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3일. 오늘은 영국인들이 스코틀랜드 언덕을 모방해서 건설했다는 고산지대 휴양 도시 누와라엘리야로 이동하는 날이다. 동양 최초의 골프장이니 동양 최초의 경마장이니 하는 것들이 있다고 하는 걸 보면 일찍부터 부자들이 놀러오던 곳이었나 보다. 고산지대라서 덥지도 않고 건물들도 예쁘게 지은 것들이 많아서 국내외 관광객들에게도 인기가 많은 곳이라는데 과연 날씨가 받쳐줄런지 모르겠다. 누와라엘리야는 빛의 도시라는 뜻이라는데, 매일같이 비가 내리고 있으니 과연 빛을 볼 수가 있을까?
느즈막히 아침을 먹고 버스 종점으로 가보니 구석에 빈 버스 하나 서 있을 뿐 관광객도 보이지 않고 조용하다. 타이밍이 안 맞았나? 하면서 둘러보는 중에 반갑게 다가서는 현지인이 있다. 해튼 가는 버스는 20분 전에 출발을 했고 다음 버스는 2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고 묻기도 전에 친절하게 알려준다. 그래? 여기서 해튼 가는 버스가 그렇게 드문가? 글쎄...... 가만히 듣고만 있으니 친절한 그이는 바로 본색을 드러낸다. 뚝뚝을 타면 해튼까지 금방 갈 수 있다고. 심지어는 목적지가 캔디냐 누와라엘리야냐고 묻더니 누와라엘리야까지 뚝뚝으로 모시겠다고 설레발을 떤다. 뚝뚝은 동네에서나 탄다니까. 우린 버스 탈 거야. 그 때 마침 비어있던 버스에 운전기사로 보이는 사람이 올라탄다. 다가가서 물어보니 10분 후에 출발하는 해튼 행 버스라고. 이거 뭐, 데자뷰 현상인가?
올 때와는 달리 갈 때는 해튼에 도착한 버스가 기차역까지 가지 않는다. 기차역은 버스 터미널에서 내려 10분 정도 걸어 가야 한다. (물론 뚝뚝이라는 편리한 물건이 있지만, 우리는 구경도 할 겸, 중간에 약국을 만나면 약도 살 겸해서 걸어갔다.) 나누오야 행 표를 사고서 언제 출발하냐고 물어보니 '지금'이란다. 열차시각표를 보니 벌써 15분 정도 지난 시각이다. 그리고 플랫폼으로 가보니 정말로 기차가 들어오고 있다. 헉! 정시에 기차가 왔으면 정말로 몇 시간 기다릴 뻔했네?
나누오야 역에 내리니 좁은 진입로에 뚝뚝과 (자가용으로 영업하는) 택시들이 늘어서 있고 누와리엘리야까지 얼마라면서 호객을 하고있다. 무시하고 슬슬 걸어가는데 언덕 위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삐끼? 돌아보니 가파른 계단 위에 버스가 보인다. 버스 차장이 배낭 지고 가는 우리를 겨냥해서 소리를 질렀던 것. 불러주지 않았으면 무심코 계속 걸어갔을 텐데, 차장 덕분에 멀리 돌지 않고 계단을 올라가서 버스를 탔다. 버스에 자리를 잡고 기다리는데 바로 앞 자리에 동양 여자가 한 사람 탔다. 능숙한 영어로 옆 사람과 대화를 하는데 아무래도 한국 억양이다. 그러려니 하다가 (우리는 외국 여행 중에 만난 한국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본 적이 없다. 우연한 합석을 제외하면 같이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신 적도 없다. 그냥,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오셨나봐요, 정도가 고작이다. 생각해 보니 징홍의 서울식당 안주인 생일 파티에 참석한 적은 있기는 한데...... 그들은 여행객이 아니었으니 해당사항 없음? 하여튼 요점은 동포 만나는 것이 싫은 건 아니지는 않지만 특별히 반갑지도 않다는 것.) 내리면서 눈이 마주쳐 인사를 했다. 한국분이세요? 그녀는 숙소를 예약하고 왔는데 평이 별로 좋지 않아서 걱정이라면서 뚝뚝을 타고 사라졌고, 우리는 이 동네는 삐끼도 없나? 하면서 두리번 두리번. 평소에도 삐끼를 잘 따라가지만, 오늘같이 비가 오는 날에 배낭을 지고 걸어다닐 수는 없지 않은가? 드디어 뚝뚝 기사가 다가온다. 메이아이헬프유? 어쭈? 대놓고 삐끼질하는 사람은 아닌가 보네? 예스, 위아루킹포러치프앤나이스룸, 두유노우? 오케이. 우리를 태운 기사는 빅토리아 공원을 빙 돌아 골목길로 들어서더니 어떤 숙소(이름을 잊음)로 안내한다. 들어가 보니 가격은 싼데 방 상태가 너무 안 좋다. 3000 불렀다가 2500으로 내려도 오케이를 하지 않으니 그럼 얼마를 원하냐며 더 깎아줄 수도 있다는 태세였지만 침구가 너무 낡아 보였다. 기사에게 조금 좋은 데로 가자고 해서 가게 된 곳이 프린세스 방갈로였다. 이번 여행 중에서 제일 맘에 들었던 숙소. 널직하고 천장이 높은 방안에는 킹사이즈 침대와 싱글 침대가 놓여있고 한 쪽에는 벽난로도 있다. 건물과 가구는 낡아 보이지만 화장실은 리모델링한지 얼마 되지 않은 깔끔한 분위기다. 그리고 집 주변과 정원을 예쁘게 꾸며 놓았다. 방세는 4000 루피에서 한푼도 깎아줄 수 없단다. 하긴 그만한 값어치는 되는 것 같다. (나중에 들으니 이 집은 150년 전에 지어졌는데 식민지 시절에는 총독(?)관저였고 10여년 전에 제법 유명한 기업가가 구입해서 별장으로 쓰다가 2년전에 게스트하우스로 리모델링을 했다고 한다. 집안에 전시된 오래된 생활용품과 고서적들이, 그리고 집주인을 인터뷰한 잡지 기사들이 종업원의 말을 뒷받침해 준다.) 가방을 들여 놓고 뚝뚝 기사에게 200 루피쯤 주려고 지갑을 열었는데 100짜리가 하나밖에 없다. 잔돈을 끌어모아 160 루피를 줬더니,애매하게 웃으며 받아 넣는다. 적다고 할 수도 없고 흔쾌하게 땡큐하기도 뭣하다는 표정. 뭔가 아쉬운 듯 차 공장 갈 때 자기 뚝뚝을 이용해 달라고 하기에 전화번호를 적어 두었지만, 차 공장을 간다면 버스를 타게될 테니 이건 공수표다. 이 근처에는 유명한 믈레즈나 티캐슬이 있는데 버스로 1 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비가 좀 약해지길래 밥도 먹을 겸 슬슬 시내로 가면서 보니 숙소 앞 길 건너편이 Good Shepherd Convent(선한 목자 수녀원?)이고 그 너머가 빅토리아 공원이다. 10분 정도 걸으면 중심가가 나오는데 이름값에 비하면 정말 작은 도시다. 금세 한 바퀴 둘러보고 밥 먹을 곳을 찾아보니 6거리(?) 건너편에 Pub Restaurant 이란 간판이 눈에 띈다. 들어가려니 입구에는 빈 맥주병이 수 십 박스 쌓여 있고 (그러고 보니 식당 이름이 라이언펍레스토랑이다.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라이언 맥주와 관계가 있는 듯.) 안에는 현지인들이 시끌벅쩍 술을 마시는 분위기다. 담배 연기 탓인가 좀 어두워 보인다. 여긴 술집인가봐, 하면서 나오는데 직원이 따라나와 붙잡는다. 식사를 하려면 위층으로 올라가라고 끌기에 따라가 보니 2층도 비슷하다. 뭐지? 또 올라간다. 3층에 올라가니 비로소 식당 분위기다. 아직 시간이 일러서 식사 손님은 없는 모양이다. 직원이 권해주는 pub special을 시켰는데 게 요리 이후 최고의 맛이다. 소고기 닭고기 해산물 채소 등을 찹수이 비슷하게 요리해서 밥에 얹은 것인데. 어디선가 우리네 고추장 맛 혹은 김치찌개 맛이 느껴지기도 했다. 가격은 550 루피고 둘이 먹기에 부족하지 않은 양이다. 기분이 좋아서 통닭을 반마리 사서 테이크어웨이. (처음에는 어? 테이크아웃이 아니고 어웨이? 했었는데, 알고보니 테이크아웃은 미국말 테이크어웨이는 영국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