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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모임]
십자가로 가는 길 - (12) 버림 받으심
2020. 7. 3. 이현래 목사
오늘은 예수님께서 버림받은 것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다. 요한복음 18장에 보면 유명한 말이 있다. ‘나는 모른다.’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을 부인했다고 한다. ‘나는 모른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나 다니지 않는 사람이나 이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모른다. 결단코 모른다. 나는 절대로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어려서 베드로가 배신자라고 생각했다. 겁이 나고 무서워서 모른다고 했다고 생각했다.
6.25 때 우리는 그런 것을 경험할 뻔 했다. 어떤 곳에서는 예수님 사진을 땅바닥에 두고 밟고 지나갈래, 밟지 않을래, 그렇게 시험했다고 한다. 그런 말을 들었을 때, 교회 다니느냐고 물었을 때 뭐라고 대답을 해야 되는가? 이런 염려를 한 때 했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책을 아궁이에 넣어 불태우고 했다. 그것을 놓고 ‘너 예수를 믿느냐, 안 믿느냐?’고 물으면 믿는다고 하고 죽으러 갈 것인가? 아니면 안 믿는다고 하고 살 것인가?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겠는가? 어려서 우리는 그런 생각을 했다. 우리 지역에는 인민군이 하루 왔다 갔다. 저녁에 왔다가 아침에 나갔지만 다른 지역에는 3개월 간 점령했다. 그래서 별의 별 일이 다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 일이 가능했다.
베드로 일이 생각났다. 뭐라고 할 것인가? 비겁하면 될 것인가? 아니면 용감하게 나설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사람들이 예수를 버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성경에서는 비겁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알지 못해서 그렇다고 한다. 좋게 말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진짜로 몰라서 그랬다. 알고서는 버릴 수가 없다. 진짜로 모르기 때문에 버린 것이다. 지식으로만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지 진짜로 알았으면 모른다고 할 수가 없다.
유대인들은 왜 예수를 버렸는가? 다 아시는 것처럼 자기들을 구원할 메시야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들의 구원은 무엇인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해서 떵떵 거리고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구약의 예언서를 읽으면 그런 생각을 안 가질 수가 없다. 그 말씀을 그냥 들으면 분명 메시야가 와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할 뿐만 아니라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게 되어 있다.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지금 우리 생각이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고 다 이스라엘을 회복할 메시야를 보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처럼 그것은 다른 뜻으로 해석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유대인들도 몰라서 그랬다.
또 베드로와 제자들 경우도 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그들은 3년 이상을 함께 따라 다녔다. 같이 먹고 자고 말씀도 듣고 모든 것을 다 보았다. 그래서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눅22:33) ‘우리가 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쫓았습니다. 다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고백했던 사람들이다. 그것도 자기들대로는 진실한 말이었다. 거짓말이나 입발림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누구 제자들 중에 한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고 다 그랬다.
가룟 유다를 보고 배신자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일종의 배신이지만 가룟 유다는 같은 마음이다. 마음은 같다. 이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는 지금 여기에다 뭘 걸고 있는데, 이 사람이 가는 길은 뭔가 석연치 않고 자기들 생각과는 다르게 보인 것이다.
내 생각은 이렇다. 가룟 유다가 성질이 급해서 한 번 내놓고 보자, 이 사람이 과연 우리가 기대했던 그 사람인지 아닌지 한 번 주사위를 던져 보자는 이런 마음으로 했다고 생각한다. 가룟 유다가 예수를 미워해서 버린 것도 아니다.
제자들을 보면 부활해서 승천하실 때까지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1:6) 하고 묻는다. 그러면 그 동안에 보고 들은 것은 무엇인가?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그 사람들이 그때 뭘 알았다고 생각할 수가 없다. 유대인들과 똑같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때와 시기(기한)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행1:7) 하신 것이 바로 그것 때문이다. 그러면 그때까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까지 택한 열 두 제자들까지도 직접 보고 듣고 했지만 역시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중요한 문제다.
배신했다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누가 다 배신하겠는가? 나 같아도 배신하지 않겠다. 그런데 만인이 다 이러했다는 것은 여기에 중요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왜 그랬는가?
예수님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던 그런 목적으로 오신 분이 아니었다. 알고 보면 이것이 문제다. 사람이 사람을 모른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목적이 너무 다른 것이다. 우리가 보통 하는 말로 사람이 사람의 속을 알기 어렵다고 한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우리의 경험적인 말에 불과하고, 예수를 모르는 것은 그런 차원의 모르는 것이 아니다. 전혀 다른 목적이다.
오늘 우리도 전혀 다른 목적이라는 것이 분명해져야 할 것이다. 목적이 다르면 모든 생각이 다 달라진다. 요즘의 언론을 보면 목적이 다르니까 무슨 일이 생겨도 다 다르다. 옛날에 자기들이 한 말을 지금도 한다. 자세히 들어보면 사람이 굉장한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자기가 어느 편이냐, 무슨 목적인가에 따라서 해석하는 것이 그렇게 달라질 수가 없다. 나는 요즘 그것을 보면서 인간이 저렇게도 되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정치적인 이야기는 할 수 없고 여러분은 아실 것이다.
무엇이 다른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러 가지로 교훈도 하고, 책망도 하고, 또 의식으로 보여주기도 하였다. 내가 너만 알았다고 하기도 하고, 할 말씀을 다 하였다. 그래도 안 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런 계획을 하셨다고 한 것이다. 예레미야 31장에서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렘31:33) 왜 이런가? 저들이 나를 알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가르치고 보여주고 아무리 해도 안 된다는 것이니까 내 법을 아주 저들 속에 새겨야겠다는 것이다.
이 말은 생명의 문제다. 어떻게 내 심장에 그 법을 새기겠는가? 이것은 생명의 문제다. 하나님의 법은 말씀이다. 말씀은 그분의 뜻이고 생각이다. 그것을 어떻게 사람에게 새기겠는가? 안 새기면 안 되겠는 것이다. 개를 키워보면 아무리 가르쳐도 안 되는 것은 안 된다. 고양이를 키워보면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게 있다. 위기를 만나면 단 번에 바로 발톱이 나와 버린다. 자기가 그렇게 해야겠다는 게 아니다. 저절로 나와 버린다.
하나님의 고민이 바로 그것이다. 자기 백성, 자기가 필요해서 지은 사람이 그 하나님을 모르니 어떻게 하겠는가? 이것이 가장 안타까운 일이다. 알고 보면 우리는 그게 별로 문제가 안 된다. 우리는 배고프면 문제가 되고, 내 마음대로 안 되면 문제가 되는 것이지 하나님이 우리 때문에 안타깝게 생각한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다. 더군다나 점점 세상이 부유해져서 잘 살게 되면 하나님이 없어도 별로 상관이 없다.
자녀들이 그렇다. 아기 때는 없으면 안 돼서 운다. 노는 것을 보면 아주 예민하다. 잘 노는 데 엄마가 딱 어디로 떠나면 단 번에 울어 버린다. 여러 사람들 속에 잘 놀아도 항상 엄마에게 관심이 가 있는 것이다. 엄마가 떨어지면 금방 울어 버린다. 엄마가 있을 때는 이 사람에게도 가고 저 사람에게도 간다.
그런데 커서 결혼해서 잘 살면 부모가 생각이 안 난다. 옛날 말에 객지에 나간 아들이 편지를 자주 하면 잘 못산다는 이야기고, 아무 소식이 없으면 잘 사는 것이라고 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했다. 잘 살면 아무 생각이 없다. 거기에 부모님이 가서 살면 그것은 정말 어렵게 된다. 자기들끼리 잘 살고 있는데 괜히 혹이 하나 붙어서 짐만 되는 것이다.
사람이나 하나님이나 똑 같은 것이다. 부모에 대한 태도나 하나님에 대한 태도가 같은 것이다. 다른 게 아니다. 자기가 편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게 사람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복을 많이 받아서 잘산다는 사람은 오히려 더 관심이 없어지고, 뭐가 안 되고 인생이 꼬이면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아브라함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갈대아 우르에서 잘 됐으면 나오겠는가? 잘 되면 안 나온다. 우리나라에서도 개화기에 안동 김씨나 잘 사는 사람들은 바깥에 안 나갔고 객지에 안 나갔다. 누가 서울로 단봇짐을 싸서 갔는가? 못 사는 사람들이 올라간 것이다. 그리고 선교사들이 와서 공부를 시켜준다고 해도 잘 사는 집에서는 안 보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사다가 학교에 보냈다는 말도 있다. 가난한 집에 가서 쌀 한 자루를 갖다 주고 데리고 왔는데, 그 사람들이 우리나라 개화기에 유명한 인물들이 되었다.
세상에서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찾지 편안한 데서는 전혀 찾지 않는다. 그런데 기독교인은 왜 이렇게 많은가? 액세서리고 문화적인 것이다. 기독교라는 종교가 그런대로 괜찮으니까 그것 하나 더 하자는 것이지 정말 갈급해서 온 사람은 많지 않다. 참 공평하다고도 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까지 잘 사는 사람들이 다 차지해 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곳은 좀 남겨 놓아야 한다. 그것까지 다 가져가 버리면 뒤쳐져 있는 사람은 어떻게 되겠는가?
이런 사람들을 놓고 율법으로, 제사로, 외형으로, 기적으로, 많은 것을 보여주고 가르쳤다. 그런데 도저히 안 되니까 아들을 보내서 친히 가르치게 했다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포도원을 맡기고 갔던 주인이 세를 받으려고 사람들을 보내니까 전부 욕하고 때리고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들을 보내면 되겠거니 해서 보냈더니 아들이 오는 것을 보고 저놈이 상속자구나. 저 놈만 없으면 다 우리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게 아주 딱 맞는 비유다.
아들이 왔다. 그런데 제자들은 따라다니면서 보고 듣고 같이 살았다. 만일 그때 제자들이 예수를 참으로 알았더라면 예수님이 십자가까지 가실 필요가 없었다. 안 가도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가신 것이다. 제자들은 나가서 말을 한다고 했는데, 예수님께 불리한 말만 계속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음에까지 몰려간 것이다.
죽기까지 했다. 그것을 보았다. 처참한 광경을 보았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것을 보고 오히려 도망 가 버렸다. 그것은 전혀 길이 다르다는 말이다. 같은 길을 갔으면 죽기까지 하신 것을 보고 도망을 가겠는가? 전우도 그렇게 안 된다. 아무 것도 아닌 사이에서도 옆에서 사람이 죽으면 독이 확 생겨난다고 한다. 전투를 하다가 온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니까 평상시 마음으로는 전투를 못한다고 한다. 그런데 옆에서 사람이 죽으면 악이 받친다고 한다. 그래서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노래가 나오는 것이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전쟁을 하게 된다고 한다.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고전2:9) 목적이 다르니까 길도 다르고, 서로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에 벌써 예언을 하셨다. 생명으로 사람 안에 새기겠다. 생명 안에 새기려면 생명 밖에는 새길 수 없다. 생명 밖에는 생명이 새겨지지 않는다. ‘내 법을, 내 생각을’ 할 때 법과 생각은 생명이다. 그냥 객관적인 것이 아니다.
율법은 돌 판에 새겼지만 하나님 마음은 돌 판에 새겨지겠는가? 못하니까 안 된 것이다. 하나님 마음을 새길 수만 있다면 되겠는데 돌 판에다 새긴다고 새겼는데도 마음은 안 새겨진다. 그래서 백 번, 천 번 읽어도 안 된다. 예레미야 31장은 꼭 그런 일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생명으로 생명 안에 새기겠다는 말이다.
이 일을 위해서 아들을 보낸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서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음 받은 그런 피조물이다. 문제는 그들 안에 하나님 생명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영을 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저 뒤의 이야기다. 백성에게 영을 준다는 말은 아주 뒤의 말이다. 원래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 때는 영이 없다. 형상이니까 영이 없어야 한다. 영이 있는 생명은 형상일 수가 없다. 영이 있다는 말은 생명이 있다는 말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63)고 했다. 사람 속에는 생명이 없다. 육신의 생명 외에는 다른 게 없다.
중국 사람들의 생각이 맞다. 사람은 그냥 육신이지 영 이런 게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선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죽으면 천당 가려한다는 것은 서양 사람들의 생각이다. 중국 사람들은 죽으면 천당에 간다는 생각이 전혀 없다. 살아서 어떻게 하면 오래 사는가?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사는가? 이것 밖에 없다. 일체주의라고 한다. 몸 하나 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말이 오히려 잘 먹혀 들어가는지 모른다.
중국에 가서 선교하고 온 형제들의 말을 들으면 굉장히 말을 잘 알아듣는다고 한다. 노트 하면서 열심히 듣고 말씀이 끝나고 나면 자기들끼리 열심히 토론하고 교제한다고 한다. 다른 데서는 그런 것을 볼 수가 없다. 우리 말씀이 현실적이어서 그런 것 같다.
모든 피조물이 다 그렇지만 사람은 유독이 하나님 생명이 없다. 하나님 생명이 없는 한 다른 피조물들과 똑 같다. 다른 게 없다. 우리가 오장육부를 가지고 있는데 다른 동물들도 오장 육부를 가지고 있다. 똑 같다. 아무 것도 틀린 게 없다. 지능이 좀 높다는 것뿐이다. 우리 기준에서 지능이 좀 높은 것이다. 동물들은 사람을 보고 괴물들이라고 생각하지 지능이 높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보다 머리가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들은 자기들 삶대로 지혜가 있다. 사람이 하지 못하는 지혜가 있다.
형상이다. 형상은 흙과 같다. 창세기 1장에서 사람은 형상이라고 하고, 2장에서는 흙이라고 한다. 흙에는 생명의 씨가 들어와야 밭이 된다. 흙은 그냥 두면 흙일뿐이다. 아무 것도 없다. 형상으로서 사람은 영이다. 생명이 들어와야 그때는 뭐가 되는 것이지 안 그러면 동물과 똑같다.
공자님 말씀에는 사람이 배우지 못하면 짐승이나 똑 같다고 한다. 여기서 배운다는 말은 윤리 도덕을 배운다는 뜻이다. 윤리 도덕을 배우지 않고 모르면 짐승과 똑같다고 한다. 그 말이 맞는 말이다.
날 때부터 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잘못된 말이다. 산 혼이다. 혼은 영이 아니다. 우리의 생각이다. 형상으로서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비정상이다. 잘 아는 게 아니다. 이 말은 흙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는 말과 똑같다. 그게 말이 되는가? 여자가 홀로 아기를 낳는다는 말과 똑같은 말이다.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여자가 홀로 아기를 낳는 것과 똑같다. 다른 말이 아니다. 만일 스스로 안다면 피조물이라고 하겠는가? 피조물이라고 할 필요가 없다. 스스로 아는 자는 피조물이 아니다.
모세가 물었다.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출3:13)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하니까 우리말 성경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3:14)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스스로 있고, 스스로 알면 피조물이 아니다. 뭔가 들어와야 되기 때문에 피조물이지 스스로 하면 피조물이 아니다.
불교인에게는 미안하지만 스스로 뭐가 된다고 하는 이야기는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가짜다. 스스로 모르니까 피조물이지 스스로 알면 왜 피조물인가? 기독교 안에도 이런 게 있다. 사람 속에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어떤 것이 있다. 알 수 있는 기능이 있는 것이지 하나님을 아는 게 아니다. 기능이 아무리 있어도 그 생명이 와야 그 기능이 작동하지 생명은 안 오는데 기능만 있다고 알게 되겠는가? 우리 속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다는 그 말은 하나님이 있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다는 말이다. 알만 한 것과 아는 것은 다르다.
원래 하나님이 우리에게 뭘 주어서 그렇다고 하는데 그것이 아니다. 안테나를 주었다. 안테나가 있으니까 수신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그런 것이지 안테나가 있다고 라디오가 들리는가? 모르는 것이 너무 당연하다. 사람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은 너무 당연하지 이것이 이상한 것도 아니고 부끄러운 것도 아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지식이다. 이럴 것이라고 아는 것이니까 틀린다. 희랍인들이 절대가 있다고 생각한 것과 똑같은 것이다. 절대라는 것은 모르는데 절대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절대를 못 만나니까 죽을 때까지 해도 불완전하다.
또 지식으로 아는 것은 잘못 아는 것이다. 그냥 아는 것은 상관이 없는데 이것은 잘못 아는 것이다. 이 잘못 아는 것이 큰 문제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모르는 게 아니었다. 잘 알았다. 그런데 잘못 안 것이다. 제자들도 예수를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잘못 안 것이다. 이것이 큰 문제다. 아예 모른다고 하면 괜찮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요9:41)는 말씀을 하셨다. 모른다고 하면 될 것인데 안다고 하니까 죄가 그냥 그대로 있다고 했다. 요한복음 9장 41절에 보면 그런 말이 나온다.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이를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너무 당연한 일이다. 출산한 아기가 자기 엄마를 알 것 같지만 자기 엄마가 누군지 모른다. 젖을 준 사람이 자기 엄마지 아기는 자기 엄마를 모른다. 구별할 수가 없다.
짐승들은 자기 새끼를 구별한다. 개는 새끼를 낳아 놓으면 냄새를 맡고 자기 새끼인지 아닌지 안다. 그런데 사람은 모른다. 사람은 아기가 엄마를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 강아지 새끼를 밖에 데리고 가서 며칠 있다가 오면 어미는 그 새끼를 모른다. 냄새가 달라져서 그런 것 같다. 그냥 물고 내쳐 버린다.
잘못 아는 것이 더 큰 문제다. 모르면 된다. 그러면 크면서 점점 가르쳐 준다. 내가 네 엄마라는 것을 행동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알아야 되는데 나면서부터 자기 엄마를 안다면 이게 큰 문제다. 그것은 인간도 아니고 무엇도 아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여호와를 제일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제일 잘 섬기는 백성이라고 자부했다. 그래서 예수를 죽일 때도 이것이 우리가 여호와를 섬기는 예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만큼 확신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베드로는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다. 베드로가 모른다고 하니까 이상하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다. 예수를 보고 모른다고 한 사람들은 다시 돌아왔다. 아니까 돌아왔다. 베드로가 배신자였으면 돌아왔겠는가? 몰라서 그랬으니까 아니까 돌아왔다. 요한은 어떠한가?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주목하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고 증거하는 예수의 증인이 되었다. 모른다는 사람은 돌아올 수 있는데, 안다는 사람은 돌아올 길이 없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 신학을 해서 안다는 사람은 도저히 생명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다. 지식이 그렇게 무섭다.
그때 하나님을 안다는 사람들은 유태의 지도자들이었다. 서기관, 바리새인, 제사장, 이런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예수를 죽였던 사람들인데,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다. 아직도 예수에게 돌아온 사람이 없다.
바울은 간곡한 심정으로 이스라엘이 돌아올 것을 소망하고 있는데 언제 이루어질지 모른다. 만일 온 세상이 전부 다 예수를 찬양하게 되면 그때는 시기가 나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유태인들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는 말은 안다는 사람은 돌아올 수 없고 모른다는 사람은 돌아온다는 것이다. 희망이 있다. 몰라서 간 사람은 다 희망이 있다.
알고 간 사람은 안 된다. 위치를 이탈한 인간이 안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모른다. 안다는 것이 너무 위험한 짓이고 거짓이다. 또 잘한다는 것이 얼마나 잘못하는 것인지 모른다. 이게 참 모순된 이야기인데, 하나님께 잘 한다고 한 것이 얼마나 잘못하는 것인지 모른다. 사람이 다 잘못되어 있다.
간첩이 와서 정말 잘하면 정말 간첩이다. 위조지폐를 구별할 때도 그렇다고 한다. 엉성하게 위조하는 것은 별로 죄가 안 되는데, 똑같이 만드는 것은 원래는 사형이라고 한다. 지금은 사형제가 없지만 일제 강점기 같으면 똑같이 돈을 만들면 사형이라고 한다.
해방 이후에 전판서 사건이 한 번 있었다. 남로당에서 돈을 찍어냈던 것이다. 왜냐하면 돈을 만드는 곳에 근무하던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이 판을 가지고 있어서 경제적 교란을 시키기 위해서 돈을 막 찍어 냈다. 그래서 비로소 남로당이 불법 단체로 지목이 된 것이다. 그전까지는 하지 중장이 민주국가에서는 사상의 자유가 있지 않느냐고 했던 사람이다. 야전군 사령관이라 정치를 몰랐다. 그래서 남로당이 마음대로 활동했다. 군대에서도 남로당이 많았다. 여순 사건이 그래서 생긴 것이다. 그 문제로 박*영은 월북했다. 그 문제가 아니었으면 계속해서 활동을 했을 것이다.
잘못된 사람이, 위치가 다른 사람이 잘 하면 더 문제가 된다. 위치부터 바로 해야 하는 것이지 위치는 그대로 있는데 잘하도록 가르치면 더 문제가 된다. 기독교인으로서 어떤 생활만 가르치고 교리만 가르쳐 놓으면 아예 모르는 사람보다 못하게 된다. 우리는 이 책임이 있다. 가르치고 인도하는 사람은 이 책임이 중요하다.
이성, 의지, 감정, 이게 사람이다. 감정이 잘못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사람들은 인정한다. 감정이라는 것은 확 일어났다가 뒤로 생각해 보면 잘못된 것도 있다. 사람의 의지도 굉장한 것이지만 잘못될 수도 있다고 하면 인정이 된다. 이성이 잘못됐다고 하면 인정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성은 내가 깊이깊이 생각한 것이기 때문에 이성은 잘못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철학을 하는 것이다. <순수이성>이라는 책을 나는 읽어보지 않았지만 제목만 봐도 순수이성이니까 어떻게 하면 바른 이성을 가지고 진리를 탐구할 것인가? 이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감정과 의지는 잘못됐는데 이성만 절대로 잘못될 수 없게 되겠는가? 사람이 하나가 잘못되면 다 잘못된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폐가 나쁘면 폐만 나쁘지 다른 데는 다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나도 병원에서 검사를 하면 폐 이외에는 해부학적으로 문제가 없다. 심장이 불편해서 심장내과를 갔더니 심장 초음파는 따로 한다. 대구에서 유명한 의사가 하는 말이 뭐 하러 왔느냐고 한다. 왜 왔느냐고 하니까 무안했다. 나는 괴로워서 왔는데 초음파를 해보더니 왜 왔느냐고 한다. 해부학적으로는 문제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폐하나가 나쁘면 다른 것도 다 같이 기능을 못한다. 겉은 멀쩡한데 기능이 안 된다. 소화도 안 되고 소화가 안 되면 뭐가 안 된다. 어느 하나만 완전하다고 다른 것이 다 완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이성만 확실히 전혀 오염되지 않으면 의지나 감정은 조절할 수 있는 것이다. 전적인 타락이라는 말이 이런 말이다. 이것도 칼빈주의인데 그것이 맞다. 감정만 잘못된 것이 아니다. 의지만 잘못된 것이 아니다. 이성도 똑같다. 그런데 이것은 자기가 생각한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을 알 수 없다. 의지나 감정은 밖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표가 난다. 그런데 이성은 그렇게 되지 않고 자기가 깊이깊이 생각한 것이다.
알고 모름의 문제는 사람의 어떠함에 달려 있지 않다. 예수를 알고 모름의 문제는 더군다나 우리가 의지로 알 수 것도 아니고, 감정으로 느끼는 것도 아니고, 이성으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잘하고 못하는 그 문제도 아니다. 내가 무엇이 악한 일을 해서 네가 나를 이렇게 하려고 하느냐? 네가 악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네가 참람해서 그렇다고 했다. 죽일 사람은 무슨 죄를 씌워도 씌우게 되어 있다.
요즘 검찰이 어쩌고 하던데 죄를 씌우려면 뭐를 해도 씌울 수 있고, 풀어주려고 하면 뭐를 해서도 풀어줄 수 있다. 잘하고 못하는 문제도 아니고, 선하고 악한 문제도 아니고, 잘 생각하고 잘못 생각하는 그런 문제도 아니다. 오로지 위치가 이탈된 문제이다. 문제는 하나다. 하나가 이탈되면 다 이탈된다.
나는 오른쪽 폐가 거의 없기 때문에 등이 굽어서 오른쪽으로 기울어있다. 오른쪽 뼈가 기울어있으면 내장이 다 기울어진다. 기울어진 것 때문에 오는 여러 가지 부작용이 있는데 어쩔 수 없다. 장기도 제 위치에 있어야 하는데 제자리에 못 있게 된다. 검사를 해보면 나는 심장이 오른쪽으로 당겨져 있다. 왜냐하면 오른쪽이 비어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심장이 오른쪽으로 당겨지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다른 문제가 생긴다. 자기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어디 한군데만 나쁜 게 아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라고 한다. 이 말을 들으면 그렇지 않은 것도 있는데, 바울이 너무 지나친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다고 한다. 찾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 것은, 예수께 감사하게 된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나님이 나섰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해결할 수 없다. 사람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다.
요즘 신학도 어떤 사람들은 사람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을 찾아가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람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을 어떻게 찾아가겠는가? 그것은 백날 찾아도 안 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 문제를 가지고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 메시아가 어디 있는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는 아니고, 자기들이 지금 필요한 메시아를 찾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이 필요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중대한 문제 때문에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제자들이 아무리 무식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3년 반이나 예수를 따라다녔으면 볼 것 다 보고 들을 것 다 듣고 하지 않았겠는가? 또 부활하심까지 봤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1:6) 또 그렇게 묻고 있다.
목적이 다른데 있으니까 알아볼 수가 없다. 그런 인간을 가지고 하님을 찾는다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하나님이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못된다. 이 하나님이 해결하셨다는 이 소식이 복음이다.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데, 사람은 할 수 없는데, 하나님이 이 문제를 해결했다는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아들을 보내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로 왔다. 기름부음 받은 자로, 하나님의 위임을 받은 자로, 우리에게 왔다. 이것이 복음이고, 이것이 우리가 찬양하고 감사할 일이다.
히브리서 1장은 이 말을 아주 명확하게 하고 있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1:1,2) 이 한마디 말에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다.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신 하나님, 모양으로, 말씀으로, 예언으로, 기적으로, 별것 다 했다. 구약 안에 없는 것이 없이 다 있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백성들을 끄집어냈는데 뭐가 못할 것이 있겠는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20:2) 이 말에 이스라엘 하나님이 정의되어 있다. 더 이상 없다. 뭐가 모자라는가? 아무것도 모자라는 것이 없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안 되어서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히1:2) 아들로 말씀하신 것이 무엇인가?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어록인가? 그것이 아니다. 지금 도마복음을 연구한다는 사람들은 도마복음에 예수의 어록만 실려 있다고 한다. 그것을 가지고 예수를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그것을 가지고 요즘에 히트를 치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 말씀을 했다는 말이 아니다.
아들로 말씀하신 것은 그런 말을 했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 말은 구약에도 얼마든지 있다. 예언자들이 다 말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아들로 말씀하셨다는 말은 이 말이 아니다. 아들, 그러면 아버지의 아들이니까,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이니까 생명의 문제이다.
아들로 말씀하셨다. 어디서 아들로 말씀했는가? 최종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힌 아들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이니까 거기서 하신 말씀을 지금 말씀이라고 한다. 예수님의 어록도 물론 맞지만 그것을 가지고서는 안 됐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만 가지고서는 안 됐다.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 그 말이다. 그렇다고 가상출현이라는 말도 아니다. 그 십자가로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이 말씀이다. 그분의 죽으심, 그것이 말씀이다.
진리가 무엇이냐 물으니까 내가 진리다. 길이 어디 있습니까 물으니까 내가 길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입으로 하신 말씀만 말씀이 아니고, 그분 자신이 말씀이다. 그분 자신이 어디서 완전하게 드러났는가? 십자가에서 완전하게 드러났다. 그분이 아주 더 이상 감출 것도 없고, 숨길 것도 없고, 모를 것도 없이 드러났다. 그분의 말씀이 거기서 완전하게 드러난 것이다. 그분이 드러난 것이 완전하게 드러난 것이고, 그분이 드러난 것이 그분의 말씀이다.
거기서 예수를 아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다 아는 것이다. 말씀과 그 사람이 별개로 되어 있는 사람이 아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라고 했다.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이 별개가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늘 구별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이 말씀하심에서 비로소 모든 것이 다 드러났다. 입으로 말한 말씀에서가 아니고, 죽음으로 말씀하신 그 말씀 안에서 모든 것이 드러났다. 인간의 위치가 어디인지가 드러났다. 우리에게 인간의 위치가 이것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안 된다. 그런데 그분의 죽으심에서 인간의 위치가 어디인지 딱 드러나니까 우리가 아니라 할 수 없게 된다. 존재가 어떤 존재인가 드러났다. 우리가 아니라 할 수 없다. 모양이 어떤 모양인지 다 드러났으니까 아니라 할 수 없다. 이것이 천 마디 만 마디 보다 더 중요하다.
불교에서는 팔만대장경, 팔만법장경이 마음 심(心)자 하나라고 한다. 마음 하나를 말하려고 팔만가지를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합천 해인사에 가면 팔만대장경이 있다. 절에 가면 대웅전이 있는데, 대웅전은 부처님이 세분이 나란히 있어야 대웅전이다. 한분만 있으면 대웅전이 못 된다.
우리나라에 3보 사찰이 있다. 합천 해인사, 부산 통도사, 순천 송광사, 세 군데가 있다. 합천 해인사는 법보다. 왜냐하면 팔만대장경이 있기 때문이다. 통도사는 진신 사리가 있어서 화신불이다. 그리고 순천 송광사는 승가대학이 있어서 원래부터 승려들을 교육하는 곳이다. 그래서 삼보 중에서 승보사찰이다. 부처님 좌우에 한쪽은 법이고 한쪽은 승이다. 거기도 삼위일체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가운데 있는 석가모니불이다. 항상 석가모니불은 가운데 있다. 화신불이다. 화신불은 우리말로 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이다. 화신, 몸으로 화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말로 하면 기독론이다. 기독론이 가장 중요하다. 기독교도 기독론이 가장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말씀이, 거기서 하신 말씀이, 우리 인간을 완전히 인간으로 드러내 놓았다. 자기는 신이면서 우리에게 너는 인간이고 피조물이라고 한 것이 아니고, 그분 자신이 완전히 피조물로 드러나면서 우리를 심판해버렸다. 우리가 뭐 아니라 한 것을 다 심판해버렸다.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다 드러나 버렸다.
우리는 그냥 형상이고 흙이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다. 모든 베일이 다 벗겨졌다. 성서의 휘장이 갈라졌다고 했는데, 이것은 베일이 완전하게 벗겨졌다는 것이다. 하나님도 드러났고, 사람도 드러났고, 모든 것이 다 드러났다. 선악과로 포장된 모든 것이 다 수치로 밝혀졌다. 이것을 성경을 열권 쓰면 되겠는가? 백 권을 쓰면 되겠는가? 천권, 만권의 성경보다 또 다른 성경이 있다 하더라도 이분의 죽으심에서 보다 더 명백하게 말씀이 드러날 수가 없다. 성경에 기록된 것이 좀 모자라다. 아무리 써도 이보다 더 명백하게 쓸 수 없다. 그것은 말보다 더 진한 것이다. 말은 원래 생명에서 나온 것이니까 생명의 표현일 뿐이다. 그런데 지금은 바로 그 생명이 드러났으니까 말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경우에 사람을 대할 때도 말이 필요 없을 때가 있다. 말이 전혀 필요 없을 때가 있다. 좀 야한 이야기지만 남자와 여자가 만나면 말이 필요 없는 것이다. 사랑한다거나 안한다는 말도 필요 없고, 아무 필요 없다. 말이 그 속에 다 있다. 예가 좀 그렇기는 하지만 그것이 가장 확실한 것이다. 말이 아니다. 말 이전에 말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1:1)는 그 말씀도 말 이전에 말이다. 부득이 로고스라는 단어를 썼지만 말 이전에 말이다. 사랑도 말 이전에 있는 것이 사랑이지 말로 하는 것은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 거짓말로 할 수도 있고, 말을 해도 변할 수도 있다. 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잘 못하는데 하도 그 말을 좋아하니까 할 수 없이 한다. 사람들이 그래야 아니까 할 수 없이 하는 것이지 나는 그 말을 잘 못한다.
예수께서는 이 자리에서 예수께서도 이 자리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아무 말이 없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말 한마디 밖에는 못했다. 이것이 모든 것이 끝났다는 말이다. 다 끝났다. “하나님, 나의 하나님.” 하니까 다 끝났다. 더 이상 없다는 말이다.
겟세마네에서 까지만 해도 “아버지여.” 했다. 여지가 있다. 그런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겟세마네에서는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라고 했다. 여유가 좀 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는 여유가 전혀 없다. “하나님, 나의 하나님.” 나는 이 자리가 예수님의 전체가 드러난 자리다. 모든 것이 다 끝났다. All finish. 그리고 참 사람이 드러났다. 더 이상 드러날 것이 없다. 하나님은 이 사람을 찾고 있는 것이다. 완전한 사람을, 자기가 지으신 사람을 찾고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지음 받은 사람 그대로 이것이 진실이고 이것이 실제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다 이루었다고 했다. 요한복음에서는 다 이루었다. 이것을 보면 뭐가 다 이루어졌는가? 사람이 사람으로 드러났으니까 다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이 요구한 것이 그것이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3:9)고 물었다. 이 문제가 다 해결되었으니까 다 이루어졌다. 끝나고 이루어지고, 끝나니까 이루어졌다.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20:11) 이것이 역설적인 것이다. 끝났는데 완성된 것이다. 끝났는데 시작된 것이다. 끝나지 않고는 시작이 따로 없다. 그 운명, 그 위치, 그것이 바로 우리의 운명이고 우리의 위치이다. 그러면 이제 완전하게 다 됐다.
그분의 운명, 그분의 위치가 바로 우리의 위치 우리의 운명이다. 그것이 완전한 해결이다. 만유를 포함한 하나님이 정하신 유일하고도 영원한 위치, 이러면 다 이루어진 것이다. 위치가 이탈되어 문제가 생겼으니까 위치가 바로 되면 다 이루어진 것이다.
비로소 여기서 우리는 조건이 없게 되었다. 아무 조건이 없게 되었다. 그전에는 우리 조건이 무지무지 많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구한 조건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구약 성경을 읽으면 머리가 아파서 못 읽는다. 나는 예언서를 잘 못 읽는다. 왜냐하면 계속 한말 또 하고 한말 또 한다. 어떤 사람은 예언서가 재미가 있다고 하는데, 나는 재미가 없다. 그래서 다 하고 지금 예언서만 말씀을 못했다. 그것을 추려서 해야 하는데 미안하다.
조건이 없다. 이제는 아무것도 없다. 여기서 그분과 마주친다. 이 조건 없는 이 자리에서 우리가 예수와 마주친 것이다. 참 사람과 내가 처음으로 마주친 것이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참 사람을 본 일이 없다. 사람을 보기는 봤는데, 참 사람이 없었으니까 참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공자님 제자들은 공자님처럼 되려고 노력하고, 석가모니 제자들은 석가모니처럼 되려고 노력하고, 예수님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되려고 노력한다. 참 사람을 본 일이 없으니까 이렇게밖에 안 된다. 본받으려고 공자님도 본받을 수 있고, 석가모니도 본받을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본받을 수 없다. 거기서 다시 나야 되지 본받을 수 없다. 행동은 본받을 수 있는데, 생명은 본받을 수 없다. 그것이 아들이다. 조건 없는 자리, 이 자리에서 우리가 마주치니까 저절로 연합이 된 것이다. 내가 연합을 하려고 해서 연합이 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내가 연합을 하겠는가? 저절로 연합이 된다. 이것은 완전한 은혜다. 우리 교회에 한철이 말로 100%다.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1:16)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오직 드러나기만 했다.
하나님을 더 이상 이제는 알려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예레미야 31장이 그렇다. 아무도 하나님을 알려 하지 않을 것이다. 어린아이에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다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렘31:34참) 절대로 하나님을 모르게 되어 있는데, 이제는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할 필요가 없다. 남자가 여자를 안다. 여자가 남자를 안다, 남자가 여자를 안다는 것이 서로 만나기 전에는 뭐가 있나 궁금해서 신비롭다. 그런데 막상 만나보면 더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
형상과 모양으로 지어진 인생! 하나님과 연합되면 하나님이 나타나고, 씨-생명과 연합되면 열매가 되고, 단지 그렇게 되는 것이다. 다른 것이 소용이 없다. 그냥 그렇게 되는 것이다. 씨를 밭에 뿌려 놓으니 열매가 나온다. 그냥 그렇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더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고, 씨를 뿌리니까 밭이 되었다.
하나님과 마주쳐서 연합이 되면 하나님이 나타난다. 어떻게 나타나는가?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는가? 부활에 대해 바울에게 물었다. 어떤 모양으로 우리가 부활할 것입니까? 이 어리석은 사람들아, 이렇게 말한다. 이 어리석은 놈들아. 어찌 그것을 그렇게 멍청한 소리를 하고 있냐? 씨를 뿌릴 때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씨를 뿌려 놓으면 어떤 형태로 나올지 모르지 않느냐는 말이다.(요일3:2참) 하나님과 연합되면 하나님이 나타나니까 알려 할 필요가 없다.
밭에 씨를 뿌려 놓으면 열매가 나온다. 이것이 밭인지 아닌지 물어볼 필요도 없다. 이것이 열매인지 아닌지를 물어볼 필요도 없다. 단지 그냥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쓰면서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모른다. 단지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하면 듣는 사람은 ‘아멘’ 해야 한다. 알려고 할 필요도 없다고 하면 ‘아멘’ 해야 한다. 이것이 알려고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결혼해서 둘이 잠자고 나서 알려고 할 필요가 뭐가 있는가? 다 안다.
생명이 연합된 그 생명은 그대로 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새 생명이라고 한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게 된다. 자연히 그렇게 된다. 생육하려고 해서 생육하는가? 번성하려고 해서 번성이 되는가? 만나니까 생육하고 번성하여 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열매가 생길 것인가? 뭘 해서 열매가 될 것인가? 할 필요가 없다.
생명의 연합! 주 예수님을 보라. 하나님이 나타나면 사람이 안 나타날 줄 알았는데 사람이 나타났다. 예수를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이제 저 사람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런데 어느 날 완전히 사람으로 나타난다. 형상을 따라 모양대로 지어진 바로 그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다. 특별한 재주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형상과 모양을 따라 만들어진 사람이니까 하나님도 나타나고, 사람도 나타난다. 우리가 보기에는 완전한 하나님이고, 완전한 사람이다. 그런데 왜 그런지를 사람들이 몰라서 이론적으로 말을 하려니까 끝이 없다.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이 됐다가 사람이 됐다가 그러겠는가? 요술도 아니고 어떻게 되겠는가?
이것이 진실한 것이다. 진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이것이 진실한 것이다. 이 사람이 참 사람이다.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을 영접할 산 혼이었다. 그런데 위치를 떠나서 어긋나게 찾고 있다. 가인과 아벨이다. 찾기는 찾았는데 어긋나게 찾았다. 요즘 사람도 그렇다. 찾기는 찾는다. 바울은 찾는 자가 없다고 했는데, 찾는 자가 없는 것이 아니고 있기는 있는데 어긋나게 찾는다. 가인과 아벨처럼 찾는다. 바울은 찾는 자가 없다고 했지만 아주 없는 것이 아니고, 있기는 있는데 어긋나게 찾고 있어서 없다는 것이다.
돼지는 코가 개보다 200배는 후각이 더 예민하다고 한다. 돼지는 열심히 찾고 다닌다. 코로 모든 것을 다 맡아야 한다. 땅속에 있는 것까지 냄새 맡고 다닌다. 그런데 절대로 진주는 찾지 못한다. 왜냐하면 찾지 않기 때문이다. 그놈이 찾고 있는 것은 무나 호박이지 진주를 찾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 있어도 못 찾는다.
다른 것을 찾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찾겠는가? 목적이 다른데 노력을 한다고 그것이 되겠는가? 돼지 목적과 진주는 다르다. 자기 목적물이 아니다. 짐승들은 사람보다 의리가 있다. 어느 밭에 돼지 한 마리가 들어가면 자기 혼자 먹고 가면 괜찮은데, 떼거지로 데려와서 먹고 간다. 그래서 한번 들어가면 완전히 밭을 다 갈아버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제주에서 앵두나무를 키웠다. 앵두가 열리면 딸 수 있는 시간이 있는데, 익는 것을 새들이 더 먼저 기다리고 있다. 처음에는 한 놈이 오고 조금 있으면 떼거지로 몰려온다. 연락을 하고 다 알려주는 것 같다. 새가 와서 먹으면 한 톨도 남지 않는다. 사람은 아무리 잘 따도 남는 것이 있는데 새들이 와서 따면 아주 깨끗하게 딴다. 내일쯤 따야지 하면 벌써 새들이 와서 다 따먹는다. 그물을 치지 않으면 못 따먹는다. 그놈들이 자기만 먹지 않고 데려오는지 모르겠다. 새들은 혼자 많이 못 먹는다. 많이 먹으면 못 날아가니까 우애가 좋은 것 같다. 떼거지로 와서 먹는다. 돼지도 한 마리가 안 들어오고 떼거지로 들어온다. 들어왔다 하면 밭을 버린다.
마지막 사람 아담은 죽으심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해서 만유에게 생명주는 영이 되었다.(고전15:45참) 어떻게 예수님이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생명을 분배해주겠는가? 만유 안에 있어야할 생명이기 때문에 우리도 그분을 보고 우리가 연합된 것이다. 연합됐으니까 생명이다. UN은 Unite Nation이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하나님과 연합한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은 United Human UN이 아니라 UM이다.
로마서 6장 5절은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본받아)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6:5)고 말한다. 이것은 연합 안에서 아주 쉬운 말이고, 연합이 없으면 불가능한 말이다. 연합 안에서는 너무 쉬운 말이다. 참 신기하다. 우리는 UN총회를 할 것이 아니고, UM총회를 해야 한다. UM본부를 하나 만들어서 거기서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총회를 해야 세상에 바꿔질 것 같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본받아) 연합한 자도 되리라.” 이 연합을 위해서 긴 역사가 필요했다. 긴 섭리가 필요했다. 아브라함을 왜 불렀던가? 이것을 위해서 불렀다. 이스라엘을 왜 구원을 했던가? 이를 위해서 구원한 것이다. 사람을 왜 지었던가? 이를 위해서 사람을 지은 것이다.
지금 우리가 근본으로 돌아온 이야기를 하고 있다. 개혁주의가 아니다. 종교개혁주의가 아니고, 근본의 문제이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고, 예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확실치 않았을 때, 내가 제일 안타까운 것이 평생을 예수를 따른다고 따라왔는데, 이 감사가 안 되었다. 아는 것은 많이 알았는데,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안 되니까 감사가 안 된다. 다른 사람들은 죄 사함을 받았다고 감격하고, 어떤 사람은 발이 땅에 닿는 줄 모르고 6개월을 돌아다녔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평생, 거의 50년 예수만 찾기를 50년을 따라왔다. 그런데 마지막에 그 예수와 내가 관계가 없으니까 감사가 안 되었다. 사람들이 왜 우는지를 내가 모르겠고, 왜 가슴을 치는지 몰랐다.
이제는 내가 감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감사보다도 내가 그의 증인으로 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증인으로 살지 않으면 내 인생이 의미가 없다. 아무 의미가 없다. 숨이 붙어 있을 때까지 내가 그분을 증거 할 수만 있다면, 증인이 될 수만 있다면, 어떤 모양으로라도 하여튼 붙어 있으면 좋겠다. 여러분이 나와 같이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꼭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여러분들이 증인이 되기를 원하고, 증인으로서 아버지 앞에 서게 되기를 원한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