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카페에 올린 ‘신항해일지’에서 동승했던 승무원들의 발병과 처리에 대한 기록은 있으나, 정작 내 자신에 대한 것은 없었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살아가는 데 한두 번은 어떤 병이든 원인이 되어 병원 신세를 지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원체 바쁘니까 병이 왔다가 얻어 먹을 게 없다고 간다.”고 대학교수이면서 명 법문가였던 박완일 법사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나 같은 경우는 ‘원체 긴장된 생활’이라 그런지 승선 중에는 크게 앓아 누운 적이 없었는데, 딱 한 번 1982년, 엑셀셔리퍼(Excelsior Reefer)호 승선 중, 카리브해에서 유럽으로 항해 중 발생한 현기증으로 쓰러져 독일에서 두 달을 입원한 적이 있었다.
카리브해, 북위 10도에 위치한 코스타리카의 리몬(Limon)항이었다. 날씨도 바람도 햇볕도 적당하게 좋았다. 바나나를 싣는 동안, 별로 할 일이 없으니, 몫 좋은 곳에 가서 가무잡잡한 살결의 아가씨 어깨를 쓰다듬으며 맥주를 마시거나, ‘오라는 데는 없지만 갈 곳이 많은’ 누구처럼 시내를 어슬렁거리기도 싫어서, 깔개 하나만 들고 선교(Top bridge : 집으로 치면 옥상) 위에 올라갔다.
하늘이 가장 가깝고, 위쪽이 아니면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이라 자리를 깔고, 알몸에다 수건 반쪽으로 그 곳(?)만 덮고는 햇볕 속에 발랑 드러누웠다. 부드러우면서도 조금은 강한 햇볕을 알랑한 바람에 섞어 쪼물락거려 발가락 사이까지 온몸에 칠했다. 나와 해 사이에는 아무런 장애물이 없기에 선이 명확한 그림자도 내 밑에 원형 그대로 깔렸다. 따끔거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모처럼 맑은 햇살을 얻어가는 기회라 참았다. 하루 1시간 정도로 2~3일은 계속한 것 같다. 내가 봐도 제법 불그스름하게 온몸이 잘 익었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나중에 밝혀졌지만, ‘과도한 일광욕은 인체에 크게 해롭다’는 것이며 이것이 발병의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의사의 경고를 들었다.
일 년을 통틀어 일조(日照)시간이 짧은 북구(北歐)와 달리 우리는 거의 일광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곳에 산다. 그걸 모르고 냅다 햇볕과 맞짱을 떴으니…….
카리브해의 코스타리카 리몬항
그리고는 유럽 독일의 함부르그항을 향해 출항했다. 순항이었다. 카리브해를 막 빠져나와 대서양을 가로지를 직선 항로를 긋고 올라선 지점이었다.
일기에는 「Apr. 4. 1982」 즉, 4월 4일로 표시되어 있다. 늘 하던 일과로 선교(船橋 : Bridge)를 둘러보고 기관 통제실(Control Room)로 가는 도중 갑자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뺑글뺑글 도는 격심한 현기증이 발생했다. 즉시 방으로 돌아와 누웠으나 약 3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어지럼 때문에 일어나는 구토를 두 번이나 했다. 머리와 몸을 꼼짝할 수가 없었지만, 정신은 너무나 또렷했다.
한밤중인 23:00경 일단 현기증은 멎었다. 당시의 위치가 북위 24도-56. 서경 060도-56인 지점이었다. 선박에서 어떤 사고가 발생하면 맨 먼저 시간과 위치부터 챙긴다. 도움을 청해도 어디쯤인가는 알려야 한다.
일등항해사를 불러 상황을 얘기하고 만일에 대비했다. 겨우 잠이 들었는데, 이튿날 아침에는 멀쩡하게 일어났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사십 평생에 처음 겪는 일이었다.
낮에는 이상 없이 잘 지냈다. 20:00경 세 차례, 오락실에서 한 차례 그리고 Bridge와 취침 전 목욕탕에서 간헐적으로 같은 증상이 일어났다. 그러나 21:00시부터는, 정도는 좀 약해진 느낌이나 현기증이 멎질 않는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빙글빙글 도는 현상뿐이다.
의무담당인 3등항해사가 전 선원을 뒤져 구해온 그럴법한 약도 먹어보고 2등항해사의 지압도 받는 등 각가지 요법(?)들이 동원되었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머리가 몸에 붙어 있다는 감각, 아니 머리가 없다는 느낌이었다. 만져보면 분명히 붙어 있는데……. 그러나 정신만은 또 몸과는 별개인 듯 또렷하게 정상이었다. 그러기에 우선은 뇌와 관계된 탈은 아니란 생각을 했다. 눈을 뜰 수가 없고 머리를 가눌 수가 없었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처럼 머리를 받쳐주거나 기대야만 했다.
4월 8일, Owner(선주)에게 타전했더니, 긴급조치를 수배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오후부터 다소 완화되기에 겨우 눈을 떴다. 오른쪽으로 누우면 약간 덜하나 왼쪽으로 누우면 심했다. 그야말로 미칠지경이었다.
다행히 날씨가 좋았기에 바다가 출렁이지는 않았다. 농장에서 갓 딴 시퍼런 풋 바나나를 가득 실은 1만톤의 선박은, 녀석의 우두머리인 선장이 머리가 붙었는지 떨어져 나간지를 모를 만큼 혼란 속에 빠져 있음도 아랑곳 없이 선수(船首)는 물결을 헤치고 선미(船尾)에는 아름다운 흰 물결을 그리며 힘차게 달린다.
21:15시 북위(北緯) 43도 28분, 서경(西經) 031도 34분의 위치에서 영국 해군병원(Royal Navy Hospital)에서 초단파무선전화(VHF)로 연락이 왔다. 아마도 Owner측에서 긴급 수배를 한 모양이었다. 거리가 멀어 Portside Radio(무선국)를 경유해야 했음으로 감도가 시원찮아 오래 지속하지 못하고 증세만 간단히 얘기하고 끊었다. 영국의 맨 남서쪽에 있는 Plymouth 외항 도착 시간에 맞추어 의사(醫師)를 대기시키겠다고 하며, 수시로 연락하자고 했다.
‘어휴!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신실까지 업혀 가서, 붙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머리를 책상 위에 마치 들고 있던 보따리 놓듯 얹어 놓은 체 눈을 감고 통화했다. 아무도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고, 그나마 그들과 영어로 서로 알아 묵을 수 있을 만큼 대화가 가능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간 짜증 속에서도 열심히 영어에 매달렸던 결과였기에 깊은 감사와 보람을 가졌다. 두어 차례 더 불러 상태를 물어주었다. 마치 하느님의 소리 같았다.
4월 11일, 오전 10:45분 Plymouth 외항 도착하자 도선사(Pilot)와 함께 기다리던 의사와 대리점(Agent)이 올라왔다. 의사가 문진(問診)과 검진으로 별다른 이상은 발견치 못하고 신경 관계 같다며 정밀검사를 위해 3~4일 입원을 권했다. 대리점과 상의 하여, 첫 기항지인 독일의 Hamburg에서 입원하기로 하고 거기까지의 Sea Pilot(대리 도선사)를 의뢰했다. 가장 절실한 것이 무엇보다도 잠이 필요하다고 했더니 약을 준다. 단. 심한 두통, 불면이 있을 때만 먹으라고 했다. 아마도 독한 수면제인 모양이었다.
역시 해양국의 선두 주자답게 인명을 최우선으로 하고 신속하게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영국 정신이 놀라웠다. 저녁에 약을 먹은 후 6시간 잤지만 비몽사몽이었다. 움직일 수는 있으나 어지러워 혼자 걷지는 못했다. 혼자 움직여 보다가 실내에서 두 번이나 바닥에 넘어졌다. 그래도 조타수들의 부축으로 선교(Bridge)에 올라가 도선사(Pilot)와 대리점과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부두에 접안하기까지 일체를 그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내 자신도 Hamburg에서 하선(下船), 입원하기로 하고 봇다리를 챙겼다.
영국의 플리머스항과 독일의 함브르크항
4월 14일, 독일 북부에 위치한 최대의 항구인 Hamburg 부두에 접안하자 마자 대기중인 Ambulance에 짐과 함께 실려 병원으로 향했다. 응급차 침대 위에서 몸을 묶일 때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마치 언젠가 본 죽은 사람 염(殮)하는 광경이 떠올랐다.
병원 도착 즉시 옷을 갈아입고 Test에 들어갔다. 혈액, X-ray(가슴과 머리의 앞, 뒤). 심전도 등등. 그러나 원인을 발견치 못했다고 했다. 오후 4시경. 귀 검사와 제자리걸음 Test를 실시하더니 원인이 귀에 있음이 판명되었기에 내일 이비인후과 전문 병원으로 이송한다고 했다. 저녁에 혈압이 145/110임을 간호원이 일러주고 갔다. 푸르스름한 한 접시의 야채죽은 더욱 서글프고 비참하게 했다.
‘제자리걸음’ 검사는 내 자신이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었다. 똑바로 선 자세에서 두 눈을 감고 천천히 그 자리에서 걸어보라고 했다. 한 발짝도 옆으로 가지 않고 또박또박 걸었다. 그만하고 눈을 떠 보라고 하기에 떠 보니 어어!! 이를 수가? 6~7m 떨어진 엉뚱한 곳에 서 있었다. 내 자신이 더 놀랐다. 이 열흘 동안의 정신적 불안과 고통은 내 40년 평생에 처음 당하는 것으로 거의 절망적이었다.
이렇게 하여 시작된 독일 Hamburg 병원의 입원이 양쪽 귀의 수술까지 거의 두 달이 걸렸다. 내가 영국에서 입원하지 않고 독일을 선택한 것은 일찍이 우리 간호사들이 많이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적중했다.
이비인후과로서는 유럽에서도 유명하다는 Hamburg 병원에 입원하던 그날 저녁에 한국인 간호사 홍(洪) 여사와 박(朴) 여사가 미리 연락을 받고 조금 일찍 나왔다며 찾아 주었다. 나중엔 어떻게 될 깝세라도 우선은 눈물이 날만큼 반갑고 고마웠다. 이후 퇴원, 귀국할 때까지 여러 사람의 한국 간호사들의 은혜를 입었으니까.
의학은 영국보다 독일이 앞선다고 했다. 잘 판단했다고 얘기해 준다. 쌓였던 여러 가지를 물어 봤다. 우선은 원인이다. 중이염 증후군으로 귓속의 사람 몸의 평형을 유지하는 달팽이관 한쪽이 손상되어 평형감각을 유지하지 못해 한쪽으로 만 뱅뱅 돌았단다. 그렇구만! 이제야 이해가 갔다.
자세한 일정은 아직 확실히 모르겠으나, 통상 먼저 염증을 완치한 후에 수술, 고막을 해 넣는단다. 그렇지 않으면 재발의 우려가 있단다. 이 병원은 특히 이비인후과가 유럽에서도 유명한 병원이라 잘 됐다며 시간이 걸리더래도 완전히 치료를 받고 가시라고 한다. 수술실에는 역시 한국인 간호원 이(李) 여사가 있어 많은 도움이 될 거란다. 지금까지의 불안이 가신다. 마음도 귀도 펑 하고 뚫리는 기분이다. 살았다는 안도감이랄까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다. (계속)
첫댓글 마치, 항로를 따라가듯- 병원생활을 목도하는것 같습니다.
그래도 삶의 기회가 신이 내려준 은총이 아니면 오늘 태양의 소중함을 알겠어요.
내용도 재밌고 삶의 순간도 디테일하게 전개해 매력과 흥미가 높아요.
不忘의 한 시간의 추억을 공유합니다!
건강하시고, 좋은 글 기대합니다.
항해일지를 보면서 "사람이 아니고 ... 허. 선천적으로 건강한 친구구나."했었다.
그런데 역시나 보통 사람이구나.
힘겨우면 귀도 탈이나는 건가??? 궁금 궁금
다음이 기대 되네요.
암튼 서완수도 보통 사람이었음을 확인.ㅋㅋ
나도 모스크에서 피부병 알았는데 호텔메니저의 도움으로 병원치료받고 병원비를 청구했는데 K B 은행 여행자 보험 이 이니고 미국계회사인것을 알고 난 깜짝놀랐지요. 우리나라 보.험업계의 배후에는 외국의 큰회사가 있다는것을 알았습니다. ㅎㅎ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