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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여름집회
신성한 경륜
8. 강인 그 영 안에서의 신성한 경륜(1)
2013. 7. 30am. 대구교회 이현래 목사
이번 집회가 하나님의 신성한 경륜의 흐름이었었는데, 이 신성한 경륜의 목표는 연합이다.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살려고 하는 계획,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하겠다는 계획, 그것이 신성한 경륜이다. 이 신성한 경륜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생명나무 열매가 필요하다.
왜 우리는 그 동안 하나님의 신성한 목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안 되었는가? 그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서 안 되는 것이다. 왜 땅 위의 교회가 아직도 완성이 안 되었는가? 그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서다. 이것을 확실하게 알고 가면 된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대부분 오늘날 교회의 문제점을 많이 알고 있다. 만나보면 다 그 이야기를 한다. 교회의 이렇고 저렇고를 이야기 한다. 또 세상에서 받는 비난도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고치려고 해도 안 고쳐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그냥 두고 고치려고 하기 때문이다. 선악과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데 다른 것을 고치려고 하니까 안 된다. 열심 없는 것을 고친다거나, 사랑이 없는 것을 고친다거나, 봉사정신이 없는 것을 고친다거나 한다.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교회를 보고 교회가 뭐 하는 것인가? 자기들끼리 좋아서 돈을 거둬서 하는 것이지 무엇을 하는가? 이렇게 비평을 한다. 교회는 거기에 대해서 대답을 못하고 항상 양심적으로 어떻게 느끼는가 하면 교회를 가지고 세상에 봉사를 해야 하는데 세상에 너무 봉사를 안 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사회에 대해서 봉사를 많이 할까하고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 다 좋은 생각이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은 그것과 다르다. 교회의 본질은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이 연합하는 것이다. 그것이 안 되기 때문에 다른 것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이 안 되는 이유는 생명나무 열매는 먹지 않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었기 때문이다. 이유가 단순하고도 확실하다. 그런데 그것을 그냥 두고 이것저것 고치려고 하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이다. 당뇨병이 들어서 피가 끈끈해졌는데 발가락 하나 자른다고 그것이 낫겠는가? 발목을 자른다고 그것이 낫겠는가? 다 잘라도 병이 있기 때문에 안 낫는다.
교회의 문제가 무엇인가? 생명나무의 열매가 없어서 그렇다는 것을 꼭 알아야 된다.
그리고 신성한 경륜의 두 번째 목표는 연합을 통한 건축이다. 건축을 하기 위해서는 흐름이 필요하다. 아무리 생명을 가지고 있어도 흐름이 없으면 건축이 안 된다.
오늘은 ‘그 강인 영 안에서의 신성한 경륜(흐름)’에 대해서 말씀하겠다.
a. 생명나무와 에덴에서 발원한 강
창세기 2장에는 동산 안에 생명나무가 있고 에덴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강이 있으며, 계시록 21,22장에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흐르는 생명수의 강과 그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다. 시작에는 나무와 강으로, 완성에는 강과 나무로 배열되어 있다.
에덴동산에는 에덴에서 발원한 강이 있었다고 한다. 강이 흘렀다. 생명나무가 있고 강이 있었다. 그 강은 에덴에서 발원했다고 한다. 에덴이라는 말은 ‘기쁨’이라는 뜻이다. 누가 기쁜 것인가? 하나님이 기쁜 것이다.
계시의 완성인 계시록에 가면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생명수가 흐른다고 되어 있다. 창세기에서 봤던 에덴은 무엇인가? 중동에 있는 어떤 지역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한 동산을 말한다.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하면 은혜와 생명이 흐른다는 말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하면 은혜가 흐른다는 말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하지 않는 한은 에덴은 회복될 수가 없는 것이다.
생명수의 강, 이것이 흘러서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시절을 쫓아 열매를 맺기 때문에 다시는 배고픔이 없고, 어둠이나 두려움이나 이런 것이 없어졌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에덴에서 흐르는 강! 하나님과 어린양의 통치로부터 흐르는 강! 하나님과 어린양의 통치하시면 세상은 은혜의 물이 흐를 것이다. 은혜가 흘러내릴 것이다.
물이라는 것은 넘치면 흐르게 되어 있다. 넘치지 않으면 흐르지 않지만 넘치면 흐르게 되어 있다. 동산에는 생명나무가 있었고, 흐르는 강이 있었다. 오늘 교회도 생명나무와 흐르는 강이 있어야 된다. 오늘 교회는 동산의 실제이다. 에덴동산의 실제이다. 에덴동산에 생명나무가 있고, 흐르는 강이 있었다면 오늘 교회 안에도 생명나무 열매와 흐르는 강이 있어야 된다.
나무는 생명의 표현으로서 하나님 자신의 표현이고 그 열매는 나무의 결과로서 그것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사람에게 공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갈망은 자신의 생명을 받은 인간과 함께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으신 사람 앞에 생명나무를 두고 그 나무를 통하여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을 먹고 함께 하기를 원하셨다. 이 나무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죽으심과 다시 사심을 통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그리스도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신 다음에 생명나무 열매를 먹으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공급하기 위한 수단이다.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사람에게 공급할 수 있는 수단이 생명나무 열매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오는 방법이라는 말이다. 수단이고 방법이다. 예수님이 생명나무라는 말은 그런 뜻이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먹으면 영생한다. 예수를 어떻게 먹는가? 먹을 방법이 없다. 그 열매를 먹는 것이다. 우리가 먹을 수 있도록 까지 과정을 거친 열매를 먹는 것이다. 어디까지 과정을 거쳤는가? 예수님께서 우리가 먹을 수 있을 때까지 과정을 거쳤는데, 어디까지 과정을 거쳤는가? 죽으심까지. 죽으심과 부활까지. 그것이 최종 열매이다. 예수님의 인격의 최종 열매는 죽으심과 부활이다. 그것을 우리가 먹는 것이다.
열매라는 것은 마지막 가지, 꼭대기에 열리는 것이다. 과정을 다 거치고 난 다음에 맨 마지막 꼭대기에 열매가 열리게 된다. 예수님에게서 여러 가지 과정이 있는데 이 과정들 속에서 우리가 먹을 수가 없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지만 우리가 먹을 수가 없었다. 먹을 수 있을 때까지 간 것이 십자가까지 간 것이다. 우리가 먹을 수 있게끔 할 때까지, 제자들이 먹을 수 있을 때까지 간 것이 십자가까지 간 것이다. 아마 중간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먹을 수 있었다면 십자가까지 갈 필요가 없다.
우리가 생각하면 얼마나 좋은 것이 많은가? 죽은 나사로를 살린다든지,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인다든지, 이것은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사람들은 그것을 찾는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먹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따라오긴 하지만 결국 저 사람들이 나를 못 먹는구나. 그렇게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까지 가게 된 것이다.
마지막 과정을 겪을 때까지도 그들은 먹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기대했던 분과는 전혀 다르니까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뒤로 자기들이 알고 보니까 바로 그분이 자기들의 생명이 되도록 먹을 수 있는 양식이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처음보고 잘못 알면 도저히 먹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것도 좋고, 예수를 따르는 것도 좋고, 전도하는 것도 다 좋지만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다 이런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십자가를 잘 몰라서 그런 것이다.
마지막 열린 열매라는 것을 모르고, 표면적인 것만 보고 저렇게 어려운 것을 우리가 어떻게 감당 하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만일 어떻게 저것을 감당하겠느냐 해서 진짜로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것 같으면 예수님이 잘못 하신 것이다. 실패하신 것이다.
생명을 주러 와서 우리가 먹을 수 없는 것을 내 놓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분이 실패하신 것이다. 요리사가 대접을 한다고 정성껏 준비를 했는데, 먹을 사람이 보고 아무도 못 먹으면, 잔치를 준비한다고 정성껏 준비를 했는데 먹을 사람이 못 먹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잔치가 잘못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시려고 왔는데, 그 생명을 못 먹게 되었으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그런데 하나님의 지혜는 잘못된 것이 아니고, 우리 같은 모든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요리가 된 것이다. 사람들이 십자가를 잘못 알아서, 십자가를 단지 고통의 멍에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니까 못 하는 것이다. 누가 그것을 지겠는가? 예수를 안 믿으면 안 믿었지 누가 그것을 지겠는가? 차라리 천당을 못 가면 말지 누가 십자가를 지겠느냐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안 그런가? 다음에 가서 지옥에 들어갈지언정 십자가를 지고 난 다음에 천당에 가면 무엇을 하겠는가? 누구든지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다들 대강 조금씩 감추고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속에는 다 그런 생각이 있을 것이다. 우선 살고 봐야지 지금 십자가에 죽어서 천당에 가면 뭐하느냐? 이런 생각이 안 들겠냐는 것이다.
전도를 해보면 그런 사람이 있다. 나는 조금 있다가 믿겠다는 사람이 있다. 언제 믿겠느냐고 하면 죽기 전에 믿으면 안 되겠느냐고 말한다. 그러면 옛날에는 할 말이 없다. 죽기 전에 믿겠다는데 어쩌겠는가. 살아 볼 것 다 살아보고 마지막에 어차피 죽을 것이니까 그때 가서 믿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솔직한 말이다.
십자가가 잘못 전달되었다. 그렇게 하려면 모든 인류를 다 멸망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가 그렇게 고통을 받은 것은 우리 허물로 인함이었다. 그가 짊어진 것은 우리 죄악을 짊어진 것이다. 이사야 53장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가 그런 과정을 거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먹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그런 과정을 거치신 것이다.
십자가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물론 그분에게는 너무너무 고통스러운 것이고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결과가 우리에게는 먹을 수 있는 양식이 되었다. 그분이 고통스러웠는데 너도 고통스러워라, 이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어렵게 어렵게 올라갔으니까 너도 나를 따라 오너라,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누가 몰라서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 가니까 안 가는 것이다.
내가 행한 대로 너희도 행하라고 하거나 내가 가는 데까지 너희도 올라가라고 하거나 하면 누가 가겠는가? 히말라야 꼭대기까지 올라가면서 나를 따라오라고 하면 누가 따라가겠는가? 예수님께서 만일 우리에게 와서 그렇게 하신다면 누가 따라가겠는가?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받으셨지만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했느니라.”고 하신 것처럼 그가 고통을 당한 것은 우리가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하려고 했던 것이다.
부모가 고생을 하는 이유는 자녀들이 편하게 살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고생을 했지만 자녀들은 편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옛날에 너무 가난한 세상이었으니까 가난은 나로 끝났으면 좋겠다, 내 후손에게는 가난을 안 물려주겠다는 것이었다. 의료보험제도가 생기기 전에 5.16 이전에는 사람이 병들어도 죽을 줄 알면서도 병원에 안 가서 죽은 사람이 약 80%는 된다. 왜냐하면 시골에서 겨우 농사지어서 먹고 사는 사람이 병원에 가면 논밭 다 팔아야 된다. 나머지 식구들을 안 죽게 하려면 내가 죽어야 되는 것이다. 그런 시절이었다. 우리는 의료보험에 대해서 굉장히 감사하게 생각해야 된다. 에스키모들은 먹을 것이 없어지게 되면 연장자 순으로 나가서 죽는다고 한다. 식량이 없어지니까 나머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자기는 죽어도 다른 사람은 그렇게 안 되도록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니까 은혜이다. 우리도 똑같이 짊어지고 가야 된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다. 내 공로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다시 알아야 된다. 그것은 내가 먹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가장 모든 사람들이 먹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죽으셨구나!
내가 말씀드렸다. 우리가 그분과 연합할 수 있는 길은 딱 한 군데 밖에 없다. 딱 그 자리 밖에는 연합할 길이 없다. 내가 해 보았다. 다 해 봐도 안 된다. 아무리 해도 조금 친해진다는 사람이 있지만 친해진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손만 들면 5만원, 10만원 준다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과 그렇게 잘 통해도 연합과는 다른 것이다. 한 마음이 안 된다. 하나가 안 된다. 궁극적인 것은 하나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신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그 열매가 되신 것이다.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다. 누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사람이다. 누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양식으로, 음식으로, 누구나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물 위로 걸어갈 때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먹을 수가 없다. 겟세마네 동산까지 간 자리까지 가서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먹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는 모든 사람이 먹을 수가 있다. 모든 사람이 다 한 운명으로 딱 그 자리에 선다. 나나 그분이나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그 자리에 서게 된다. 그것이 먹는 것이다. 다른 것이 아니다. 내가 거기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내가 바벨탑 위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위에서 내가 발견된다. 여러분 모두 다른데 있는 것처럼 생각이 될 것이다. 나는 십자가 위에 있지 않다. 나는 지금 살아있어. 나는 지금 바벨탑 꼭대기는 못 갔어도 중간쯤은 가고 있어.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고, 우리 모든 인류가 그 십자가 위에 있는 것이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것을 피해보려고 그것을 벗어나려고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벗어날 수가 없다. 어떻게 우리가 벗어나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그 자리에서 우리 자신의 운명을 거기에서 보고 저 사람이 내 원래 하나님이 나를 지어주었던 그 사람이구나! 이것이 구속이다. 그분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한테 해주신 일이다. 다른 일은 해준 것은 다 없어도 상관없다. 있어도 우리가 못 먹으니까.
나는 뷔페에 가면 항상 좀 억울하다. 먹을 것이 너무나 많은데 창고가 작아서 못 들어간다. 그런데 씨름 선수 10명 정도가 들어오면 싹쓸이를 한다고 한다. 그래서 들어오면 주인들 눈이 휘둥그레진다고 한다. 있는 대로 다 먹으니까. 이 사람들은 본전의 몇 배로 먹고 가는 것이다. 나는 돈 내고 십분의 일도 못 먹는다.
우리 주님! 우리 예수님! 우리에게 무엇을 해주었나? 먹을 수 있게 해주었다. 완전하게 먹을 수 있게, 누구나 먹을 수 있게 해주었다. 이것을 먹고 나서 ‘과연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렇게 해야 되는 것이다. 교리로 배워서 하나님 아들이시며,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은 소용이 없는 것이다. 내가 그 열매를 먹고 나서 진실로 당신은 그리스도시고, 진실로 당신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십니다. 이렇게 해야 되는 것이다.
이 사람은 아들이 있는 사람이다. 아들이 있는 사람은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고 요한1서에 나와 있다. 아들이 있는 사람은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고 한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그 열매는 바로 우리를 구속하는 일이다. 그 일을 하셨다. 다른 것을 예수님에게 기대해봤자 다 실망한다. 예수님도 항상 잘해주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처음에 꼬시려고 잘 해주는 경우가 있긴 한데 잘 가다보면 또 안 될 때가 있다. 나도 경험을 해 보면, 진짜로 하나님이 내 손을 이끌어주었다고 생각되는 일이 있다. 그렇다고 항상 그런가? 항상 그렇지 않다. 어느 날 가면 아예 나는 모른다하고 가버릴 수도 있다. 그것을 기대하지 말고 그분이 맺은 열매, 마지막 열매, 그 열매를 놓치면 다 놓치고 마는 것이다.
그 열매는 어디에서 자라는가? 강이 흐르는 곳에 자란다. 강이 흐르는 땅에서 나무가 자란다. 물이 흐르지 않으면 나무는 자랄 수가 없다.
사람과 나무가 있는 동산에는 “강이 있는데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월라 온 땅에 둘렸으며 그 곳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더라.”고 하였다.
사람과 나무가 있는 동산에는 강이 있었다고 한다.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월라 온 땅에 둘렸으며 그 곳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더라.”고 하였다.
흐름이 있는 곳에 보석들이 나왔다는 말이다. 금이나 베델리엄이나 호마노가 있었다는 이 말은 물이 흐르는데 나무만 있는 것이 아니고 물이 흐르는 곳에 건축의 재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들이 출애굽기에 오면 성막을 건축하는데 사용하는 재료들이 되게 된다.
오늘 교회도 마찬가지로 이런 재료들로 인해서 건축되는 것이다. 이것이 완전하게 드러나는 날, 새 예루살렘이 드러나는 날이 되면 금과 진주와 보석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강이 흐르는 곳에, 물이 흐르는 곳에, 생명이 흐르는 곳에 건축의 재료들이 생겨난다.
b. 에덴에서 발원한 강은 땅을 적셔서 만물을 생성케 함
에덴이 기쁨이라는 뜻이라고 하면 강은 하나님의 기쁨의 흘러넘침이라 할 수 있다. 강은 물이 넘치는 곳에서 흐르는 것이다. 계시록 22장에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생명수의 강이 흐른다고 하였다. 에덴이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하는 보좌로 발전된 것이다.
에덴에서 발원한 강은 땅을 적셔서 만물을 생성케 한다. 에덴은 기쁨이라는 뜻이다. 무슨 기쁨인가? 하나님의 기쁨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기쁨은 무엇인가? ‘선하신 기쁘신 뜻’이라고 에베소서에서 말했는데 ‘선하신 기쁘신 뜻’이라는 말은 사람과 연합했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얻었다는 뜻이다.
에덴에서 발원한 강은 땅을 적셔서 만물을 생성케 한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면, 하나님의 기쁨이 있는 곳에는 기쁨의 강이 흘러넘친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기쁘셔야 우리가 풍성해진다. 부모가 풍성해야 자녀가 풍성해 진다.
흥부집 아이들은 아무리 해도 아이들이 풍성할 수가 없다. 흥부집 아이들은 아이들만 아홉이나 되고, 이불은 하나 밖에 없으니까 풍성할 수가 없다. 이불을 사방에서 잡아당긴다. 여러분은 그런 것을 잘 모를 것이다. 옛날에는 그런 것이 많이 있었다. 이불 하나를 가지고 사방에서 잡아당기는 것이다. 흥부네 집은 어쩔 수가 없었다. 가난하기 때문에. 넉넉하면 다 하나씩 줄 것이다. 요즘은 다 하나씩 준다. 그냥 캐시미론 이불이라도 요즘은 싸니까 아이들 하나씩 다 준다. 옛날에는 이불 하나를 가지고 다섯 명이든 열 명이든 함께 자야 하는 것이니 얼마나 옹색하겠는가.
하나님과 어린양이 통치하는 보좌에서는 온 땅을 적시는 생명의 물이 흐른다는 것이다. 땅은 물이 적당하게 공급되어야 만물을 생성케 한다. 이 보좌는 기쁨이 흐르는 에덴이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은(엡1:9참) 사람과의 연합이다. 땅은 물이 적셔주어야 만물을 생성시키고, 사람은 하나님 생명으로 적셔져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해진다(요1:14참).
하나님의 기쁨이 있는 곳에 흐름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게 되면 저절로 그냥 강이 흘러들어오게 되어 있다. 그의 기쁨이 되면 저절로 흘러들어오게 되어 있다.
이것이 보좌로 발전하는 것이다. 에덴이 보좌로 발전한다. 그래서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 하나님과 어린양의 통치, 이렇게 발전하는 것이다. 거기에서 만물이 소생한다는 것이다. 땅에는 물이 촉촉이 적셔지면 만물이 소생한다. 그런데 비가 안 오면 바짝 말라서 죽지 못해 살고 있는 그런 풀들을 볼 수 있다.
처음에 하와이를 가니까 바짝 말라있는 나무가 서 있었다. 다 죽은 나무를 왜 저렇게 놔두느냐고 했더니 죽은 것이 아니고 건기라서 비가 안 오기 때문에 잎이 다 떨어져서 그렇다는 것이다. 우기가 돌아오면 또 파랗게 잎이 나온다는 것이다.
물이 없으면 나무는 못 산다. 물이 흐르면, 땅이 촉촉해지면 만물이 소생하게 된다. 심지어는 벌레도 비가 와야 살아난다. 병충해, 병충해 하지만 그것도 비가 와야 발생하지 비가 안 오면 없다.
제주 가서 보니까 귤 밭에 비 오고 난 다음날 바로 약을 쳐야 된다. 비오고 나면 약 치고, 비오고 나면 약 친다. 왜냐하면 비오고 나면 병충해가 생기기 때문이다. 미생물이 생기는 것이니까 비만 오면 생기는 것이다. 우리한테는 해롭지만 만물이 소생하는 원칙을 보면 그것이 당연하다.
캘리포니아 같은 데서는 비가 안 오니까 병충해가 없다고 한다. 밑으로 물을 주니까 병충해가 없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유리하고 좋지만 미생물들이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촉촉하게 적셔줘야 미생물도 살고, 사람도 살고, 다 산다. 우리 인생의 물인 몸도 어떤 영양분이 촉촉하게 적셔줘야 만물이 소생하게 된다. 그런데 그것이 메마르면 만물이 소생할 수 없다.
하나님의 기쁨이 있는 곳에 물이 흐른다. 하나님과 어린 양의 통치가 있는 곳에 만물은 소생하게 되어 있다. 생명나무가 있고, 그것은 만물을 소생케 하더라.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하기만 하면 만사가 다 된다. 그런데 하나님과 사람이 갈라지면 아무 것도 안 된다. 하늘은 하늘대로 있고, 땅은 땅대로 있고, 하늘은 하늘 맘대로 놀고, 땅은 땅 맘대로 놀면 안 된다. 땅이 왜 비를 안 주느냐고 하면, 내 맘이지 네 맘이냐고 한다. 쩍쩍 갈라져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아프리카 같은 곳을 영화에서 보면 땅이 갈라질 때 보면 정말 비참하다. 짐승들이 다 죽는다. 식물들이 자라지 못하니까 동물들이 가다가 그 자리에 쓰러져 죽는 것이다. 우리는 그래도 그렇게 가뭄이 든 것은 못 봤다. 가뭄이라는 것은 무섭다.
우리 인생에 가뭄이 온다면 안 될 것이다. 가뭄이 오면 안 된다. 비가 촉촉이 와서 만물이 소생해야 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와서 촉촉이 적셔줘야 된다.
예수님을 보니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다. 요한복은 1장 14절에 보니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다. 이것은 아주 기름이 잘잘 흐른다는 말이다. 사람도 속에서 은혜가 촉촉하게 있으면 얼굴만 봐도 기름이 좔 흐른다. 나 같이 거칠거칠 하지 않고 아주 반질반질하고 생생하고 살아 있다. 아까 중학생 아이들 나오는 것을 봤을 것이다. 얼굴이 다들 반질반질하다. 그것은 속에서 강물이 흘러서 그렇다. 생명의 강물이 넘쳐흐르니까 그렇다.
강이 흐르는 곳에 금과 베델리엄과 호마노가 있다고 했다. 이것들은 모두 건축을 위한 재료들이다. 새 예루살렘 성은 금과 진주와 보석들로 건축되었다. 금은 영원한 신성을, 베델리엄은 생명의 승리를, 호마노는 변화된 인성을 상징한다.
이 중에 베델리엄은 식물성 수지가 나무의 성처에서 흘러나와 결정된 것인데 성막에서는 은으로 나타났고, 새 예루살렘에서는 진주로 나타났다. 은은 구속을 상징하기 때문에 애굽으로부터 구속 받은 백성들을 표현한 것이고, 진주는 완전한 승리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최종완성의 성에는 은 대신에 진주가 등장한 것이다.
강이 흐르는 곳에 금과 베델리엄과 호마노가 있다고 했다. 이 베델리엄은 출애굽기에 오면 은으로 변한다. 왜냐하면 은은 구속을 상징하기 때문에 구속받은 백성들 속에서는 은으로 나타나게 되고, 계시록에 가면 진주로 바뀌게 된다. 왜냐하면 계시록에는 완전한 승리를 표현하기 때문에 진주로 바꿔져서 열두 진주문이 되게 된다.
c. 흐름은 생명과 건축에 관계됨
이렇게 완전한 성! 이 성은 생명의 흐름을 통해서 온다. 흐름은 생명과 건축에 관계된 것이다.
1) 에덴에서 흐르는 강 (창2:10,11)
사람 사는 세상이 강퍅한 것은 인생을 적셔주는 은혜의 물이 없기 때문이고, 행복이 없는 것은 인생의 소출(보람?)이 없기 때문이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게“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너는 이마에 땀이 흘러야 먹고 살리라”하셨다(창3:17~19참). 부모가 행복해야 자녀들이 행복한 것이다. 하나님의 기쁨, 즉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의 기쁨과 만족이 강처럼 흘러 땅(인생)을 적셔주면 사람은 아름다운 사회 건축을 위한 재료들이 된다는 것이다.
왜 세상이 강팍한가? 흐름이 없기 때문이다. 넘쳐서 흐름이 없다. 부자가 많으면 흘러 넘쳐야 한다. 그런데 부자는 더욱 더 흘러넘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은 쪽박이 없기 때문에 흘러넘치는데, 부자는 쪽박이 너무 커서 흘러넘칠 수가 없다. 세상은 강팍할 수밖에 없다. 세상은 여유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만나보면 아무도 여유 있는 사람이 없다. 우리가 볼 때 너무나도 잘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에 여유가 없다. 왜? 은혜가 아니기 때문이다.
왜 인생이 불행한가?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데 왜 불행한가? 인생의 소출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다운 소출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행하다. 그것은 아무리 있어도 사람의 소출이 아니다. 인격의 소출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이 불행한 것이다. 사람이 인격의 소출이 있으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아도 행복하다. 사람이 이래서 사는구나. 이것 때문에 내가 사는구나. 사는 이유가 확실해지면 인생이 행복해진다. 불행이 없어진다. 그런데 그 소출이 없어서 그렇다.
아담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땅이 너를 저주할 것이라고 했다. 가인에게도 땅이 너를 저주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오히려 가시덤불만 내게 될 것이다. 엉겅퀴를 내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 땅이 축복을 해야 하는데 땅이 저주를 하면 사람이 못 산다. 땅이 사람을 저주하면 사람이 못 산다. 아무리 잘 살려고 해도 살 수가 없다. 사람은 땅이 좋아야 된다.
생명이 흐르는 곳은 건축과 관계 된다. 하나님의 기쁨은 인생의 행복이다. 하나님이 만족하시면 인생이 행복해지는 것이다.
에덴에서 흐르는 강! 이것은 아주 근원적인 것을 이야기 한다. 하나님의 기쁨이 곧 인생의 행복이다.
2) 반석에서 흘러나온 생수(출17:6)
반석에서 흘러나온 생수는 구속 받은 백성을 살림으로 성막을 건축하게 하였다(출17:6참). 생수를 흘려낸 이 바위에 대하여 바울은 고전3:11,10:4에서“이 반석은 그리스도”라 했고. 3:10~13에서는 "교회건축의 기초" 라고 했다. 생명이 흘러야 만물이 소성하고 아름다운 사회를 건축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나오면 반석에서 흐르는 생수가 있다. 출애굽기 17장에 가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가다가 목이 말라서 아우성치는 데가 나온다. 거기서 모세가 반석을 치라고 해서 반석을 쳤는데 반석이 깨져서 물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었을까? 어떻게 반석이 쪼개져서 물이 나왔을까? 이런 것은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런 것을 생각해 봤자 소용없다. 책이 그런 것을 위해서 쓴 것이 아니다. 반석을 어떻게 치면 물이 나오나? 반석에서 어떻게 물이 나오나? 이것을 목적으로 쓰여 진 책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생각해봤자 헛일이다.
사도바울이 해석한 것을 보면 그 반석은 그리스도라고 한다. 이 반석은 그리스도라고 한다. 희한한 일이다. 모세가 반석을 치니까 물이 나왔는데, 이 반석은 그리스도라고 한다. 예수님이 매 맞고 나서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흘렀다. 그런데 바울이 그렇게 해석을 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나왔는데, 그것을 출애굽기에 있는 반석으로 묘사를 한 것이다. 아주 신기하다. 성경을 이렇게 봐야 된다. 돌멩이에서 무슨 물이 나와? 이렇게 생각하면 성경 볼 줄 모르는 것이다. 성경은 그런 목적으로 쓴 책이 아니다.
반석은 그리스도시다. 이 반석이 곧 교회의 기초이다. 그 말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기초라는 말이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기초가 된다. 생명이 흘러야 만물이 소생한다. 생명이 흐르면 반석이 있어야 사람이 살 것이다.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흐르는 그리스도가 있어서 교회가 된다는 말이다.
반석에서 흘러나오는 생수! 이것은 건축을 위한 것이다. 우리를 구속하고 건축하기 위한 것이다. 그 피로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그 피로 구속, 곧 죄사함을 받은 사람들이 오늘 교회가 된 것이다. 여기는 다른 이유로 교회가 될 수는 없다. 어떤 이유로도 교회는 안 된다.
3)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강(시46:4)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강은 교회 안에서 흘러나온 하나님 찬양이다. 어린양의 피로 구속받은 백성은 어린양의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한다(출15:1,계14:3,15:3참). 이 노래는 교회 안에서 흐르는 어린양의 구속을 간증하는 것이다. 간증은 건축을 이룬다.
시편에 보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강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강이 무엇일까?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구속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와서 노래를 불렀는데 ‘어린양의 노래’라고 한다. 어린양의 노래라는 말은 구속 받은 사람들의 노래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어린 양으로 인해서 구속을 받았기 때문이다. 어린양의 노래인데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다 어린양이 된 것이다. 이 어린양의 노래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노래가 됐다.
이 내용을 살펴보면 이것은 구속을 간증하는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어린양의 노래는 무엇인가? 자기들이 애굽에서 구속받은 것을 노래하는 노래이다. 오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찬송은 무엇인가? 우리가 구속 받은 것을 노래하는 것이다. 이것 없이는 교회도 안 되고 아무 것도 안 된다. 우리 노래의 기초는 항상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에 관한 찬송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은 무엇인가? 우리를 구속하신,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이다. 내 인생은 어린양의 구속이었다는 것을 찬양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건축이 되는 것이다.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더라고 했는데, 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가? 우리는 구속하신 그 은혜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은혜다. 그러니까 하늘로부터 그 교회가 성장해서 단장해서 내려온다는 뜻이다. 땅에 있지만 땅에 속한 것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것이 교회이다. 땅에 있긴 있지만 속하기는 하늘에 속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여기 있는 것 같아도 우리는 지금 하늘에 속한 백성들이다. 우리는 지금 하늘에서 자라고 있는 것이다. 하늘의 기준에 따라, 하늘이 방식으로, 자라고 있는 것이 현재 교회이다. 그러니까 하늘에서 자라고 있다.
마지막에 다 자라서 단장하면, 여자가 성장하게 되면, 신부가 될 만한 나이가 되면 시집을 간다. 시집을 갈 수 있을 만큼 성장해서 단장하고 내려오는 것이니까 우리는 지금 땅에 있지만 하늘에 속한 사람들로써 하늘의 교육을 받고 있다.
미국 사람들이 한국에 와도 자기들 학교에 보낸다. 한국학교에 보내는 것이 아니고 외국인 학교, 미국 사람들이 다니는 학교에 보내는 것이다. 그래서 거기에서 미국사람 교육을 한다. 한국 땅에 살지만 교육은 미국 교육을 받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땅에 살고 있지만 교육은 하늘의 교육을 받고 있는 것이다. 요즘 국제중학교라고 해서 말썽이 많다. 돈 없는 사람은 못 가는 곳인 것 같다. 그래서 돈을 썼다가 발각이 되어서 문제가 되었다. 우리는 돈도 안 쓰고 들어왔다. 그냥 공짜로 들어왔다. 누가 부정 입학한 사람이 있는가? 아무도 없다.
교회는 땅에 있지만 하늘에 속한 것이다. 순모임을 할 때도 그냥 땅에 기는 지렁이들처럼 하면 안 된다. 우리는 땅에 있지만 신분은 하늘에 속한 것이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 것이다.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는 사람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해야 된다.
미국사람들이 세계에 나가서 왜 떵떵거리고 큰 소리 치는 줄 아는가? 자기가 미국시민이라는 것이다. 미국 시민이라서 아무도 건드리지를 못한다. 그냥 사람이면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이 사람이 미국시민이라서 이 사람에게 잘못하면 미국이 가만히 있지 않는 것이다. 미국 시민이라는 권리 때문에 다른 사람이 손을 댈 수가 없다. 바울도 그것을 써 먹었다. 나는 로마시민권 가졌다고 했다. 나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이다.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니까 하늘에 속한 교육을 받고 있다. 왕자들은 왕자들의 교육을 받는다. 미국 사람들은 한국에 와서도 미국 교육을 받고 있다. 오늘 우리는 땅에 있지만 하늘에 속한 교육을 받고 있다. 그것을 확실히 가지고 있어야 한다. 지렁이처럼 빌빌거리면 안 된다.
우리가 이것을 찬양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간증이다. 우리가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로서 찬양해야 하나님이 만족하신다. 땅에 빌빌 기는 지렁이 찬송을 받고 싶겠는가.
4) 복락의 강수(시36:8)
인생이 메마르고 불행한 것은 은혜의 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선악을 아는 지식은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를 차단하고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두 다 같은 마음이기 때문에 남의 공로를 찬양하지 않는다.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모두가 이해관계만으로 상대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기쁨과 행복의 강이시다. 부모는 자식의 행복을 위해 사는 것이다.
시편 36편에 보면 복락(福樂)의 강수(江水)라는 구절이 있다. 인생이 메마르고 불행한 것은 은혜의 길이 막혀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아무리 물이 많이 있어도 길이 막혀 있으면 못 들어온다. 수도관이 막혀 있으면 물이 안 온다. 하나님 은혜가 아무리 있어도 관이 막혀 있으면 안 들어온다. 관을 막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선악을 아는 지식이다. 이것이 관을 꽉 막고 있기 때문에 물이 안 들어오는 것이다.
우리 몸의 피도 혈관을 콜레스테롤이 막고 있으면 피가 안 간다. 심장에 피가 안 가면 심장마비이다. 그러면 그냥 죽는 것이다. 잠자다가 그냥 가는 것이다. 등산하다가 그냥 가는 것이다. 하이킹하다가 그냥 가는 것이다. 심장에 피가 공급이 안 되면 그냥 죽는 것이다. 막히면 죽는 것이다. 뚫어지면 살고 막히면 죽는 것이다.
요즘 건강법은 전부다 막히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너무나 기름진 것을 많이 먹어서 기름진 것들이 막으니까 기름진 것을 다 빼내는 약들이 전부 건강식이다. 옛날 같으면 상상도 못할 것이다. 옛날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흘러갈 물이 없어서 못 먹었는데, 요즘의 건강식이라고 하는 것을 먹었다간 다 죽는다. 그렇지 않아도 먹을 것이 없는데, 미역이나 톳이나 이런 것을 먹어서 살겠는가? 해초 같은 것을 먹으면 얼굴이 붓는다. 지금은 왜 그것이 건강식인가? 너무 많이 먹어서, 여유분이 너무 많으니까 뚫어주게 하기 위해서 먹는 것이다. 뚫어지면 살고, 막히면 죽는다. 구호가 그럴 듯하다.
뭐가 막히는가? 선악을 아는 지식이 가로막는다. 항상 선악을 아는 지식이 가로막고 있다. 하나님께로부터 바로 오는 직통의 길을 막고 있다. 선악을 아는 지식이 고상하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고상한 것이 아니라 아주 지저분한 것이다.
5) 성전 문지방 밑에서 흐르는 강(겔47장)
성전은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곳이고 하나님이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곳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만남에서 은혜와 진실이 흐른다는 것이다. 말씀이 육체가 되신 독생자를 보니 은혜와 진실이 충만하더라 했다(요1:14참). 그리스도는 성전이시므로 그에게서 흘러나온 은혜는 절망적인 백성에게 그 나라에 대한 소망이 되신 것이다.
성전 문지방에서 흐르는 강이라는 것이 있다. 에스겔서 47장에 보면 성전 문지방에서 물이 나와서 점점 물이 불어나서 한 자, 두 자 하더니 사람 키를 넘어가도록 물이 흐르더라는 말이 나온다. 성전은 무엇인가?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곳이다. 성전 문지방에서 물이 흐른다는 말은 성전에서 은혜가 흐른다는 말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니까 은혜가 흐른다는 말이다.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온 물이 점점 수위가 높아져서 사람 키보다도 높아지더라는 환상을 에스겔이 봤다. 에스겔이 이런 환상을 볼 때 그 나라의 형편은 대단히 메마른 상태였었다. 풍전등화와 같은 상태였다. 그런데 에스겔은 거기에서 이런 환상을 봤다. 성전 문지방에서 흐르는 물이 점점 높아져서 지면을 덮는 것을 봤다.
아무리 메마른 사정 가운데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과 만나기만 하면 된다. 연합하기만 하면 문지방에서 물이 흘러나와서 넘친다는 것이다. 물이 흐르기만 하면 만사형통한다는 것이다. 피가 잘 흘러가기만 하면 만사형통한다. 발이 왜 찬가? 발까지 피가 안 흘러가서 차다. 손이 왜 찬가? 손까지 피가 못 와서 차다. 다 흐르지 않아서 차다. 소통만 잘하면 된다는 것이다. 요즘에 정치적으로 소통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소통이 왜 안 되는가? 서로가 자기가 잘났기 때문에 소통이 안 되는 것이다.
선악을 아는 지식이 결국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통로를 가로 막고 있다. 형제들과 소통을 하려니까 무엇이 가로 막고 있는가? 형제들과 파이프라인으로 소통을 하려고 만들어 놓았는데 꽉 막혀서 안 나간다. 왜 그런가? 선악과가 막고 있다. 바로 경험해 보면 금방 안다. 부부간에도 백년해로하자고 만났는데, 백년해로도 안 되고 십년해로도 못하고 꽉 막혀 있다. 왜 그런가? 선악을 아는 지식이 꽉 막고 있기 때문이다.
선악을 아는 지식이 모든 것을 막는다. 우리 인체로 말하면 콜레스테롤과 마찬가지이다. 수도관으로 말하면 수도관 안에 있는 녹과 마찬가지이다. 아주 지저분한 것이다. 아주 좋은 것으로 착각하지 말라. 아주 고상한 것으로 착각하지 말라. 나는 선악을 아는 지식을 가졌으니까 고상한 인간이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지 말라.
선악을 아는 지식이 교통을 막는구나! 이것은 교회 생활을 해 보면 금방 드러난다. 교회생활 해보면 아무 이해관계가 없는데도 막힌다. 세상에서는 이해관계가 있으니까 막힌다. 돈 문제 이런 것 때문에 막힌다. 형제간에도 돈 문제 때문에 막히는데, 교회에서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데 막힌다. 괜히 내가 논 팔아서 저 사람 준 것도 아니고, 그런 것이 아닌데 괜히 막힌다. 왜 먹히는가? 오직 선악을 아는 지식 때문에 막힌다. 교회에 오면 금방 안다. 선악과가 무엇인지를 금방 알 수 있다. 교회생활을 안 해본 사람은 선악과가 무엇인지 모른다. 아무리 말해도 알 수가 없다.
교회생활 안 해본 신학자들이 선악과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신학자들이 교회 생활을 해 봤겠는가? 안 해 봤으니까 선악과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교회생활을 해 보면, 누구라도 해 보면 그냥 안다.
우리 교회는 초등학교 학생들도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그런 이야기를 한다.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다가 삐지면 해석하기를 선악과가 있어서 그렇다고 해석한다. 수준이 보통 수준이 아니다. 아까 우리 교회 아이들이 나왔다. 그 아이들이 초등학교 때부터 자라서 올라온 아이들이다. 지금 중학교 1학년인데 아이들 수준이 대단하다. 이 아이들은 커가면서 인생을 해석하는 폭이 확 달라질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 말씀을 먹으면, 인생을 해석하는 눈이 확 열리고, 인생을 해석하는 폭이 확 넓어지게 된다.
세상이 메마른 것은 소통이 안 돼서 메마르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도 오는 그 라인이 막혀서 메마른 것이다. 이것이 뚫려서 흐르기만 하면 거기에서 모두 건축의 재료들인 정금과 진주와 호마노가 나온다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아름다운 사회를 건축하게 되는 것이다.
재료가 좋아야 좋은 집을 짓지 재료가 나쁘면 아무리 유명하게 설계를 해도 좋은 집을 지을 수가 없다. 100층, 200층 되는 집을 어떻게 짓겠는가? 그런 재료가 있으니까 짓는 것이다. 옛날에도 그림으로 그리려면 100층도 그릴 수가 있고, 1000층도 그릴 수가 있었다. 설계를 하려면 할 수가 있다. 그렇지만 재료가 없어서 못 하는 것이다. 요즘에는 재료가 발달해서 좋은 재료가 많이 나왔기 때문에 100층을 거뜬하게 짓는다. 우리나라에서 아라비아인가 어디 가서 100층 건축을 한다. 다른 나라가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대한민국이 하고 있다.
우리가 재료만 되면 틀림없이 우리는 가장 좋은 사회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설계도는 이미 하늘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재료만 되면 우리는 아름다운 사회를 건축하는 사람들이 되게 될 것이다.
새 예루살렘 성! 밤낮으로 열려 있어도 적이 없는 성! 열두 문은 다 진주 문으로 되어 있고, 바닥은 정금이고, 성곽은 보석으로 쌓였는데, 보기에 백옥 같고 수정같이 맑더라는 것이다. 그런 아름다운 사회가 건축되게 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 다 이렇게 한 건축 안으로, 한 목적 안으로, 한 경륜 안으로, 한 흐름 안으로 오게 된 것이 너무너무 감사하다. 나 혼자 가도 감사하겠지만 여러분까지 함께 간다고 하니까 더욱 감사하다. 사실은 나 혼자서는 못 갔을 것이다. 나 혼자서는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아무리 연구해도 알 수가 없는 일이다. 기도를 아무리 해도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여러분이 있어서 이것을 아는 것이다. 교회가 있기 때문에 이것을 알게 된 것이다. 나는 여러분한테 너무너무 감사하다. 정말로 감사하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이 각박한 땅 위에서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을 불러 모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땅에 살지만 하늘에 속한 시민권을 가지고 살 수 있게 하신 주님께 감사를 드리고, 하늘의 교육으로 하늘의 영양분으로 먹고 자라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신부로서 단장되어서 신랑을 맞이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를 끊임없이 가꾸신 것을 감사하고, 우리를 자라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함께 가게 하신 것을 감사하고, 우리가 함께 찬양할 수 있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또 만날 때도 늘 더 나은 것으로 더 나은 것으로, 더 발전된 것으로 더 발전된 것으로 우리가 만나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여기 이번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주님께서 구속해 주신 그 은혜와 주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두신 그 목적을 분명하게 일생동안 새기고 살게 하여 주시고, 그것이 표준이 되고 푯대가 되고 중심이 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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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에서 빠진 말씀 노트 부분>
6) 영원히 목마르지 않도록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요4:14,7:38)
예수님은 죽음과 부활을 거쳐 생명주는 영이 되셨다(고전45:45). 나무는 과정을 거치면 달콤한 열매가 된다. 쓴 나무에서 단 열매가 열리는 것이다. 조개는 사망의 바다에서 진주를 만들어낸다.
주님은 저주 안에 있는 인생으로 하나님을 표현하고 그를 대신하는 영광스러운 인생을 만드셨다. 그러므로 그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다. 그러므로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그 영광으로 말미암아 배에서 영원토록 솟아나는 생수가 흐르는 것이다. 생수가 흐르면 하나님 나라 건축의 재료가 된다.
7) 보좌로부터 흐르는 생명수의 강(계22:1)
보좌는 에덴의 회복,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 인생을 지으신 목적의 회복이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흐르는 강은 그 연합의 통치를 상징한다. 창조 된 우주는 사람의 이탈로 말미암아 저주의 가시밭으로 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어린양의 피로 구속함을 얻었음으로 은혜로운 통치가 생명수의 강처럼 흘러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고 그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의 건축이 완성 된 것이다.
에덴에는 나무가 있고 강이 있으며, 최종적인 새 예루살렘에는 강이 있고 나무가 있다. 에덴에 있는 생명나무는 생명의 표현으로서 생명이신 아버지 하나님의 체현(아들)이고, 흐르는 강은 영이신 하나님의 표현으로서 아들(나무)을 통하여 맺는 열매가 하나님과 사람의 만족과 기쁨(에덴)이 되어 은혜로서 흐르는 것을 계시한 것이다.
새 예루살렘에 강이 먼저 있는 것은 이미 아들(나무)이 과정을 거쳐 하나님과 어린양의 연합으로 보좌가 되었음으로 그 보좌(에덴)로부터 생수의 강이 흐르고 그 흐름을 따라서 좌우에 나무들이 있어 열매를 맺는 것을 계시한 것이다.
열두 가지 열매를 시절을 좇아 맺는 나무들은 동산에 있던 그 나무의 번식으로서 맏아들이신 독생자와 그의 많은 형제들(교회)을 의미한다. 동산에서는 독생자이셨으나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거치면서 많은 형제들을 얻었기에(요20:17,히1:6참) 강 좌우에 있는 나무들은 그가 얻은 많은 형제들로서 지금도 교회 안에서 미리 볼 수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지금 우리가 교회 안에서 시절을 좇아 열매 맺는 열두 가지 과일들을 미리 맛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풍성한데 최종 완성인 새 예루살렘에서야 얼마나 더 풍성하겠는가!
에덴은 시작이고 보좌는 완성이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기쁨이 아들을 통하여 흘렀기 때문에 나무(아들)가 먼저 보이고, 흐르는 강이 보였으며 그 가운데서 조성 된 보석들이 보였으나, 완성에는 이미 건축이 완료 되어 하나님과 어린양이 통치하심으로 거기서 강이 흘러 나무들이 자라고 열매를 맺어 만민을 먹이고, 잎으로는 만국을 소성하게 하는 것이 보인 것이다.
우리는 성육신 하신 아들을 통하여 흐르는 생수를 보고 마셨으며 이 생수를 마시고 아들의 증인들이 되었다. 처음에는 에덴을 보고 나중에는 보좌를 보며, 처음에는 동산을 보고 나중에는 새 예루살렘을 본다. 하나님의 계시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들의 환경과 눈높이만큼 점진적으로 보여 진다.
생명은 삶으로 흐르고 넘침으로 흐른다. 생명이 나무로, 몸으로 체현 된다면 그 안에는 숨이 왕래하고 피가 흐른다. 그러나 넘치면 밖으로 흘러 생명을 준다. 소는 풀을 먹고 그 생명이 넘치며 그 생명은 우유로 흐른다. 그리고 송아지는 그 우유를 먹고 마시며 자라는 것이다.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그 흐름 안에서 건축의 재료들을 산출했다. 이와 같이 주 예수께서는 물과 피를 흘려 하나님을 떠난 인류를 구속하고 죽음과 부활을 통해 생명주는 영이 되어 교회를 산출하고 기른다. 교회는 이제 최종 완성을 성취하기 위하여 부름 받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