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동양의 옛 시문詩文은 오랜 세월 닳지 않고 빛나는 것 중의 하나이다. 비교하자면 은은한 달빛이다. 먼 길 가는 나그네의 발밑을 비춰주고 가슴속 찬바람을 부드럽게 덮어주며 위무하는 달빛…. 천 년 혹은 수백 년 전 선인들이 남긴 옛 글은 나그네 머리 위에 동실 떠 있는 그 달을 닮았다. 슬픔과 그리움, 기쁨과 설렘, 허무와 절망……. 삶에서 만나는 온갖 감정을 독서와 사색으로 다스리며 써내려간 ‘정수淨水의 언어’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시중에는 옛 시문에 관한 책이 많이 나와 있다. 고전학자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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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옛 시문詩文은 오랜 세월 닳지 않고 빛나는 것 중의 하나이다. 비교하자면 은은한 달빛이다. 먼 길 가는 나그네의 발밑을 비춰주고 가슴속 찬바람을 부드럽게 덮어주며 위무하는 달빛…. 천 년 혹은 수백 년 전 선인들이 남긴 옛 글은 나그네 머리 위에 동실 떠 있는 그 달을 닮았다. 슬픔과 그리움, 기쁨과 설렘, 허무와 절망……. 삶에서 만나는 온갖 감정을 독서와 사색으로 다스리며 써내려간 ‘정수淨水의 언어’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시중에는 옛 시문에 관한 책이 많이 나와 있다. 고전학자와 한문학자들이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한 전문서도 있고, 원문보다 더 미려한 풀이로 작가의 감상을 더한 책도 있다. 시류에 맞게 인생의 지혜서로 다듬어 쉽고 재미있게 읽히는 시문집도 있다.
이 책은 김진태 전 검찰총장이 틈틈이 옛 글을 찾아 읽고 덧붙인 소회를 모아 엮은 것이다. 법정法庭이야말로 인간의 민낯과 세상인심이 여실히 드러나는 곳이다. 법조인으로서, 그는 인간사 애환을 바라보며 느껴야 했던 번민과 소란한 마음을 옛 글에 기대어 풀고 다스렸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시문들은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詩에서 지식인의 고뇌와 사유, 생활인의 어려움, 사랑, 우주적인 깨달음까지 아우른다. 덧붙인 소회는 현대인의 가벼운 삶에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김진태 전 검찰총장이
천천히 공들여 읽고 음미한 옛 시문詩文의 향香 “이 책은 원래 검찰을 떠나면서 짐을 챙기던 중 혹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까 하여 책상 위에서 나뒹굴던 시詩?문文을 한데 모아 퇴임식에 참석한 후배들에게 나누어 준 것이었는데, 어떻게 이것을 알고 달라는 사람들이 있어 부득이 인쇄를 하게 되었고, 그 기회에 몇 사람을 추가하고 내용을 다듬었다. … 이 책이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그래서 온 누리에 자비와 평화가 가득하길 기대해 본다. (-‘글머리에’ 중에서)
저자는 지난해 12월 검찰총장직에서 퇴임했다. 법法과 시詩 사이는 멀어 보인다. 그러나 법조인으로 자칫 메마르고 관성적으로 흐를 수 있는 마음가짐을 그는 시詩로써 다스리고 사색의 깊이를 더했다. 저자는 검찰총장 자리에 오른 뒤 가진 첫 간부회의에서 소동파의 시가 적힌 종이를 나눠주었는데, ‘자리가 사람을 빛나게 하는 게 아니라 어느 자리에 있건 최선을 다하면 그 자리가 빛나는 것’이라는 뜻을 시로 전달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평생 법조인으로 한 길을 걸어 온 그는 젊은 날 ‘한국의 유마’라고 불렸던 백봉 김기추 선생, 효당, 무천에게서 불교와 역易을 배웠으며, 한문에도 능통하다. 한국, 중국의 한시와 문장, 불교 경전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음미하고 풀어낼 수 있는 내공이 여기에서 비롯한다.
최치원, 원효, 이순신, 이백, 소동파, 측천무후…
인생의 굽이마다 찾아온 옛 글 126편 이 책은 한국과 중국의 시와 문장 126편과 여기에 저자의 짤막한 소회를 덧붙여 구성된다. 최치원, 두보, 이백, 원효, 소동파, 이황, 조식, 측천무후, 임제 등. 역사의 굽이굽이에 살다간 사람들이 당시 처한 상황에서 선택하고 포기하며 쏟아낸 시문들이다. 여기에 지은이의 삶과 역사적 행보, 정치적 풍경 그리고 저자의 감상을 녹여냈다. 인물의 업적이나 과오를 따지기보다 당시 현실에 이입移入하여 최대한 인간적으로 교감하고 이해하려 한 것이다. “어떤 존재라도 막중한 소명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났으며, 당시의 상황에서는 꼭 필요한 사람으로 이해하려 했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자연을 노래하고, 세상을 논하고, 사랑에 설레고 애달파 하고, 삶의 이치를 깨달아가는 선인들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인간의 정회를 새삼 깨닫게 한다.
흘반난吃飯難,
세상사 밥 먹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있으랴 ‘흘반난吃飯難’은 밥 먹기 어렵다는 뜻이다. ‘밥’은 생존과 직결된다. 인생은 알고 보면 밥 먹고 사는 여정에 다름 아니다. 세상에 밥 먹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을까.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투고 번민하고 갈등하고 울고 웃는다. 법조인인 저자는 세상의 축소판인 법정에서 누구보다 절실히 느꼈으리라.
이 책에 실린 시와 글은 대부분 궁극적으로 밥 먹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하고, 권력에 밀려나 유배를 떠나고, 아침엔 친구였던 이가 저녁에는 원수가 되고,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해 세상을 버리고, 알아주는 이가 없어 방랑하는, 인간사 모든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러나 이들이 읊은 시는 이들이 결코 암울함이나 슬픔 속에 계속 빠져 있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산과 꽃, 강물과 바람, 새와 달 등 머문 곳에서 만나는 자연에 마음을 빗대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대자연의 이치 앞에 일개 한 인간의 삶은 얼마나 소박한지. 그래서 집착을 털어내고 마음을 낮추기에 이른다. 이런 운치와 풍류가 있기에 선인들은 팍팍한 삶을 무심無心으로 바라보며 받아들일 수 있지 않았을까.
비 온 뒤의 뜰 안은 쓴 듯이 고요하고 雨餘庭院靜如掃
바람 지나는 난간은 가을인 듯 시원하다. 風過軒窓凉似秋
산 빛과 물소리, 그리고 솔바람 소리 山色溪聲又松?
또 무슨 세상일이 이 마음에 이르나. 有何塵事到心頭
(-원감 충지, 「우서일절偶書一絶」)
산중에서의 삶을 통하여 자연과 하나가 된 자신의 경지를 보여 주고 있다. 산 빛과 물소리, 그리고 소나무 사이로 바람 지나가는 소리……. 이게 전부이다. 그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만약 그 외 세상사가 마음 머리로 달려온다면, 그래서 그것에 빠진다면 아직 공부가 익지 않은 탓이다. (178쪽)
“가난보다 시를 짓지 못함이 더 부끄럽다”
두통약 대신 시 읽기를 권유하다 옛글 읽는 재미란 무엇인가. 선인들이 글짓기를 통해 ‘밥 먹고 살기’ 힘든 삶을 한 발짝 떨어져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삶의 의미를 헤아렸다면, 시를 읽는 우리는 그 마음에 이입하여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데 시 읽는 재미가 있으리라. 고려 때 선비 임춘은 가난과 실의 속에 시를 쓰며 위로 받았는데, “나는 곤궁하면서도 시 또한 잘 짓지 못한다”며 애석해하기도 했다. 시 한 편의 힘은 이렇듯 크다. 천 년 혹은 수백 년 전 선인들이 삶의 희로애락을 담아낸 시 한 편, 글 한 줄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면, 밥 먹기 힘든 세상 덜 외롭게, 좀 더 힘을 내서 헤쳐갈 수 있지 않을까.
잠깐 갰다, 잠깐 비 오고 다시 개니 乍晴乍雨雨還晴
천도도 오히려 그러하거늘 하물며 세상의 정이야. 天道猶然況世情
나를 칭찬하는가 했더니 곧 다시 나를 비방하고 譽我便應還毁我
이름을 피하는가 하면 도리어 이름을 구하네. 逃名却自爲求名
꽃이 피고 꽃이 진들 봄이 무슨 상관이며 花開花謝春何管
구름 가고 구름 옴을 산은 다투지 않는다. 雲去雲來山不爭
세상에 말하노니 모름지기 기억하라. 寄語世上須記憶
어디서나 즐겨함은 평생 득이 되느니라. 取歡無處得平生
(-김시습의 「사청사우乍晴乍雨」)
이 시는 비가 오다 개고, 또 오는 자연 현상을 빌려 인정세태의 무상함을 풍자하고 있다. 인정과는 무관한 자연 현상도 이렇게 변화무쌍한데 이해관계로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인간 세상이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칭찬했다가 비난하고, 명리를 피한다면서 바로 명리를 구하고……. 그러나 봄은 꽃이 피고 지는 것을 상관하지 않고 산은 구름이 오고 가는 것을 다투지 않는다. 어디에선들 자족하면 그것이 바로 평생에 얻는 바가 되지 않겠는가.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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