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양산 백학장원 원문보기 글쓴이: hwd
호박이 어디 공짜로 굴러옵디까
전우익
-아름다운 무늬로 바뀌는 상처
인(印)형,
오랜만입니다. 사람 꼴이 엉망이라 편지 또한 여전히 횡설수설일 수밖에 별도리가 없습니다. 넋두리쯤으로 짐작하고 읽어 주면 고맙겠네요.
올 음력 정초엔 어찌된 셈인지 붓글씨가 써 보고 싶어서 벼루와 먹 그리고 종이를 방바닥에 잔뜩 늘어놓았지요.
멋지게 써 봐야지!
멋지게 쓸 것만 같았습니다. 멋지게 멋지게 하는 생각이 영 머리에서 떠나질 않아 결국은 한 자도 써 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후에 곰곰이 생각해 봤지요. 멋지게 쓴다는 게 뭘까? 멋지게 산다는 게 어떻게 사는 걸까? 그건 재주와 능력으로 기교와 잔꾀를 부리는 일이라고 생각되는데요.
멋지게 쓰겠다는 허황한 생각이 글씨는 고사하고 먹도 갈아 보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어요.
정성껏 공들여 써 보겠다는 마음이었다면 글씨는 언제나 쓸 수 있고, 먹을 가는 일이 스스로를 갈고 닦는 일이 되고, 똑바로 단단히 붓을 잡는 일이 휘청거리는 자신을 되돌아보게 할 수 있고, 글씨를 쓰는 과정이 공들여 탑을 쌓는 일처럼 조금 성실한 인간이 되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글씨를 쓰는 일이 이와 같은데 하물며 딴 일은 더 말할 나위 없지요. 정성과 공을 들이지 않고는 아무 일도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다시 확인한 셈이었어요.
피아니스트이 이야기를 쓴 책에서 이런 걸 읽은 적이 있어요.
어느 피아니스트가 피아노를 칠 때마다 이번에 치는 이 연주가 처음이고 마지막이라는 숙연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 바쳐 친답니다. 마치 독실한 신자가 신부님 앞에서 고해 성사를 하듯 말입니다.
그러나 자세로 피아노를 치니 인간적 성숙도 이루어졌을 터이고, 참된 인간이 치는 피아노 소리니 좋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쯤 되면 피아노를 치는 일이 구도(求道)의 길이 되고 뜻을 펴는 일도 되어 구도와 뜻을 펴는 일이 함께 어우러지는 경지 같아 부러웠습니다.
작년 추석에 밤새워 가며 소설 <동의보감>을 읽었습니다. 줄을 그어 가며 읽은 그 책은 추석 선물로 막내 놈한테 주고 올 추석에 다시 읽겠다고 새로 한 벌 샀습니다. 언젠가 막내 놈을 만났더니 하는 말이 “아버지 그 책 참 재미있습디다.” 합디다. <동의보감>을 재매로 읽은 자식이 있고 어떻게 살아갈까를 찾아보려고 그 책을 다시 산 애비가 함께 살고 있는 것이 이 세상이지요.
형,
숨을 돌려 보려고 불러 본 거요.
일직에 계신 권정생 선생님도 <동의보감> 두 번 읽었답디다.
작년 추석에 <동의보감>을 읽은 감회는 아직도 뿌듯합니다. 거기서 사람다운 사람을 넷이나 만났으니까요.
사람의 가장 큰 기쁨이란 결국은 사람을 만나는 일이 아닐까요. 유의태가 허준을 만나고 허준이 유의태를 만나는 감격을 나는 맛볼 수 없을까. 그들이 만날 수 있었던 건 두 사람이 함께 갖춘, 참되게 살아 보자는 마음씨의 만남이 아닐까요. 그 마음과 마음의 교감에서 불꽃이 튀고 빛으로 피어났는데 그 빛을 우리도 바라보게 되어 한없이 고맙고 이 절망의 시대에도 사람은 있겠지 하는 희망을 가져 봅니다.
허준은 유의태의 의술이 아니라 인품에서 선생으로 모실 사람을 만났고 유의태는 허준과의 만남을 통해 또 한 사람의 자기와의 만남을 이룬 것 같아요.
나도 도라지 농사를 몇 해 짓다 보니 숱하게 캤지만 실뿌리까지 정성스럽게 캐 본 적은 별로 없어요. 어쩌다 산에서 야생 도라지를 만나면 공들여 캐긴 했지마는.
<동의보감> 중에서 가장 감명 깊게 읽은 곳 몇 대목 인용해 봅니다.
유의태는 허준의 망태기에서 쏟아져 나온 도라지 두어 뿌리를 주워들고 그걸 아들 도지한테 내밀면서 “못 찾았으면 모르되 찾았거든 단 한 뿌리라도 이런 정성으로 캐야 한다.”고 했지요. 이에 아들 도지가 “물건이 너무 작아 약재로 쓸 거리가 못 됩니다.”하자, 유의태는 “초행부터 제대로 된 물건을 찾을 순 없다. 하나 도라지를 산삼처럼 이렇게 실낱 같은 작은 뿌리 하나하나까지 다치지 않도록 애써 캔 그 정성을 말한 거다.”라는 말 끝에 유의태는 허준에게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가상한 일이다. 약초를 대하는 너의 이런 정성을 언제까지 지닐지 그건 내 알 바 아니다.”했지요.
이 말에서 허준은 유의태란 의원이 지리산 백 여든 네 군데 골짜기와 벼랑과 능선에 자라는 수천만 뿌리 도라지의 한 뿌리에도 얼마나 깊은 외경을 지닌 사람인가를 발견하고 가슴이 뜨거워졌지요.
하여 그 감정은 높은 의원의 세계를 처음으로 만나는 신선한 충격으로 바뀌어 갔지요.
유의태가 도지한테 허준에게 약재 창고를 맡기라 하자, 도지가 “약초 이름도 모르는 신출내기”라고 반대하자 유의태는 “염소 뿔 오래 묵힌다고 녹용이 되더냐? 햇수 오래된 것 무슨 소용이 되느냐? 숙맥이 아니면 약초 이름쯤은 사나흘 보고 익히면 안다.”고 하지요.
제자들이 고생과 햇수를 들먹이자 “연기로 따져 누가 오래 되고 덜 되었는지는 내 알 바 아니로되 생수 걸러 첫 새벽 왕산골짜기를 오르내린 것이 억울하다면 그건 해명하겠다. 의원이 약효가 있는 약을 지음에 있어 그 비결은 정성이 반이다.”
이 말에 허준의 눈과 귀가 번쩍 뜨였지요.
“하여 약을 짓는 정성을 배우라. 왕산골짜기 새벽 찬물을 떠오라 한 것을 깨우치지 못하고 그걸 오로지 고생으로만 여겼다면 그건 의원의 마음가짐일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고 이어서 “지리산 골짜기에 너희들 호미질이 안 찍힌 데가 없다고 우긴다만 백 번 아니라 만 번을 오르내린들 아직 난 너희 중 아무도 이런 정성어린 손길로 캐 온 뿌리를 본 바 없다.”고 잘라 말한 다음 아들 손에서 허준이 캔 실뿌리가 달린 도라지를 집어 장쇠의 가슴에 던지지요.
“너희가 내 밑에서 오래 머문 것만 내세우나 아직 첫 새벽물 길러 다니는 진정한 뜻을 모른다니 물에 대해 일러주지. 물이란 무엇이냐?”
형,
이 대목에서 내가 느낀 건 바른 인생관에 서서 이룩한 해박한 지식과 뛰어난 실무 능력 그리고 사람을 알아보는 유의태의 눈입니다.
눈에는 홑눈<단안(單眼)>이 있고 겹눈<복안(複眼)>이 있다는데 유의태의 눈은 아마 겹눈인 것 같아요.(잠자리의 눈은 뒤편까지 본다니 그건 무슨 눈인지 잘 몰라요)
소설 <동의보감>이 의서 <동의보감> 못지않은 좋은 책 같아 참 기쁩니다. 소설 <동의보감>이 잘 팔리자 소설00, 소설xx 등이 쏟아져 나오는 걸 보고 서글퍼졌어요. 언제까지 흉내만 내다 말건가 한심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창비가 이 책을 팔아 돈을 벌게 된 것도 기쁘지만, 진짜 기쁨은 <동의보감>을 읽고 인간답게 사는 길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을 믿어 봐야지요.
다음은 나무 이야길 좀 해볼게요.
지금은 강원도에 가 있는 현기 스님이 정릉 봉국사에 머물고 있을 때 그 분의 방 앞에는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있었고, 좀 떨어진 산비탈에도 느티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늦은 봄에서 여름으로 접어들 때쯤인데 이른 아침에 산 중턱에 있는 뒷간으로 가는 사다리를 오르다 보니 벼랑에 느티나무 총생이가 몇 그루 있는데 분에 심기에 알맞았어요.
명륜동 승가회 사무실에 심겠다고 스님과 함께 명륜동 가는 길에 미아 삼거리 어느 다방에 들어갔다 문제가 벌어졌어요.
문을 열고 몇 발짝 들어가자 종업원들이 일제히 뭐야 뭐야 하며 나한테로 다가오면서 숨을 들이쉬면서 느티나무 모조에 코를 갖다 대고 이게 무슨 나문데 이렇게 좋은 향기가 나느냐고 묻는 것이었어요.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많이 크는 동네에서 느티나무를 심고 가꾸어 보긴 해도 느티나무에서 향기가 난다는 건 이때 처음 알았습니다.
군불을 넣을 때 때때로 보이는 송진이 빨갛게 엉킨 관솔을 태워 버리기 아까워 잘게 쪼개서 술에 담가 마십니다. 불을 붙이면 잘 타기에 옛날에는 이 관솔로 불을 밝혀 일도 하고 글도 읽었다지요. 관솔은 가지를 자르면 송진이 그 상처로 모여 이루어진 거지요. 상처의 아픔이 관솔로 승화된 걸로 여겨봅니다. 그 대적인 것이 감나무 같아요. 감은 딸 때 가지를 꺾어 한 알 한 알 따는데 가지마다 상처를 입게 되지요. 그 상처로 빗물 같은 것이 스며들어 이루어진 검은 멍자국이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먹감나무 무늬지요.
십여 년 전에 구해 두었던 감나무 토막을 지난 추석 무렵에 그라인드로 다듬었더니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 나타납디다.
가까운 산과 먼 산 사이에 엷은 구름이 깔려 있고 이어지는 능선에는 나무들이 듬성듬성 선 풍경입니다. 벽에 붙박아 두었는데 보는 사람마다 누구의 그림이냐고 묻습니다. 감나무 무늬라 하자 모두들 놀라고 감탄해요.
소나무는 상처를 관솔로 만들고 감나무는 상처를 아름다운 무늬로 만드는데 우리도 상처로 좌절하지 말고 상처를 딛고 보다 나은 사람, 보다 나은 민족이 되어야겠다고 여겨 봐요.
아현동에 있는 현암사로 수백 년 살다 말라죽은 소나무 가지 토막(지름 십오 센티미터, 높이 십 센티미터)을 부친 후 편집부장을 만나서 들은 이야기는 이래요.
그 나무토막이 편집실에(넓이 여섯 칸 정도) 배달되자 편집실에 향기가 나기 시작하더니 점점 꽉 찼고 그 토막이 사라진 다음에도 두 시간 동안은 향기가 남아 있었다는 것과 불란서에서 평생을 발라도 싫증이 나지 않는 고급 향수가 바로 소나무에서 뽑은 향이라는 말을 했어요.
또 어느 선생님은 오래되고 좋은 소나무에는 기(氣)가 있다고 해요. 예를 들자면 우유는 보통 사흘 동안 보관이 되는 데, 기가 서려 있는 소나무 토막 위에 놓으면 닷새 동안 썩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발 달린 사람들이 떠나고 난 시골에서 뿌리박고 사는 나무의 고마움을 알고 정을 주고받으며 살아갑니다. 그 나무들을 보면서 온갖 생각을 합니다. 나무는 동서남북 사방으로 가지를 뻗으며 사는구나 하는, 따뜻한 남쪽 가지는 좀 더 크고 길지만 춥다고 북쪽 가지가 남쪽으로 가지는 않는데 사람들은 편하게 잘 살겠다고 도시로 몰려가서 시골은 텅텅 비었서요.
사람이 자칭 만물의 영장이라 그래도 끄떡없이 살고 있는 건가요. 남쪽 가지만 있고 동‘ 서’ 북쪽 가지가 없는 나무가 쓰러지지 않을 수 없듯이, 도시로만 몰린 세상이 번영하고 불야성을 얼마나 누릴까요.
나무를 만지면서 배운 것이 몇 가지 됩니다. 소위 환경이 좋다는 곳에서 자란 나무는 단단하기도 향기롭기도 덜하고 메마른 곳에서 자란 나물수록 나이테가 쫌쫌하고 단단하고 아름답습니다. 향기도 아주 진합니다.
좋다는 곳에서는 뿌리를 깊이 박지 않고서도 수월하게 살 수 있지만 메마른 곳에서 자라는 나무는 뿌리를 깊이 박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데 땅에서도 역시 좋은 것은 깊은 곳에 있으니까 메마른 땅에서 자란 나무가 좋은 나무가 될 수밖에 없지요.
나무 중에서도 아주 진하게 크는 대추나무와 박달나무는 나이테조차 분간할 수 없는 놀라운 나무지요.
진하게 산다는 건 세월을 살 되 세월에 얽매이지 않는 삶이 아닐까 여겨 봐요. 그래서 봄에 잎이 가장 늦게 돋는 대추나무는 이파리가 단단하고 반짝반짝 윤기가 납니다.
하지만 나무 중에는 뭐니 뭐니 해도 소나무가 제일이지요. 삼천리강산 어디에나 지천으로 있고, 물오르는 봄에는 송기(松肌)를 벗겨 먹을 수 있고 송홧가루로 송이 다식을 만들어 먹을 수도 있으며 향기롭고 알맞게 단단해 땔나무나 집 재목으로는 이 소나무를 당할 나무가 없지요. 죽은 뿌리엔 복령(茯苓)이 달리고, 복령이 천 년을 묵으면 호박을 벤다고 하니 소나무는 보배 중에서도 보배지요.
사람이 하는 일에도 기(氣)와 향(香)이 있는 모양이지요. “서권기 문자향” 이란 말이 있듯이 좋은 책 읽으면 기운이 솟고, 글 구절에도 향기가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가 갖추어진 사람일 때나 걸을 때 지기(地氣)를 들이마실 수 있고, 나무나 풀의 향기를 마셔 내화(內化)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내화한 기와 향이 글이나 작품에 나타날 수 있겠지요.
사설이 길어 지리했지요?
요사이는 <사기(史記)>와 그것에 대한 책을 읽으며 나무를 만지고 있어요. 나무 만지는 일이 더 신나요. 사람이 만든 것보다는 자연이 만든 것이 더 좋은 게 틀림없는 것 같아요.
1992. 12. 7
愚弟 올림
-나무와 맺은 인연
印형
그가 우리 마을로 농활을 왔을 때가 85년 8월이었으니까 내년이면 십 년이 되네요. 그 때는 퍽 살벌한 세월이어서 젊은이들이 집단으로 몰려와 팔 걷어붙이고 논밭에서 일 거들어 준다는 건 큰 사변이었습니다.
어느 날 밤에 그가 친구와 둘이 세상에서 얄궂은 내 방을 찾아왔을 때 서로 무슨 이야길 했는지 다 까먹었지만, 그제나 이제나 확실한 것은 내가 구질구질하고 비겁하게 살아서 부끄럽다는 이야길 했고, 마침 가지고 있던 느티나무 뿌리 토막을 준 기억이 납니다. 주면서 했던 말이, 내 인생을 자르면 그 단면이 엉망진창일 게 틀림없는데 이 느티나무 토막의 무늬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형들의 삶은 이처럼 아름답기를 바란다고 했더랬지요. 이 느티나무는 동리 어귀에 버티고 서 있던 너 댓 아름 되는 동수(洞守) 나무(동리를 지켜 주고 동리를 상징하는)였는데 일제 말기에 왜놈들이 앞잡이를 시켜 베어 갔는데, 몇 년 전 새마을운동 판이 벌어지자 뿌리까지 뽑아 버린 것을 주워다 토막으로 잘라 사포로 갈고 닦아 간수 하고 들여다보던 거란 사연과 약탈자들은 쓸 만한 사람과 함께 나무도 죽이고 잘라 가더란 이야기도 곁들인 것 같습니다.
앞산 낙엽송도 육이오 전쟁이 터지기 일 년 전에 ‘치안벌채’로 낙락장소 베어낸 자리에 심었다는 사실도 역사 공부한다기에 일러줬지요.
사람을 죽이는 데 이골이 난 자들이 입가심으로 나무를 안주 삼아 베는 것 같습니다.
일제 때와 소위 해방 후의 산과 나무의 수난을 뚝눈으로 볼 때 왜놈들은 쌀 뺏어가자니 산을 건드리지 않았는데 미국은 잉여농산물 팔아먹을 심보로 산을 완전히 까까중으로 만듭디다. G.M.C 화물차가 가파른 산꼭대기를 뒷걸음질로 올라가 나무를 실어냈어요. 나무 몇 차 실어내면 쌀 몇 차 팔아먹을 수 있다는 계산이 컴퓨터 두드리면 나오겠지요. 도시에 큰 아파트 한 채 들어서면 농촌 인구 그거 채울 만큼 빠져 나가듯이 말입니다.
그 벌거숭이 산이 아물자 이번에는 포크레인이란 ‘외팔이’ 괴물이 나타나서 산을 송두리째 깎아 내고 없애 버리고 있습니다. 일각수(一角獸)가 나타나서 세상을 요절내는 무서운 이야길 몇 해 전에 읽었는데, ‘외팔이’가 산을 깎아먹는 무서운 꼴을 가는 곳마다 봅니다.
산이, 나무가 사람의 것이 아닌데 제 자식도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세상인데 어쩌자고 산을, 나무를 함부로 다루는지 모르겠어요.
맹호부대 용사들이 베트콩을 치고 거룩한 미국을 거들어 그곳 나무와 풀까지 씨를 말리려고 뿌린 고엽제에 감염되어 불치의 병을 앓고 있다는 신문 기사를 보면서 사람과 나무가 딴판 남이 아니라는 걸 알 것 같습니다. 산을 들어낸 우리는 앞으로 불치병보다 더한 형벌을 받을 각오를 해야지요.
말려서 되지도 않을 때는 구경이나 하기로 하고 제가 나무 심고 만진 이야기나 해보지요.
처음 느티나무를 심던 해는 퍽 가물었습니다. 6월 10일에 비가 와서 캐 두었던 모종을 심었더니 잘 삽디다. 뿌리가 좋으니까요. 느티나무치고 보기 싫은 나무는 없어요. 성질도 참 좋은가 봐요. 까다롭지 않고 그래서 꽤 오래 사귀었습니다. 한 이십 년 봄마다 심었는데 잘 커서 한 삼십 년 자라면 아름드리로 자랍디다. 모종은 큰 느티나무 근방에 가면 몇 그루씩 있습니다. 십 리 근방 느티나무 밑은 거지반 뒤지고 다녔습니다. 어느 만큼 크면 마을 천방에도 심고 학교에도 나누어 주었습니다. 큰길에서 동리가 보이지 않도록 천방 느티나무가 크고 우거지는 게 소원의 하나입니다. 우리 마을엔 느티나무가 고목에서 애둥이까지 백 여 그루 넘게 늠름하게 버티고 서서 자라고 있습니다. 아주 든든해요.
그 느티나무는 나무마다 잎이 다르고 단풍 빛도 달라요. 자연의 무궁한 조화를 느끼기도 하고 나무도 각각 개성이 있다는 걸 알 것 같고, 큰 느티나무는 가지마다 잎 모양이 달라요. 정말 놀랍고 신비합니다. 그걸 바라보면 살 맛이 납니다.
수해(樹海)란 말이 있지요. 저의 집은 나무로 담을 두른 셈입니다. 재산 공개할 겸 가짓수 적어 볼게요.
제일 먼저 심은 나무는 살구나무였어요. 살구나무 골짜기를 만들어 보겠다고 심었는데 한 이십 년 자란 살구나무는 제법 굵어요. 스님한테 들으니 목탁은 살구나무가 가장 좋다고 하니 언젠가 목탁 만들어 깨지지 않을 만큼 미치게 두들겨 보고 싶습니다.
이번에 4대가 한집안에 살며 동생이 암으로 사경을 헤맨다는 분의 “만일에 환생을 한다면 다시는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고 가장 구슬피 우는 짐승으로 태어나겠다.”는 기막힌 하소연은 착실하기에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분의 탄식이었어요.
형도 알다시피 여긴 시골이라 다니다 보면 버려진 나무토막이 눈에 뜨입니다. 굵지도 작지도 않지만 썩게 버려 두기도, 군불을 때기도 아까운 걸 주워다 필통을 팠어요. 톱 한 자루 사고, 글은 수도원 수사님한테 한 벌 얻어서 지름 십 센티미터, 길이 이십오 센티미터 될까 말까 한 걸로 손바닥이 벌겋게 달도록 팠지요. 보통 연필꽂이가 둥근 통에 세워 꽂혀 있는 걸 보면 괜히 힘이 들어요. 게으른 탓으로 눕기 좋아해서 연필을 눕힐 수 있는 긴 통을 파서 나누어 줬는데 그 때 눈에 뜨이는 나무는 느티나무, 은행나무, 옻나무였습니다. 은행나무는 세월이 지날수록 노오랗게 변해 가고 옻나무는 노란색이 별로 변하진 않지만 자주 매만져 세월과 손때가 묻으면 물리적 무게는 줄지만 존재 자체의 무게는 무거워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 인간은 어떤가요. 지위와 권세, 명예가 오를수록 존재 자체는 가벼워지다 못해 형편없이 되는 것 같은데 형은 어떻게 봅니까?
나무를 끌로 파 보니 결과 엇결이 있는데 결 따라 파면 힘이 덜 들데요. 때때로 힘들게 엇결로 파면서 사나운 운수가 미련하게 엇결로 사는구나 싶어서 내가 날 보고 쓰게 웃을 때도 있습니다. 끌이 비호같이 잘 들고 솜씨가 어지간하면 엇결도 그다지 힘들진 않답디다.
우리 동리에는 동수나무가 두 그루 있었습니다. 아까 말한 느티나무는 그렇게 잘렸고, 저의 집에서 더 골짜기로 올라가면 몇 백 년 묵은 아름드리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그 나무도 동수나무였습니다. 동민들이 소원을 빌기도 하고 음력 정월 보름날 자정에는 동리 사람들이 정성을 모아 만든 떡과 감주, 삼실과를 차려 놓고 제사를 지냅니다. 잘 돌봐 주셔서 고마웠습니다. 올해도 여우같은 저희 동민들 갉지 마시고 잘 돌봐 달라고 비는 제삽니다.
그 나무가 십여 년 전에 시들시들해지자 수간주사(樹幹注射)를 놓았는데도 끝내 죽고 말았습니다. 말라 죽어서도 한 오년 동안 늠름하게 버티고 서 있더니 뿌리째로 넘어졌어요. 넘어진 채 몇 해를 지나자 바깥 쪽이 썩더니, 송진이 많이 박힌 옹이는 진을 뿜어내고 원 둥치는 송진이 박힌 데까지 썩어 들어갔어요.
나무란, 특히 낙락장송은 살아 있을 때도 보배지만 죽어도 보밴데 그걸 사 썩인다는 건 정말 아까웠습니다. 그런데 시골에서는 동수나무는 살아 있을 땐 말할 것도 없고 죽은 나무도 건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고, 한 삼십 년 전에 죽은 동수나무를 자른 사람이 아파서 죽은 사실이 있었어요. 꼭 그 일 탓이라곤 할 수 없지만.
그런데도 그 나무를 그냥 썩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과 건치다가 화를 당할 두려움이 뒤엉켜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동리에는 똑똑한 사람, 힘센 사람이 여럿 있는데 누가도 그 나무를 거들떠보지 않아요. 모두들 무서운가 봐요. 사실은 그래서 그 나무가 말라 죽은 채로 그곳에 있을 수 있었던 거지요.
일 년 넘게 망설이다 보배를 썩여서는 안 되겠다는 결단을 하고, 잘랐습니다. 긴 데는 열 자, 짧은 데는 나무 생김새대로 여러 토막으로 잘랐더니 보통 화물차로 한 차쯤 됐어요. 작은 토막, 반 썩은 토막까지 간수했습니다.
처음에는 10자 X1.7자(지름)짜리는 팔아 비용 쓰고 짧은 토막으로 책상 만들어 나눠 쓰겠다고 마음 먹었지요. 이웃집에 초상이 나서 널을 삼사십만 원 주고 샀다니 긴 토막은 백만 원은 받아야 하는데 돈 아까운 건 나도 알지만 나무가 보배라는 걸 아는 사람 없을 것 같고, 또 그 나무가 내 나무가 아니란 걸 깨닫고, 좋은 책 만들어 주는 출판사에 주었습니다. 나머지는 주로 책상 두께(두 치)로 켜서 한 일 년 동안 사이사이에 엷은 졸대 끼워 쌓아 두었는데 그 고방에 들어가면 송진 향기가 진동했어요.
직접 만들어 본다고 대패, 그라인더, 드릴 같은 연장을 사고 쓰는 법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만들기 전에 궁리도 많이 하고 물어 보기도 했지요.
큰마음 먹고 만들기 시작했어요. 생김새를 그대로 살리면서, 나무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는 느낌이었어요. 자연의 조화, 나무의 신비, 이런 걸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며 마음으로 느꼈지요. 그러면서 나를 돌아보고 인간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훌륭한 사람을 만난 느낌을 나무와의 만남에서도 느끼게 되고, 인간 이상의 것을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
고사목(枯死木), 말라죽은 나무, 죽었다는 게 뭘까, 진짜 죽었는가, 인간들이 죽었다고 단정해서 잘라 켜 다듬은 나무가 향기를 뿜어 내고 빛깔을 바꿔 가며 자꾸 변해 가는데 어째서 죽었다 할까. 그건 아마 진짜 인간이 죽은 다음에도 역사에 길이 남아 살아 있는 인간들한테 영향을 주는 것과 비슷하구나 여겨져요. 인간은 그런 사람 드문데 나무는 거의 다 그렇게 느껴지니 나무는 다 제대로 사는가 봐요.
대패밥도 향기롭고 아까워서 차마 버릴 수 없어 쓸어 모아 베갯속 넣어 베개 만들고, 톱밥으로는 술을 담갔습니다. 소주를 부으니 향기로운 술이 됩디다. 이 사람 저 사람한테 나눠 주기도 했지요.
몇몇 선생들께 책상 만들어 드렸더니 그렇게 좋아하시고, 귀한 편지도 보내 왔어요. 책상판에 호두나 잣을 칠했더니 한결 아름다워집디다. 희미하던 무늬가 뚜렷하게 나타나요. 여자들이 화장하는 사연을 알 것 같았어요. 너무 진한 화장은 무늬를 덮어 버리니 엷은 화장해서 형의 그 고운 살결 환히 보이도록 하면 좋을 것 같은데, 피부에 자신이 없으면 진한 화장하시고요.
그 나무는 두 줄기로 솟아 큰 가지도 쳤는데 줄기와 가지 따라 결과 무늬가 다 달라요. 곧은 데도 있고 비비 뒤틀려 꼬인 데도 있는데 곧은 건 수월하게 만들 수 있지만 꼬인 것은 생각을 비비 돌려야 만들 수 있었어요. 곧은 건 판 한 장 붙이면 그만인데 뒤틀린 것은 판을 두세 겹 포개어 붙여야 바로 잡을 수 있었어요. 쉬운 일이란 별 생각 안 해도 되는데 굽고 뒤틀린 것으로 뭔가 만들 때는 꽤 많은 시간과 생각이 들데요. 어려운 일이 첩첩이 겹치면 넌덜머리가 나겠지만 때로는 어려운 일이 있어야 궁리하는 능력을 키울 성싶었습니다.
자르고 대패질해서 사포로 다듬는 게 일인데 그 자르는 톱질도 쉽지 않습디다. 욕심 부려 손에 힘주고 빨리 자르려 들면 비탈로 나가요. 손 힘 빼고 톱 시대로 나무 결대로 욕심 내지 말고 잘라야 겨우 줄 따라 잘라져요. 그것도 위쪽은 맞는데 아래쪽은 빗나가요.
단소 배우는 젊은 신부님이 선생님께 단소 배우는 방법을 가르쳐 달랬더니 선생님 하는 말이 “부시오.” 하더랍니다. 그래요. 부는 수밖에 별도리 없지요. 나무를 직각으로 자를 수 있는 방법도, 자르고 자르고 또 자르는 길밖에 딴 길은 없을 것 같아요. 우리가 사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듯이 말입니다.
판을 다듬는데 기계로 하니까 쉽고 빠른데 정신을 차릴 수 없었어요. 사포로 문지를 때, 쌘더로 할 때와 손으로 할 때, 손질도 빨리 할 때와 천천히 할 때가 다 달랐습니다. 저의 어설픈 경험은 손으로 천천히 할 때가 정성을 함께 넣을 수 있었습니다. 못난 놈의 정성은 가만히 대상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그 무엇을 만들 때 정성을 불어넣지 못하면 만들어진 것이 허깨비지 물건은 아닌 성 싶어요.
물체와 정성이 어울려 만들어진 것이 진짜 물건같이 느껴져요. 그래서 역시 근본은 손이고 그 손을 통해 사람의 정성이 대상에 전달되는 데 그 과정이 조용해야 되는구나 싶었어요. 이건 하찮은 저의 경험입니다.
그리고 나무도 큰 것보다는 작은 토막이 더 아름다웠어요. 자연도 작은 걸 더 아끼고 보살피나 싶데요. 작은 것이 알뜰살뜰 살았구나 싶기도 하고, 크면 듬성듬성 살 수밖에 별도리 없지요. 토막, 자투리, 조각의 소중함을 느끼기도 했지요. 그래서 푼돈은 아껴라 했구나 싶고, 틈틈이 얼마나 중한가도 생각해 봤지요.
두 마리 용이 바라보는 그림 같은 형의 책상을 만든 그 나무가 황장목(黃腸木)이래요. 동수나무 덕분으로 많은 공부 하게 됐어요. 고사목이 생나무 벤 것보단 훨씬 낫대요. 우리나라에 소나무가 자라기 시작한 건 육천 년 전에 소나무가 갑자기 불어났다고 추측된대요. 지금의 소나무는 태백산과 그 근방 산에서 자라고 백두산에서도 자란답니다. 척박한 땅에서는 낙엽 활엽수보다 강하지만 기름진 땅에서는 못 당한대요. 그래서 설악산에선 능선엔 소나무, 비탈과 골짜기엔 낙엽 활엽수가 자라고 있답니다. 은행나무 다음으로 오래 살고 몸집이 크다고 십장생(태양, 산, 물, 돌, 구름, 소나무, 불로초, 거북, 학, 사슴)에 드는데 삼사십 년 자라야 재목이 되고 육십에서 팔십 년 지나야 대들보감이 된대요.
제 고향과 강원도 태백 지방에 나는 소나무를 춘양목이라고 해서 귀한 목재로 치는데 결이 곱고 빛나며 속살이 황적색을 띠는 아름드리는 황장목이라 한 대요. 옛날에도 이걸 귀한 보배로 쳤답니다.
울진군 서면 소광리, 화전민들의 후예들이 전기도 없이 호롱불로 어둠을 밝히며 사는 산간오지가 ‘가장 잘 생기고 질 좋은 소나무’로 꼽히는 아름드리 금강송(본 이름은 금강송인데 일제 때 베어낸 금강송을 봉화군 춘양역에서 열차로 실어낸 탓으로 춘양목이란 이름이 붙었대요) 이 숲을 이루고 있는 마지막 자생지랍니다. 그곳에서 자라는 이십 미터가 넘게 날씬하게 솟은 소나무의 붉은 껍질이, 햇빛이 구름을 벗어날 때마다 황금빛으로 반짝거린답니다. 그곳에 자라는 소나무는 최고 오백 년에서 이백 년 이상 된 것이 약 백만 그루 빽빽이 서 있는데 산 아래서는 전복대 굵기쯤 뵈는데 가 보면 아름드리 거목이 하늘로 뻗어 줄기 끝은 볼 수 없대요.
진짜 금강송은 나무껍질이 지금 것보다 훨씬 얇고 밑둥이 회갈색을 띠며 거북 등처럼 갈라져 때깔과 자태가 지금 것하고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잘 생겼는데 다 잘려서 볼 수 없대요. 어떤 골짜기엔 가슴 높이 백십 센티미터가 넘는 가장 오래된, 수령 오백 년의 노송이 기묘하게 뒤틀려 뻗은 가지로 풍상의 세월을 견뎌 온 지조를 뽐내고 있는 듯하대요.(한겨레신문 92년 9월 30일 <이곳만은 지키자>에서)
언제 거기 가 봅시다. 불영계곡이 여기선 그리 멀지 않습니다. 원시림의, 만고의 고요 속에 잠겨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형이 이번 지리산 길에 장터목 지나 천왕봉 오른다니 새벽 어스름에 고사목 지대를 지나겠네요. 제가 처음 지리산 갔을 땐 산에 오르지 않고 화엄사 옆 개울에서 보냈습니다. 수많은 크고 작은 바위 사이로 찢어지며 흐르는 비명 같은 물소리와 숨가쁘게 울어 대는 매미 소리가 조국의 운명을 끌어안고 쓰러져 간 사람들의 호곡같이 느껴졌고 맴도는 잠자리 떼는 죽어서도 갈 곳 없는 원귀들의 넋 같아 차마 그곳을 뜰 수 없었습니다.
종주했을 땐 죽어서도 늠름히 서 있는 주목, 고사목에 자주 눈길이 갔고 형과 함께 갔던 소백산 주목 지대에 들었을 땐 둥치가 몇 갈래로 갈라진 채 삐딱이 서 있는 주목이 조국의 운명을 보는 것 같아 처절함을 느꼈습니다. 그걸 구경거리로 여기는 사람은 남의 처참한 불행을 구경거리로 삼는 심사 같은데 사람한텐 그런 속성도 있는 것 같습니다.
형,
드디어 재산 공개로 들어갑니다. 구린내 나는 건 들추지 말고, 천하에 떳떳한 담 안에 서 있는 나무 헤아려 봅니다.
갖다 심었을 뿐 저렇게 멋지게 자란 것은 땅 기운과 햇빛을 비롯한 천지 자연의 조화의 힘이라 여깁니다. 농사도 그래요. 사람은 약간 거든 거고 천지 조화로 싹트고 자라고 영글었지 그건 사람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부분입니다.
저의 집에 있는 나무도 산에서 자라기보다 불편하고 답답함을 느낄지 몰라요. 나무를 제가 키운 것은 절대 아닙니다. 이제 그런 건방진 생각은 안 할 만큼 철이 들었습니다. 가나다 순서대로 적어 봅니다.
가죽나무: 잎이 연할 때는 데쳐 먹기도 해요. 서울 거리의 가로수로서 있는 것은 참죽나문데 속살이 붉고, 가죽나무는 속살이 누래요. <장자>엔 못난 나무로 씌어 있지요.
느릅나무: 잎이 제법 아름답고 굴피가 연해서 연장 자루로 많이 씁니다
느티나무: 설명이 필요 없지요.
두릅나무: 나무 꼭대기에 두릅이 달리는데 뿌리로 잘 번져요. 가시도 많고.
닥나무: 종이를 만드는데 나무 껍질을 두들겨 만든다고 하여 ‘벼락 딱 방망이’라는 말도 나오고, 부러뜨리면 딱 소리가 납니다. 껍질로 노를 만들고 밧줄을 꼬기고 합니다. 큰 닥나무는 꽃도 피고 오디 같은 열매가 달리는데 그걸 저실(楮實)이라 해서 한약에 쓰요. 피로, 눈이 침침할 때, 허리와 무릎이 붓고 시릴 대 쓴대요. 지금 지천으로 달려 있습니다. 필요하면 기별해요. 소주에 담갔다 먹으면 대요.
단풍나무: 종로 5가에서 적단풍이라고 사다 심었는데 푸르러요. 푸른들 어때요. 적단풍 한 그루 있습니다. 일점홍(一點紅) 볼만해요. 단풍나무는 빨리 자라는 편입니다.
모과나무: 껍질이 특이하지요. 예비군 복장 무늬가 그와 비슷해요. 울퉁불퉁 못생긴 모과 향기가 매끈한 개량종보다 더 향기롭습니다. 못생긴 사람 인정 많고 매끈한 놈 쌀쌀맞은 이치 같기도 해요. 모과나무 옆에 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모과나무가 키만 크고 꽃은 피는데 열매가 달리지 않아 그늘 지우는 나무를 잘라냈더니 작년부터 열려요. 나무가 제대로 자라는 덴 공간이 필요한 것 같았어요. 사람은 빽빽할수록 좋은 모양이지요. 꾸역꾸역 도시로 몰리는 걸 보면.
물푸레나무: 잎이 볼만해요. 가지로 도리깨 노리를 만들지요. 도리깨는 타작할 때 쓰지요. 긴 막대기를 장치라 하고 노리를 그 끝에 끼우게 만들었는데 옛날엔 ‘보리타작을 할라느냐 염병을 않을라느냐“ 할 만큼 땡볕에서 보리타작 해봤더니 정말 얼얼합디다.
매실: 술 담그면 향기가 일품이고 이른 봄에 꽃이 피는데 술 담그는 매실은 익기 바로 전이라야 합니다. 서울 거리에서 파는 건 너무 빨라요.
배나무: 달밤에 흰 배꽃이 일품이라 “이화에 월백하고” 어쩌구 했나 보죠. 옛날 돌배나무는 몇 아름 되는 게 있었고 나무 결이 명주같이 곱습니다. 감나무, 은행나무 결과 비슷하게 고와요.
밤나무: 옛날 밤은 작고 달았는데 개량종은 굵긴 하되 맛은 별로지요.
복숭아나무: 까틀 복상입니다. 토종인데 어지간히 익었을 때 발로 차서 떨어지는 게 제 맛이 나요. 슬쩍 삶아서 먹기도 해요. 딱딱한 씨 껍질 안에 진짜 씨가 있는데 이게 도인(桃仁)이지요. 개량종에는 인(仁)이 없대요.
뽕나무: 오디가 향수를 자아내지요. 요사이 애들은 과자 사먹을 줄 알지 오디 따먹을 줄은 몰라요. 누에 쳐 봤더니 흰 누에가 푸른 뽕잎 먹는 모습은 푸른 숲에 수많은 흰옷 입은 사람들이 모인 광경 같아 “야” 소리치고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잠식(蠶食)이란 말이 있지요. 야금야금 먹는다, 차츰 침략해 들어간다는 나쁜 뜻도 되지만, 화닥닥 덤비지 말고 차근히 치러 가는 좋은 뜻도 있죠. 누에 같이 먹으면 체하진 않죠.
벚꽃나무: 토종 벚꽃나무
벚나무: 산에 자생하는 키 작은 상록숩니다. 송이 위에 작은 흰 꽃이 둥글게 핍니다. 생김새가 영산홍 비슷합니다.
살구나무: 씨는 행인(杏仁). 행화촌은 살구나무 많아 살구꽃 만발한 동리도 되고, 술집이란 뜻도 있대요.
생강나무: 잎이 일품입니다. 잎과 가지에서 생강 냄새가 나서 생강나무, 이른 봄 산에서 가장 빨리 노란 꽃이 핍니다. 떨기로 자랍니다. 잎이 피어날 때 새 부리 같아 이걸 따 말린 것을 작설차(雀舌茶)라 하고, 열매로 짠 기름이 동백기름이래요. 정말 신비한 나뭅니다. 정원수로도 적당해요.
산수유나무: 귀에 따대기 앉을 만큼 여러 번 들었지요.
오갈피나무: 오갈피 잎, 줄기를 함께 소주에 담그면 향기로운 술이 됩니다. 이파리가 다섯 쪽으로 갈라져 오(五)자가 붙은 것 같습니다. 한약에 쓰지요.
오동나무: 꽃향기가 대단합니다. 재목은 방화, 방습, 방충 역할을 한답니다. 대나무가 귀한 이곳에선 옛날에 오동나무로 퉁소를 만들었다 해서 퉁소를 한번 만들어 봤어요. 소리가 대나무보다 무겁고 순합디다.
아그배나무: 한방의 산사(山査)인데, 잎이 반짝반짝 빛나요. 가을에 빨갛게 익은 아그배나무는 멀리서 보면 대추나무 같아요. 잎, 열매는 차(茶)로 쓰면 됩니다.
은행나무: 노랗게 물든 잎이 한꺼번에 몽땅 떨어지는 게 특징 같아요. 떨어진 것 중에 가장 아름다운 잎.
잣나무: 만든 책상이나 필통에 잣 칠 했더니 한결 돋보여요.
전나무: 월정사 어귀의 전나무 숲, 깊은 산속에 자생하는 상록침엽교목. 높이 삼십 미터, 지름 일 미터까지 자라는데 칠팔 년 동안은 느리게 자라다 기초 다지면 쑥쑥 큰데요. 수령이 오백 년이나 되는 나무를 봤어요. 사람이 나무를 보는 게 아니라 나무가 사람을 가소롭게 보는 것 같아요.
화살나무: 자생하는 키 작은 나문데 줄기 양쪽에 화살 같은 깃이 달려 그렇게 부르나 봅니다. 단풍이 아름답고, 민간요법에 약으로 씁니다.
회나무: 괴화나무가 옳은 말 같아요. 괴화꽃은 한방에서 쓰고, 옛날에는 꽃을 따서 노란 물 들이는 데 썼답니다. 통시 가까이 심어 놓으면 치질에 안 걸린다고도 해요. 꽃이 지천으로 피었다 나무 밑에 꽃방석을 깐 것처럼 떨어져요.
형의 고향 남해의 포구나무, 남원 광한루의 팽나무, 해남 대흥사의 비자나무, 삼나무도 그지없이 아름답고 든든한 나무였어요. 이렇게 자연은, 나무는 사람과 함께 살자고 사람한테 많은 혜택을 주는데 철없는 사람들이 배은망덕하게 그 나무를 막 자라 버리고 있습니다.
형,
그 날 정릉 종점에 있는 국민대학으로 약속 시간에 가서 전영우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학교에는 학생도 많고 나무도 많이 서 있고 바로 옆엔 산이 있었습니다. 술꾼이 술친구를 만나면 반갑듯이 나무 공부하시는 선생님 만나서 참 기뻤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임학과 학생들만이라도 일 년에 몇 번 맨발로 흙 밟게 할 수 없을까 하는 안타까운 소망을 말했더니, 선생님께서는 바로 옆에 있는 산에조차 올라가는 학생들을 볼 수 없다고 한탄을 합디다. 신발이 참 소중하긴 한데 그 신발을 벗고 흙을 밟을 줄 모른다면 신발이 사람을 잡는 흉기로 둔갑하는 것 같았어요.
내려가는 길에 경산에 있는 영남대학엘 갔습니다. 백만 평이나 되는 넓은 땅에 산도 있고 숲도 있고 못도 있는 참 좋은 학교였어요. 그곳에는 제가 존경하는 선생님이 몇 분 계셔서 한 선생님을 만나 학교 이야기, 학생들 모습, 세상이야길 했지요.
선생님 말씀이, 학교가 넓다 보니 사 년 동안 다 밟아 보지도 못하고 졸업한다, 전에는 학생들이 숲 속에서 모임도 하고 놀기도 했는데, 요 몇 년 사이에는 숲을 찾는 학생들을 볼 수 없다고 했어요.
또 한 가지 역사 공부하는 젊은이들의 <지리산 역사 기행>을 그들이 산을 어떻게 보는가 궁금해서 읽어 봤어요. <아 지리산>하고 작은 제목은 있는데 산에 대한 이야기나 소감은 한마디도 없었습니다. 남부군 이야기 일색이었어요.
지난날 사람들은 사람의 아들인 동시에 자연의 아들이었고 고향에는 부모 친척은 물론이고 고향 산천도 있었는데 지금은 도시화하여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서 문명의 아들로 크다 보니 산천을 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게 발전인지 오그라듦인지 몰라요.
지난날엔 국토와 국민을 함께 생각했는데 이젠 국토는 안 중에 없고 국민만 보는 역사가 된 것 같아요. 그래서 국토를 함부로 다루고 있는 것 같아요.
자연과 멀어지고 인공(人工) 인위(人爲) 일색으로 사는 게 발전일까요? 자연과 인위(人爲)의 균형이 깨어져 인공(人工)이 판을 치는데 인 변에 위(爲)자를 쓰면 거짓 위, 속일 위(僞)자가 된대요.
지난번 서울 갔을 때 이철수 형 아버지가 아파트 분양 받았으나 오라 해서 갔더니 십이 층 방에 옮겨 놓은 가구들 문이 열리지도 닫히지도 않는다고 놀랍디다. 가구가 그런데 사람은 어떨까 무서웠습니다.
사람이 집에 맞춰 사는 세상이 사람한테 맞춰 집을 짓는 세상보다 좋은 세상이라고 야단인 덴 할말이 없어요.
누가 말려요, 말린다고 됩디까? 두고 보는 수밖에.
아까운 종이에 쓸데없는 소리만 잔뜩 늘어놓아 죄송해요. 안녕히 계십시오.
1993. 6. 15
우익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