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포 현령 군수 선정비(善政碑) : 김포시 사우중로1(향토유산 제5호)
- 2009년에 김포시청에서 10명의 김포 현령과 군수 선정비의 훼손과 부식을 막기 위해 현재 위치로 이전
이 선정비(善政碑)는 조선 후기 인조에서 순종 때까지 김포 현령과 군수를 역임한 170명 중 10명의 현령과 군수 선정비(관찰사 1기, 현령 1기, 군수 8기)로서 이 중의 선정비 1기는 풍화작용으로 내용 판독이 어려운 상태이다.
이 비군(碑群)은 조선 후기에 김포군에 부임해와 선정(善政)을 베풀었던 현감(縣監), 부사(府使), 관찰사(觀察使) 등 목민관들의 선정 불망비(不忘碑)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이 비군(碑群)은 김포시청사 주차장 한쪽 면에 위치하고 있는데, 『조선왕조실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사료에는 김포지역 현령과 군수 선정비에 대해 20기로 기록하고 있지만 현존하는 것은 10기뿐이다.
조선 중기에서 말기에 걸쳐 건립된 이 비군(碑群)은 지방사와 역대 행정관들의 치적으로 연구하는데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김포시는 2009년 5월에 선정비의 훼손과 부식을 방지하고, 시민들에게 역사 교육의 장소를 제공하기 위해 현재 위치로 옮겨 정비한 뒤에 보호 비각을 설치하고, 각 선정비 아래에는 비의 이름과 주인, 임명과 임기 만료, 선정비 건립 시기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행군수홍공백순청덕애민영세불망비’는 군수 홍백순이 1799년에 김포 군수로 임명되어 1801년에 사직했는데, 1799년 7월에 선정비가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군수 홍백순이 청덕(淸德), 애민(愛民), 영세불망(永世不忘)이라니 얼마나 선정을 베풀었을까?
하지만 김포 현령, 군수 선정비 옆에 '판 김포현사 이공 보정 청덕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이 비는 조선 세종 때 김포 현사를 지낸 이보정 선생의 선정을 기리기 위한 선정비이다. 이보정(李補丁: 1393~1456) 선생은 청덕, 애민, 평반을 실천하였고, 생활이 청빈하여 어머님의 장례비가 없었을 정도라고 전한다.
이보정은 1420년(세종 2) 문과에 급제하였고, 관직이 예조판서에 올랐다.
참고로 이보정의 신도비는 이숙함(李淑瑊, ?~?)이 지었고, 정난종이 썼다. 이보정의 묘소는 현재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에 그 아들 이숭원(李崇元, 1428~1491)의 묘소와 함께 남아 있으나 신도비의 글씨는 확인할 수 없다.
탁본 또한 이 『동래군필적(東萊君筆跡)』을 제외하고는 알려진 바가 없어, 조선 전기 명필 정난종의 글씨는 물론 우리나라 서예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 장릉(章陵) : 김포시 풍무동 산 141-1번지 (사적 제202호)
- 조선 후기의 원종(元宗 : 추존)과 인헌왕후의 능
장릉(章陵)은 쌍릉으로 인조의 아버지로 추존된 원종(元宗 : 1580년~ 1619년)과 그의 비인 인헌왕후(仁獻王后)의 능이다.
면적은 51만 6,955㎡로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 없이 호석(護石 : 봉분 주위를 둘러막는 돌)만을 두르고 있는데, 이는 왕위에 오르지 않은 왕의 아버지, 즉 대원군의 묘제를 따른 것이다. 각 능 앞에 상석이 놓여 있고, 상석 좌우로 망주석 1쌍이 있다.
봉분 주위에는 석양(石羊)·석호(石虎) 각 2쌍을 교대로 배치하였으며, 봉분 뒤쪽으로는 3면의 곡장(曲墻; 나지막한 담)을 둘렀다. 봉분 아랫단에 문인석·석마(石馬) 각 1쌍과 장명등, 그 아랫단에 무인석·석마 각 1쌍이 있고, 능원 밑에 정자각·비각·수복방(守僕房)·홍살문·재실이 있다.
문인석은 머리에 복두(幞頭)를 착용하고, 공복을 입은 채 석마와 나란히 서 있으며, 무인석은 장군의 형상으로 투구와 갑옷을 입고 있다. 문무석인 모두 무표정한 얼굴에 위엄이 서려 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르는 길인 참도(參道)가 다른 능과는 달리 약간의 경사진 계단식 형태인 것은 정자각이 상대적으로 조금 높은 곳에 지어졌기 때문이다.
정자각 동쪽에 자리한 비각은 비석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각으로, 비문을 통해 능의 주인공과 그의 생전의 행적을 알 수 있다. 홍살문 안의 비면에는 ‘조선국 원종대왕 장릉 인헌왕후 부좌(朝鮮國元宗大王章陵 仁獻王后附左)’라고 쓰여 있으며, 1753년(영조 29)에 세워졌다.
근처에는 장릉의 원찰(願刹)인 금정사(金井寺)가 자리하고 있다.
< 장릉의 변천 >
정원군(定遠君)은 1619년(광해군 11) 12월 29일,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이듬해 2월에 경기도 양주군 곡촌리에 장사지냈는데, 그로부터 3년 뒤 그의 장남 능양군(인조)이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르자 대원군에 봉해졌다.
1626년(인조 4) 1월 14일에 경희궁 회상전에서 정원군의 인헌왕후 구씨가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같은 해 5월 18일, 이곳 김포 성산의 언덕에 안장하고, 원호를 육경원(毓慶園)이라 하였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627년(인조 5), 정원군의 육경원을 이곳 성산으로 천장 하여 쌍릉을 조영하면서 원호(園號)를 흥경원(興慶園)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인조 10년(1632) 이귀(李貴) 등의 주청에 따라 정원군을 원종(元宗)으로 추존하여 능호를 장릉(章陵)이라 하고, 석물을 왕릉제로 개수하였다.
< 정원군의 일화 >
정원군 원종은 1580년(선조 13) 6월 22일 경복궁 별전에서 선조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1587년(선조 20)에 정원군에 책봉되었고, 1590년(선조 23) 11세에 좌찬성 구사맹(具思孟)의 딸 인헌왕후와 가례를 올렸다. 어릴 때부터 용모가 남다르고 태도가 신중하였으며,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가 남달랐다고 한다. 임진왜란으로 피난길에 올라 험난한 시기를 겪고, 1595년(선조 28) 겨울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1608년에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로부터 7년 후에 정원군의 셋째 아들 능창군을 황해도 수안군수 신경희가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무고(誣告)로 인하여 큰 옥사(獄事)가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능창군은 강화도로 유배당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정원군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었다. 그 후 정원군은 몸져누워 1619년(광해군 11) 12월 29일 4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원군은 임진왜란 때 부왕 선조를 모시면서 험난한 일을 겪었으나, 나이가 아직 어렸음에도 의연한 태도로 이에 대처하여 모두가 그를 기특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중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의주로 피난을 떠나게 되었다. 이때 신하들에게 명하여 정원군(원종)을 영변(寧邊)으로 데려가 왜적을 피하도록 하였다. 그때 정원군이 영변에 이르러 울면서 말하기를, “이곳에 온 것은 제가 살기 위해 온 것이 아니고, 임금님의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왜적의 형세가 날로 성하고 임금의 행차는 날로 멀어지니,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된다면 임금과 신하가 죽음과 삶을 같이 하지 못할 것인데, 이 몸이 간들 어디로 가겠습니까? 죽더라도 눈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선조는 이 말을 전해 듣고 가상히 여겨 정원군을 다시 불러왔으며, 그 뒤로 정원군은 선조 곁을 떠나지 않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를 옆에서 모셨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종결되고 서울에 돌아오자, 1604년(선조 37)에 정원군은 선조를 호종(扈從)한 공으로 호성공신에 봉해졌다.
◇ 금정사(金井寺) : 경기도 김포시 풍무리 산 669 [장릉산(章陵山)] (석조여래좌상 : 지방유형문화유산 제275호)
- 장릉의 원찰(願刹)로 1974년에 봉릉사를 ‘하늘우물’(금정사)이라는 뜻으로 개명
금정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로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 때 창건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고상사(高上寺)라고 하였다.
1632년(인조 10)에 인조가 부친 원종(元宗)의 묘와 인헌왕후(仁獻王侯)의 능을 양주군 곡촌리에서 김포 장릉산으로 이장한 뒤, 인근에 있던 고상사를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전한다.
당시에 고상사는 장릉(章陵)의 원찰(願刹)로서 절 이름도 봉릉사(奉陵寺)로 고쳤으나 그 이후의 연혁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 사찰은 이후에 폐허가 되었던 것을 여러 차례 중수하였다.
1920년 일제강점기 때 유영송(劉永松), 1938년 정성화(鄭性和)가 이 절을 각각 중수하였으나 1950년 6·25전쟁으로 불에 탔다. 1970년에 고근(古根)이 중수하였고, 1974년에 비구니 정념(淨念)이 대대적인 불사를 일으키면서 ‘하늘우물’이라는 뜻의 금정사(金井寺)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1년 대웅전을 새로 짓고, 비구니 수행도량으로 자리 잡았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범종각·요사채가 있다.
금정사 소장의 석조여래좌상은 경주 불석(佛石)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이 불상은 몸에 비해 큰 얼굴과 어린아이 같은 표정, 양 무릎 위에 나란히 올린 손의 자세 등에서 조선시대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고와 같은 부드러운 질감, 깔끔하게 처리된 법의의 윤곽선 등에서 재질적인 특징이 잘 드러나며, 상호가 원만하고 불신과 법의(法衣)가 유기적으로 처리된 수준 높은 작품으로 가치가 인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