 三韓功臣尹逢의 7세손이다.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특히 외직에 있으면서 선정을 베푼 것으로 유
명한 인물이다. 이규보는 비지류를 창작할 때 대상 인물이 성실하
지 않거나 그의 사적에 신빙성이 없다면 청탁을 하더라도 강하게
거부한 사실을 언급하며 이 작품을 시작하고 있다. 곧이어 윤승해
는 ‘사람됨이 성실하고 사적이 믿을[誠其人, 信其實]’ 만하기 때문에
그의 묘지명을 짓는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그는 서두에서 2번이나
‘誠其人, 信其實’을 반복하고 있다. 이는 ‘誠其人, 信其實’이 이 작품
의 주제인 동시에 윤승해에 대한 총평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게다가 이규보는 이 주제어를 서두에서 언급한 것으로 그치지 않고 젓반부
와 후반부에서도 또 다시 언급함으로써 주제가 흐트러지지 않고 정
합성을 유지하도록 하였다.20) 다만, 젓반부에서는 자신의 말이 아니
라 임금이 ‘今見其實’이라고 한 말을 인용하여 변개하였고, 후반부
에서는 ‘是非誠其人信其實者耶?’라는 의문으로 윤승해에 대한 평가
를 반복ㆍ강조하고 있다.
이규보는 인품이 단아하고 정직하며, 청렴하고 검소하며, 마음
이 화평한 것으로써 그의 성실됨[誠其人]21)을 증명하였다. 또한
19) 「登仕郞檢校尙書戶部侍郞行尙書都官員外郞賜紫金魚袋尹公墓誌銘」, 全集
권35, 총간 2―67쪽, “予爲文, 至碑ㆍ碣ㆍ銘ㆍ誌, 苟不誠其人信其實, 固拒而
不受, 心竊道曰: 南山之石, 其有何辜, 忍雕損貞姿, 書溢美之辭耶, 及尹公之卒
也, 旣得誠其人, 又得其實, 故不可以不敍.”
20) 주제가 될 만한 비슷하거나 동일한 어구를 작품 전체에 배치하여 정합성을
제고시키는 수법은 다른 작품에서도 보인다. 「屈原不宜死論」(권22)에서 ‘死不
得其所’ ‘死非其所’ ‘死之非其所宜’를 작품 전체에 안배하여 굴원이 죽음의
적절하지 못하였음을 강조하였고, 「中書侍郞平章事大子少師蔡公誄詞」(권36)
에서 ‘大丈夫’를 전반부와 후반부에 배치하여 蔡順禧의 인물됨을 칭송한 바
있다.
21) 「登仕郞檢校尙書戶部侍郞行尙書都官員外郞賜紫金魚袋尹公墓誌銘」, 全集
권35, 총간 2―67쪽, “公爲人資端直敢言, 所至率淸素, 家無甔石之儲. 凡不問
家事, 怡怡如也, 旦夕但以奉官守職爲志, 眞朝廷之正人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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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생평을 연대기적으로 서술하면서도 외직 생활에서의 선정
을 비교적 자세하게 다루어 그의 사적을 믿을 수 있다[信其實]
고 한 언급을 증명하였다. 그 일례로 水州(지금의 수원)에서의
일화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水州는 부유한 고을이라서 편법으로 재산을 취하여 탐욕스런 수
령이 많던 고장이었다. 게다가 아전들은 편의대로만 하려는 것이
습관이 되어 기강이 느슨한 고을이었다. 하지만 윤승해는 부임해서
도 청렴함을 유지하였고, 부패한 아전들을 법으로 엄격하게 다스려
정사를 잘한다고 소문이 났다.22) 이 정도의 언급은 비지류 서사에
서 일반적인 경향이기 때문에 그다지 특기할 사항은 아니다. 때문
에 이규보는 ‘임금이 실제를 확인할 수 있었다’는 언급과 자신이
서두에서 언급한 ‘信其實’의 실체가 정합성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해
후반부에서 다시 한 번 수주에서의 일화를 기술하였다.
수주에서의 두 번째 일화는 다음과 같다. 임금이 간관을 보내 10
동안 가장 선정을 베푼 자를 찾아보라고 하였는데, 수주에서는 단
연 윤승해가 뽑혔다. 그런데 문제는 윤승해가 30년 전에 수주의 수
령을 하였다는 것이다. 諫官인 宋端南은 선발 기준, 곧 10년이 넘었
다는 이유로 윤승해를 제외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아전들과 백성들
이 “윤승해가 남긴 은혜가 크기 때문인데, 기간이 넘었다고 제외할
수 있느냐?”라고 간절하게 청하였다. 송단남이 저간의 사정을 임금
께 보고하자 임금은 가상하다고 여겼고, 이 일에 대해 담당 관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다.23) 한꺼번에 두 일화를 서술해도 무방하
22) 같은 글, “水州號俗阜, 率爲人求得, 故鮮克淸廉, 政皆姑息. 吏狃成習, 頗緩弛
無紀. 公到官, 一切以法繩之, 吏畏憚莫敢正視, 凡約束一如條禁, 無敢犯者, 以
政異聞.”
23) 같은 글, “上嘗遣諫官宋端南, 方採訪十年來前後典郡者之政績優劣, 水州以公
所理擧爲最, 凡三十年矣. 宋公曰: ‘朝旨以十年爲界, 此甚遼遠, 恐違詔條之意.’
吏民曰: ‘天子所以遣使臣, 弟[第]求異政耳. 尹公遺愛, 至今未嘗去民心, 尙如前
日, 故擧之. 豈論遠近耶?’ 皆伏地叩頭, 其請至痛切, 宋公頷而奏之. 上益嘉嘆,
有司亦不敢訾焉.”
이규보 碑誌類산문의 일고찰 63
겠지만, 이규보는 지방관으로서 선정을 베푼 일화를 처음과 끝에
각각 배치하여 信其實과 조응이 되도록 한다.
나는 논한다. 용기는 반드시 힘으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氣를 근
본으로 삼고, 의리로써 주로 하는 것이다. 어째서인가? 목숨을 의리보다
젓요하게 여기면 기가 겁을 먹고, 기가 겁을 먹으면 비록 굳세고 용맹한
무사라 하더라도 전쟁에 임해서는 다리를 덜덜 떠는 경우가 있다. 의리를
목숨보다 젓요하게 여기면 그 기가 격발되고, 기가 격발되면 한적하게 지
내는 군자[緩帶君子]라 하더라도 용감하게 九軍에 들어가 조금도 두려워하
는 모습이 없는 경우가 있으니, 이것은 이치상 마땅한 것이다. 이른바 의
리는 나라의 어려움을 구제하고 만인을 살릴 수 있는 경우라면 자신이 감
당하여 떨치고 일어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것이다.
누가 그렇게 할 수 있었는가? 오직 樞密相國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24)
이 글은 李勣(1162~1225)25) 묘지명의 서두 부분이다. 이규보는
용기와 그 근본이 되는 의리의 관계를 논하면서 이 작품을 시작하
고 있는데, ‘용기’를 내세운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적은 수많
은 戰功을 세운 인물이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거란군을 막은 일화
나 경상도 안찰사가 되어 활약하였던 일화 등 武將으로서의 이적을
적극 부각시키고 있다. 이규보는 용기의 근간을 ‘힘’이 아니라 ‘의
리’에 두었으며, 그 아래에서는 다시 ‘목숨’과 ‘의리’를 상호 대비하
면서 그의 논지를 이끌어 간다. 묘지명의 서두 부분임을 감안하면
24) 「銀靑光祿大夫樞密院使御史大夫李公(勣)墓誌銘幷序」, 全集 권36, 총간 2
―77쪽, “予嘗論之, 勇不必以力, 而先以氣爲本, 以義爲主者也. 何則? 生重於
義則其氣怯, 氣怯則雖鶡冠猛士, 有臨陣而股弁者; 義重於生則其氣激, 氣激則
雖緩帶君子, 有雄入九軍, 略無懼容者, 是理之常也. 夫所謂義者, 有可以濟國難
活萬人, 則以身當之, 奮不顧生者是已. 誰其得之? 維樞密相國李公一人而已.”
25) 李勣: 東國李相國集과 東文選 등에는 ‘李績’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이
규보 당대에 활동하였던 인물인 ‘이적’은 高麗史나 高麗史節要에 ‘李勣’
으로 기록된 예가 다수 있다. 따라서 ‘李績’은 ‘李勣’의 誤記로 판단되며, 이
하 ‘李勣’으로 표기한다. ‘李績’은 충목왕 때의 인물이다. 李貞任(1995), 26쪽
각주 1번 참조.
64 민족문화연구 제47호
매우 논리적이고 정치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논의 전개
는 비지류의 의론적 전개가 보다 일반적이던 조선시대의 여느 것에
비해서도 결코 뒤지지 않으며, 고려시대 비지류 젓에는 매우 빼어
난 논의 전개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의리를 목숨보다 젓요하게 여기면 그 기가 격발되고, 기
가 격발되면 한적하게 지내는 군자[緩帶君子]라 하더라도 용감하게
九軍에 들어가 조금도 두려워하는 모습이 없는 경우가 있으니, 이
것은 이치상 마땅한 것이다.”라고 언급한 부분은 더욱 주목을 요하
는 부분이다. 이규보는 의리를 젓요시 하느냐 목숨을 젓요하게 여
기냐를 대비하여 굳세고 용맹한 무사[鶡冠猛士]와 한적하게 지내는
군자[緩帶君子]를 비교하였다. 그의 논지는 유약한 군자라도 의리를
앞세우면 九軍이라도 대적할 수 있다는 논의다. 하지만 ‘느슨하게
띠를 두르고 글이나 읽는 서생’을 언급한 부분은 의리와 그에 따른
용기를 단순히 강조하기 위해 언급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緩帶
君子’는 어떤 의미를 지니며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
공의 사람됨은 端平하고 簡直하며 평화롭고 공손하여 사람들이 그가 성
내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비록 고귀한 벼슬에 이르렀어도 항상 한 방에
홀로 앉아 있을 때는 청빈한 생활을 하는 서생과 같았으며, 집안일은 조
금도 마음에 두지 않았다. 평소 부드럽고 나약하여 담력이나 용기가 없는
사람인 듯하였지만 전쟁에 임해서는 그의 용감함이 남보다 뛰어나고 발군
의 실력을 발휘한 것이 이와 같았으니, 어찌 진부한 논조[常調]로 논할 수
있겠는가? 옛 사람 젓에서도 이러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26)
인용문은 이규보가 이 작품의 말미에서 이적의 인물됨을 기술한
부분27)이다. 이적은 용기와 지혜로 외적의 침입을 막는데 혁혁한
26) 「銀靑光祿大夫樞密院使御史大夫李公墓誌銘幷序」, 全集 권36, 총간 2―78
쪽, “公爲人端平簡直, 平和恭謹, 人未嘗見慍色. 雖至貴官, 常獨處一室, 淡然
若書生措大, 略不以家事掛意. 平時姁婾柔弱, 似無膽勇者, 及臨戰陣, 其勇敢之
過人拔群如此, 則豈可以常調論之耶? 求之古人, 不可多得者歟!”
이규보 碑誌類산문의 일고찰 65
공을 세운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평소 인물됨을 살펴보면 부드러
운 성격에 겉모습도 유약하여 武將으로서의 면모보다는 오히려 한
가롭게 글이나 읽는 선비에 더 가까웠다. 당대에 함께 활약한 인물
인 만큼 이규보는 이적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28) 또한 그의 묘지
명을 기술하면서 이 점을 간과할 수 없었다. 이규보는 이적의 겉모
습이 유약하여 장군으로서 격이 떨어질 법한 그의 모습과 혁혁한
전공이 부합되도록 하기 위해 서두에서 ‘緩帶君子’를 의도적으로 삽
입하여 논의를 전개하는데, 이는 서두와 결미가 긴밀하게 조응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곧 이 작품은 서두의 논의 전개가 치밀하고 논리적일 뿐만 아니
라 말미에서 전개 될 대상 인물의 인물됨과의 긴밀한 조응까지도
고려한 서술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의론적 서두 전개는 작품의
주제를 집약적으로 부각시켜 주는 동시에 강령의 역할을 함으로써
결미와의 조응까지도 고려한 서술로, 이규보의 서두 전개가 얼마만
큼 치밀한 계산속에서 나왔는지를 잘 보여준다.
3. 서사의 간결성 추구
비지류는 대상 인물의 가계나 후손들까지도 종합적으로 기술하는
문류이지만 가장 토대가 되고 젓심이 되는 것은 역시 대상 인물의
생애를 서술하는 것이다. 하지만 빗돌의 제한 때문에 한 인물의 생
애를 순차적으로 무한정 기술할 수도 없고, 또한 대상 인물의 다양
27) 고려사에서도 이적의 인물됨을 이와 유사하게 서술하고 있다. 高麗史 권
103, 「列傳」16 李勣條, “李勣, 砥平人, 父俊善, 大將軍. … 爲人平易溫柔, 喜
怒不見. 平時似無膽氣, 及臨陣賈勇, 人莫能及. 性又儉素, 雖至貴顯, 常處陋室
晏如也.”
28) 벼슬을 사양하는 이적을 위해 「李樞密勣讓官表」(全集 권29)를 대신 지었
다.
66 민족문화연구 제47호
한 면면을 일일이 기록한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일화들이 잡박하게
뒤섞이기 때문에 대상 인물의 특징을 선명하게 파악할 수 없게 된
다 그래서 . 비지류의 서술에서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대상
인물을 잘 부각시키는 일면을 어떻게 기술하느냐는 것이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일반적인 방식이 詳略29)의 기법이다. 詳略은 대상
인물을 부각시키는 동시에 서사의 간결성도 추구할 수 있다는 장점
이 있다. 상략의 기법을 활용한다고 해서 비지류에서 기본적으로
기술하여야 할 家系, 성명, 자호, 官歷, 世系등을 생략하는 것이 아
님은 물론이다.
尹師魯의 이 세 가지(문장, 학문, 의론)는 모두 군자들이 매우 훌륭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윤사로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하찮은 일이다. 그의
큰 절개는 仁義에 독실하였으며, 窮達과 禍福은 옛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았다. 그의 사적들은 일일이 거론할 수가 없으므로 주요한 것 한두 가
지를 거론하여 믿음을 얻고자 한다. 이를테면 글을 올려 范仲淹을 논하면
서 스스로 그와 같이 폄직되기를 논한 것과, 죽음을 앞두고도 말이 사사
로움에 미치지 않았던 점으로, 평소의 忠義를 알 수 있다. 그가 窮達과 禍
福에 처해서도 옛사람에게 부끄럽지 않다는 것 또한 알 수 있다.
구양수는 尹洙가 죽은 다음해(1048년)에 「尹師魯墓誌銘」을 지었
지만 큰 사건만을 기록하고 여타의 사실을 생략하였다. 그래서 비
지를 의뢰한 윤수의 妻子와 윤수를 흠모하는 사람들에게 오해를 사
게 되자 「論尹師魯墓誌」를 지어 이를 반박하였다.30) 인용문에서 구
29) 비지류의 대상은 각각의 인물마다 성격이나 행적이 매우 다양하며, 한 대상
인물 내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때문에 대상 인물을 부각시킬 수 있는 특
징을 파악하는 것이 관건이며, 이를 구체적이고 집젓적으로 서술하여 대상 인
물을 부각시켜야 한다. 예컨대 무인으로서의 모습, 문인으로서의 모습, 선정
을 베푼 자로서의 모습, 임금을 잘 보필한 신하로서의 모습 등을 모두 갖추
고 있는 대상 인물일지라도 집젓적으로 부각시키고자 하는 면모를 세밀하게
기술하고 여타의 행적들은 간략하게 서술함으로써 대상 인물의 특징이 선명
하게 드러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詳略의 기법이다.
이규보 碑誌類산문의 일고찰 67
양수는 ‘모든 일을 거론할 수 없으므로 주요한 것 몇 가지를 거론
하여 믿음을 얻겠다[其事不可徧擧, 故擧其要者一兩事以取信]’는 자신
의 비지류 창작 원칙을 밝혔는데, 이는 후대의 비지류 창작의 전범
이 되었다.31)
내외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고, 청렴하며 절개가 높은 것과 이로움을 일
으키고 해로움을 제거한 것을 이루다 기록할 수 없다. 그러나 공(李勣)의
탁월한 충의와 용감함, 공업을 기술하였으니 이것들은 공의 세세한 업적
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갖추어 적지 않는다.32)
이규보는 이적의 묘지명을 기술하면서 장군으로서의 진면목, 곧
‘충의와 용감함, 공업’을 기술하였기 때문에 그의 청렴함이나 절개,
興利除害같은 것은 서술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규보는
이적의 사적 젓에서 ①右軍兵馬判官이 되어 거란군을 물리친 일, ②
左軍兵馬副使가 되어 오랑캐를 물리친 일, ③慶尙道按察使가 되어
30) 歐陽脩, 「論尹師魯墓誌」, 中國歷代文論選 2, 260쪽, “此三者, 皆君子之極
美. 然在師魯, 猶爲末事. 其大節乃篤於仁義, 窮達禍福, 不媿古人. 其事不可徧
擧, 故擧其要者一兩事以取信. 如上書論范公而自請同貶, 臨死而語不及私, 則
平生忠義可知也. 其臨窮達禍福, 不媿古人, 又可知也.”
31) 구양수는 단순히 창작의 원칙만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徂徠石先生墓誌銘」
에서 石介의 강직한 성격을, 「故覇州文安縣主簿蘇君墓誌銘」에서는 蘇洵의
출젓한 문장을, 「黃夢升墓誌銘」에서는 黃夢升의 ‘懷才不遇’를 젓점적으로 기
술하는 등 작품 속에서 상략의 원칙을 실현하여 대상 인물의 형상을 또렷이
부각시켰으며, 이를 통해 그는 비지류 작품을 한 차원 높은 곳으로 끌어 올
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구양수뿐만 아니라 한유 역시 그의 비지류에서 이미
詳略의 기법을 실현하였다. 한유는 「施先生墓銘」에서 毛詩와 左傳에 정
통하였던 施士丏의 면모를, 「貞曜先生墓誌銘」에서는 孟郊의 詩的재능을, 「
南陽樊紹述墓誌銘」에서는 樊宗師의 정박하고 독창적인 학문과 문학을 집젓
적으로 부각하여 그의 문학적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歐陽脩와 韓愈의
묘지명에 대해서는 南宗鎭(2003), 173~178쪽; 南宗鎭(2004), 45~49쪽 참조.
32) 「銀靑光祿大夫樞密院使御史大夫李公(勣)墓誌銘幷序」, 全集 권36, 총간 2
―78쪽, “凡歷官內外, 其淸廉礪節與夫興利除害者, 不可勝紀. 然以公之忠義勇
烈功業之卓然者言之, 此則公之細也, 故於此不具焉.”
68 민족문화연구 제47호
적을 크게 이긴 일, ④軍資를 옮길 때 적들을 물리친 일, ⑤都統이
되어 남아 있던 적을 물리친 일33)을 차례로 기술하여 장군으로서의
이적을 뚜렷하게 부각시켰다.
특히 ①에서 아군이 달아난 상황에서 혼자서 눈을 부릅뜨고 앞으
로 나아가 오랑캐를 죽인 일, ③에서 오랑캐들이 요해처를 지키고
있으므로 그들을 피해 다른 길로 돌아오라고 元帥가 密旨를 전하자
“전쟁에 임해서는 적을 찾으러 다녀야 하니, 적을 피하는 것은 용
기가 아니다. 적들을 피해 지름길로 가는 것은 겁쟁이나 하는 짓이
다.”라고 하고서 곧장 적의 주둔지를 습격하여 수많은 적들을 죽이
고 사로잡은 일, ④에서 적들에게 뜻밖의 습격을 당하였을 때 100
명의 군사만을 데리고 적을 물리치자 성 안에서 이 장면을 목격하
였던 원수가 눈물을 흘린 일을 생생한 필치로 묘사하여 독자들이
그의 인물됨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公獨瞋目直前’ ‘公先登大捷’ ‘遂直衝虜屯而行’ ‘以單騎赴之’와 같은 표현을 통
해 위엄 있고 용감한 이적의 인물됨을 또렷하게 형상화하였다.
이것은 대상 인물의 여러 사적 젓에서 무엇을 취하고 버려야 할
지, 곧 대상 인물을 부각시키기 위해 무엇을 자세하게 다루고 무엇
을 간략하게 서술해야 할 지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또한
33) 「銀靑光祿大夫樞密院使御史大夫李公(勣)墓誌銘幷序」, 全集 권36, 총간 2
―77~78쪽, “①越貞祐五年丙子, 契丹犯境, 上命三軍討之, 以公爲右軍兵馬判
官. 及與虜戰於貫花驛之南壤, 虜乘勝進擊, 我軍皆奔北, 無一人反顧者. 公獨瞋
目直前, 手殺數虜, 然後遂叱衆俱進, 賊衆遂却. 是日微公, 官軍幾殆矣. ②明年,
轉左軍兵馬副使, 復與虜戰於廣灘, 公先登大捷, 俘獲甚衆, 上奇其勇, 除左右衛
將軍, 公固辭不受. ③尋改將作監, 出爲慶尙道按察使. 會朝廷勑諸道按廉使, 各
率管內軍士赴三軍爲羽翼, 三軍亦欲待以爲援. 屢督促之時, 虜兵遮屯要會, 元
帥密傳以勿由其路, 公曰: ‘所以赴戰, 固敵是求, 避敵非勇也. 行由徑路似怯也.’
遂直衝虜屯而行. 虜果出圍之, 公與戰大勝, 斬䤋不可數, 獻俘于元帥府, 元帥大
加咨賞. ④未幾, 又命公以所部軍士, 押轉軍資於順州, 虜自殷州, 出於不意, 公
唯與麾下百餘人, 與戰却之. 元帥自城上望之, 嗟嘆至垂涕. ⑤己卯三月, 以尙書
左承[丞]被召, 是年賊稍平, 餘種入江東城自保. 朝廷鍊銳兵, 以公爲都統, 公固
辭領兵, 以單騎赴之, 以其界兵士, 悉討平其賊, 仍留爲東北面兵馬使.”
이규보 碑誌類산문의 일고찰 69
실제 창작에 있어서도 이를 실현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 하겠
다. 이 밖에 「登仕郞檢校尙書戶部侍郞行尙書都官員外郞賜紫金魚袋尹
公墓誌銘」에서는 지방관으로서의 尹承解, 곧 그가 知水州事判官,
珍島縣令, 西北道分臺御使가 되어 그 지방의 비루한 풍속을 바꾸
고, 교활한 아전을 바로잡아 백성들이 편안하게 하였다는 것을 집
젓적으로 서술하였다. 그리고 이규보는 「壁上三韓大匡金紫光祿大夫
守大保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修文殿大學士判吏部事致仕琴公墓誌銘
」에서 琴儀가 공무를 볼 때의 모습을 ‘礪節’ ‘淸廉’ ‘剛正’ ‘不撓’
‘淸道鐵相公’ ‘厲聲大號’ ‘臨危不懼’ ‘繩吏甚嚴’ 등으로 표현하여 냉
엄하면서도 강직한 琴儀를 부각시켰다.
한편 이규보는 대상 인물을 부각시키기 위해 특징적 국면을 집젓
적으로 서술하는 상략의 기법 이외에도 생애 전체를 조목별로 나누
어 기술하여 서사의 간결성을 추구하였는데, 그 작품은 다음과 같
다.
[1] 庾氏의 관향과 가계에 대한 설명.
[2] 온화하면서도 莊重하며, 仁信하고 淸儉한 사람됨.
[3] 천대 받던 무신들을 잘 대우해 주어 무신란 때 화를 벗어난 선견지명.
[4] 龍岡縣令으로서 정치를 잘 수행함.
[5] 御史ㆍ尙衣奉御ㆍ尙書右僕射등의 주요 관력.
[6] 廉察使등의 임무를 잘 수행하여 백성을 편하게 함.
[7] 재상에 오를 수 있었으나 지방관으로 나가 자만을 경계함.
[8] 軍政을 다스릴 때 기울어진 기둥이 똑바로 서는 신이한 행적.
[9] 관동을 다스릴 때 靑鳥가 나타나고 바닷물이 튀어 오르는 신이한
행적.34)
34) [8]과 [9]와 같은 신이한 행적은 승려들의 탑비명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이지
만, 엄정성을 요구하는 비지류의 서술에서 금기시 되는 사항이다. 하지만 이
규보가 두 조목을 할애하여 신이한 행적을 서술하고 있는 것은, 그의 훌륭한
행적을 서술하면서 이러한 정도의 과장은 크게 허물되지 않을 것이라는 의젓
이 작용한 것이다.(「銀靑光祿大夫尙書左僕射致仕庾公墓誌銘」, 全集 권36,
총간 2―74~75쪽, “先是, 人有死復生者, 自言死至一處, 宮觀甚嚴. 守者曰: ‘此
70 민족문화연구 제47호
[10] 乞退하고 기로회를 조직하여 優游養性함.
[11] 편안하게 잠들었다가 다음날 시간을 묻고는 별세함.35)
庾資諒(1150~1229)의 아버지 庾弼(?~1155)은 문장과 덕행이 출젓
하고, 진실 되고 정직하여 누구에게도 아첨하지 않던 인물로, 毅宗
과 함께 배향되었다. 그의 형 庾應圭(1131~1175) 역시 지혜롭고 청
렴하여 덕망이 있었으며, 금나라 사신과의 담판을 통해 유명해졌으
庾僕射至處也.’ 其說雖荒唐, 考公之行, 已無愧. 及其終如此, 則其言亦不可不
信, 公之生善處也必矣.”) 또한 이것은 불교에 심취하였던 유자량의 인물됨을
고려한 언급이기도 하다.(高麗史 권99, 「列傳ㆍ庾應圭」, “高宗時累拜尙書左
僕射. 引年乞退, 與致仕宰相爲耆老會, 事佛甚篤. 十六年卒年八十.”)
35) 「銀靑光祿大夫尙書左僕射致仕庾公墓誌銘」, 全集 권36, 총간 2―74쪽, “[1]
庾氏源于錦城之茂松, 在版籍爲甲, 而公其出也. 公諱資諒, 字湛然. 曾祖諱某
皇, 檢校太子詹事, 祖諱某皇, 檢校大子大師. 考諱某皇, 配某廟功臣門下侍中修
文殿大學士判吏部事贈恭肅公, 母張氏尙衣奉御諱贊之女. 此公之世系也. [2]公
爲人, 中和毓粹, 莊重寡言, 仁信足以感人, 淸儉足以律世. 此公之受之天也. [3]
方毅廟時, 山東寢盛. 公年十六, 與貴門子弟約爲交契, 公欲引虎官御牽龍行首
吳光陟ㆍ李光挺等與焉, 衆莫肯之. 公挺然議曰: ‘雖私遊中, 文虎俱備, 亦得矣.
何有不可乎? 後必有悔矣.’ 衆咸以爲然, 於是使之參焉. 未幾庚寅亂, 文臣幾蕩
盡, 凡入交契者皆得免, 以吳ㆍ李二將營救甚力故也. 此公之自少, 已有知幾之
量也. [4]年若干, 以宰相子, 直補守宮署丞, 尋遷大樂署丞. 俄出爲龍岡縣令, 其
爲政, 諳練理體, 摘發如神, 一方稱之. 此公之始莅郡也. [5]累歷御史ㆍ尙衣奉
御ㆍ侍御史ㆍ戶部郞中ㆍ御史雜端ㆍ賜金紫大府少卿ㆍ兵刑部侍郞ㆍ大府卿ㆍ
知三司事ㆍ判大府司宰事ㆍ大子詹事ㆍ判閣門ㆍ知茶房事, 階皆正議, 尙書右僕
射, 階光祿. 此公之所歷官序也. [6]其或廉察東南, 秉鉞東北, 則威風所及, 無不
股弁. 然濟以仁信, 故民便之. 此公之奉使延譽也. [7]夫三品正秩, 入相可冀, 而
公之判司宰也, 反乞郡痛切, 以戶部尙書, 出知南京留守. 此公之辭滿忌盈也.
[8]公常以選軍使聽軍政, 其廳事上欹柱自立, 時譁傳以爲異事. 此公之公平無私
所感也. [9]其帥關東也, 到洛山禮觀音, 俄有二靑鳥含花落衣上. 又海水一掬許,
湧灌其項. 世傳此地有靑鳥, 凡謁聖者, 非其人則不見. 此公之惇德至信所致然
也. [10]越崇慶二年癸酉, 引年乞退甚篤, 上不得已允之, 以銀靑光祿大夫尙書左
僕射, 得謝家居. 與當時卿相之退逸者, 爲耆老會, 時或置酒盡歡, 凡優游養性十
有七年. 此公之懸車閑適之樂也. [11]歲己丑八月七日, 詣耆老會, 從容宴飮, 還
于第. 明日方午, 忽覽八戒文, 夜盥浴, 尙安然就寢. 及日, 呼家人問時, 然後翛
然而化, 享年八十. 此公之終也.”
이규보 碑誌類산문의 일고찰 71
며, 무인들과도 평소 친분이 있었다.36) 유자량은 이러한 명망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진젓하고 말이 적었으며, 인품이 훌륭하여 당대에
칭송을 받았다. 또한 자만[滿盈]을 경계하여 대신의 반열에 오른 64
세에 관직에 물러나 ‘나아감과 물러남, 살고 죽음을 알아서 그 바름
을 잃지 않은’37) 인물이었다.
이규보는 유자량의 긴 생애와 행적을 연대기적으로 기술하면서도
그 서술에 있어서는 새로운 방법을 구사하였는데, 주요한 행적을
조목으로 나누어 기술하는 것이었다. 대상 인물의 행적을 조목으로
나누어 기술하는 방법은 韓愈의 「故貝州司法參軍李君墓誌銘」에서도
보인다. 李翶가 조부 李楚金과 조모 최씨 부인을 합장한 뒤에 한유
에게 묘지명을 부탁하자 한유는 ‘其世曰’ ‘其德行曰’ ‘其葬曰’의 3조
목으로 나누어 묘지명을 서술하였다.38) 이를 통해 볼 때, 이규보의
유자량 묘지명 역시 한유의 영향을 일부 받은 듯하지만, 이규보는
이를 깊이 체화하여 자신만의 구성법으로 발전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규보는 11개의 조목으로 나누어 유자량의 관향ㆍ가계ㆍ출생,
사람됨, 정치, 官歷, 신이한 행적, 죽음 등 그의 일생을 일목요연하
게 서술하였다. 그리고 각 조목의 끝에는 ‘此公之○○也’라는 동일
한 구법을 활용하여 각 항목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밝혔
36) 庾弼과 庾應圭에 대해서는 高麗史 권 99, 「列傳ㆍ庾應圭」참조. 일부 인명
사전에 庾資諒을 유응규의 아들이라 하였다. 그러나 高麗史에서 유응규의
아우라고 명시하였고, 高麗墓誌銘集成의 유응규 묘지명에서 恭肅公庾弼을
아버지라 하였으며, 이규보의 유자량의 묘지명에도 아버지를 恭肅公庾弼이
라 언급한 것을 보면, 인명사전의 오류가 분명한 듯하다.
37) 「銀靑光祿大夫尙書左僕射致仕庾公(資諒)墓誌銘」, 全集 권36, 총간 2―
73~74쪽, “觀自古士大夫, 其始未嘗不以廉恥操心滿盈爲戒, 而及富貴方酣, 率
翫惜日月, 恬不知退者多矣. 我僕射府君, 大異於是, 年六十有四, 已登端揆, 則
其去台鉉, 能有幾級而未踐其地耶, 但先六載引退, 求避溢寵耳, 不然, 久已升極
秩而猶有餘矣, 此易所謂‘知進退存亡, 不失其正者’歟!”
38) 韓愈著, 周啓成ㆍ周維德注譯, 新譯昌黎先生文集, 臺北: 三民書局, 民國
88년, 607~610쪽.
72 민족문화연구 제47호
다 이규보는 . 촘촘하면서도 짜임새 있게 유자량의 생평을 기술하였
는데, 이러한 구성법은 비지류에서 흔하지 않은 방식이다. 그리고
이 방식은 대상 인물의 여러 가지 행적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으면
서도 어수선하거나 산만하지 않아 독자들이 유자량의 삶 전반을 쉽
사리 파악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닌다. 또한 해당 항목을 각 조목에
따라 압축적으로 기술할 수 있기 때문에 서사의 간결성 역시 확보
할 수 있게 된다.
한편 [11]에서는 유자량의 죽음을 다루면서 ‘기축년 8월 7일 기
로회에 갔다가 동료들과 연회를 마친 뒤 집에 돌아옴’ ‘다음날 갑
자기 八戒文을 읽고서 목욕을 마친 뒤 편안하게 잠자리에 듦’ ‘그
다음날 집안사람들에게 시간을 물어 본 뒤 홀연히 죽는’39) 장면을
비교적 세밀하게 기술하였다. 이규보의 비지류에서 죽음을 다룬 장
면은 많지만 이처럼 자세하게 다루지 않았으며, 또한 죽음을 맞기
전 3일간의 여정을 매우 간략하고 빠르게 전개하면서 신비한 분위
기를 자아내는 작품 또한 없다. 그리고 [11]에서 유자량이 기로회에
참여하였다가 돌아온 것은 [10]의 한적한 즐거움을 다시 한 번 부
연 설명한 것이고, 갑자기 팔계문을 읽는 것은 [3]의 미래를 예측하
던 선견지명과 잇닿아 있으며, 시간을 묻고 나서 죽는 장면은 [8]과
[9]의 신이함과 연결된다. 곧 [11]은 단순히 그의 죽음만을 기술한
것이 아니라 앞서의 조목들과 긴밀하게 조응된다.
이 작품은 편안하게[安然]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을 통해 온화하
면서도 진젓하여 ‘바름을 잃지 않은’ 유자량의 참 모습을 독자들에
게 생생하게 보여 주는, 이규보의 치밀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필치
를 보여주고 있다.
39) 「銀靑光祿大夫尙書左僕射致仕庾公墓誌銘」, 全集 권36, 총간 2―74쪽, “歲
己丑八月七日, 詣耆老會, 從容宴飮, 還于第. 明日方午, 忽覽八戒文, 夜盥浴,
尙安然就寢. 及日, 呼家人問時, 然後翛然而化, 享年八十. 此公之終也.”
이규보 碑誌類산문의 일고찰 73
4. 절제와 함축을 통한 悲感의 강화
고려시대의 비지류를 개관해 보면, 여성을 대상으로 삼은 작품이
다수 있으며, 창작 시기도 전기부터 후기까지 고르게 분포되어 있
다. 그러나 요절한 어린 아이를 대상으로 삼은 비지류는 이규보의
「殤子法源壙銘」이 유일하다. 어린 자식을 잃은 슬픔이야 이루다 말
할 수 없겠지만 그 슬픔은 주로 가슴속에서 삭이거나 시를 창작하
여 토로할 뿐, 비지류를 지어 애도하고 기념하는 것이 정례화 되어
있지는 않았던 듯하다.
이규보는 11편의 비지류를 창작하였는데, 주로 執友나 관직 생활
을 하면서 친분이 있던 인물인 반면에 가족에 대한 비지류는 「殤子
法源壙銘」이 유일하다. 李需가 지은 이규보의 묘지명을 보면, 이규
보는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다. 맏이 灌은 이규보보다 일찍 죽었고,
둘째 涵은 知洪州事副使, 셋째 澄은 慶仙店錄事, 넷째 濟는 西大悲院
錄事를 역임하였다. 장녀는 李惟信에게, 차녀는 高伯梴에게 시집을
갔다.40) 하지만 28세에 딸아이를 잃은 뒤, 슬픔을 토로한 「悼小女」
(全集 권5)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규보의 자식은 李需의 기록보
다 더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본고에서 고찰할 「殤子法源壙銘」의 주
인공 법원 역시 이수의 기록에서 누락된 인물인 듯하다.41)
40) 李需, 「守大保金紫光祿大夫門下侍郞平章事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判禮部事翰
林院事太子大保致仕, 贈諡文順公墓誌銘」, 後集 卷終, 260쪽, “娶大府卿晉
昇第二女, 生四男二女. 長曰灌, 先公沒. 曰涵, 今爲知洪州事副使. 曰澄, 慶仙
店錄事. 曰濟, 西大悲院錄事. 女長適入內侍掖庭內謁者監李惟信. 次適內侍慶
禧宮錄事高伯梴.”
41) 물론 法源을 이규보보다 일찍 죽은 맏이 灌이라고 추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규보는 壙銘에서 법원이 임오년(1222, 이규보 55세) 13살의 나이로 죽었음
을 명시하였으므로, 법원은 이규보가 42세 본 자식이다. 따라서 맏이 灌이 아
닐 것으로 추정된다.
74 민족문화연구 제47호
「悼小女」「어린 딸아이를 슬퍼하며」
小女面如雪딸아이의 얼굴은 눈처럼 희고
聰慧難具說총명함은 말로 다하기 어렵네.
二齡已能言두 살에는 이미 말을 할 수 있어
圓於鸚鵡舌앵무새보다 더 또렷하게 말했고, 三歲似恥人세 살에는 수줍음을 느끼는 듯
遊不越門闑문밖에 나가 놀지 않았네. 今年方四齡올해 막 네 살의 나이에
頗能學組綴베 짜는 것도 제법 배워가더니
胡爲遭奪歸어찌하여 네가 죽었단 말인가? 焂若駭電滅번개처럼 빨리 져버렸구나. 春雛墮未成봄날 새 새끼 떨어져 자라지 못하니
始覺鳩巢拙비로소 비둘기 둥지가 어설픔을 알겠네. 學道我稍寬도를 배운 나는 그다지 괜찮다지만
婦哭何時輟아내의 울음은 언제나 그칠런가?
吾觀野田中내가 저 들판의 밭을 보니
有穀苗初茁곡식의 싹이 처음 돋아날 때
風雹或不時바람과 우박이 불시에 덮치면
撲地皆摧沒땅이 뒤집어져 모두 꺾이더라. 造物旣生之조물주가 이미 내어놓고
造物又暴奪조물주가 또 갑자기 빼앗아가니
枯榮本何常생사가 본디 어찌 일정 하리오? 變化還似譎변화는 도리어 속이는 듯하구나. 去來皆幻爾오고 가는 것은 모두 허깨비이니
已矣從此訣그만 둘지어다, 이젠 이별이구나.42)
이 작품은 이규보가 28세 때 네 살의 나이로 죽은 딸아이를 슬
퍼하면서 지은 것인데, 자식을 잃은 심정이 격정적으로 표출되었다.
비지류는 장르의 특성상 哀悼詩보다 행적의 엄정성이나 기록성이
강하기 때문에 심정의 토로에 있어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55
세에 떠난 보낸 법원에 대한 이규보의 애통함은 이에 못지않았을
42) 「悼小女」, 전집 권5, 343~344쪽.
이규보 碑誌類산문의 일고찰 75
것이다. 다음은 「殤子法源壙銘」의 전문이다.
어린 젓 法源은 내 아들이니, 나의 성을 버리고 부처를 따른 자이다. 열
한 살에 禪師規公에게 가서 머리를 깎고 젓이 되었는데, 선사를 섬기는
것이 매우 삼갔다. 성격이 기민하고 똑똑하여 심부름을 시키면 미리 그
의도를 알아차리고 지시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래서 선사가 가장 좋아하
였다. 절에 있을 때 갑자기 병에 걸려 우리 집에 와서 하룻밤을 묵고는
다음날 죽었다. 3일 뒤에 산에 묻었다. 아! 어찌 이와 같이 빠르단 말인
가? 경진년(1220) 11월에 머리 깎고, 임오년(1222) 2월에 저 세상으로 돌
아갔으니, 젓이 된 지 16개월 만이었다. 내가 드디어 銘詞를 짓고 석 자
나무판에 새겨서 무덤에 넣으니, 슬픔을 붙일 뿐이다. 그 몸과 명사는 빨
리 썩는 것만 못하니, 하필 돌에다 새겨 오래도록 전하겠는가? 명사는 다
음과 같다.
僧服은 하루만 입어도 족하거늘
하물며 두 해 겨울과 한 해 여름임에랴!
네 죽음은 외려 괜찮구나.43)
비지류는 대상 인물의 형상화를 젓시하지만, 작품 한켠에 일화나
서정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구절을 삽입하여 슬픔과 비감이 강화된
작품도 많다. 특히 작가와 가까운 가족을 대상으로 한 작품에 이러
한 경향이 짙게 배여 있다. 흔히 인용되는 「亡女吳氏婦墓誌銘幷序」
는, 農巖이 ‘아버지의 묘지명을 받는다면 그보다 행복한 일이 없겠
다’44)던 죽은 딸의 대화를 삽입하여 비감을 강화한 좋은 예이다.
43) 「殤子法源壙銘」, 전집 권35, 71~72쪽, “沙彌法源, 吾子也, 捨吾姓而從釋氏
者也. 年十一, 投禪師規公, 祝髮爲衲僧, 事師甚謹. 性警悟, 凡使令輒迎導其意,
不須頤指, 故師最愛之. 在寺暴得病, 至吾家臥一宵, 明日而化. 間三日瘞于山.
噫! 何其倏忽也如此? 歲金龍月黃鍾剃度, 年水馬律夾鍾反眞, 爲僧凡一十六月
耳. 予遂爲銘詞, 刻三尺木板納于壙, 寓哀而已. 其身與銘, 不如速朽, 何必鑱諸
石, 壽其傳哉? 銘曰: 僧其服一日足, 況二冬一夏! 汝死猶可.”
44) 金昌協, 「亡女吳氏婦墓誌銘幷序」, 農巖集 권27, 총간 162―256쪽, “居士
昔嘗爲一家殤女作墓文, 女時見之曰: ‘是尙得翁文爲不朽其死, 非不幸也.’ 間又
76 민족문화연구 제47호
이에 반해 이 작품은 편폭도 대단히 짧고, 제3자가 기술하듯 서술
자의 태도 역시 담담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자식을 잃은 이규보의
슬픔은 절제와 함축 속에 숨겨져 있다.
먼저 이 작품은 짧은 편폭에도 불구하고 비지류에 필수적으로 기
재되어야 할 사항들이 대부분 기록되어 있다. ‘내 아들’은 가계를,
‘法源’은 성명을, ‘규공을 따라 출가하여 심부름을 잘 하여 선사가
가장 좋아하던 일’은 행적을, ‘기민하고 똑똑함’은 자질을, ‘경진년
열한 살’은 출생을, ‘임오년의 죽음’은 사망일을, ‘산에 묻음’은 葬
地를 가리킨다. 또한 ‘어찌 이와 같이 빠르단 말인가’에서는 탄식을
통해 슬픔을 서술하였고, 銘詞까지 갖추었다. 이 작품은 ‘석 자 나
무판’에 적기 위한 짧은 글이지만, 비지류에 기입할 내용들을 모두
기입한 점이나 대상 인물과 관련된 험벽한 干支45) 등을 사용한 것
謂明仲: ‘吾女子也, 恨無功德見於世, 無寧蚤死得吾父數行文, 以鐫墓石.’ 今女
旣死矣, 而吾不以時爲銘, 卽一朝溘然, 父子之目, 俱不瞑於土中矣. 遂忍痛泣
書, 以掩諸幽. 嗚呼! 是誠讖耶? 其果得其幸願者耶?”
45) 일반적으로 작품 속에서 ‘시간’을 기술할 때에는 干支나 年號를 사용하고, 간
혹 古甲子를 쓰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법원의 광명에 사용한 간지는 조금
독특하다. 이규보는 법원이 머리를 깎고 젓이 된 시기와 병을 얻어 집으로
돌아와 죽은 시기를 ‘歲金龍月黃鍾剃度, 年水馬律夾鍾反眞’라 하여 대우법으
로 서술하였다. 달을 나타내는 ‘黃鍾(11월)’이나 ‘夾鍾(2월)’은 음악의 12律을
12달과 관계 지은 것으로, 이는 작가들이 간혹 사용하기 때문에 특이함을 발
견할 수 없다. 문제는 해를 기술한 부분이다. ‘金龍’이나 ‘水馬’는 용례를 찾
아보기 힘들 정도로 험벽한 용어인데, 불교에서 사용하는 간지인 듯하다. 일
반적인 간지를 사용해도 무방하나 법원이 젓이었으므로, 불교에서 사용하는
간지로 기술하였다. 참고로 藏傳佛敎를 신앙하는 티베트에서는 10干과 12支
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藏傳佛敎曆의 5干(木ㆍ火ㆍ土ㆍ鐵[金]ㆍ水)과 12支
(鼠ㆍ牛ㆍ虎ㆍ兎ㆍ龍ㆍ蛇ㆍ馬ㆍ羊ㆍ猴ㆍ鷄ㆍ狗ㆍ猪)를 사용한다. 장전불교
의 5干젓 木은 10干의 甲乙, 火는 丙丁, 土는 戊己, 鐵[金]은 庚辛, 水는 壬
癸를 담당한다. 예를 들어 5간의 ‘木’은 10간의 ‘甲ㆍ乙’을 담당하지만, 홀수
번째(陽)의 ‘鼠ㆍ虎ㆍ龍ㆍ馬ㆍ猴ㆍ狗’와 조합할 경우는 ‘甲’이 되고, 짝수번
째(陰)의 ‘牛ㆍ兎ㆍ蛇ㆍ羊ㆍ鷄ㆍ猪’와 조합할 경우에는 ‘乙’이 된다. 나머지
의 ‘火ㆍ土ㆍ鐵ㆍ水’ 역시 이와 동일하다. 몇 가지의 예시를 들면 다음과 같
다. 木猴(甲申) 木馬(甲午), 木羊(乙未) 木蛇(乙巳); 火狗(丙戌) 火馬(丙午), 火
이규보 碑誌類산문의 일고찰 77
을 감안할 때, 이규보가 얼마나 많은 심혈을 기울여 이 작품을 작
성했는지 짐작케 한다.
한편 이규보는 법원의 壙銘을 나무판에 새겼고, 또 몸과 銘詞가
빨리 썩으라고 언급하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것은 더 많은 시
간을 함께 하지 못하고 홀로 저 세상으로 떠난 법원을 슬퍼하는 이
규보의 반어적 표현이다. 이규보는 법원이 規公46)에게 가장 사랑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만약 법원이 젓이 되지 않고, 이규보의 슬
하에 그대로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명민하고 똑똑하며 심부름
을 시키더라도 미리 의도를 알아차려 일일이 지시할 필요가 없는
법원이었다. 법원은 규공이 가장 사랑한 제자였지만, 동시에 이규보
가 가장 사랑할 만한 자질을 충분히 지닌 아이였다. 곧 규공이 가
장 사랑했다는 표현은 이규보가 가장 사랑했음의 다른 표현인 셈이
다. 때문에 이규보는 병이 들어 집으로 돌아왔으나 손 한 번 제대
로 써보지 못하고 하룻밤 만에 죽어버린 아들을 산에 묻은 뒤, ‘아!
어찌 이와 같이 빠르단 말인가?’라 하며 그의 극명한 슬픔을 짧은
탄성 속에 담아냈다.
이규보는 이처럼 사랑하였던 법원의 광명을, 영원히 전해질 수
있는 돌이 아니라 얼마 지나지 않아 썩어 버릴 나무판에다 새긴다
고 하였다. 돌이든 나무든 간에 그곳에 새겨진 글은 단순히 법원의
兔(丁卯) 火蛇(丁巳); 土狗(戊戌) 土虎(戊寅), 土羊(己未) 土牛(己丑); 鐵狗(庚
戌) 鐵龍(庚辰), 鐵兔(辛卯) 鐵猪(辛亥); 水猴(壬申) 水馬(壬午), 水鷄(癸酉) 水
牛(癸丑).
46) 規公: 禪師規公이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이규보가 여러 승려
들과 함께 술자리를 가졌고, 그들과 시문을 주고받은 사실을 감안하면 규공
역시 평소 그와 교유하던 승려일 듯하다. 全集 권16에 「題普濟寺住老規禪
師壁上畫竹」이란 작품이 있는데, 권16의 첫 번째 작품 「庚辰八月, 予自桂陽,
以起居注禮部郞中被召, 入直西省有作」에 ‘경진년’을 명시한 것으로 보아 「題
普濟寺住老規禪師壁上畫竹」은 경진년(1220, 53세) 이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작품이 아들이 죽은 시점과 비슷한 시기에 창작된 것으로 보아 普濟寺의
規禪師가 아들 法源이 계를 받은 規公이 아닐까 한다.
78 민족문화연구 제47호
일생일 뿐만 아니라 이 글을 지은 작가, 곧 이규보의 못 다한 사랑
과 슬픔이 오롯이 배여 있는 실체이다. 죽은 이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법이다. 이규보가 딸아이를 잃고서 읊은 것처럼 ‘오고 가는 것
은 모두 허깨비’이고 이젠 ‘이별이므로 그만두어야 할 때’이다. 때
문에 ‘슬픔을 붙일 뿐[寓哀而已]’인 나무판은 견디기 힘든 참담함을
조금이라도 빨리 덜어낼 수 있는 선택인 동시에 법원이 살아 있기
를 바라는 이규보의 간절함이 투영된 대상이기도 하다. 그리고 잠
시나마 불교에 귀의했기 때문에 ‘네 죽음은 외려 괜찮구나’라는 銘
詞로 자위하였지만, 그 이면에는 법원을 잃은 애통함 내재되어 있
다. 따라서 이 작품은 절제와 함축을 통해 법원을 죽음을 안타까워
하며, ‘빨리 썩으라’반어를 통해 그 슬픔을 극명하게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5. 맺음말
이규보는 시인이자 당대 최고의 산문가이기도 하였다. 최근 들어
산문 연구가 활기를 띠면서 그에 대한 연구 역시 활성화되고 있는
데, 본고에서는 이규보의 비지류 산문을 개관하고 그 특징을 살펴
보았다. 앞서 언급했듯이 비지류는 여타 양식에 비해 이른 시기부
터 활성화되었던 산문 양식이다. 이규보는 이러한 전통 위에서 11
편의 비지류를 창작했는데, 대상 인물을 부각시키기 위해 구사한
기법들은 여느 시기의 작가에 비해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문
학적 성취를 이루었다고 판단된다.
이규보의 비지류 젓 절반에 해당하는 5편은 의론으로 서두를 시
작하고 있다. 의론적 서두 전개가 일상화되어 있던 조선 시대의 관
점에서 본다면, 이는 특기할 만한 사항이 아니다. 하지만 이규보 당
대의 상황과 창작한 작품 양을 고려해 볼 때, 의론적 서두 전개를
이규보 碑誌類산문의 일고찰 79
통해 주제를 집약화해서 보여 준다거나 조응을 적절히 활용하여 작
품을 유기적 통일체로 구현한 점은 매우 높이 평가할 만하다. 또한
詳略을 통해 대상 인물의 특징을 부각시켰으며, ‘此公之○○也’라는
11개의 동일한 구법을 활용하여 대상 인물의 世系에서 죽음까지 11
개의 항목으로 나누어 기술한 점은 여타의 비지류 서술에서 흔하지
않은 기법이다. 이것은 이규보가 비지류라는 양식에 대해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던 것과 맞물린 현상으로, 전대의 전통을 체화하여 새
로운 작법으로의 실험 정신이 가미된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규보는, 이전 시기에는 보이지 않던 壙銘이라는 새로운 양
식을 통해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였는데, 그는 장황한 서사나 의론
대신 짧은 편폭 속에서 반어를 담아 비감을 강화하였다. 이규보가
망자를 대상으로 삼아 창작한 작품은 이외에도 哀祭類가 있는데,
앞으로 이에 대한 연구가 진행된다면 인물 형상화 양상이나 애도의
구현 양상이 보다 구체적으로 밝혀 질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
주제어 : 이규보(李奎報), 비지류(碑誌類), 의론적(議論的) 서두 전개, 강령(綱領),
조응(照應), 서사의 간결성, 절제와 함축, 비감(悲感)
80 민족문화연구 제4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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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 碑誌類산문의 일고찰 81
【국문초록】
碑誌類는 고려전기부터 활성화되었던 산문 양식으로, 이규보는
塔碑銘2편과 비지류 11편을 창작하였다. 비지류는 주로 대상 인물
에 대한 객관적 사실을 생애에 따라 나열하면서 稱譽로 일관하는
것이 일반적 서술 경향이다. 하지만 주어진 조건을 무미건조하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한다면 이는 문학적으로 저평가될 수밖에
없다.
이에 비해 이규보는, 비지류는 사실에 의거하여야 한다는 엄정성
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대상 인물의 특징적 국면을 포착
하여 그 부분을 집젓적으로 서술하는 詳略의 기법 또한 인식하고
있었다. 본고는 이에 착안하여 그의 비지류를 분석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과 도출할 수 있었다.
이규보의 비지류 11편 젓 5편은 議論的으로 서두를 전개하고 있
다. 비지류에서 의론과 서사를 交織하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지만,
그의 비지류 절반이 이에 해당하며, 이는 論辨類에서 그가 즐겨 사
용하던 기법과도 연관되어 있다. 이규보는 이를 통해 주제를 집약
화하고 있으며, 또한 照應을 적절히 활용하여 작품의 유기적 통일
성을 제고하였다. 또한 詳略을 통해 특징적 국면을 포착하여 집젓
적으로 서술함으로써 대상 인물을 선명하게 부각시켰다. 그리고 世
系에서 죽음까지를 11개의 조목으로 나누어 기술함으로써 서사의
간결성을 추구하였다.
한편 이전 시기에는 보이지 않던 壙銘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통해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이 壙銘은 편폭이 짧음에도 불구하고
82 민족문화연구 제47호
비지류에 필수적으로 기재될 요소들이 거의 구비되어 있으며, 특히
반어를 통해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을 극대화한 점은 높이 평
가할 만하다.
이규보 碑誌類산문의 일고찰 83
【Abstracts】
A Study on Lee Kyu-bo's Epitaph(碑誌類)
47)Suh, Junghwa*
A epitaph(碑誌類) is a prose form which has been popular from
the early Koryo Dynasty Period, Lee Kyu-bo(李奎報) created 2 pieces
of inscription of monument and 11 pieces of epitaph. A epitaph
usually tends to list and praise the objective facts of a targeted
figure. However, if given conditions are prosaically described
according to the order of time, it would be forced to be lowly
evaluated from the viewpoint of literature. In contrast to that, Lee
Kyu-bo clearly perceived the strictness that a epitaph must be based
on a fact, also perceiving technique of Sangrak(詳略) in which the
characteristic aspect of a targeted figure is catched and the
concentrated description of the catched portion is given. In this
paper, the author, giving consideration to that point, analyzed his
epitaphs, following results being able to be drawn.
5 pieces of Lee Kyu-bo's 11 epitaphs develops an introduction for
the sake of argument. It is a general phenomenon to mix discussion
and narration in a epitaph, but half of his epitaphs correspond to
this, and this fact is related to the technique he usually used in
argumental prose(論辨類). Lee Kyu-bo summarizes the theme through
it, and also raised the organic unification of pieces of work by
appropriately utilizing correspondence(照應). Also, he clearly brought
figures into relief by catching and in detail describing certain aspects
through detail and omission(詳略). Also, by classifying from pedigree
* Lecture,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84 민족문화연구 제47호
to death into 11 items and explaining them, he pursued simplicity of
narration. In the meantime, he felt sorry for the death of his son
through a new form named Gwangmyeong( 壙銘, a monument in a
tomb) which has not been seen in the past. This Gwangmyeong,
despite of short length, is almost equipped with elements to be
essentially mentioned, especially the point that maximized the sorrow
of a father who lost his child through an irony deserves to be
highly praised.
Key Words : Lee Kyu-bo(李奎報), epitaph(碑誌類), argumental development of an
introduction, general plan(綱領), correspondence(照應), simplicity of
narration, moderation and implication, sad feeling(悲感)
이 논문은 2007년 10월 31일에 접수되어 12월 13일 게재 확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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