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난 1월(맞지요?) 체험수업 1기에 친구와 참석했었습니다.
그때 <영화마을 수업>에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작품을 감상했다 들었습니다.
물론 저는 그 수강생은 아니었지요.
그렇지만 이 영화의 메시지에 대해 평소에 몹시도 궁금했던 터라
많은 논의를 기대했었는데, 후속작업이 잘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에 늦게나마 저의 생각을 정리해보았습니다.
마침 <영화이야기>방으로 다시 정비가 되어있어서
수강생이 아니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올려봅니다.>>
진정한 소설이나 영화는
작가가 인간과 세계를 대상으로
깊이 탐구하고 이해하면서 우리에게 내놓은 고심에 찬 결과물이다.
따라서 우리가 깊이 탐색하면
삶에 대한 지혜와 깨달음을 한 자락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영화<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주제 혹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참 어렵다.
영화도, 책도.
설명도 구구각색이고, 소위 전문가들의 견해도 다양하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예술은 느끼는 자의 것이므로,
하나의 정답은 없고 모두가 정답이라는 사실.
탄자니아 대통령의 말이 기억난다.
“아프리카를 ‘한 마디’로 말하지 말아 달라.”
아마 책의 저자 맥카시 나 영화를 만든 코엔형제도 비슷할 것이다.
“내 작품을 한마디로 정리하지 말라.”
그래도 어쩝니까, 해봐야지요.
영화에대한 기본적인 소개나 줄거리는 생략합니다.
혹시 영화를 안보신 분들은
인터넷 자료를 통해 먼저 확인해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첫째, 탐욕스런 인간(모스:인간일반)은
과욕으로 인해 파멸하게 된다.
지나친 욕심으로 인해 이익 충돌이 생기고
더 큰 권력을 가진 존재(시거)에 의해 묵사발난다.
현재 인간사회의 참담함은 그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모든 행운에는 대가가 뒤따른다.
어떤 행위든 그 결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과거를 잊어도 과거는 우리를 잊지 않는다.
욕망의 노예가 되지 말라.
돈가방을 줍지 말라.
한편, 여기에서 노인은 누구인가?
과거를 아름답다 느끼면서 단순히 추억하는 사람들일 수도 있고,
시간의 지혜를 통해 세계의 원리를 깨달아
세상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는 존재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이다.
그 흐름을 막지 못한다.
둘째, 그렇다면 세상은 모두 필연적인 인과율에 얽혀있는가?
꼭 그렇지는 않다.
원인은 반드시 결과를 낳는 듯해도,
전혀 무관하게 독립시행적으로 어떤 사건이 발생하기도 한다.
시거의 행진에 우연히 부딪혀 살육당한 사람들의 경우를 보라.
가장 첨단적인 분자 생물학 연구에서도
생명활동의 초기 단계에서는 거의 우연성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파악한다.
물론, 지극히 작은 것은 우연적인데,
큰 덩어리의 흐름은 필연적으로 결정될 수도 있다.
우연히 더 먹는 한 숟가락의 밥이 1년 쌓이면 3kg을 찌운다....ㅎ
한편, 불가(佛家)에서는 선한 공덕과 악업의 논리를 동원하여
연기론으로 설명함으로써 일견 명쾌해 보이기도 한다.
셋째, 세상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
도덕도 윤리도 종교도 인간의 존엄도 더 이상 없다.
있다하더라고,
본질이 퇴색하고 힘도 잃어버리고 형식만 남아있을 뿐이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힘>과 <우연성>이다.
그 힘이란, 권력과 돈 그리고 목표 추구의 강렬한 포스(잔학무도함)이다.
이를 안타까이 바라보는 현인(노인)들은 속수무책이다.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누구를 보호하지도 못하고, 징계하지도 못한다.
선한 의지가 물결치던 과거(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추억에나 있을 뿐...
(그런데 실은 과거도 그렇게 아름답지 않았다.
기억이 선별작업을 하여 그렇게 느껴질 뿐 아닐까?)
인간의 선의(善意)는 그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장차 어찌될까?
인연의 고리에 의해, 과욕과 거대한 악은 모두 응징 받을까?
아니면, 우연의 나열에 의해 약한 자(하위권력)는 파멸되고 그리 흘러가는가?
그도 아니라면 모두의 공멸인가? 종말인가?
알 수 없다.
하여간 사람들이여, 허구적인 가상현실(매트릭스)에서 벗어나라.
실제 현실세계를 직시하라.
소박한 선의로 추억되는 그 세계는 이미 사라졌다.
즉, 그대들 추억에 남아있는 그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허구요 가상이다. 꿈이다. 그것은 이데아일 뿐이다.
추억이 미화되고, 미래의 기대가 최선으로 그려져, 조합된 매트릭스일 뿐이다.
실제 세계는 탐욕스럽게 이익추구만 난무하는 종말의 세상이다.
시작도 종말이었고, 지금도 종말이며, 종말이 언젠가 있다면 그것도 또 종말이다.
어찌됐건 알 수 없다.
이 크고 작은 피와 폭력으로 얼룩진 동정 없는 세상이
쉽게 종말로 이어질지, 이대로 지속될지,
혹은 노인의 예지가 스며들어 개선될지는 알 수 없다.
여기에서 잠깐 방향을 틀어볼 필요가 있다.
즉, 내 자신은 어떠한가 하는 바로 그 점이다.
과연 나는 어떤 삶의 수칙에 따라 행동하는가?
지극한 선의로 아름다운 인간성에 기초하는가?
아니면 돈과 힘의 저울추에 따라 기울어지는가?
넷째, “ 이 현대사회에 수없이 밀어닥치는 복잡다단한 문제들을,
흘러간 과거의 낡은 가치체계의 망령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
이글은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이라는 책의 서문에
번역자 김용준이 이 책의 관점을 설명하면서 정리한 내용이다.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서 인용해 보았다.
즉, 현대인은 아인슈타인과 스티븐 호킹의 세계에 살아가면서도,
중세의 갈릴레이나 근대의 뉴턴적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과학이 이룩한 결과물을 이용하여
온갖 편리함과 즐거움을 누리며 과학의 성과를 향유하고 있지만,
과학이 배경으로 삼고있는 진정한 이념은 무시하고 살아가고 있다.
즉, 원시사회나 중세시대 이룩된 이념적 체계를 그대로 품고 살아간다.
대표적으로 종교가 그렇다.
여기에서 삶의 모순은 계속 커지고, 해결은 더욱 어려워진다.
다섯째, 그러면 어찌할 것인가?
지금 우리 시대에 진행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일을 보면
우리가 위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노인을 위한 시대가 아님이 분명한 듯한데,
어찌할 것인가?
아직 우리 주변에 선의로 가득 찬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기뻐해야할까?
또한 그 선의를 가진 사람들의 따뜻함이 어떻게 나를 구원할 수 있을까?
참, 그리고 이 논의에 지리산학교가 떠오르는 것은 왠일일까?
<< 감사합니다...>>
첫댓글 혹시 영화를 안보신 분들은
인터넷 자료를 통해 먼저 확인해보시는 것이 도움이 될것이라 생각됩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한참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를 머릿속으로 썼습니다.
우리가 사는 건 어차피 한세상이지요.
살아본 적도 없고 살아갈 것도 없는 현재일뿐이지요.
제게 산다는 건 늘 숙제같은 일이였습니다.
잘 풀려지지 않고 하다보면 지루할 때도 많고
저는 제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희망적이지 않듯이 특별히 더 절망적이지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그 평가를 누군가 타자에게 혹은 사회에게 전가할 수 없다고 봅니다.
선의로 살든 악의로 살든 지금 우리가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노인을 위한 나라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노인을 위한 나라가 없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쨋든 노인은 살아가고있습니다.
구원의 문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구원할 의지가 있는가를 늘 저는 저에게 묻습니다.
세상을 시니컬하게 보는 것도 세상을 살아가는 한 방편이고 사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가 없다면 그런 선이 없다면
우리가 우리자신을 위로해야 하지 않을까!
거기에 지리산학교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지리산학교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지리산학교는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입니다.
지금 바로 여기 그리고 나자신!
거기서 부터 모든 질문과 해답이 있다고 생각합니
다.
사람사는 일이 복잡다단할수록 문제의 해결은 가장 간단한 곳에서 풀린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하이퍼리얼리티 세상을 재단하는 많은 말들이 있지만 우리가 살아내는 세상입니다.
과거의 낡은 가치체계는 문제를 푸는 것에 있어 미약한 방법이나 인간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의 궁극은 악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우리의 해답은 르네상스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방법은 늘 고민해야 할 일입니다.
해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과정이 우리 삶에 필요하지 않을까요?
부정은 아무것도 구원할 수 없으니
노인이 사는 나라를 고민하는 겁니다. ^^
이렇게 평생 고민하다 죽어도 별 수 없지만요.
맞습니다.
어느 시대나 고뇌하며 응시하는 노인집단이 있고,
우연한 행운이나 고통 속에 일희일비하는 뭇 다수집단이 있고,
촉각과 힘을 통해 계획하고 공격함으로써 큰이익을 달성하려는 사람들이 있겠지요.
여기에는 도덕 윤리도 원칙도 법도 아무 소용이 없지요.
다만 그럴둣하게 포장하면 되니까요.
그야말로 '정의란, 강자의 이익이지요'
이번에 또 터진 저축은행 사건만 봐도 그렇지않겠어요? ㅎㅎ
그런데 시대에 따라 문화에 따라 국가에따라
그 차지하는 사람들의 비율은 조금 달라질 수있는 것일까요?
이 원작소설을 쓴 맥카시나 영화를 만든 코엔 형제는
미국사회를 소위 서부시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파악한것 같아요.
그리고 천민자본주의가 극성을 부리는 한국사회도 결코 못지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마 위 세사람이 한국을 너무잘알고 잇는것이 분명하지요. ㅎ
이즈음에 선생님 말씀대로 개인의 선택이 요구됩니다.
영원한 숙제이지요.
주변엔, 노인의 역할을 자임하면서
동시에 구체적 실천으로 살아가는 분들의 노고를 보면서,
노인을 위한 나라의 그림자의 도래를 꿈꾸어봅니다...ㅎ
그리고 노인의 예지와 패기를 위해
지리산에서 함께 노닐 그날을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