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6시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버스에 올랐다. 단체여행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같이 일어나 같은 시간에 밥을 먹고 같이 출발하는 것은 나보다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지 않고서는 어렵고 피곤한 것이다. 10여 년 전 파리에서 유학할 때는 가끔 배낭을 꾸려 혼자 여행은 떠난 적이 많았다.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밥 먹고 싶을 때 밥 먹고, 보고 싶은 데 마음대로 보았던 여행이 그립다.
버스를 타고 카이로 시내를 통과하였다. 이집트 여성들은 전통복장인 갈라비아와 차도를 착용하고 다닌다. 더운 나라에서 저렇게 옷을 치렁치렁 입으면 더 덥지 않겠는가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옷이 시원하다고 한다. 마침 오늘이 이슬람교의 큰 명절인 하지날이라 거리는 사람으로 넘쳐났다. 창세기 22장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아들 이사악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했는데, 이슬람교에서는 이 이야기를 약간 다르게 해석하여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아랍인들의 조상)을 제물로 바치려 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기념하는 날이 바로 오늘 하지날이다. 새벽기도를 마친 직후에 무덤으로 기도하러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빈민촌 지역인지 못 사는 것이 한 눈에 보일 정도로 열악한 주거환경이다.
먼저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구경했다. 피라미드는 이집트 고왕국 제4왕조(B.C. 2613-2494년)의 쿠푸 왕, 카프르 왕, 멤다우르 왕의 무덤인데, 태양신의 아들인 파라오(이집트 왕)가 사후 부활을 염원하며 만든 신성한 건축물이다. 그 옛날에 이렇게 거대하고 정교한 석조물을 쌓아올린 이집트인들의 종교와 문화를 상상해 보았다. 그렇게 막강한 제국 이집트가 지금은 이렇게 몰락했다는 것 또한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카프르 왕 피라미드로 들어가는 길은 좁고 경사진 비밀통로였다. 남들이 허리를 숙이고 들어가기에 뒤따라 들어갔더니 이게 웬일인가! 오르락내리락 미로는 끝없이 이어지고 밀폐된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니 갑자기 숨이 막혀서 더 이상 갈 수가 없었다. 얼른 다시 나와서 우리 일행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나오는 사람마다 모두 이마에 땀이 맺혀있고 허탈한 웃음을 짓는다. 대단한 것을 기대하고 피라미드 안에 들어갔으나 그 안에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다.
세 개의 피라미드가 잘 보이는 곳에 가서 증명사진을 찍고 스핑크스를 보러 갔다. 스핑크스는 피라미드를 지키는 거대한 석조물인데, 머리는 파라오의 형상이고 몸은 사자의 모습이다.
이어서 아기 예수님 피난 성당을 순례하였다. 마태오 복음 2장에 따르면 박사들이 동방으로 돌아간 뒤에 헤로데가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 하자 요셉이 가족을 이끌고 이집트로 피신하였다고 한다(마태 2,14). 다른 어느 복음에도 이런 내용이 없는 것을 볼 때, 성가정이 이집트로 잠시 이주하였다는 이야기는 역사적 신빙성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전하는 마태오의 의도를 알면 된다. 마태오복음 사가는 구약성서의 사건과 말씀이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되었음을 강조하고자 하는데, 성가정의 이집트 피난 이야기도 그런 맥락이다. 즉 예수님의 유년시절을 출애굽과 연관시켜 보고 싶었던 것이다. 10세기에 지어진 아기 예수님 피난성당은 성가정이 한 달 정도 피난생활을 하였던 동굴 위에 지어진 콥트 교회(5세기 가톨릭에서 갈려나온 이집트 교회) 성당이다. 성당 지하에 피난동굴은 예전에는 물이 차 있었는데, 몇 년 전에 공사를 하여 물을 빼냈다고 한다. 그러나 지하 동굴로 들어가는 문은 닫혀 있었다.
지금은 유태인들의 회당을 쓰는 모세기념 성당을 둘러본 뒤에, 점심식사는 버스 안에서 도시락으로 해결하였다. 버스 기사 일행은 점심을 무엇으로 먹었는지 모르겠다. 못사는 나라라는 표를 내는지, 버스 기사에 보조원이 따라붙고 관광경찰까지 동승을 한다. 경찰이 동승을 해야 관광하거나 순례하는 곳에 문제없이 들어갈 수 있단다. 동승하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식사비와 수고비까지 주어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럽다. 가는 데마다 막아놓고 돈을 받는 것도 잘 이해가 안 된다. 유적지나 성당에 들어갈 때 입장료를 내는 것을 그렇다 하더라도 화장실에도 일 달러를 내고 들어가는 것은 웃기는 일이다.
카이로를 출발하여 시나이 광야 쪽으로 향했다. 가도 가도 끝도 없는 사막이다. 산이나 들판에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다. 중간 오아시스 지역에서 잠시 휴게소에 들른 다음 수에즈 운하를 지하통로를 이용하여 통과하였다. 예전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천신만고 끝에 홍해를 통과했는데, 우리는 버스에 편히 앉아 쉽게 건너가니 모세 할아버지께 죄송한 마음이다.
지하통로를 통과하며 보니 'Welcome to Suez'라는 간판이 보였다. 어떤 분이 그것을 읽는데, 내 귀에는 ‘웰컴 투 쐬주’로 들렸다. 잘 버무린 파절이에 삼겹살을 안주로 쐬주를 한 잔 마시고 싶은 어리석은 바람 때문이리라. 그러나 이 사막 어디에서 그런 호화스런 밥상을 기대하겠는가!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에게 먹을 고기를 내놓으라고 하던 것(민수 11,4 참조)과 같이 어리석은 짓이다.
탈출기 15장에 따르면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광야로 들어섰을 때 물이 써서 마실 물이 없었다. 그래서 모세가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나무의 가지를 꺾어서 우물에 던지니 단물이 되었는데, 탈출기는 그곳을 마라라고 한다.
마라로 추정되는 장소에서 미사를 봉헌하였다. 앞으로는 홍해바다요 뒤로는 시나이 광야에서 미사를 드리니 성찬의 신비와 구원역사가 새롭게 다가왔다.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우리의 오랜 기도를 들어주셔서 성서 백주간 공부를 마치고 이렇게 성지순례를 오게 되었으니, 우리 순례팀의 이름을 ‘사무엘 성지 순례팀’으로 하자는 이야기를 강론시간에 하였다.
또 다시 끝도 없이 이어지는 광야지역을 통과하여 시나이 산 밑의 호텔에 도착하였다. 저녁식사를 먹는데, 이상한 향료를 많이 넣어서 역겹게 느껴졌다. 그래도 안 죽고 이 순례를 계속하려면 이집트 음식으로라도 허기를 채워야 한다. 저녁을 먹고, 내일 등산장비를 머리맡에 챙겨놓고 일찍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