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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의 要素:시어(詩語) 碧波 김철진
'詩는 문학의 정수(精髓)'니, '詩는 문학의 꽃'이니
하는 말을 우리는 자주 하고 듣습니다. 그 까닭은 시가 가장 짧은 형태 안에 앞으로 우리가 함께 공부해 나갈 '시(詩)의 요소(要素)'인
언어·운율[리듬]·이미지·비유·상징 등 많은 것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시 공부를 하거나 '시 짓기'를 하거나 할 때, 우리가
진실로 알아야 할 것들은 시의 기원이나 시의 정의나 시론이나 시의 분류가 아니라 바로 이제부터 공부할 시의 요소들이지요. 이 시의 요소들을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는 안목을 기르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가장 중요한 시 공부입니다. 그럼 제5강에서는 시에 씌어지는
언어인 시어(詩語)부터 우리 공부를 시작해 볼까요?
1. 시어(詩語)란 무엇인가?
그럼 시의 요소 중의 하나인 이
시어란 무엇일까요? 골치부터 아퍼 오지요?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쉽게 쉽게 넘어갈 테니까요. 간단하게 말해서 시어란
'시에 쓰이는 언어', '시에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럼 '시에 쓰이는 언어가 따로 있단 말인가?'라고 의아해 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생활하면서 주고받는 대화에서 쓰는 말들을 시에서 쓰면 그것이 시어가 되는 것이지요. 뭐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있나요?
그런데 소위 유식한 분들은 거창하게 '시는 고도의 언어 예술'이므로 '시어란 시에 동원되는 특별한 낱말과 어귀'란 뜻으로 해석하여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말들과 구별되어 사용되는 것을 뜻한다고 말합니다. 이래서야 우리 같은 일반인들이 감히 시 근처에나 갈 수 있겠습니까.
이러니까 시의 독자들이 자꾸 줄어들지요.
그리고 요즘 보세요. 어떤 시인들이 이렇게 어렵게 시어를 의식하면서 시를 짓고 있나요?
요즘 시인들은 어떤 시어든지 자기의 시상(詩想)을 표현하는 데 가장 적합한 언어라고 생각되면 그 시어를 가져다 쓰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좀 지저분한 부분이나 거슬리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긴 합니다만 제 시 제가 그리 쓰겠다는 데 누가 뭐랄 수 있겠습니까?
하긴 옛날에는 동서양 구분 없이 시어에는 일반적인 언어와는 달리 어떤 우아함이나 고상함, 또는 장중함 같은 느낌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시에 쓰이는 언어인 시어에서 고어(古語)나 아어(雅語) 등을 주로 사용하였으며, 때로는 별도의 성구(成句) 등도 즐겨 사용해
왔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18세기 영국의 T.그레이가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보통의 언어가 필요에 의해서 특수화되면서 거리가 생겼다.
이것이 바로 시어인데 라틴어의 완곡한 표현체인 고어체를 고쳐 놓은 것이다.'라고 한 데서도 입증되고 있지요.
그러나 워즈워드는
그의 '서정시집'의 서문에서 시의 감동적인 본질을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언어들은 시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지요. 결국 워즈워드에 의하면
산문의 언어와 시의 언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럼 우리가 시와 산문을 읽으면서 그 언어의 차이를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자세히 공부할 기회가 오겠지만 우선 여기서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비유나 상징
등으로 인하여 시어가 지니게 되는 언어의 특수한 기능 때문이라는 정도로만 이해하고 넘어가기로 합시다. 아직은 더 깊이 들어가면 시에 대해서 情이
뚝 떨어질지도 모르니까요.
2. 시어(詩語)의 함축적(含蓄的) 의미(意味)에 대하여
제목만 봐도 한자가 많아 한글
세대들은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하지요? 그럼 이야기나 한 자루 하며 좀 쉬어 갑시다. 여러분들도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 김 삿갓
난고 김병연의 시 한 수 볼까요?
月白雪白天地白 (월백설백천지백) [달도 희고 눈도 희니 천지가 희고]
山深水深客愁深 (산심수심객수심) [산도 깊고 물도 깊어 객수도 깊구나]
이 얼마나 간결하게 쉬운 글자들로만 시를
지었으면서도 달빛 희게 부서지는 깊은 산 속에서 눈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나그네의 심정을 이리 잘 표현했을까요? 이런 것이 시입니다.
유식한 한학자들이 딱딱하고 어려운 한자들로만 지은 어려운 한시들보다야 이 시가 얼마나 쉽게 우리의 가슴을 때립니까? 그럼 한 수 더
살펴볼까요?
二十樹下三十客(이십수하삼십객) [스무나무 아래 서러운 나그네] 四十家中五十食(사십가중오십식)
[망할 놈의 집에서 쉰 밥을 주는구나] 人間豈有七十事(인간개유칠십사) [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을것가]
不如歸家三十食(불여귀가삼십식) [내 집에 돌아가 선 밥 먹음만 못하구나]
이 시는 김 삿갓이 한문 숫자풀이를
이용하여 함경도 어느 부잣집에서 냉대 받은 나그네의 심정을 완곡하게 풍자적으로 읊은 것입니다. 여기서 이십수(二十樹)는 느릅나무과에
속하는 스무나무를, 삼십객(三十客)의 삼십(三十)은 '서른'이니 '서러운'의 뜻으로 써서 삼십객(三十客)은 '서러운 나그네'를,
사십가(四十家)의 사십(四十)은 '마흔'이니 '망할'의 뜻으로 써서 사십가(四十家)는 '망할 (놈의) 집'의 뜻을, 오십식(五十食)의
오십(五十)은 '쉰'(상한)이니 오십식(五十食)은 '쉰 밥'을, 칠십사(七十事)의 칠십(七十)은 '일흔'이니 '이런'의 뜻으로 써서
칠십사(七十事)는 '이런 일'의 뜻을, 삼십식(三十食)에서는 삼십(三十)의 '서른'을 '미숙한, 선'의 뜻으로 써서 삼십식(三十食)은 '설익은
밥', 즉 '선 밥'의 뜻으로 노래한 시이지요. 그 기지와 풍자가 놀랄 만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시에 나오는 한문 숫자인
'二十, 三十, 四十, 五十, 七十, 三十'은 모두 그 숫자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의미 이외에 또 하나의 다른 뜻을 지니고 있음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지요. 이런 것을 두고 시어의 이중성이라 하는데, 하나의 시어가 두 가지의 뜻을 지니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처럼 시어는 하나의
의미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둘 또는 셋 이상의 의미를 지닐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시어와 산문의 언어가 다르게 느껴지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그럼 우리 고유의 정형시인 시조에서 그것도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서 화담, 박연 폭포와 더불어 송도 삼절로 불리고 있는 황진이의
시조를 살펴볼까요?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 창해하면 돌아오기 어려웨라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
이 시조에서 '벽계수(碧溪水)'는 '푸른 계곡 물'인 동시에 왕실 종친이었던 '벽계수'를, '명월(明月)'은 '밝은
달'과 황진이 자신의 기생 이름인 '명월'을 동시에 뜻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 여러분들도 잘 알고 계시겠지요. 여기서도 보는 바와 같이
시어가 지니는 이러한 이중성은 바로 시어에 함축적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위의 시에서 '푸른 계곡 물'과 '밝은 달'의 의미는
사전에 나오는 뜻풀이로서 이런 것을 '사전적 의미'라 하고, '벽계수'와 '명월'처럼 이 시 속에서만 중의적으로 그 뜻을 지니는 시어의 의미를
'함축적 의미'라고 하지요. 내 설명이 어렵습니까? 그래도 어떻게 합니까? 내 실력이 이 정도뿐이니 다른 방법이 없군요.
그럼 하나만 더 살펴볼까요?
'장미'가 시어로 씌어졌다고 할 때, 그것이 '관상용 식물인 장미과의 낙엽 관목'을 나타내는
시어로 사용되었다면 그것은 '사전적 의미'로 쓰인 것이요, 만일 '사랑하는 이에 대한 나의 정열적 사랑'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그것은
'함축적 의미'로 쓰인 것이지요. 이제 시어의 '함축적 의미'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마치기로 합시다.
3. 시인(詩人)과
시어(詩語)
이제 시인과 시어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합시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시에 사용된 언어는 모두 시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구요? 같은 대상을 두고 두 사람이 시라고 썼는데 한 사람의 작품은 시가
되고 한 사람의 작품은 시가 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의 시냐 아니냐의 가름은 두 사람이 사용한 시어의 차이에서 비롯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시어를 썼다 하더라도 그 시어가 적확하게 제자리를 잡아 앉았느냐도 문제가 되고 그 대상을 표현하는데 그 시어가 최선의
시어였느냐 아니냐도 문제가 될 것입니다.
이는 순전히 시인 개인의 시적 역량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시어는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기존의 언어 관념을 뛰어넘어서 독자로 하여금 폭넓은 상상력을 일깨우게 하는 것이어야 하며, 나아가서는 한 편의 시 속에서 그 시의 내용과
긴밀한 관계를 지니면서 시어 하나 하나가 표현하려는 사물이나 대상의 본질, 또는 이미지를 확대시켜 우리에게 간명하게 전달해 줄 수 있어야만
한다고 할 수 있지요. 이런 시어로 시를 쓸 수 있느냐 없느냐는 순전히 시인의 몫이지요. 그래서 시인에게 시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여기서 여러분도 잘 아시는 김수영의 '풀'을 한 번 볼까요?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
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이 시가 나오기까지 풀은 세상에 흔하면서도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식물일
뿐이었지요. 그러나 1960년대 말 김수영 시인에 의해서 억압받으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끈질긴 생명력으로 다시 일어서서 불의에 맞서 항거하는
'민중(民衆)', '민초(民草)'의 상징으로 태어났습니다. 이 '풀'은 김수영 시인의 '풀'로 태어나 모두의 '풀'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때 사용된 '풀'이 바로 시어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김춘수 시인이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김춘수 시인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듯이 시인은 시어의 의미를 확대
재발견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