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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분 | 종 별 | 문화재 명칭 | 지정 번호 | 소 재 지 | 지정일자 |
국가지정 | 보 물 | 사천 매향비 | 614 | 곤양면 흥사리 산48 | 78.3.8 |
조선왕조의궤 | 1901-4 | 용현면 시청로 77 | 16.05.03 | ||
천연 기념물 | 사천 성내리 비자나무 | 287 | 곤양면 성내리 195 | 82.11.4 | |
사천 아두섬 공룡화석 산지 | 474 | 신수동 산 33-2 | 06.12.5 | ||
사 적 지 | 사천늑도유적 | 450 | 늑도동 일원 | 03.6.23 | |
무형 문화재 | 진주삼천포농악 | 11-1호 | 용현면 선진리 856 | 66.6.29 | |
가산오광대 | 73 | 용현면 선진리 856 | 80.11.17 | ||
등록문화재 | 사천 다솔사 괘불도 | 623 | 곤명면 다솔사길 417 | 14.10.29 | |
도 지 정 | 무형 문화재 | 판소리 고법 | 8 | 용현면 통양리 262 | 85.1.23 |
판소리 수궁가 | 9 | 용현면 통양리 262 | 85.1.23 | ||
사천마도갈방아소리 | 28 | 용현면 통양리 262 | 04.3.18 | ||
유형 문화재 | 다솔사 보안암석굴 | 39 | 곤양면 무고리 산43 | 72.2.12 | |
다솔사 대양루 | 83 | 곤명면 다솔사길 417 | 74.2.12 | ||
사천향교 | 220 | 사천읍 선인리 119 | 83.8.11 | ||
곤양향교 | 221 | 곤양면 송전리 355 | 83.8.11 | ||
사천 삼천포 매향암각 | 288 | 향촌동 산 46-1 | 93.1.8 | ||
사천 백천사 전적류 | 508 | 백천동 112번지 | 10.10.07 | ||
사천 백천사 달마대사관심론 | 560 | 백천동 112번지 | 14.03.20 | ||
사천 백천사 육조대사 법보단경 | 561 | 백천동 112번지 | 14.03.20 | ||
백운암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권하) | 568 | 사천읍 토촌길 181-15 | 15.1.15 | ||
백운암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권4) | 569 | 사천읍 토촌길 181-15 | 15.1.15 | ||
사천 백운암 대방광불화엄경 | 570 | 사천읍 토촌길 181-15 | 15.1.15 | ||
기 념 물 | 세종대왕 태실지 | 30 | 곤명면 은사리 산27 | 72.2.12 | |
단종 태실지 | 31 | 곤명면 은사리 438 | 72.2.12 | ||
신벽동 지석묘 | 39 | 신벽동 494 | 77.12.28 | ||
덕곡리 지석묘군 | 49 | 용현면 덕곡리 136-1일원 | 79.12.31 | ||
사천 조명군총 | 80 | 용현면 선진리 402 | 85.11.7 | ||
사천 성황당산성 | 132 | 정동면 예수리 산45-1일원 | 93.12.27 | ||
사천 연천숲 | 141 | 사남면 우천리 495-1 | 94.7.4 | ||
사천읍성 | 144 | 사천읍 선인리 580-2외2 | 94.9.26 | ||
사천 안점산봉수대 | 175 | 용현면 신복리 산4 | 97.12.31 | ||
사천 우산봉화대 | 176 | 곤양면 남문외리 산1 | 97.12.31 | ||
사천 금성리토성지 | 177 | 곤명면 금성리 산40,일원 | 97.12.31 | ||
사천 용산리사지 | 178 | 곤명면 용산리 334,335-1 | 97.12.31 | ||
사천 와룡동사지 | 179 | 와룡동 279 일원 | 97.12.31 | ||
사천 우천리도요지 | 233 | 사남면 우천리 1380 일원 | 2001.5.3 | ||
사천 사촌리 도요지 | 234 | 사남면 사촌리 산20-3일원 | 2001.5.3 | ||
사천 자혜리 갯지렁이 화석산지 | 241 | 서포면자혜리산29지선공유수면 | 2002.6.7 | ||
민속 문화재 | 가산리 석장승 | 3 | 축동면 가산리 626-1외1 | 74.12.24 | |
문화재 자료 | 구계서원 | 40 | 사천읍 구암리 산43 | 83.8.11 | |
대방진굴항 | 93 | 대방동 250 | 83.12.20 | ||
각산산성 | 95 | 대방동 산40 | 83.12.20 | ||
각산 봉화대 | 96 | 대방동 산2 | 83.12.20 | ||
사천환덕리 조씨고가 | 116 | 곤양면 환덕리 569 | 85.1.23 | ||
다솔사 극락전 | 148 | 곤명면 다솔사길 417 | 85.11.7 | ||
다솔사 응진전 | 149 | 곤명면 다솔사길 417 | 85.11.7 | ||
경백사 | 234 | 용현면 온정리 517 | 97.1.30 | ||
사천 선진리성 | 274 | 용현면 선진리 770 일원 | 98.9.8 | ||
사천 백천사 신중탱 | 514 | 백천동 112번지 | 10,10.07 | ||
사천 백천사 아미타후불탱 | 515 | 백천동 112번지 | 10,10,07 |
* * * 사천 흥사리 매향비
소재지 ; 곤양면흥사리산48
지정번호 : 보물 제 614 호(1978.03.08.)
규모 : 2㎡
매향비란 향나무를 땅에 묻고 그 위에 비를 세워 두는 것을 말함인데
다시 말해서 내세의 발원(소원을 비는 것)을 위하여 향을 강이나 바다에 잠기게 묻고
그 사실을 돌에 새겨 기념하기 위해 세우는 비를 말한다.
이 비는 고려 말 우왕(禑王) 13년(1387)에 세운 것으로 당시 왜구의 횡포가 극심하여
나라의 운명마저 불안해지자 승려 중심의 불교신자 4,100명이 향계를 맺고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살기가 평안함을 미륵보살께 비옵니다”라는
뜻의 204자의 글을 새겨 놓았다.
매향의 의식은 많이 행해진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민속적으로는 향나무를 땅에 묻어 미륵보살을 공양하며 부처 보살이 가는
아주 깨끗한 세상에 왕생하고자 하는 종교의식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향은 불태워서 천상계의 신명을 청해 모시는 것으로만 알고 있지만
향은 단지 태우는 것만 아니고 다른 방법으로 신명에게 고하여 알리는 수단이었으니
이것이 신앙의식의 매향 또는 침향으로서 미래 구복적인 성향이 강한
미륵신앙의 한 형태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므로 매향비에 나타난 발원형태는 모두 미륵 내세신앙과 연결된다고 하겠다.
그러면 이러한 매향 사례들은 어떠한 현실적 배경에서 세상을 구하고자
미륵신앙과 향을 접합시켰던 것일까?
불가에 전하는 바로는 매향의 최적지는 바닷물과 계곡물이 만나는 지점이라고 한다.
따라서 매향처가 바닷가나 섬 등지에 한정되어 있는
매향비는 ‘사천매향비'를 비롯하여 현재까지 알려진 곳은
전국에 모두 10여 곳이 있다. 사천 매향처도 옛날에는 바닷물이 들어 온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 * * 다솔사[ 多率寺 ]
소재지 ; 경남 사천시 곤명면 다솔사길 417(용산리 86).
이칭 ; 영악사(靈嶽寺), 영봉사(靈鳳寺)
건립연대 ; 511년(지증왕 12)
511년 조사 연기가 창건하여 '영악사'라 하였고, 636년(선덕여왕 5) 다솔사로 개칭하였다.
676년(문무왕 16) 대사 의상이 다시 '영봉사'라고 고쳐 부른 뒤 신라 말기 국사 도선이 중건하고
다솔사라고 하였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인 범어사(梵魚寺)의 말사이다. 봉명산은 이명산이라고도 한다.
사찰이 자리한 일대는 봉명산군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 511년(지증왕 12)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하여 ‘영악사(靈嶽寺)’라 하였고,
636년(선덕여왕 5) 건물 2동을 신축하고 다솔사로 개칭하였다.
676년(문무왕 16) 의상(義湘) 대사가 다시 ‘영봉사(靈鳳寺)’라고 고쳐 부른 뒤,
신라 말기 도선(道詵) 국사가 중건하고 다솔사라고 하였다.
1326년(충숙왕 13) 나옹(懶翁)이 중수하였고, 조선 초기에 영일·효익 등이 중수하였으며,
임진왜란의 병화로 소실되어 폐허가 되었던 것을 1686년(숙종 12) 복원하였다.
1748년(영조 24) 당우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나, 1758년 명부전·사왕문·대양루 등을 중건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대양루를 제외하고 1914년의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 재건한 것이다.
- 현존하는 당우로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된 대양루(大陽樓)를 비롯하여,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8호인 극락전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9호인 응진전, 대웅전·나한전(羅漢殿)·천왕전(天王殿)·요사채 등 10여 동의 건물이 있다.
대양루는 1749년(영조 25) 건립된 2층 맞배집으로서, 건평 106평의 큰 건물이다.
1658년에 중건하고, 1986년에 수리하였으며, 2000년 1월에 다시 보수를 마쳤다.
- 1978년 2월 8일에 있었던 대웅전 삼존불상 개금불사(改金佛事) 때
후불탱화 속에서 108개의 사리가 발견됨에 따라,
이 절에서는 익산 미륵사지의 석탑을 본뜬 높이 23m, 30평 정도의
성보법당(聖寶法堂)을 탑 안에 설치하여 적멸보궁사리탑(寂滅寶宮舍利塔)을 건립하였다.
이밖에도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마멸이 심한 마애불(磨崖佛)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9호인 보안암석굴(普安庵石窟), 부도군(浮屠群) 등이 있다.
보안암 석굴은 고려 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하여지며, 경주 석굴암의 형태와 비슷하다.
석굴 안의 본존불인 석가모니불은 코 부분이 깨어져 있으며,
본존불을 중심으로 하여 1.3m 내외의 석불좌상 16구가 안치되어 있는데,
조각수법으로 보아 조선시대 작품으로 추정된다.
부도군에는 도명(道明)·낙화(樂華)·성진(聖眞)·풍운(風雲)·세진(洗塵) 등 5인의 부도가 있다.
- 이 절은 일제 때 한용운(韓龍雲)이 머물러 수도하던 곳이며,
소설가 김동리(金東里)가 『등신불(等身佛)』을 쓴 곳이기도 하다.
이밖에도 절 주위에서 재배되는 죽로차(竹露茶)는 반야로(般若露)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명차이다.
[네이버 지식백과][多率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지정번호 ; 등록문화재 제623호 (2014.10.29.)
본 아미타 괘불도에서 아미타불은 오른손을 아래로 내리고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댄 수인(手印)을 하고 있다. 좌우의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은 연화를 쥐고 있으며 좌우가 대칭을 이룬 구도를 보인다. 가섭존자와 아난존자는 두 손을 합장하였다. 문수동자와 보현동자는 구름 문양 위의 색칠이 된 원형 구 안에 자리하였다. 문수동자는 사자를 타고 있으며 보현동자는 코끼리를 탄 도상을 보인다. 화면에는 전반적으로 전통적인 채색 기법을 사용하였으나 가섭존자의 얼굴 표현 등에서 서양화법을 도입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불과 보살의 신체 비례가 안정적이며 복식의 표현이 섬세하고 화려하다.
[네이버 지식백과]사천 다솔사 괘불도 (두산백과)
* * 다솔사 대양루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83호(1974.02.12.)
규모 : 4,634.8㎡
다솔사는 흔히 곤양 다솔사로 많이 알려져 왔으나 사실은 곤명면 용산리에 자리한 고찰이다.
대양루는 다솔사 경내에 있는 큰 누각으로써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이후 7년 동안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이 그러했듯이 다솔사도 병화를 입고 폐허화되었다. 그로부터 거의 100년이 지난 후인 숙종 12년(1686)에 승려들이 힘을 모아 10년 세월에 걸쳐 중창불사(: 절을 다시 이룩함)로 크게 중흥하였다. 그러나 62년이 지난 후인 영조 24년(1748)에 큰 불로 말미암아 불행히도 재앙을 겪었다.
그리하여 같은 왕 34년(1758)에 여러 스님이 또 합심하여 명부전과 대양루사왕문을 중건했다. 그런데 1914년 12월에 또 한번의 대화로 모든 전각이 불타는 불운을 겪었으나, 이 때 유독 대양루만은 그 화를 면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 누각은 맞배지붕의 2층으로 된 목조 기와 지붕으로서 높이가 13m나 되며 36개의 아름드리 큰 기둥이 무거운 몸체를 떠받치고 있다. 처음 건축 당시에는 사왕문이라 하여 아래층은 출입문 구실을 하였으나 뒤에 건물 왼편에 돌계단이 새로 생기면서 지금은 칸막이로 창고와 기타 용도로 이용되고 있다.
1974년 2월 16일 도지정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후 건물이 오래되어 몸체가 비스듬히 기울기 시작했는데, 1986년 8월 수리하였으나 다시 몸체가 기울어져 1999년 번와(기와를 교체)와 보수를 대대적으로 실시하여 2001년 4월 보수를 마무리하였다.
* * 다솔사 극락전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148호(1985.11.07.)
규모 : 81.8㎡
다솔사 경내에 있는 전각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목조와가의 맞배집으로 되어 있다. 다솔사의 연혁이 말해 주듯 크게는 임진란 때의 병화로 폐허가 되고 그로부터 몇 차례에 걸쳐 중건하였다. 그러나 영조 24년(1748)에는 3전과 3당이 불타는 재앙을 겪었다. 그러다가 1914년에 또 한번의 화재로 대양루를 제외한 모든 건물이 소실되자 그 이듬해부터 3년간 걸친 중창불사 끝에 현존한 것이 이 건물이다. 건축구조는 익공계에 속하는 양식이며 익공계란 임진란 이후 우리나라에서 성행하던 유형이다. 가구는 대개 지대석 위에 마루가 없으며 기둥 사이에 넛살문이 셋이고 주심포 짜임에 서까래는 연목과 부연으로 되어 있다.
이 전각의 주존불(으뜸으로 모시는 부처)은 ‘아미타불’이다. 아미타라는 말은 산스크리트말의 아미타유스(Amitayus), 혹은 아미타바(Amitabha)에서 따온 것이다. 아미타유스는 무한한 수명을 뜻하고 아미타바는 무한한 광명을 뜻하므로 각각 무량수·무량광으로 풀이된다. 뿐만아니라 무한한 광명은 지혜를 가리킨다 하며 ‘무량수전’ 또는 ‘미타전’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극락전은 정토종 계통의 절에서 아미타불을 모시어 둔 법당이다. 이 법당에는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대원을 품은 부처 즉, 아미타불좌상을 모시고 있고, 그 양쪽에는 극락정토에서 아미타불의 협시(좌우에서 가까이 모심)로서 부처의 교화를 돕는다는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 * 다솔사 응진전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149호 (1985.11.07.)
규모 : 77.3㎡
다솔사 경내에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 목조와가의 맞배집이다. 이 전각도 앞서의 극락전과 같은 시기에 건립한 건물로서 건축구조도 역시 극락전과 동일하다. 응진전은 석가모니불 가섭(과거 7불의 여섯 번째 부처)과 아난다(석가의 십대 제자 중의 한 사람)를 비롯한 16나한을 모신다. 나한전이라고도 일컬으며, 오백나한을 전각 가득하게 모시기도 한다.아라한은 본래 범어로써 존경을 받을만한 사람이라는 뜻 즉, 소승불교의 수행자 가운데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여 온갖 번뇌를 끊고 사제(네가지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 즉 고제, 집제, 멸제, 도제를 통틀어 일컬음. 사성제, 사진제⇒원사제, 고집멸도의 이치를 밝히어 깨달음을 얻어서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만한 공덕을 갖춘 성자를 말함이다. 또 열가지 부처의 칭호 가운데에 하나이며, 생사를 이미 초월하여 배울만한 법도가 없게 된 자리의 부처를 말한다.
불전은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게 마련인데 나한전만은 파격을 이루어 보는 이로 하여금 미소짓게 하는 수가 있다. 모셔진 각양각색 저마다의 개성이 강한 특징이 있는 나한상의 모습 때문이다. 나한은 아라한의 약칭으로 산스크리트 아라한을 음역한 것이다. 응공, 응진의 뜻을 지녔다. “공양을 받을만한 자격자”, “진리에 응하여 남을 깨우치게 하는 자” 즉 성자를 아라한이라 부른다.
* * 다솔사 보안암 석굴
소재지 ; 곤양면무고리산43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39호 (1972.02.12.)
규모 : 770.5㎡
시대 : 신라
보안암은 다솔사에 딸린 암자로 일명 미륵암이라고도 했으며 창건 연대는 명확하게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14세기(1336년)경 이곡이 쓴 기록에 의하면, “서봉사(지금은 절은 없고 그 터만 남아 있다) 남쪽 천령 위에 석굴을 만들어 미륵석상을 봉안한 것은 신라 신문왕(681~691)대의 두 왕자에 의해 창건했다”라는 것과 17세기 중엽의 최응천도 미륵봉의 석실 안에 [장육석불이 봉안되어 있다고 서술했다. 이러한 기록 등으로 미루어 보안암 석굴의 창건 연대는 신라 때인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현재 석굴 중앙에는 돌로 쪼아 만든 석가모니의 좌상(坐像)이 안치되어 있고, 좌상 뒤 좌우에는 아주 작은 돌로 쪼아 만든 16구의 나한상이 배치되어 있다. 원래 서봉사에 딸린 암자였으나 서봉사가 폐지됨에 따라 다솔사로 귀속되었다.
* * 다솔사 안심요
해방 이후 한국의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거목 김동리!
순수문학과 신인간주의의 문학사상으로 일관한 그는 광복 직후 민족주의 문학 진영에 가담하고 우익 민족문학론을 옹호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고유의 토속성과 외래사상과의 대립을 통해 인간성의 문제를 그렸고 6.25전쟁 이후에는 인간과 이념의 갈등에 주안을 두었다.
대표작품은 《화랑의 후예》,《무녀도》,《역마》,《황토기》,《등신불》등이 있다.
김동리
본명은 김시종, 동리는 필명으로 1913년 11월 24일 경북 경주 태생. 경주 제일교회 부속 계남학교를 졸업한 후 1926년 대구 계성학교에 입학하였 다가 1928년 서울 경신학교 3학년에 편입하였으나 이듬해 중퇴하였다.
193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화랑의 후예》, 이듬해 동아일보 신춘 문예에 《산화》가 거듭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그 후 《바위》, 《무녀도》《황토기》등의 문제작들을 발표함으로써 주목받는 신진작가의 한 사람 으로 부상하였으며, 유진오와 ‘순수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김동리의 문학세계에서 가장 뚜렷한 흐름을 이루고 있는 것은, 토착적 한국 인의 삶과 정신을 깊이 있게 탐구하면서, 그것을 통하여 우주 속에 놓인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의 궁극적인 모습을 이해하려는 끈질긴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등신불의 모티브 ‘다솔사’
193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등단한 김동리는 창작에만 집필 하고자 조용한 곳을 찾던 중 형의 소개로 다솔사에 머물게 된다. 다솔사의 요사채 안심요에 머물렀던 것이다. 《황토기》의 장사 와 절맥설 모티브, 《당고개 무당》의 당고개, 《황토기》와 《산제》의 주산, 《바위》의 다솔사 앞 장군석과 문둥이 마을 등 그의 작품의 주요 모티브가 된 것이 바로 사천 다솔사 지역에 있었던 것이다. 다솔사에 얽힌 전설을 기초로 하여 쓰여진 작품이《황토기》이고 다솔사에 있었던 소신대를 바탕으로 한용운 스님과 범부 범술 세 분의 ‘소신공양’ 담론에 충격을 받고 쓰여진 작품이 《등신불》이다.
‘등신불 축제’로 문학적 관광요소 재조명
김동리 소설의 모티브가 된 다솔사를 중심으로 한 문학적 관광요소들을 재조명하고 문학테마의 축제를 개발함에 따라 지역주민의 자긍심을 일깨우고 문화적 욕구충족에 기여하기 위해 등신불 축제를 기획하였다. 축제의 컨셉은 소설 등신불에 묘사되어 있는 등신불의 모습에서 모티브를 찾았으며, 축제의 주제는 ‘평범한 삶, 특별한 만남’이라 했으며, 슬로건은 ‘나의 등신불을 찾아서’로 설정하였다.
즉, 등신불은 우리들의 삶 그 자체다. 소설 속의 등신불처럼 ’허리도 제대로 펴고 앉지 못한 자세’는 삶의 무게에 짓눌려 사는 인간의 모습 그대로다. ‘머리위에 조그만 향로를 얹은 채’라는 글귀에서 인간은 누구나 알게 모르게 자신의 머리 위에 향로를 얹고 살아간다는 걸 깨달을 수 있다. 이 향로에서 어떤 향이 피어오르는가에 따라 우리들의 표정과 모습은 달라진다. 또한 등신불 자체가 해탈한 인간의 모습이듯 우리는 일상적인 삶속에서 나름대로의 가치를 추구하며 타인과의 만남, 즉 인연을 통하여 소중한 가치와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곧 우리들의 등신불이다.
축제 개요
일시 : 미정(부처님오신날 이후 주말 3일간)
장소 : 다자연, 다솔사, 별주부전테마파크(3개소)
행사 : 전시, 공연행사, 경연대회, 체험행사, 학술행사 등
주관 : 등신불축제추진위원회
주최 : 사천시
* * * 세종대왕 태실지
소재지 ; 곤양면은사리산27
지정번호 : 기념물 제30호(1972.02.12.)
규모 : 446.4㎡
시대 :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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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명면 은사리 소곡산에 있으며, 일명 태봉이라고도 한다. 이 태실지는 세종 임금이 왕위에 오르던 해인 1418년에 곤양군의 전신인 옛 곤명현 소곡산이 전국에서 가장 좋은 길지라 하여 임금(세종)의 태를 이곳에 안치하였던 것이다. 그로 인하여 이듬해인 세종 1년(1419)에 곤명현은 남해현과 합하여 큰 고을로 승격하게 되었다. 이름하여 곤남군이라 하였는데, 실로 파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에는 왜적에게 짓밟히는 불운을 겪었으니 임금의 태실이라 하여 온전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선조 34년(1601) 3월에, 대대적인 수리를 하게 되었으며 영조 10년(1734)에는 태실비를 세우고 [태실수개의궤:수리한 기록문서]를 남겼다. 한편 일제의 식민정책으로 1929년에 태실의 소유권자인 경복궁이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태실 임야를 모두 민간인에게 팔고 태실은 경기도 양주로 옮겨갔다고 한다. 현재 태실지에는 민간인의 묘지로 변하고 다만 당시의 조형물인 태실비와 기타 석물 등의 유물을 산자락에 한데 모아서 1972년 2월 12일 지방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따라서 《세종대왕 · 단종대왕 태실수개의궤》의 원본은 현재 우리 시에서 보관하고 있으며 2000년 12월에 번역, 복원하여 책으로 발간되었다.
* * * 단종태실지
소재지 ; 곤양면은사리438
지정번호 : 기념물 제31호(1972.02.12.)
규모 : 4,954㎡
시대 : 조선
단종태실지는 세종대왕이 임금자리에 오른지 23년(1441)에 그의 애손(愛孫)인 단종이 태어나자 자신의 태실 앞산에 태실을 안치토록 어명을 내려 곧 그해에 조영하였다. 임진란 때 왜적이 몰려와 규모가 큰 세종대왕의 태실은 거의 파괴되었으나, 규모가 작은 단종 태실은 적의 눈길을 끌지 못하여 다행히도 화를 면했다. 영조 10년(1734) 세종대왕의 태실비를 세울 때 단종의 태실비도 이때 함께 세웠다. 단종은 세종 23년(1441)에 태어나서 12살의 어린 나이로 부왕인 문종의 뒤를 이어 1452년에 제6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를 보필하던 중신들이 그의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참살되자 1455년 재위 3년만에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으로 봉해져, 강원도 영월 땅에 유배되었다가 그의 숙부인 세조 3년(1457)에 죽음을 당한,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슬픈 운명의 임금이었다. 현재 태실지 산비탈에 석물들이 흩어져 있고 본래의 태실지에는 민묘가 있으며 1972년 2월 12일 세종대왕태실지와 함께 도지정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하고 있으며 역시 수리에 관한 내용은 세종대왕·단종대왕태실수개의궤에 기록되어 있고 2000년 사천문화원에서 번역본을 발간한 바 있다.
* * * 사천 성내리 비자나무
소재지 ; 곤양면성내리195
지정번호 : 천연기념물 제 287호(1982.11.04.)
규모 : 424㎡(약300년가량)
원래 이 비자나무가 서 있는 자리는 옛 곤양군 시절의 당시 읍성 안에 청사가 즐비해 있던 그 중 형방(죄인을 구치하던 곳)터였다고 전해지며 그 때 형방 앞뜰에 심어 놓은 것이 오늘날에 이른다고 한다. 두 그루 중 하나는 높이 21m, 둘레 5m 가량이며 또 한 그루는 지상에서 3~4m 높이의 줄기가 썩기 시작하면서 커다란 구멍이 생겼는데 10여년 전 줄기가 꺾여 나갔다. 그러던 것이 가지가 새로 돋아나서 지금은 나무의 키가 약15m에 이르고 있다.
이 나무는 늘 푸른 주목과의 비자나무속에 딸린 바늘잎 큰키나무로서 높이 25m, 지름 2m에 달한다고 한다. 열매는 핵과로서 두 끝이 뾰족하고 기름이 많으며 맛이 떫고 구충제로 쓰이는데 특히 촌충이 잘 죽는다고 한다. 이듬해 9~10월에 붉은 자주색으로 성숙하고 우리나라의 제주도와 일본, 중국에 분포하고 있다.
* * * 사천읍성
소재지 ; 사천읍선인리580-2일대
지정번호 : 기념물 제 144 호 (1994.09.26.)
규모 : 4,984.8㎡
축성 시기는 조선 세종 24년(1442)이며 병조참판 신인손이 왕명에 의해 성을 쌓았습니다. 이로부터 4년 뒤인 세종 27년(1445) 봄에 공청(공무를 보는 집) 등 모든 건물을 짓고 현기를 정동고읍에서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규모를 보면 처음의 기록에는 성 둘레 3,015척, 성벽의 높이 10.5~11.5척,
성문과 옹성이 각 세 곳이라 하였습니다.
그 후의 기록에는 성둘레 5,015척, 성벽의 높이 15척, 성가퀴(여첩) 630곳,
성문 및 옹성이 각 세 곳에 있다 하였습니다.
이로 미루어 초기에 추가하여 증축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 이 성은 본래 백성을 보호하고 외적을 막기 위해 쌓았으나 임진 난 때 왜적에게 짓밟히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이후 선조 32년(1598) 9월 28일경, 병사 정기룡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과 명나라 원군이 연합하여 이 성을 탈환하기 위해 혈전을 벌려 왜적을 몰아냈습니다. 이때 명나라의 유격장 노득공이 전사하였고 지금의 산성공원은 옛 성의 일부로서 성안에는 수양루와 팔각정 등 각종 휴게시설이 있어 사천 시민들을 위한 편안한 휴식공간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사천읍성의 위치는 정의리 일부와 선인리 일부에 걸쳐 있으며, 현재의 수양공원 일대를 포함하는 전지역이 옛 읍성지이다. 축성시기는 조선 세종 24년(1442)에 병조참판 신인손이 왕명에 의해 성을 쌓았다. 이로부터 4년 뒤인 세종 27년(1445) 봄에 공청(공무를 보는 집) 등 모든 건물을 짓고 현기를 정동 고읍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규모를 보면 처음의 기록에는 성둘레 3,015척, 성벽의 높이 10.5~11.5척, 성문과 옹성이 각 세 곳이라 하였다. 그 후의 기록에는 성둘레 5,015척, 성벽의 높이 15척, 성가퀴 630곳, 성문 및 옹성이 각 세 곳에 있다 하였다. 이로 미루어 초기에 추가하여 증축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이 성은 본래 백성을 보호하고 왜적을 막기 위해 쌓았으나 임진란 때 왜적에게 짓밟히는 수모를 겪었다. 특히 선조 32년(1598) 9월 28일경, 병사 정기룡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과 명나라 원군이 연합하여 이 성을 탈환하기 위해 혈전을 벌여 왜적을 몰아내었다. 이때 명나라의 유격장 노득공이 전사하였다. 지금의 산성공원은 옛 읍성의 일부로서 성안에는 수양루와 팔각정 등이 있어 시민의 휴식공간이 되고 있다.
* * * 사천 조명군총
소재지 ; 용현면선진리402
지정번호 : 기념물 제80호(1985.11.07.)
규모 : 1,534㎡
조명군총은 조선조 선조 30년(1597) 1월에 왜적이 재침하여 일어난 정유재란 당시 선진리성(당시는 신채라고 함)에 포진하고 있던 왜적을 몰아내기 위해 조명연합군이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가 산화한 희생자의 넋이 잠들고 있는 곳이다.
무덤의 형태는 사방 20칸(35m)의 방형분묘(네모반듯한 무덤)로서 흔히 ‘당병무덤’이라 일컬었으며, 속칭 ‘댕강무데기’라고도 한다. 해방 전까지는 무덤 위에 [당병공양탑]이라 쓰인 높이 1m 가량의 표석이 서 있었으나 해방 후에 없어졌다. 그러나 이 무덤만은 약 400년 동안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 채 잘 보존되어 왔으며, 지금은 조·명연합군전몰위령비가 무덤 앞에 세워져 있고, 1985년 11월 7일 도지정 기념물로 지정되어 조명군총이라 명명하여 보호되고 있다.
조명군총의 유래를 살펴볼 것 같으면 선조 25년(1592) 임란 4월 우리나라를 침략한 일본은 강화교섭을 3년이나 끌다가 결렬되자, 1597년 1월 일본군이 우리나라를 재침하여 북진하려다 육지에서는 9월 6일 괴산 근방 소사전투에서, 해상에서는 9월 16일 노량해전에서 대패하여 북진과 서진계획이 저지되자 전국에 일대전환이 왔다. 그리하여 일군은 서둘러 경상도 남해안 지방으로 퇴각하여 동쪽으로는 울산에서부터 서쪽으로는 순천에 이르는 800여리 연해에 성을 쌓거나 또는 수축하고 분주하였다. 이때 사천지방에는 그해 10월부터 12월 3개월에 걸쳐 왜장 모리길성이 선진에 상륙하여 성을 수축한 것을 그 이듬해인 1598년 왜장 도진의홍 부자가 진을 쳤는데 명나라 동정군의 중로제독 동일원과 경상우병사 정기룡이 약 3만여 병력으로 9월 19일부터 진주에서 남강을 건너 망진채, 영춘채, 곤양성을 차례로 빼앗고 사천구성의 적도 크게 무찌른 후 10월 초하루에는 선진의 신채를 다그쳐 왜적을 바다로 몰아내려다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때에 아군 진중의 폭약궤에서 발생한 불의의 화란으로 적계의 역습을 받게 되어 아군은 수천 명의 희생자를 내었는데 이때 분사한 전사자의 수급을 적의 손으로 장사된 곳이 이 무덤인 것이다. 적은 이 전투에서 38,717명의 목을 베었다고 공칭하였으며, 도진의홍은 그의 부하인 후시래손좌위문에게 명하여 성밖에다 사방 20간 되는 땅을 파서 수급을 묻고 큰 무덤을 만들어서 진승 졸사파가 장례를 집행한 후 ‘경관’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또한 참수한 수급의 코와 귀를 베어 큰 나무통 10개에 넣고 소금에 절인 후 전공 공물로 본국에 보냈다고 도진의홍기에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선조실록에 의하면 당시 전사한 명군의 수는 7~8천명에 이른다고 기록되어 있어 3만 명 이상의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물론 승자 쪽에서는 전과를 크게 과장하려 하고 반대로 패자쪽에서는 그 피해를 가능한한 줄이려고 하는 것이 예사(例事)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38,717명 대 7~8천명이라는 큰 차이는 과장이라도 이만저만의 과장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당시 동일원 휘하의 조 · 명연합군의 총병력 약 3만 명보다도 많다는 점은 믿기 어려운 숫자인 것이다. 당시 왜군이 전승물로 코와 귀를 잘라 보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그들은 전투한 뒤 또는 분탕질 할 때 가능하면 죽은 사람의 코와 귀를 잘라갔을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과장된 것으로 보이는 일본측 기록의 38,717명 가운데 10월 1일 전투에서 조.명군 전사자 외에 그 이전의 여러 전투에서 전사한 조.명군 및 이러한 전쟁통에 억울하게 죽은 일반 양민, 그리고 오래 전부터 자행해 온 왜군의 분탕질로 무참히 학살당한 인근 지방의 양민들의 숫자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에서 살폈듯이 이 무덤은 근년까지 오랫동안 우리들의 관심밖에 방치되어 너무 소홀하게 대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당병무덤이란 이름과 같이 명군 전사자의 수급만 많이 묻혀 있다는 인식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무덤이 비록 명군전사자들의 수급이 많이 묻혀있다 하더라도 왜침을 당한 우리나라의 국난을 구하기 위해 원군으로 파병되어 왜적을 몰아내려다 이국 땅에서 목숨을 바친 원혼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들의 숭고한 정신을 우리들은 높이 현창해 주어야 마땅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행히 1983년에 이르러 사천문화원이 중심으로한 사천사회단체협의회가 주관하여 사천시민은 물론 출향인사들의 정성어린 성금으로 무덤 앞에 광장을 마련하였으며 전몰 제385주년 만인 1983년 11월 4일 조명연합군전몰위령비를 건립하여 제막식을 성대히 하는 한편, 영령을 추모하는 의범을 비로소 가졌다. 따라서 사천시 지원하에 사천문화원이 주관하여 해마다 음력 10월 1일을 기해 연례행사로 위령제를 거행하게 되었다. 그 후 1991년 12월에는 도비 지원으로 이곳을 역사의 산교육장으로 삼기 위해 나무들을 베어내고 본래의 형태로 복원하였다. 충남 금산의 칠백의총과 남원의 만인의총은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반해 이곳 조명군총은 지방문화재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칠백의총이나 만인의총에 못지않게 나라를 위하여 산화한 원혼들이 잠들고 있는 곳으로 특히 이국땅에서 희생된 명나라 군사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차원에서라도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되어져야 할 것이다. 군총 옆에는 임진란 때 전공공물인 일본 경도 풍신수길묘 앞에 있는 이총(귀무덤)의 원혼을 환국하여 안장한 곳이 있으며, 맞은 편 길 건너 정득열 현감의 비가 진주성 싸움의 처참함을 알리며 서 있다. 한편 2001년부터 5개년 계획으로 성역화사업을 하기 위하여 발굴조사를 하던 중 지난 2004년 6월에 소승자총통과 만력통보가 출토 되었다. 이 중 소승자총통은 철제이며 죽절이 없는 것으로 중국제일 가능성이 높고 또한 총신안에 2발의 탄환이 장전된 채로 출토되어 정유재란 당시 조.명 연합군과 왜군의 전투가 있었던 지역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 * 조명연합군전몰위령비
규 모 : 높이 2.12m 폭 73cm 두께 42cm
전면각 : 조명연합군전몰위령비(朝明聯合軍戰歿慰靈碑)
측면각 : 서기(西紀)일구팔삼년십일월사일세움 (癸亥十月初一日戰歿385週忌)주최 : 社團法人 泗川文化院(院長 吳大泳)
주관 : 泗川社會團體協議會(會長 張在薰)
협찬 : 泗 川 郡(郡守 梁鍾守)
새삼 덧없어라. 시간(時間)이란 무시종(無始終)의 바람결이며 그 수레바퀴에 실려가 누누(累累)한 청사(靑史)의 책장 밖에서 민들레꽃 솜털인 듯 떠돌이 구름다운 무주원혼(無主怨魂)들이 구천어디메 오갈곳 없음인들 무릇 얼마리오. 저기 당병소(唐兵沼)와 사남(泗南) 화전(花田)의 병둔(兵屯)자리 및 왯골, 왯등 따위로 이름이 남았고 이 일대 선진신성(船津新城)터는 一五九七年 정유(丁酉) 재침(再侵)후 十二月 卄二日에 준공(竣工)시킨 왜장(倭將) 도진의홍(島津義弘)이 十여 달이나 차지했던 자취로서 어언 근 400년(近 四百年)의 춘풍추우(春風秋雨)동안 이곳 선진리(船津里)의 속칭 · 댕강무데기 · 아래 무언의 흙이 된 왜군 명병과 호국전몰(護國戰歿)의 사연들을 되살려 보련다.
앞서 임계양란(壬癸兩亂)으로 이 땅 남북강산(南北江山)의 조야민생(朝野民生)을 짓밟았던 적괴(敵魁) 풍신수길(豊臣季吉)의 무엄한 도이(島夷) 강화3년(講和三年) 교섭의 결렬에 이어 정유년(丁酉年)에 재침(再侵) 북진(北進)하려다가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에 떠나더니 선진신성(船津新城) 안에 농성 하였기 익98년(翌九八年) 무술(戊戌) 9월(九月) 스무날부터 명중로군(明中路軍) 동일원(董一元)과 우리 정기룡군(鄭起龍軍)이 사납게 쳐몰아 망진(望晉), 영춘(永春), 곤양채(昆陽寨)를 차례로 빼앗고 사천읍성(泗川邑城)의 적(敵)도 크게 무찔렀다. 마침내 十月 첫날에 선진왜성(船津倭城)을 다그쳤으나 배수진(背水陣)의 적계(敵計)에 역습당하여 분사(憤死)한 아군(我軍) 일만(一萬)내외의 수급(首級)이 여기 당병(唐兵)무덤에 적의 손으로 장사됐다.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정기용군(鄭起龍軍)의 이천이백(二千二百)과 제독(提督) 동일원군을 합쳐 3만6천설(三萬六千說)도 있지만 모국기선봉 7천5백(七千五百)과 좌우익(左右翼) 각 4천(四千)이면 만5천5백(萬五千五百)의 실전주력(實戰主力)과 적수(敵數) 약 8천(八千)의 대결인데 아군진중(我軍陣中)의 병고(兵庫)에서 발생한 화란(火難)에다 동제독(董提督)의 전략(戰略)이 경적(輕敵)의 허(虛)를 범한 후평(後評)마저 있었다.
기승한 흉적(兇敵)은 동지(冬至)달 열여드렛날 병선(兵船) 5백척(五百隻)으로 사천선창(泗川船滄)을 떠나더니 강주해(江州海)를 거쳐 노량(露梁)나루에 이르매 서둘러 여수(麗水)서 달려온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의 연합군(聯合軍)과 해전사상(海戰史上)에 불후(不朽)할 노량대해전(露梁大海戰)을 치렀다. 이튿날 미명(未明)의 관음포(觀音浦)에서 이통제사가 순국(殉國)한 격전(激戰) 끝에 패잔선(敗殘船) 겨우 5십여척(五十餘隻)을 이끌고 혼비(魂飛)한 적(敵) 도진(島津)이 도망치자 묘도(猫島) 서편(西便)으로 패적장(敗敵將) 소서행장(小四行長) 또한 탈주함으로써 악몽(惡夢) 7년(七年)의 임란(壬亂) 싸움이 선진포(船津浦)를 마지막으로 설욕(雪辱)의 막을 내린 셈이다. 일본(日本)의 고도(古都) 경도(京都)에 왜구(倭寇)들이 전공공물(戰功貢物)로써 묻혀 있던 이총(耳塚)에서 금년(今年) 9월(九月) 한일유지(韓日有志)들이 위령(慰靈)의 향사(享祀)를 가졌거니와 왕정(王政) 한 때의 내우(內憂)가 천추(千秋)의 외환(外患)을 자초(自招)한 공죄(功罪)야 여부간에 강토(疆土)의 북반천지(北半天地)는 아직 잠겨있는 채 우리들 민주공화조국(民主共和祖國)을 세운지라 이제 향민(鄕民)의 미애(微哀)를 모아 먼먼 이국(異國)땅에 불귀(不歸)의 한객(恨客)으로 남은 명대맹방민(明代盟邦民)의 굳은 전우애를 기리며 삼가 조.명연합군위령(朝.明聯合軍慰靈)들의 명복(冥福)을 비는도다.
어즈버 성웅(聖雄) 이순신공(李舜臣公)의 전상독전(戰傷督戰)과 두척의 거북철선까지 신출귀몰(新出鬼沒)턴 성난 선진(船津) 앞바다는 그 분들을 진혼(鎭魂)하여 길이 고요하라. 西紀 一九八三年 十二月 四日 (癸亥十月初一日 戰歿 三八五週期)이 비에 있어 파성(巴城) 설창수(薛昌洙)는 글 지었고, 은초(隱樵) 정명수(鄭命壽)는 글씨 쓰다.
* * * 선진리성
소재지 ; 용현면선진리 770일원
지정번호 : 경상남도 지정문화재 제 274 호 (1998.09.08.)
규모 : 76,637㎡
선진리성은 사천읍에서 서남쪽으로 약5km 떨어진 선진리 북쪽의 얕은 언덕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남쪽과 서쪽, 북쪽 3면은 바다에 임하고 있고 동쪽의 한 면만 육지와 이어져 있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축조한 일본식 성곽으로 이순신 장군에 의해 격파되기도 한 전적지입니다. 이 곳 선진리성은 벚꽃으로도 유명한데 선진리성으로 오는길에 길게 펼쳐진 벚꽃터널과 백년을 넘게 산 벚나무들의 웅장한 아름다움이 봄마다 많은 관광객들을 이 곳으로 발걸음하게 합니다. 선진리성은 현재 성터만 남아있고 시민들의 여가생활을 즐기는 공원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산책길과 잔디공원이 잘 조성되어 있어 가족, 연인들이 나들이 오기에 좋습니다. 벚꽃이 만개하는 시기에 맞춰 사천의 큰 축제인 와룡문화제와 구암제도 개최되어 이 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석루가 무너져 현재는 토성과 문지, 장대지로 추측되는 시설이 남아있습니다. 입구 돌계단을 올라와 마주하는 성벽을 따라 걷다보면 야외공연장이 보이고 성문을 통하면 천수각터와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한 전적기념비(충령비)와 이 곳에서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충무공 사천해전 승첩기념비를 볼 수 있습니다. 선진리성을 둘러싸고 있는 바다를 바라보다보면 그 옛날 사천해전의 영광을 다시금 떠올려보게 됩니다.
- 사천의 선진리성은 임진왜란 시기에 쳐들어온 왜군들이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쌓은 일본식 성곽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선진리왜성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과거의 기록을 보면 선진리성의 성 안쪽과 외곽 쪽으로 많은 시설과 건축물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 * * 대방진 굴항
소재지 ; 사천시대방동250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93호 (1983.12.20.)
규모 : 4,621㎡
대방진굴항은 고려시대 우리나라 연안을 빈번히 침범하던 왜구의 노략질을 방비하기 위하여 설치한 구라량의 영이 있던 곳으로 수군만호가 있었다. 그 뒤 구라량이 폐영이 되면서 소규모의 선진으로 남아 있다가 조선시대 말경 순조 때 비로소 이곳에 굴항을 축조하였다. 이 역사에는 진주목에서 관내 72개 면민을 동원하여 부역을 시켰으며 굴항이 축조된 다음에는 이곳에 조곡 운송선과 전함이 정박했다.
* * * 각산산성
소재지 ; 사천시대방동산40 (삼천포항 각산 일원)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 95 호 (1983.12.20.)
규모 : 7,093.3㎡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으로 외적의 침입이 잦아 이에 대비한 축성이 삼국시대부터 이뤄져 도처의 요새지에는 성지가 남아 있는데, 남한 각지에 남아 있는 것만도 1,115개나 된다고 한다. 이들 성은 축성 형식에 따라 도성, 산성, 읍성, 행성, 왜성 등으로 구분하며, 또 지형의 이용에 따라 테메식, 포곡식, 평지성 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삼천포항을 서남 방향으로 병풍처럼 둘러 쳐 있는 산이 각산인데 바다를 한 눈에 굽어 볼 수 있는 지역으로서 이 산의 8부 능선에 길이 242m를 돌로 쌓은 석성이 남아 있으니 이 곳이 각산산성이다. 성의 남쪽 성문은 원형대로 남아 있으니 성벽의 대부분이 허물어져 있어 복원을 하였다.
이 성은 백제의 제30대 무왕 6년(A.D 605년)에 축성한 것으로 기록은 전하고 있다. 백제는 전성기에 영토를 이 지방까지 확장한 적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진주목본백제거열성」 즉, 「진주는 본래 백제의 거열성이었다」하는 대목을 보면 진주가 백제의 영토였다는 사실이 명백히 나온다. 가야제국이 흩어져 살다가 가락국이 신라에 의하여 병합될 무렵에 진주지방이 고령, 가야는 백제가 공취하여 거열성을 두었다. 하고 무왕 6년 2월에 각 산성을 쌓았다고 하였는데 이 성은 진주의 남쪽 76里에 있다고 하였으니 오늘의 각산산성이다. 이 산성은 그 뒤 고려시대에는 삼별초난을 토평하는데도 활용되었으며 왜구의 침범에는 각산리의 주민들이 이 산성에 의지해서 대응했던 곳이다.
* * * 각산봉수대
소재지 ; 사천시대방동산2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 96 호 (1983.12.20.)
규모 : 896,7㎡
각산의 정상인 해발 408m의 고지에 있다. 이 봉수는 고려 때 설치된 간봉이며 남해의 금산에 있는 구정봉의 연락을 창선면 대방산을 거쳐서 받았으며 이를 다시, 고려 때부터 설치된 용현면의 침지 봉수와 곤양면의 우산 봉수로 보냈으며 조선시대 세종 때 봉수망의 정비로 침지봉수와 성황당 봉수를 폐지하고 용현면 안점 봉수를 다시 설치하여 서로 연락하였다. 또 한편으로 사량도의 공수산 봉수를 고성 하일면의 좌이산 봉수에 전달하는 역할도 하였던 곳이다.
* * * 사천 늑도 유적지
소재지 ; 늑도동 일원
지정번호 : 사적지 제 450호(2003.06.23.)
규모 : 250,671㎡
늑도패총은 1985년 1월 14일 지정면적 34,159㎡로 경상남도지정 기념물 제75호로 지정되었다가 2003년 6월 23일 지정면적 157,904㎡, 보호구역 89,407㎡ 총 250,671㎡로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450호 사천 늑도유적으로 지정되었다. 늑도는 삼천포항의 서쪽에 위치한 남해군 창선도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조그마한 섬으로 길이 970m, 너비 720m, 면적 46㏊(0.56㎢)인 작은 섬인데 섬의 남쪽과 북쪽에는 큰섬산과 작은섬산으로 불리는 해발 90m와 60m의 봉우리들이 있고 양봉우리 사이는 비교적 평탄면을 이루며 연결되는 안부를 위시하여 섬 일원에 커다란 패총이 형성되어 있는 곳이다.
늑도유적은 1979년 부산대학교박물관이 지표조사를 통해 학계에 알려진 후 1985년 10월 1일부터 40일간에 걸친 1차 발굴조사에 이어 1986년 5월 19일부터 30일간에 걸친 2차 발굴조사를 부산대학교 박물관에서 실시하였다. 이때의 발굴에서는 초기 철기시대인 B.C 1세기경으로 추정되는 주거지 11동과 무덤 73기[옹관묘 35기(유아, 소아 매장), 토광묘 38기(성인 매장)]가 확인되었으며 바리형 민무늬토기, 덧띠토기, 민무늬 항아리 등 12점과 숫돌 2점, 사슴뿔 2개 등이 출토되었다. 이곳의 움집들은 약 150㎡ 범위에 밀집되어 있어 대부분이 아래위로 겹쳐 있는데 구릉의 사면 아래쪽에서 점차 위로 옮겨가면서 집터를 마련해 나간 것 같다. 또한 이 유적에서 당시의 생활방식이 농경, 어로, 수렵의 수단에 의존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1950년대까지도 이 고장에 있었던 애기장(葬 : 어린아이가 죽으면 아무런 격식도 없이 땅속에 관을 묻는 것)이 아득한 옛날부터의 유습과 습속으로 끈질기게 이어져 온 흐름에 새삼 놀라게 된다.
3차 발굴조사는 1998년 부산지방국토관리청에서 시행하는 남해 창선도와 대방동 간의 국도3호선 구간을 연결하는 연륙교 설치계획에 따라 부산대학교 박물관, 동아대학교 박물관, 경남고고학연구소 등 3개 기관이 구역을 나누어서 1998년 5월 19일∼12월 31일의 154일간, 1999년11월 22일∼2000년 12월 20일의 319일간(1999년도에 41일간, 2000년도에 278일간), 2001년 5월 14일∼11월 24일 195일간 3차에 걸쳐 총668일간의 합동 발굴조사를 시행하였다. 1998년부터 3년간의 발굴조사에서 주거지, 분묘, 토취장, 토기소성가마터, 패총 등의 유구 확인. 토기, 석기, 철기, 청동기 등의 인공유물과 인골, 개뼈, 사슴뼈와 뿔, 조개류, 어골류, 쌀보리의 곡물류 등의 자연유물 수만점 출토. 특히 원형수혈주거지의 온돌시설, 토광묘에 부장된 인골과 개뼈, 패각층의 반량전, 오수전 등의 중국화폐, 야요이계와 낙랑계 토기 등의 발견으로 역사상으로 매우 주목되는 곳으로 부각되고 있다.
여러 차례에 걸쳐 발굴 조사된 결과로 볼 때 이 유적은 섬 전체가 청동기시대에서 삼한시대로 이어지는 단계의 삼각형점토대토기를 특징으로 하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유적으로써 신석기시대의 유물부터 초기 철기시대(원삼국시대)까지의 유물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선사시대의 많은 주거지 등 생활관련 유물과 낙랑관련 유물 및 일본관련 유물 등 외래계 유물들이 대량 출토되어 활발한 대외교역과 중개지로서의 기능을 확인 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학계에서는 각종 유구와 유물로 보아 삼한시대 문화상의 연구, 당시 한·중·일 간의 관계 교섭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적 가치로 평가되어 국정교과서에서도 실려 있으며 이러한 역사적 중요성으로 인하여 전시관건립을 촉구하게 되어 늑도 패총에서 출토된 인골, 동물유체, 석기, 토기, 철기 등 13,000여점 가운데 전시 가능한 유물 2,000여점을 선별하여 전시·연구용으로 활용할 계획이고 출토유물을 통한 삼한시대 남해안의 사회상과 문화상은 물론, 동북아시아에 있어서의 한·중·일 문화교류 관계의 연구산실로 활용할 계획이다.
* * * 조선왕조의궤
소재지 ; 용현면덕곡리501(사천시청 내 지적서고)
지정번호 : 보물 제1901-4호(2016.05.03.)
수량 : 3권 3책
시대 : 조선
세종대왕의 태실 수개의궤는 제작 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나 현재 전해지는 것은 없다. 때문에 현재 전해지고 있는 이 『세종대왕 태실 수개 의궤』와 『석 난간 수개의궤』, 『표석 수립 시 의궤』의 3권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기록이라고 하겠다.
이 비문은 조선 초기 태종 18년(1418)에 승려와 신도들이 이곳에 매향하고 그 내용을 암각한 것이다. 그 당시는 왜구에 의해 격심한 침탈을 받던 해안 지방의 백성들 입장에서는 왜구의 창궐이 보다 큰 불안이요, 현실적 위기감이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단종대왕의 태실 수개의궤는 현재로서는 따로 전해지는 것이 없고, 다만 세종대왕의 것과 함께 기록된 『세종대왕·단종대왕 태실 수개의궤』류 만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사천시 소장『세종대왕·단종대왕 태실수개의궤』는 모두 3권으로 되어 있으며 태실을 수개하였거나 태실의 석 난간을 수개하였을 때 그리고 태실의 표석을 세울 때의 여러 가지 정황과 절차, 제의과정, 석물의 형태, 제작과정, 동원된 인력과 물품 등에 관한 여러 가지 정보가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어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만력 29년 (선조 34년, 1601)의 세종대왕태실 석난간 수개의궤는크기가 33㎝×78㎝이고 한 쪽이 11행으로 모두 13쪽의 필사본이고, 옹정 8년(영조 6년 1730)의 세종대왕 단종대왕 태실 수개의궤는 크기가 35㎝×87㎝이며 한 쪽이 13행이고 모두 23쪽으로 필사본이며, 옹정 12년(영조 10년, 1734)의 세종대왕 단종대왕 태실표석 수립시 의궤의 크기는 35㎝×87㎝이고 한쪽이 13행으로 모두 23쪽으로 된 필사본이다.
사천시 홈페이지와, 인터넷자료등 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