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재래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는 고추. 판매상은 “국산 고추의 마진이 상대적으로 높지만 중국산은 음식점 등에서 대량주문이 많아 박리다매가 가능하다”고 전했다. 생산지별로 마대에 담겨 있는 국산 건고추(위). 500] 단위로 포장된 국산·중국산 고춧가루(아래).
22일 서울의 한 재래시장에서 만난 고추 소매상은 “일반 소비자는 한국산, 식당은 중국산으로 고추시장이 구분돼 있다”며 “원산지표시 단속을 한달에도 몇번씩 나오니까 우리는 정확히 표시를 하고 있지만 단속 사각지대에서 영업하는 업체는 중국산을 국산으로 속여 파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시장에서 팔리는 중국산 고춧가루는 500g당 5000원으로, 국산 상품가격과 비교하면 거의 3분의 1 수준이다. 색택은 중국산이 되레 국산보다 낫다는 상인들도 있었다.
그러나 취재과정 중 접촉한 음식점 업주나 소매상 가운데 수입 고추의 35%가 냉동고추를 들여와 해동·건조시킨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건고추 환산 시 연간 3만7000t이 넘는 수입 냉동고추가 최종 소비단계 직전에 정체를 감추는 셈이다.
엄영희 고향주부모임 서울시지회장은 “고추를 얼렸다 말리는 과정에서 위생·안전상 어떤 문제가 있을지 모르는데 냉동고추가 그렇게 많이 유통된다는 것을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면서 “냉동고추를 해동·건조해서 유통시킬 경우 소비자가 이를 알 수 있도록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촉구했다.
◆냉동고추 건조 때 관세차액 물려야=국내 경종농업 가운데 생산액 2위를 차지했던 고추산업. 그 생산기반을 지키기 위해 270%의 높은 관세가 설정됐지만 이 같은 보호막은 관세 27%짜리 냉동고추에 의해 맥없이 허물어졌다. 올해 생강값 폭락 사태는 고추농사를 접은 농민들이 대거 생강 재배에 몰렸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고추 재배를 중단하는 농가가 계속 늘고 있어 앞으로 어떤 작목으로 불똥이 튈지 알 수 없는 상태다.
고추업계는 수입 냉동고추의 건조 후 가루유통 행태를 관세포탈이라고 주장한다. 관세가 낮은 냉동상태로 들여와 해동·건조하면 영락없는 건고추가 되기 때문이다. 홍성주 충북 제천 봉양농협 조합장은 “수입 냉동고추를 국내에서 변칙 가공할 경우 관세차액을 추가로 부과하고, 냉동고추 사이에 건고추를 끼워서 수입하는 행태도 확실히 단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대수 새누리당 의원(충북 증평·진천·음성)은 “수입 냉동고추로 인해 국산 고추값이 폭락하고 건고추 재배면적이 급감하는 등 고추 주산지 경제가 타격을 입고 고추 재배농가들은 설 자리를 잃고 있다”며 “정부는 사태를 방관하지 말고 냉동고추의 용도 제한 등 실효성 있는 규제와 더불어 국산 고추를 사용하는 식품가공기업에 대한 세제혜택 등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체험프로그램 등 연계 국산 소비 확대=서울 금천구에 사는 주부 임모씨(54)는 최근 농산물 직거래장터에서 3㎏짜리 국내산 건고추 5포대를 김장용으로 구입했다. 임씨는 “집에서 먹는 고춧가루는 다 국내산을 쓴다”며 “수입 고추는 맛이 떨어지고 안전성도 신뢰하기 어렵다”고 했다. 서울 광진구의 주부 지모씨(41)도 고춧가루는 국산을 고집한다. 지씨는 그러나 “고추장이나 김치를 직접 담그지 않다 보니 집에서 쓰는 고춧가루의 양은 그리 많지 않다”고 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최근 도시가구 설문 결과 올해 김장을 지난해보다 적게 하겠다는 비율은 28%에 달했다.
농경연은 “건고추나 홍고추 원물보다는 김치나 고추장 등 1·2차 가공품 소비가 증가하는 추세”라고 분석했다.
이 같은 소비패턴의 변화는 국산 고추 소비를 중국산 고추로 대체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시판되는 김치·고추장 제품이 수입고추를 원료로 많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송성환 농경연 양념채소관측팀장은 “주식인 쌀 소비가 줄다 보니 곁들여 먹는 고추류의 소비량도 줄고 있는데다 수입 고추의 영향으로 국산 고추의 시장이 좁아지고 있다”며 “수입 고추 주요 소비처에서 국산 고추 사용비율을 높이도록 유도하고, 규모화 생산 등을 통해 생산비를 낮추는 노력이 요구된다”고 밝혔다.
이한종 서울 송파농협 조합장은 “도시민 김장 체험·고추장 담그기 체험 등이 국산 고추소비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며 “도시 주부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농촌 현장체험 기회를 확대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홍경진 기자 hongkj@nongm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