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미의 논리: 14. 이중 원인성, 15. 특이성들
-들뢰즈(G. Deleuze), Logique du sens, Minuit, 1969, pp. 101-114, 115-121.
벩송이 상징계에서 놀이를 학문으로 간주하지 않은 이유는 가상성이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물론 들뢰즈는 문학과 예술에서 상징계가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벩송은 상징계와 실재계를 다루는 두 방식에서, 두 방향에서 원인성에 대한 깊이를 사유하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고 보았다. 상징계를 실재적인 것으로 보는 종교와 관념론의 입장이 있고, 심층의식(내재의식)을 실재성으로 보아 생성과 발산을 다루는 형이상학(형이심학)이 있다는 것이다. 즉 전자에서 바깥에서 철학하는 것이고, 후자는 안에서 철학하는 것이다. 후자의 원인성은 원인 다음에 결과를 생각하면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원인에서 발생을 다룬다. 따라서 벩송에서 원인성 또는 원인은 인과관계와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원인은 분열 또는 분화를 생산하는 것이지, 결과로부터 원인에 연결하는 전도된 사고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한다.
벩송의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록(초기 4강좌)’과 비교해 보면, 벩송은 원인을 철학사적 연관에서 먼저 제기하고, 원인을 언어(개념과 관념)로 다루는 것이 오류, 착오, 불합리에 빠지는 것을 지적한다. 말하자면 벩송 자신이 시간-지속으로 다루는 것이 철학의 근본이라고 한다. 이에 비해 들뢰즈는 언어(명제, 개념)로 다루는 것도 있을 수 있고, 그 경우에는 무의미와 파라독스에 대응하여 응답할 수 없는 처지에 빠지는데, 이런 이유는 분열증과 원인성을 기원적으로 제대로 다루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간주한다. 아마도 들뢰즈가 벩송의 강의록을 보았더라면 설명의 순서는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벩송은 삶이 먼저이고 사고와 사변은 다음이라 하였고, 들뢰즈는 여러 관점(개념 관념)들을 검토하건데 철학이 원인에서 출발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의 삶에서 행위 또는 실천이 철학의 가장 근본적인 과제로 보았던 것 같다. 이 원인에 의한 분열증을 잘 이해해 준 당대의 철학자는 라깡이 아니라 가타리였다. 그 둘 들뢰즈/가타리는 파라노이아(편집증)를 비판하고 분열증을 분열분석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가족과 종교의 삼원성이라는 정신분석학의 가족계열(la filliation)이 아니라, 사건의 생성에서 다양체의 발현과 수렴으로 이루어지는 분열증의 동맹관계((l’alliance)를 파악해야 한다고 한다. 이런 설명은 “안티외디푸스”에서 할 것이다. 가타리가 들뢰즈를 잘 읽었다고 해야 할지, 들뢰즈가 가타리를 잘 이해했다고 해야 할지 선후는 알 수 없지만 둘은 같은 사유를 가쳐왔을 것이다. 즉 원인성의 탐구 방식에 의해 둘의 연구는 변곡점을 상승시키는 효과를 생산하였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56MKB)
14계열에서 문제제기로서 한 소제목은 “이중 원인성(la double causalité)”을 내걸었다. 원인성 또는 원인에 관한 문제제기는 벩송이 1900년 논문에서부터 시작하여 꼴레쥬 드 프랑스의 강의에서 거의 2년간 다루었다. 벩송은 원인과 결과라는 틀 속에 다루는 것은 근대의 데카르트적 양식에 관한 것으로, 고대에서는 오관을 통한 상식으로 원인으로부터 귀결이 일방향이 아니라도 영향을 미치는 효과에 대해 더 많은 논의가 있었다고 본다. 이런 원인에 대한 논의는 이데아를 원본으로 하여 현상(표면)에서 결과를 낳는 것과 다르다. 이 논의는 생성에서 원인이 표면으로 올라가는 길도 다양하며, 또한 표면에 드러내는 방식이 다양하다는 것을 논한다. 들뢰즈는 이 강의록을 볼 수 없었지만 벩송의 철학사에 대한 깊은 관심사와 동일한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벩송은 원인성(아페이론)은 저술에서는 이중화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다른 곳(인격성 강의)에서 이중화 사중화의 예를 들기도 한다. 그런데 벩송은 의식이라는 차원에서 여러 갈래로 가지치기 한다는 표현도 많이 쓴다. 즉 내재적 의식에서 표면으로 현실화에서는 여러 변형들이 등장한다고 한다. 들뢰즈는 이렇게 등장하는 것을 시뮬라크르들라 한다. - 나중에 들뢰즈가 이야기하겠지만 시뮬라크르의 두 종류가 있다 -
들뢰즈가 표면으로 솟아나는 생성들이 있다는 것은 내면 또는 깊이에서 움직임과 능동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움직임의 온덩어리를 온사건이라 부를 것이다. 사건들과 시뮬라크르들은 깊이에서 진동하며 우글거리는 운동에서 나온다(생성한다)는 것이다. 벩송이 자발성 또는 작동하는 권능이라고 하는 내재성의 동인을, 들뢰즈는 생성의 권능(puissance de genèse)이라 한다. 흥미로운 것은 벩송이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록에서 고대의 상식, 근대의 양식의 사고들이 그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였다. 벩송은 후설에게 까지는 설명하지 않았지만, 후기칸트주의와 신칸트학파들의 스콜라철학자들이 범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들뢰즈는 한 수 더 나아가 후설도 후기칸트주의자의 길로 갔다고 하고, 그래서 후설은 원독사(Urdoxa)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후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에시스와 노에마의 도식을 빌려온 셈이라 한다. 이런 방식이 카톨릭적인 것이고, 벩송이 말하는 네오 스콜라주의에 해당한다. 들뢰즈가 벩송과 같은 문제의식을 갖는 것은 이 글에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앵글로색슨의 지식론으로서는 인간 본성의 문제를 안으로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지식으로 사는 것만이 아니라, 삶의 기원과 근원에서 나오는 공감(벩송)과 공명(들뢰즈)으로 산다는 것이다.
들뢰즈가 넷째 소절에서 “진정한 생성의 조건: 나도 개별화의 중심도 없는 선험적 장(Les conditions d'une vraie genèse: un champ transcendantal sans Je ni centre d'individuation)[‘이페이론’이지]”에서 말하는 선험적 장은 벩송의 내부의식(in-consience)[기억]에 관한 것으로 보인다. 들뢰즈가 “분열증적 심연”이라고 하는 심층도 벩송과 플로티노스가 긍정으로 본 ‘아페이론’에서 오는 것이리라. 들뢰즈가 앞에서 언어 측면에서 또는 문장론적 측면에서 심층이 실재하는 움직임으로 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이런 견해에 대해 주목하는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자아도 불성도 없는 공(空)과 같은 것이 있고, 그 공은 온사건을 내포하는 색(色)과 같은 것이지만, 표면에 올리는 것은 노력하는 불자에 달려있다고 보면, 불교식 도덕론이 될 것이다. 이런 솟아오름의 가지치기에서 그 기원 또는 아르케를 류적차원도 종적차원도 아닌 개별성으로 다루면 “특이성”을 다루게 될 것이다. (56MKB)
**
사람들은 인간이라고 말할 때 대부분은 보편명사처럼 류적 인간을 말하고, 한국인 또는 이란인이라고 말할 때는 일반적인 종적 인간처럼 말한다. 보편은 고대의 상식과 닮았고, 종적 일반적이고 개념적인 근대의 양식에 닮았다고 한다면, 그 류아래 종아래 개별성으로서 개인은 특이성이 될 것 같다. 그 인간, 그 때 그 장소의 그 인간은 특이성을 지닌 바로 그 인간이다. 소크라테스, 그 인간은 참주제에 저항하며 젊은 청년을 각성하게 하다가 아테네에서 민주파들의 고발로 참주파들의 묵인아래 재판을 받고 독배를 마신 그 인간이고, 예수는 나자렛에서 태어나 로마의 참주(황제)체제에 저항하여 인민을 자각하게 하려다가, 유월절에 인민들에게 선택받지 못하여 십자가에 매달렸다. 한 인격의 특이성은 참주제(황제제)와 더불어 생각해야 하고, 청년의 각성과 인민의 자각과 더불어 그 터전과 입말로부터 생각해야 할 것이다. 저항이 있었으나 봉기는 쉽지 않았고, 사회적 또는 종교적 습관이 봉기를 억압할 때는 자치와 자주의 사유는 표면 밑으로 흐르기 마련이었다. 제국주의 시대 두 번의 전쟁으로 심층이 표면으로 분출하였다, 20세기 후반에서 ‘제국’의 시대에 표면을 따라 여러 갈래로 표면의 균열을 내고 있는 있음에도, 제국주의에 저항하던 국가주의 연관들이 제국에 대해서는 분산된 저항과 봉기가 미약하여 흩어져 소멸되고 있다.
그럼에도 국가주의 영향 아래 동지애(camaradrie)와 세계시민사상(humanitaire)이, 소크라테스 시대처럼 또는 예수 시대처럼, 현 상황에서 제국에서 배제되고 파편화되고 있다. 그래도 누군가는 세계시민사상과 인성자유주의(libertaire)를 입말에 올리고 있지 않는가? 종교재판과 같은 악마주의가 빨갱이라는 말만하면 된다고 여기는 이들이, 인문주의와 시장자유주의로서 세상을 공정과 정의를 실현한다고 한다. 악마주의는 없어진 신을 현존하는 신으로 대체 하려고 하는 입말의 독사(doxa)에서 온다고 들뢰즈가 말한다.
이 신들의 이야기에 대한 믿음에서, 특이성의 인간들의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 인민, 프롤레타리아, 대중, 민중들에서 특이자들이며 소수자들이다. 이들을 악마주의자들이 빨갱이(악마)로 몰려고 하지만, 특이자로서 활동하는 일이 별난 것이지 빨갱이가 아니라는 것도 사람들이 안다. 사람들은 이들을 노토스, 별종, 덕후라고 부르기도 한다. 제국에서는 덕후들이 표면에 균열을 내고 솟아날 것이고, 별종들이 자기의 입말을 듣는 이가 없는 SNS에서 함성처럼 소리지르게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제국이 뭐라고 하든, 우리글 우리입말이 있다는 것은 즐겁고 유쾌한 일들을 생산할 것이다. 이 덕후들의 알리앙스(동맹)는 ‘새소식’과 같을 것이다.
들뢰즈는 설명하였듯이 19세기 전반에 단편소설(la nouvelle)의 시대 같은 것이 과거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21세기 제국의 시대는 어떤 라누벨(새 이야기)이 있을 것인가? 여전히 팜플렛과 같은 전단이 필요할 것이다. 덕후의 입말과 전단이 방향성과 경향성을 갖출 때 저항의 힘은 주변으로 확장할 것이다. 그 덕후들의 경험의 이야기(신화도 테오리아도 아닌)들이 젊은이에게는 “선험적 장”이 될 것이고, 그 장은 활동성이기 때문에, 제15장에서 셋째 절에서 들뢰즈는 “선험적 장은 의식의 형식을 간직할 수 없다(Le champ transcendantal ne peut pas garder la forme d'une conscience)”하는데, 형식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인민 지난 경험 속에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벩송은 말한다, 흐름에서 솟아나는 혁명은 간헐적이나, 폭발적이라고 한다. (56MLA)
*
들뢰즈가 13장에서부터는 다른 측면(위상)을 다룬다고 하는 것은 우선 류적과 종적 차원의 개념화 작용은 관례와 습관에 의존하기 내부로부터 원인, 즉 자발성을 구해낼 필요가 있다. 원인성을 두가지 방식으로 다룬다고 하기보다, 실재성으로서 원인은 하나로부터, 즉 자연으로부터이다. 신과 관념의 원인성을 벗어나야 한다. 그러면 실재성으로서 내재생의 원인 생성에서 발생의 장을 무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삶의 장이며, 여기에서 선험적 형식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선험적 경험의 총체, 실행하는 권능이 있다. 이로부터 도덕론을 전개해야 할 것이다. 내재성에서 원인, 그리고 원인의 발생과 생성의 장을 먼저 끌어내야 인간의 도덕성을 논할 수 있을 것이다.
특이성이 활동 또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장에서부터 시작해야, 도덕론의 토대 또는 기원에 대한 담론의 전개일 수 있을 것이다. 벩송의 경우처럼 자연(본성)의 자발성, 본성의 분열과 생성을 논할 수 있고, 그리고 들뢰즈가 나중에 제기할 수 있듯이 생장에 대한 이야기(단편소설)를 전개하기 위한 밑거름일 것이다. 토양과 거름이 두꺼울수록 이야기는 흥미진진할 것이니까.(56MKI)
***
제14계열 : 이중 원인성(de la double causalité)
Gilles Deleuze, Logique du sens, Minuit, 1969, pp. 115-121.
비형체적 사건-효과들, 그것들의 원인과 준원인 Les événements-effets incorporels, leur cause et leur quasi-cause 115
115 의미의 연약성(fragilité)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속성(l'attribut)은 물체적인 성질들과 전혀 다른 본성이다. 사건은 물체의 능동이나 수동과는 다른 본성이다. 그러나 사건은 이들로부터 결과한다(résulter). 왜냐하면 의미는 물체적 원인들 및 이들의 조합에서 유래하는 효과이기 때문이다. (115) [언어에서 의미의 속성은 물체의 성질과 다른 성질이다. ]
비물체적 의미는 물체의 능동과 수동의 결과이며, 표면 위에서 그 자체 비물체적인 준원인(quasi-cause)에 결부되는 한에서만 물체적 원인과의 차이를 보존할 수 있다. (115)
스토아학파는 사건이 이중 인과에 의해 야기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그 하나는 사건의 원인인 물체들의 조합(mélanges)에 있고, 다른 하나는 사건의 준원인인 다른 사건들에 연관 있다. 반면에 에피큐로스 학파는 외관과 표면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키지 못하였고, 때문에 비물체적인 효과들이라는 개념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것은 아마도 ‘시뮬라크르들’이 물체들이라는 심층적 원인에만 종속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115)
우리는 표면과 사건의 비물체적 성격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두 번째 인과관계를 정초하려고 시도했다. 우리가 보기에, 사건 즉 의미는 역설적 요소에 연관되어있었고, 이 역설적 요소는 무의미로서 또는 우발점으로 개입하며, 또한 준원인 역할을 하면서 효과의 충분한 자율성(autonomie)을 확보해준다.(115-116).
되돌릴 수 없음과 발생 Impassibilité et genèse 116
116 그러므로 효과의 자율성(autonomie 자치성)은 우선은 [물체의] 원인과 본성상 차이를 통해서 두 번째로 준원인과 관계들 통해서 정의된다. 이 두 측면은 의미에게 매우 큰 차이 있으며, 더 나아가 심지어 대조적이기까지 한 특성들을 부여한다. (116)
효과 또는 사건으로서 의미는 빛나는 되돌릴 수 없음(침투불가능성, 불모성, 비효과성, 능동도 수동도 아님)에 의해서 특징지워진다. (116)
이 모순된 두 측면을 어떻게 화해시킬 수 있는가? 한편으로 사물의 상태[사태]들에 관련한 되돌릴 수 없음(impassibilité)이나 명제들에 관련한 중성(neutralité)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명제들에 연관해서도 사물의 상태들에 연관해서도 발생/생성의 능력/권능(puissance de genèse)이 있다. (117)
논리적 원리와 선험적 원리를 어떻게 화해시킬 것인가? .. 이 두 측면이 자율성의 두 모습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은 불충분하다. (117)
후설의 이론 Théorie de Husserl 117
단순한 형식논리와 선험적 형식논리의 대립은 모든 의미 이론을 관통한다.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의 이덴(Ideen 1913)을 예로 들어보자. 후설이 의미를 작용의 노에마 또는 명제의 표현됨으로써 발견했다고 사람들은 기억한다. (117)
노에마적 의미의 핵(noyau)에서, 보다 친숙한 어떤 것이, 최상으로 또는 선험적으로 친숙한 중심(centre)이 나타난다. 이것은 다름 아닌 의미 자체가 실재로서 대상과 맺는 관계, 즉 이제 선험적 방식으로 발생되거나 구성되어야 할 연관과 실재성(rapport et réalité)이다. (117-118)
리쾨르(Paul Ricoeur, 1913-2005)는 핑크(Eugen Fink, 1905-1975)를 이어서 이념들(Ideen)의 넷째 절에서 이러한 전환의 존재를 지적한다. “의식의 지향된 의미(un sens visé) 안에서 스스로를 넘어설 뿐만 아니라, 이 지향된 의미가 대상 안에서 스스로를 넘어선다. ... {그러나 이제} 대상에 대한 노에마의 관계는 그 자체 노에마의 궁극적 구조인 선험적 의식에 의해 구성되어야 한다.” (118)
그러나 후설적인 발생은 일종의 요술(un tour de passe-passe)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핵이 속성(attrribut)으로서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속성은 술어(prédicat)로서 이해될 뿐 동사로서 이해되지 않는다. 즉 개념으로서 이해될 뿐 사건으로서 이해되지 않는다. (118)
[후설의] 어떤 사물 x는 내적 무의미와 같지 않으며 의미와 공현존(coprésent)한다. 그것은 그것이 낳아야할(engendrer) 어떤 것도 전제하지 않은 제로 점(point zéro)이다. 그것은 차라리 칸트의 대상 x 이며, 이 x는 단지 어떤 것(quelconque)을 뜻하며, 초월의 외재적 합리관계 속에서 의미와 더불어 있다. (118) [후설의 선험적 대상 x는 칸트의 물자체와 같은 것이 된다.].
후설은 발생을 생각한 것 같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 필연적으로 ‘역설적’이고 ‘동일화 불가능한’(그 고유한 시원과 동일성을 동시에 모자란) 심급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대상의 동일성을 설명해줄 공통감각(sens commun, 오감, 상식)의 시원적인 능력에서 출발해, 더 나아가 모든 대상들을 무한히 동일화하는 과정을 설명해줄 양식(bon sens, 일방향, 즉 오성)의 능력에서 출발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119) [벩송의 꼴레쥬 드 프랑스 강의록에서 ‘의식(영혼)의 일방향과 이원성이, 고대의 상식, 근대의 양식에 근거했음’을 길게 설명했다. 들뢰즈는 벩송의 강의록들을 읽지 못했음에도, 상층에서 암묵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에서는 비슷한 사고를 할 수 밖에 없음을 끌어낸 것이 흥미롭다. (56MKI)]
독사에 대한 후설의 이론에 따르면, 믿음의 상이한 양식들은 원통념(Urdoxa, 근원독사)에 의해 발생하며, 이 원통념은 각각의 능력들에 관련해 공통감각의 능력으로 기능한다. (119)
칸트(Kant, 1724-1804)에게서 이미 분명하게 드러났던 것이 후설에게도 유효하다. 즉 칸트와 후설은 상식/공통감각의 형식을 탈피하지 못한 것이다. (119)
진정한 생성의 조건: 나도 개별화의 중심도 없는 선험적 장 Les conditions d'une vraie genèse : un champ transcendantal sans Je ni centre d'individuation [‘이페이론’이지]
그래서 우리는 의미 개념에 의해(par) 생겨나게 해야 할 모든 것을 의미 개념 안에(dans) 이미 가지고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 심각한 것은 우리가 표현과 구분하고자 했던 다른 차원들[지칭화, 표출화, 의미화(기호작용)]과 그것[표현]을 혼동함으로써 개념을 완전히 휘저어 놓고 있다는 것이다. (119-120)
후설적인 의미 규정은 점진적으로 등질화되는 소급적인 계열로부터, 나아가서는 이질적 계열들 – 두 얼굴을 가진 심급이 그 사이를 돌아다니는 노에시스의 계열과 노에마 계열(‘Urdoxa’와 어떤 대상) - 로부터 편리한 외관을 빌려온다. (120)
사실상, 내재적 준원인에서 출발하는 의미 규정과 명제의 다른 차원들로부터 결과하는 정적 생성(la genèse statique)은 선험적 장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이 선험적 장은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가 1937년에 발표한 결정적 논문에서 제기한 조건들에 응답하는 것이다. 이 선험적 장은 비인칭적 장으로서, 종합 작용을 하는 인칭적 의식이라는 형식 또는 주체적 동일성이라는 형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120)
또한 후설이 선험적 장 안에 개별화의 중심들과 개별적 체계들, 모나드들과 관점들, 칸트적인 ‘나’가 아닌 라이프니츠적인 ‘자아’를 각인할 때에도, 사태는 더 아나지는 것 같지 않다. 그럼에도 뒤에서 보겠지만 여기에 매우 중요한 변화가 있다. (121)
그러나 선험적인 장은 인칭적이지 않은 만큼 개체적이지도 않으며, 나아가 보편적이지 않은 만큼 일반적이지도 않다. 이 선험적 장은 차이도 바닥도 모습도 없다는 것, 분열증적 심연이라는 것을 말하는가? 그러한 장의 표면의 조직화가 시작되면서, 모든 것은 그것[앞의 말]을 부인한다. 특이성의 관념(idée, 발상)은 반(反)일반성이며, 동시에 비인칭적이고 전 개체적이다. 이제 이 특이성의 발상은 이 영역의 규정과 발생적 능력(puissance génétique)의 규정을 위한 가설을 사용하게 해준다. (121) (41OMC)
제15계열 : 특이성들(des singularités)
Gilles Deleuze, Logique du sens, Minuit, 1969, pp. 122-132.
[§9 문제적 §10 이상적 놀이 등에서 특이성이 빈 형식인 아이온에서 일어나는 대사건이 있다. 의미의 발생은 특이성의 생산성 즉 발생이다. 이 발생의 심층에 내재하는 준원인에 의해서 이다. 이 생성이 계열은 상식과 양식에 대립된다.]
[§13에서 알려지지 않은 계열을 아르또로부터 제시하고 §14에서 철학사적으로 칸트와 후설까지도 이 영역(선험적 장)을 보았으면서도 들어가지 못하였다. 이제 그 영역을 들어가는 입구가 특이성이며, 발생적 논의를 우선 정태적으로 논하고(§16, §17), 나중에 분열 분석에서 역동적으로 논하게 될 것이다.]
전투 La bataille 122
[전투는 이기고 지는 편을 가르는 게임 이전에, 인간에게 죽음을 담보하는 사건이다.]
122 의미의 두 계기(deux moments), 되돌릴 수 없음과 발생(genèse), 중성과 생산성 등에서 어느 하나를 다른 하나의 외관으로 간주할 수 없다. 사건이 중성적이며 되돌릴 수 없는 것이라는 것, 내부와 외부, 개별과 집단, 특수와 일반 등의 규정에 무관하다는 것은 일종의 항상성(une consistante 常項)이다. 이 항상성이 없다면, 사건은 영원한 진리를 가질 수 없을 것이며, 또 시간적 효과와도 구별할 수 없을 것이다. (122)
만일 전투가 여러 사건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그 본질에서 대사건(Evénement)이라면, 전투는 의심할 바 없이 동시에 여러 방식으로 현실화되기 때문이다. ... 특히 전투가 자기 자신의 장 위를 난다는 것, .. 중성적이며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122) [모든 생명에서 대사건은 ‘죽는다’라는 동사적 사건일 것이다. 전투에는 그 죽음의 흐름이 있다? ]
이 용기와 비겁함의 저편에, “의지적 직관”에 의한 – 즉 여전히 현실화[효과화]의 유형들에 상응하는 모든 경험적인 직관들과 구분되는, 사건이 그에게 만들어주는 의지에 의한 – 사건의 순수한 파악에 도달하기 위해서 병사에게는 여전히 하나의 긴 정복이 필요하다. (122-123)
또한 사건에 대한 가장 위대한 저작, 스탕달(Stendhal, 1783-1842), 위고(Hugo, 1802-1885), 톨스토이(Tolstoy, 1828-1910)의 것보다 더 위대한 저작은 스테판 크레인(Stephen Crane 1871-1900)의 붉은 무공 훈장(The Red Badge of Courage, 1895)의 저작이다.(123)
전쟁의 신(dieu de la guerre)은 분명 있다. 그러나 모든 신들 중에서 가장 되돌릴 수 없는, 기도(prières)를 분명하게 거부하는 신은 바로 투과불가능성(Impénétrabilité), 텅빈 하늘, 아이온이다. (123)
선험적 장은 의식의 형식을 간직할 수 없다 Le champ transcendantal ne peut pas garder la forme d'une conscience 123
[선험적 장: 제14계열, 119-121, 제15계열, 124-125. ]
123 의미의 중성은 명제적 양태들 일반과 연관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양의 관점에서, 의미는 특수한 것도 일반적인 것도 아니며, 보편적인 것도 개체적인 것도 아니다. 질의 관점에서, 의미는 긍정에도 부정에도 전적으로 무관하다. 양상의 관점에서, 의미는 실연적(assertorique)도 절대 보편적(apodictique)도 추측적(interrogatif)(주관적 불확실의 양태 또는 객관적 가능성의 양태)도 아니다. 관계의 관점에서, 의미는 그것을 표현하는 명제에 있어서, 지시, 표출, 기호와도 같지 않다. 전형의 관점에서, 어떤 직관들과도 의식의 ‘위치’들과도 혼동되어서 안 된다. (123)
그래서 의미의 투과불가능한 중성은 의식 자체 내에서 선언(選言)의 측면들 – 이성의 합법화 하에서 실재적 코기토의 어머니-위치인가, 아니면 합리적 합법화에 복속되는 불활성적이고 되돌릴 수 없는 ‘반면(反面)’, ‘부적절한 코기토’, ‘그늘 또는 반사’로서 중성화인가 – 중 하나로서만 규정된다. (124)
[후설이] 이렇게 의식으로부터 분명히 단절되는 것으로 제시하는 것은 [우리가] 의미의 두 측면과 - 양태들에 관련해서 중성과 발생적 잠재력(puissance génétique) - 정확히 상응한다. (124) [의식으로부터 분명히 단절되는 것으로 제시하는 것이란 ‘대척점’(contrepartie), ‘불순한 코기토’(cogito impropre), ‘그늘 또는 반사’(ombre ou reflet)] (124)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특이성 Les singularités impersonnelles et pré-individuelles
124 우리는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장, 즉 경험적 장들과 유사하지 않으면서도 미분화된 깊이와 혼동되지 않는 선험적 장(un champ transcendantal)을 규정하고자 한다. 이 장은 의식의 장처럼 규정될 수 없다. 사르트르(Sartre 1905-1980)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칭의 형식과 개체화의 관점을 인정함으로써 의식을 모체로서 수립하려는 시도를 거부한다. (124)
의식의 통합적 종합이 있다면 나의 형식도 자아의 관점도 있게 마련이다. 이와 반대로 개체도 인칭도 아닌 것, 그것은 특이성들의 유출(émissions)이다. 특이성들은 무의식의 표면위 에서 이루어지며, 노마드적 분배에 의한 자가 통일화의 내재적이고 동적인 원리를 통해 작동한다. .. 특이성은 참된 선험적 사건들이다. 그것은 페를랭게티(Ferlinghetti)가 “단수 4인칭”라고 부른 것이다. (124-125) [18계열 166쪽 4인칭 단수 - 유머 문제]
특이성은 개체적이거나 인칭적이기는 커녕, 개체와 인칭들의 발생을 주도한다. 특이성들은 그 자체 내에 자아도 나도(ni Moi ni Je) 포함하지 않으며, 현실화됨으로서(s'actualisant)만 효과화됨으로써(s'effectuant)만 이들을 생산하는 ‘포텐셜’ 안에서 분배된다.(125)
익명적이고 노마드적인,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특이성들이 우글거리는 세계가 열릴 때, 우리는 마침내 선험의 장을 밟고 있게 된다. 앞선 계열들의 과정에서, 그러한 세계의 다섯 중요한 특징이 묘사되었다. (125) [의식의 지표 밑에 미친생성이 있다. 마치 제우스가 밟고 있는 지표 밑의 저항하는 거인족들이 있는 것처럼.]
선험적 장과 표면 Champ transcendantal et surface
125 첫째 특이성-사건들은 계열들 간의 차이들을 분포하는 포텐셜 에너지를 갖춤으로, 안정적이지도 불안정적이지도 않은, 준안정적인(métastable) 체계 안에서 조직되는 이질적 계열들에 상응한다. (포텐셜 에너지는 순수사건의 에너지이다.) (125)
둘째로, 특이성들은 자기-통일화(auto-unification)의 과정을 겪는다.
셋째로, 특이성들 또는 포텐셜들은 표면에 붙어 다닌다. (125)
따라서 생물학적으로 “가장 깊은 것, 그것은 피부이다”를 이해해야만 한다. .. 시몽동(Simondon, 1924-1989)은 매우 잘 말하고 있다. “생명체는 그 자신의 극한에서, 즉 그의 극한 위에서 살아간다.(…) 생명에 특징적인 극성은 막(la membrane)의 층위에 존재한다. 생명이 그 본질적인 방식으로 현존하는 것은 이 장소(cet endroit)에서 이다. ... 위상학에서는 거리가 무의미하다. 생명체 내부 공간을 채우는 빌료의 모든 질량은 생명체의 극한 위에서 외부 세계로 활동적으로 드러난다. ... 극화된 막의 층위에서 내부적 과거와 외부적 미래가 만난다.(…)” (126)
126 넷째로, 표면은 의미(sens)의 장소(lieu)라고 말할 수 있다. 기호들은 두 계열 사이의 공명[공가능성]을 가능하게 하는 표면의 조직화 내에 들어가지 못하는 한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126)
다섯째로, 이 의미의 세계가 문제적인(problématique) 것의 지위를 가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127) [개별적 질문이나 그에 상응하는 응답을 갖는 경우가 아니라, 문제적은 잠재적(포텐셜)으로 있는 것이다.]
이미 보았듯이, 이 사실이 ‘문제적인 것’과 그것이 내포하는 비결정성에 {주관적인 추측이 아니라}, 충분히 객관적인 정의를 부여할 수 있게 해준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인도된 특이성들의 본성, 다른 한편으로 그것들의 현존과 방향없는 배분은 객관적으로 구분되는 심급들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127)
개체담론, 인격담론, 바닥없는 담론: 넷째 담론이 있는가? Discours de l'individu, discours de la personne, discours sans fond: y a-t-il un quatrième discours?
[넷째 담론은 전통형이상학의 물체에 대한 개체담론이 아니고, 칸트식 선험철학의 인칭 담론도 아니고, 스토아의 바닥없는 담론도 아니다. 그러면 니체의 담론? ]
127 그래서 진정한 발생의 조건들이 드러난다. 의미는 선험철학의 독자적 발견물이며, 낡은 형이상학적 본질을 대체해 왔다. (의미는 되돌릴 수 없는 중성의 측면에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단절한 경험적 논리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발생적 생산의 측면에서, 형이상학으로부터 단절된 선험철학에 의해 발견되었다) (127-128)
선험적인 것을 시원적인 의식으로서 정의해야 한다는 이러한 요청이, 굳이 말한다면, 정당화되는 것은 사실이다. 인식의 객관적 대상들의 조건들이 인식의 조건들과 같은 것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 따라서 조건 지어진 것의 이중적 계열, 즉 경험적 의식과 그 대상들의 계열은 객관성의 순수한 형태(대상=x)와 의식의 순수한 형태를 취하는, 그리고 후자[순수의식]에서 출발해 전자[순수 대상]를 구성하는 하나의 시원적인 심급 위에 기초해야 한다. (128)
그러나 이런 요청은 전혀 합법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 형이상학과 선험철학은 규정 가능한 특이성들을 단지 이미 지고의 자아(Moi suprême)나 상위의 나(Je supérieur)에게 사로잡힌 것으로만 생각한다고 할 수 있다. (129)
[한 축으로] 형이상학이 지고의 자아를 .. 어떤 온존재(Etre)로 특성화하는 자아로 규정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다. .. 왜냐하면 이 온존재는 필연적으로 개별화된다. 왜냐하면 이 온존재는 그 어떤 실재적인 것도 결코 표현하지 않을 모든 술어나 속성을 비존재나 바닥-없음의 심연으로 던져버리며, 제한된 실재들만을 표현하는 파생된 술어들을 수용하려는 노력을 그 피조물들에, 즉 유일한 개체들에 위임하기 때문이다. (129)
다른 한 축으로 선험철학은 .. 인칭(Personne, 인격, 선험적 주체)의 유한한 종합적 형식을 선택했다. 그러나 우리는 둘 중의 어느 경우이든, 분화되지 않은 토대 없음과 사로잡힌 특이성이라는 대안적 구조에 머물게 된다. (129)
슈티르너(Max Stirner, 본명 Johann Kaspar Schmidt 1806-1856)의 말처럼 인간적과 신적이란 것은 동일한 두 술어(prédicats)이다. (130)
언제나 예외적인 계기들이 있어왔다. 그 계기들에서 철학은 토대 없음(Sans fond)을 말하게 했고, 그것의[토대 없음] 분노(courroux), 무정형(informité), 맹목성(aveuglement)의 신비한 언어를 발견했다. 뵈메(Jacob Böhme 1575-1624), 셀링(Friedrich Wilhelm Joseph von Schelling, 1775-1854),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는 이들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쇼펜하우어의 제자이다. (130)
비극의 탄생(Die Geburt der Tragödie, 1872)에서 그가 토대없는 디오니소스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그는 아폴론의 신성한 개별화만이 아니라 소크라테스의 인간적인 인격에도 대비시킬 때가 그렇다. 이것이 “누가 철학에서 말하는가?” 또는 철학적 담론의 ‘주체’는 누구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이다. (130)
니체의 발견 역시 다른 이유로 그러하다. 그가 쇼펜하우어와 바그너로부터 벗어나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특이성들의 세계, 그가 이제 디오니소스적이라든가 또는 능력[권능]에의 의지라든가, 자유롭고 고삐 풀린 에네르기라고 부른 세계를 탐구할 때가 그렇다. (130)
이 새로운 담론은 더 이상 형상(forme)의 담론이 아니며, 그렇다고 무형(informe)의 담론도 아니며, 그것은 오히려 순수 무정형(l'informel pur)이다. “당신은 하나의 괴물이자 하나의 혼돈(chao)이다.” .. 니체가 대답하기를 “우리는 이 예언을 실현했다.” 이 새로운 담론의 주체는 - 더 이상 주체란 없으며 - 인간 즉 신이 아니며, 신의 자리에 대신한 인간도 나이다. 그것은[새로운 담론의 주체는] 자유롭고, 익명적이며 노마드적 특이성이다. .. 초인은 다른 것을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다만 존재하는 모든 것보다 우월한 전형을 말할 뿐이다. (131)
131 그 자신의 독창적 발견물에서 니체는 마치 꿈속에서처럼 대지를 짓누를 수단, 대지를 스쳐지나갈 수단, 춤출 수단, 그리고 바닥의 괴물들과 하늘의 형상들로 남았을 것을 표면으로 가져올 수단을 힐끗 보았다.(131)
왜냐하면 병(maladie)과 죽음(mort)은 이중 인과를 따르는 한에서 사건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중인과란 물체들, 사물의 상태들[사태], 혼합물들의 인과, 그리고 비물체적 표면의 조직화나 탈조직화의 상태를 나타내는 준원인의 인과를 말한다. (131) [이 예시적 인물은 니체이다. 그런데 인간에게 병(죽음: 삶) 비정상(분열: 정상)은 벩송의 견해대로(MR 1장) 저항의 노력에 대해 대항으로 드러나는 예외적 현상이다.]
우리는 작품(oeuvre)과 병(maladie)의 연관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이중인과의 형태 아래서와 다른 방식으로 보지 않는다. (132) [불교의 고(苦)로부터 해탈은 이중인과(신체와 영혼)에서 벗어남이 아닐까?]
(41OMD) (정리, 8:23, 56MLC) (10:34, 56MLE) (11:18, 56MLH)
*
150 클레멘스(Clément d’Alexandrie, Κλήμης ὁ Ἀλεξανδρεύς, 150경-215), 아테네 태생, 그리스 기독교인, 호교론자. Stromates : livres I-V.
1266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 1266-1308), 스코틀랜드의 스콜라 철학자. 프란체스코파. 주요작품: 'Opus oxoniense'와 'Opus parisiense' 2부로 구성된 명제집 주석서가 있다.
1575 뵈메(Jacob Böhme 1575-1624), 독일신비주의자, 구두 직공, 독일어로 첫째 철학저술.
1596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 프랑스 철학자. Meditationes de prima philosophia (Méditations métaphysiques) 1641(avec six séries d'Objections).
1646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 독일의 철학자, 수학자. 논리학자, 외교관, 사서관. 그는 라틴어(~40%), 프랑스어(~30%), 독일어(~15%) 등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였다.
1724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계몽기 독일 철학자. 독일 관념철학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순수이성비판
1775 셀링(Friedrich Wilhelm Joseph von Schelling, 1775-1854),
1762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1814) 독일 철학자. 후기 칸트학파. 《종교와 이신론(理神論)에 관한 아포리즘》(1790)
1770 횔덜린(Friedrich Hölderlin, 1770-1843) 독일의 시인. 튀빙엔 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였다.
1778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
1783 스탕달(Stendhal, 1783-1842, Marie-Henri Beyle) 프랑스 소설가. 소설 ≪적과 흑≫, ≪파르므의 승원≫으로 특히 잘 알려졌다.
1802 위고(Victor-Marie Hugo, 1802-1885), 그의 아버지는 프랑마송, 프랑스 시인, 소설가, 극작가. 가톨릭 교회는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과 《레미제라블》등의 걸작들을 금서였다고 한다.
1806 슈티르너(Max Stirner, 본명 Johann Kaspar Schmidt 1806-1856) 젊은 헤겔주의자, 실존주의와 개인적 아나키즘의 선구자. 유일자와 유일자의 특성(L'Unique et sa propriété, 1844)
1813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 독일 작곡가. 니벨룽겐의 반지(L'Anneau du Nibelung (Der Ring des Nibelungen).
1828 톨스토이(Leo Tolstoy, 1828-1910) 러시아 소설가, 시인, 개혁가, 사상가. 《전쟁과 평화》(1869년), 《안나 카레니나》(1877년)
1844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 비극의 탄생(Die Geburt der Tragödie aus dem Geiste der Musik. 1872)
1859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 독일 철학자. 논리연구(Logische Untersuchungen: Recherches logiques, 1900-1901), 이덴(Ideen 1913)
1871 스테판 크레인(Stephen Crane, 1871-1900), 미국 작가, 시인, 기자. 붉은 무공 훈장(The Red Badge of Courage, 1895)
1897 귀르비치(Georges Gurvitch, 1897-1965) 러시아 유대계 출신 프랑스 사회학자, 1928년 프랑스 국적. 이론 도덕론과 풍습(Morale théorique et science des mœurs, 1948 .
1896 베르제르(Gaston Berger, 1896-1960) 프랑스 철학자, 고급공무원. 후설철학에서 코기토(Le Cogito dans la philosophie de Husserl, 1941), 인식 조건들에 관한 탐구(Recherches sur les conditions de la connaissance, 1941)
1905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 프랑스 철학자. 상상작용(L'Imagination, 1936), 자아의 초월(La Transcendance de l'Ego, 1936)
1905 핑크(Eugen Fink, 1905-1975), 독일철학자, 현상학자. 세계기호로서 놀이(Spiel als Weltsymbol, 1960.
1908 로트망(Albert Lautman, 1908-1944) 루마니아 유대계, 프랑스 철학자, 수학자, 레지스탕스. 시간 문제(Le problème du temps, 작성 1943)(1946출판)
1913 리쾨르(Paul Ricoeur, 1913-2005), 프랑스 철학자, 후설의 이덴(Ideen I d'Edmund Husserl) 번역.
1919 페를랭게티(Lawrence Ferlinghetti(1919-) 아메리카 시인, 프랑스에서 자라고 파리에서 박사학위.
1924 시몽동(Gilbert Simondon, 1924-1989) 프랑스 철학자, 정보이론과 기술철학 전문가. 개체와 개체의 심리-생물학적 발생(L'individu et sa genèse physico-biologique, 1964)
(56MKI) (12:34, 56MM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