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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한국과 일본의 차문화는 다르다. 그러나 초기의 차문화는 비슷한 전개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오늘날의 차문화 역시 비슷하게 전개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쩌면 지리적으로 근접한 거리에 있고, 역사적으로도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밀접한 관계에 있는 양국의 ‘문화’라는 측면에서 살펴보자면 의외로 ‘비슷하다’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과 일본의 차문화는 ‘다르다’는 인식이 한 층 강세인 듯하다. 연구자 역시 줄곧 양국의 차문화를 접하면서 ‘다르다’는 인식에 사로잡혀 있어왔다. 이러한 인식은 16세기를 전후로 하는 양국의 차문화의 현실에서 발생하였다. 좀 더 넓게 기간을 잡아보자며 14세기 후반, 조선의 건국을 기점으로 거슬러 갈 수 있다.
한국의 입장에서 살펴보자면, 이 무렵 차문화는 침체기로 들어섰으며, 이는 이후 일제식민지하와 6.25 등의 암울한 민족의 역사와 함께 계속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물론 19세기 초의선사에 의해 차문화의 중흥을 이루기도 하지만,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였고, 1970년대 이후에서야 차문화의 발전을 살펴볼 수 있다.
일본의 경우, 14세기는 가마쿠라 막부가 들어서면서 새로운 문화와 종교의 요구로 차문화와 선종이 급속도로 발전하던 시기였다. 일본의 차문화는 차공급량의 증가와 함께 대중화를 이루었고,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와비차’라고 하는 일본차만의 독특한 문화를 완성시켰다. 이무렵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시기이다. 조선으로 보자면 큰 전란으로 인해 차문화의 흔적은 더욱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쇠멸했지만, 임진왜란이 도자기 전쟁이라고 불릴 정도로 일본의 경우는 차문화의 최고 융성기였다.
이러한 상반된 역사적 배경으로 일본의 ‘와비차’와 조선의 차문화는 극명하게 다른 양상을 보여왔고 ‘다르다’라는 인식이 주를 이루고 있다. 본 발제문에서는 이러한 양국의 차문화의 차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 속에서 살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일본의 독특한 문화인 와비차가 일본의 정신과 어떻게 연결되며 생활문화로 정착되는지도 함께 고려해 보고자 한다.
1. 일본의 차문화, 와비차와 和
<와비차의 의미와 형성과정>
일본다도는 일본문화 중에서도 특수성과 대표성, 그리고 보편성을 확보하고 있다. 일본다도를 일컫는 용어로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가장 많이 사용되며 그 성격을 잘 나타내는 것이(侘び茶)이다. 1) 일본다도를 지칭하는 용어로 ‘와비차’ 이외에도 소박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다도라 하여 ‘草庵茶’라고 부르기도 하고, 마시는 음료를 기준으로 ‘차노유(茶の湯)’라 이름하기도 하며, 취향, 기호적인 측면으로 ‘차스키(茶数寄)’, ‘와비스키(佗び数寄)’라고 부르기도 한다. 과거에는 차노유, 차스키 등의 용어가 많이 사용되었고 현대에는 다도, 와비차, 초암차 등으로 많이 불린다.
와비차는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배경 속에서 발전하였으며, 전통문화이자 생활문화로 자리매김하였다. 정치적으로는 무사정권의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되었으며, 사회적으로는 사카이(界)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부를 축적한 상인(町人)들의 문화로, 그리고 선종의 영향을 받은 당시 예능의 한 분야로 자리매김하면서 형성된 것이 와비차라고 할 수 있다.
와비(侘, 侘び)란 다도의 근본이념이자 미의식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이는 비단 차문화 뿐만 아니라 다른 예능 분야에서도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다도에 사용되기 이전의 와비의 의미는 ‘외롭다’, ‘쓸쓸하다’, ‘초라하다’ 등의 부정적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였다. 그러나 차문화에 사용되면서 ‘와비’라는 용어는 그 뜻의 대변혁을 가져왔다. 외롭고, 쓸쓸하고, 초라하지만 ‘외롭게 느끼지 않고’, ‘쓸쓸하게 느끼지 않고’, ‘초라하게 느끼지 않는’ 의식의 세계로 그 의미가 변화된 것이다. 부족하지만 부족한 그대로 완벽함을 아는 것, 소박하지만 소박함의 진정한 가치를 아는 것, 불완전하지만 그 자체로 완전하게 바라보는 안목을 의미하는 것이 바로 와비의 뜻이다. 와비의 의미는 다도에서 비롯되어 도자기, 꽃꽂이, 요리 등의 여타 일본문화 속으로 침투되어 갔다.
일본의 차문화가 ‘와비차’라고 하는 독특한 문화를 형성한데에는 불교의 여러 宗派 중에서도 특히 禪宗의 영향이 컸다. 선종과 더불어 와비차라고 하는 독특한 일본의 전통문화가 만들어졌고, 그렇게 형성된 와비차에는 의식주 등과 관련된 각종 생활양식을 비롯해 정신적 가치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담겨져 있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와비차를 일컬어 종합예술이라고 하며, 전통문화 가운데서도 가장 생활과 밀접한 문화이다.
일본의 茶와 禪에 있어서 에이사이(榮西, 1141-1215)선사는 중요한 인물이다. 차는 遣唐使에 의해서 전래되었으나, 견당사 제도가 폐지되면서 문물의 유입 역시 단절되었다. 이후 12세기 말 가마쿠라(鎌倉, 1192-1333)막부 시대에 에이사이가 入宋 후 귀국하면서 차문화를 전하였다. 에이사이는 두차례에 걸쳐 宋에 다녀왔는데, 2차 입송 때 臨濟宗 黃龍派의 법맥을 계승하였고, 귀국하면서 차종자와 보리수를 가져왔다. 또한 1차 입송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喫茶養生記』를 저술하여 유포시키기도 했는데, 이를 계기로 차문화의 확산이 이루어졌다. 선사는 귀국 후 壽福寺 및 建仁寺를 창건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며 임제종을 하나의 독립된 종파로 형성시켰다. 에이사이가 귀국할 당시는 정치적으로는 가마쿠라 초기의 무사정권이 개막되던 불안정한 시기였으며, 종교적으로도 기존 불교계의 부패 등으로 새로운 사상이 요구되던 시기였다. 이러한 때 에이사이가 도입한 차와 선종은 武士계급의 비호를 받으면서 급속하게 성장해 갔다.
무로마치(室町, 1336-1573)막부 이후, 차의 생산량이 증가되고 약용에서 기호음료로 변화되면서 ‘鬪茶’라고 하는 새로운 형식의 문화로 정착되기에 이른다. 투차는 당시 하극상 시대를 배경으로 신분이 급격히 상승하거나 부를 축적한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한 일종의 투기성 놀이문화로, 상당한 高價의 唐物이 상품으로 배정되는 등 사치와 화려함의 극을 이루었다. 투차와 더불어 성행한 귀족들의 차문화를 書院茶라고 한다. 서원차는 서원 양식의 저택에서 즐기는 유희풍의 차문화로, 서원은 원래 책을 보관하고 공부하기 위한 공간이었지만, 이 무렵에는 고가의 미술품 등을 장식하고 회의나 화려한 연회 등을 즐기던 사교 모임 공간으로 변모되었다. 사교 모임을 위해 당물 중심의 화려한 다도구 등을 갖추어 놓고 차를 즐긴 것이었다.
이 무렵 등장하는 인물이 와비차의 始祖로 불리는 무라타 슈코(村田珠光, 1423-1502)이다. 그는 11세 무렵 奈良 稱名寺에서 출가하였으나, 지나치게 차에 몰두하여 쫓겨났다고 한다. 이때 슈코가 매료된 차문화는 투차였다. 투차놀이에 빠져 지내던 슈코는 잇큐(一休, 1394-1481)선사와의 만남으로 일생의 대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슈코는 잇큐의 문하에서 수행하면서 “불법도 차노유(茶湯) 안에 있다” 2) 『南方錄』, p.52.
고 하며 차문화에 선 정신을 도입하게 된다. 슈코는 “마음의 스승이 되어라, 마음을 스승으로 삼지 말라” 3) 林屋辰三郞 編注, 『日本の茶書』1, 平凡社, 1988, 447. 고 하며 차를 통한 심신 수련을 강조하였고, 차를 행할 때의 마음으로 ‘히에카루루(冷え枯るる)’ 할 것을 주장했다.
‘히에카루루’란 냉정하고 군더더기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연희풍의 차를 즐기던 정서에서 차분하고 간소한 마음가짐으로 한층 와비의 의미에 다가섰다고 할 수 있다. 슈코는 서원풍의 저택에서 즐기던 차를 다다미 네장 반 넓이의 초암풍의 다실을 만들어 차를 마셨고, 다실에는 화려한 장식품을 배제시키고 대신 선승의 墨跡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그가 가장 중시한 것이 잇큐로부터 인가의 증표로 받은 원오의 묵적이었다고 한다. 4) 『山上宗二記』, p.52.
무라타 슈코 이후 다케노 조오(武野紹鷗 1502-1555)에 의해 와비차는 한층 더 발전하였다. 조오는 슈코가 남긴 ‘히에카루루’라는 말에 집약된 와비차의 의미를 눈에 보이는 행위나 구체적인 형태로 만들어 더욱 와비스러움이 드러나게 했다. 조오는 侘びの文에서 와비를 “가깝게는 정직하고 조심스럽게 여기며 자만하지 않는 모습” 5) 戶田勝久, 『武野紹鷗』, 中央公論美術出版. 2006, p.154. 이라고 정의했다.
앞서 언급한 ‘초라하고 쓸쓸하며 무언가 부족한’이라고 정의되던 와비의 부정적 느낌이 슈코를 거쳐 조오에 이르면 이미 사라지고, ‘꾸밈없고 겸손하며 소박한’ 모습을 뜻하는 것으로 인식의 전환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오 역시 한 때 출가생활을 하였다가 환속하기도 했으며, 또한 ‘知量茶味與禪味’라고 한 것 등을 유추해 볼 때 그의 와비차에도 역시나 선이 바탕하고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오에 의해 한층 중흥의 길을 연 와비차는 제자 센 리큐(千利休, 1522-1591)에 의해 완성되었다. 슈코와 조오가 다소 은둔적 생활을 하며 와비차를 구현했다면, 리큐는 보다 적극적이며 왕성한 사회활동으로 와비차의 대중화를 이끌었다. 리큐는 내란으로 100여 년간의 대혼란의 시기인 전국시대를 무력으로 제패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434-1582)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의 茶頭(茶匠)의 역할을 하면서 차와 관련된 모든 일을 총괄했다. 리큐가 은둔적 성향을 보이던 슈코, 조오와 달리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통해서 전하고자 했던 와비의 참뜻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리큐는 “와비의 본뜻은 청정무구한 불세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중략) 이것은 곧 불심을 여실히 드러내는 바이다.” 6) 『南方錄』, p.264.
라고 정의하고 있다.
부정적 의미가 강했던 와비는 슈코, 조오를 거치면서 소박하고 자연적이며 은둔적인 의미로 바뀌었는데, 리큐에 의해 깨달음의 선세계이자 佛心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으로 또 한번의 대변혁을 이루었다. 슈코나 조오의 와비차의 근저에도 선이 자리하고 있지만, 와비의 의미 자체에 선사상을 주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리큐는 와비차가 곧 禪의 영역이자 그대로 禪임을 분명하게 천명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리큐의 와비차에는 불심을 여실히 드러내기 위한, 불심이 드러난 세계가 형성되었으며, 이는 곧 와비차의 완성을 의미했다.
<정치적․사회적 측면>
와비차는 무로마치(室町, 1336-1573)시대에서 아즈치모모야마(安土桃山 1573-1600)시대에 걸쳐 꽃피운 차문화이다. 무로마치 막부가 들어서고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장군의 후계자 문제로 1467년 발생한 오닌의 난(応仁の亂)을 계기로, 일본은 100여년간 내란에 휩싸이게 되는데, 이 시기를 戰國시대라고 한다. 전국시대는 오다 노부나가의 전국제패가 달성될 무렵 서서히 막을 내리는 듯하지만, 노부나가가 암살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뒤를 이어 중앙집권화를 이루는 일정기간 동안 계속 이어졌다.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30여 년 동안의 집권기를 아즈치․모모야마(安土桃山 1573-1600)시대라고 한다. 무로마치 시대 중후반에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이르는 이 시기는 극심한 혼란기였지만 반면 문화적으로는 대단히 융성하였다. 이른바 전란 속에서 실익을 추구하며 ‘하극상’이 팽배한 대혼란의 시대였지만, 오히려 일본 고유의 문화가 꽃피우게 된다. 중앙통제가 불가능해지고 무질서가 난무했던 당시의 분위기는 한편으론 새로운 질서와 가치, 평화를 갈구하는 자유의 시대이기도 했던 것이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수도인 쿄토와 사카이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와비차는 특히 사카이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사카이는 일본 최대의 무역 자치도시로 무기, 특히 유럽에서 수입된 조총을 취급하는 주요 상인들이 모인 곳이었다. 경제적 부를 바탕으로 자유도시였던 사카이는 상인들을 중심으로 예술문화를 항유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었다. 조오나 리큐 역시 사카이의 상인출신이었다. 노부나가는 권력의 정점에 오르자 사카이의 상인들에게 정치적 자유를 보장해 주는 조건으로 군사비를 부담시켰다.
노부나가는 개인적 취향으로 다도를 즐기는 한편, 전쟁에 공훈을 세운 무사들에게 자신이 사용한 차도구를 하사하는 등 무사들을 장악하고 중앙집권화를 이루는데 활용했다. 당시 최고 권력자인 노부나가가 소장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차도구의 가치는 치솟았다. 노부나가는 차도구를 財貨로 인식하여 적극적으로 수집하였는데, 권력을 바탕으로 강제매수하거나 혹은 자진해서 진상하도록 유도하는 방법 등을 사용하였다. 이른바 名物사냥이라고 불린다.
노부나가가 전국을 평정하기 위한 전투를 계속하던 중, 1582년 6월 2일 本能寺에서 배신한 부하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에 의해 죽음을 당하는 사건(本能寺의 변)이 발생하고, 이 소식을 들은 히데요시는 전투 중이었으나 노부나가의 복수를 위해 군대를 돌려 미쓰히데를 격파했다. 이후 히데요시는 여러 전투에서 승승장구 하며 세력을 확장하였고, 10월 15일 大德寺에서 진행된 노부나가의 장례식을 주관하며 자신이 노부나가의 후계자임을 선언했다. 7) 박전열, 「도요토미 히데요시 다도의 정치적 요소」, 『日本思想』제19호, 한국일본사상사학회, 2010, p.9.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3남 노부타카의 부하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차노유(茶の湯)는 곧 정치의 道(御茶湯御政道)라고 표현하며 노부나가가 자신에게 차를 하도록 허락한 것은 곧 정치를 하도록 허락한 것임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8) 熊倉功夫 외, 『資料による茶の湯の歷史』上, 主婦友社, 1994, pp.329-330.
히데요시 역시 무사들을 장악하는 수단으로 차를 이용했다.
히데요시 역시 리큐를 자신의 茶頭(茶匠)로 고용하여 차와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도록 했다. 히데요시는 개인적으로도 차에 심취해 다도구를 수집하고 측근들을 중심으로 茶會를 열고 취미로 즐기기도 했지만, 그보다 정치 수단으로 이용하며 다도구를 활용해 무사들의 충성과 신뢰를 표명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關白 就任에 대해 감사하는 禁裏茶會, 실질적으로 전국통일을 이룬 후 기념한 北野大茶會 등 대규모의 다회를 개최해 자신의 위상과 권력을 과시하려는 측면이 강했다.
이렇듯 히데요시가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며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는 도구로 茶를 이용하면서 그의 차는 점점 더 화려함을 추구했고 극도의 사치로 치달았다. 그럴수록 리큐가 추구하는 禪風의 초암차와 현격한 차이를 보였으며 리큐와의 관계는 어긋날 수밖에 없었다. 히데요시는 막강한 경제력으로 황금으로 된 조립식 茶室을 만들어 궁궐을 비롯해 各地를 이동하며 황금다실에서 茶會를 즐긴 반면, 리큐는 草庵風의 다실을 점점 더 간소화하여 다다미 2장의 작은 공간에서 자신의 차의 세계를 펼쳐 갔다. 평화를 추구하고 구현하고자 한 와비차는 아이러니하게도 전쟁과 폭력이 난무했던 시기에 성행하였고, 무력과 전쟁을 업으로 하는 무사들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하였으며, 대표적 무사문화로 대두되었다.
<사상․문화적 측면>
와비차를 비롯한 일본 전통문화예술을 일컬어 藝能이라고 하며, 예능의 수행적 측면을 강조하여 藝道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茶道(와비차), 香道, 노(能), 꽃꽂이(花道), 서예(書道), 와카(和歌) 등의 문화예술 영역을 포함한다. 예능으로 분류되는 데에는 변신, 행위, 장식, 정신의 4요소가 갖추어져야 하는데, 와비차의 경우, 일상적 생활공간이 아닌 비일상적 공간의 설정 및 생활도구와 차별화되는 차도구, 그리고 차와 관련한 행위들은 예능의 3요소(변신, 행위, 장식)를 충족시키고 있다. 마지막으로 정신의 요소를 갖춤으로 와비차는 일본 전통문화인 예능으로 분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와비차가 예능화되는 과정은 곧 와비차의 완성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슈코로 부터 태동된 와비차가 리큐에 의해 사상적으로 완비됨으로써 와비차는 예능 혹은 예도화된 것이다.
리큐가 완성시킨 와비차의 정신은 禪사상이다. 리큐는 오랜 기간 임제종 大德寺에서 수행을 하며 “작은 茶室에서의 茶湯은 佛法의 修行得道가 第一의 목적” 9) 『南方錄』, p.3. 이라고 하며 와비차의 목적과 방향을 분명히 제시하였고, “그 법식들을 출발 단계로 해서, 지금보다 좀 더 높은 깨달음에 이르고자 뜻을 두고 大德寺, 南宗寺 등의 화상들에게 열심히 배우고 아침저녁으로 禪林의 淸規를 바탕으로 정진하였다. 10) 『南方錄』, p.265. ”고 자신의 수행을 소회했다.
와비차는 그렇게 형태를 갖추었다. 대덕사는 특히나 문화예술인들이 많이 모였던 선종사찰로 리큐를 비롯한 많은 예능을 향유하고자 했던 이들은 대덕사의 선사들 문하에서 참선을 하는가 하면, 일정기간 출가를 하기도 했다.
리큐는 스승인 쇼레이 화상으로부터 자신이 고안한 여러 가지 차와 관련한 작법들이 수행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훌륭하지만 그 역시 한 변에 떨어진 것임을 지적받고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11) 『南方錄』, p.347
자신이 혼신의 노력으로 고안하여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규칙-차를 타는 행위, 차도구의 모양, 차도구를 놓는 위치, 손님의 次第, 물과 불의 사용법 등-은 곧 수행이라는 이름의 相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규칙들은 고정불변하는 것이 아니고, 고정불변의 틀이 되어서도 안되며, 오직 이 ‘한 마음에 상응하여 작용’해야 진정한 차가 되는 것임을 깨달았다. 12) 『南方錄』, p.347.
여기에서의 마음은 일체유심조의 마음이며, 일체만물의 自性이자, 마조가 무조작․무시비․무취사․무범성 등으로 다만 오염만 되지 않으면 平常心이 道라고 한 바로 그 마음이다. ‘한 마음에 상응하여 작용한다’는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의 마음 작용을 의미한다. 지금 이 순간에 계합(卽)하여 일어나는 그 마음에는 시비, 분별, 조작, 취사, 단상 등의 오염이 침범할 틈이 없다. 오직 處處에서 마음에 상응한 작용의 茶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 순간의 차는 곧 무분별의 차, 무조작의 차, 무범성의 차가 되며, 禪茶錄에서 리큐의 차를 평한 것처럼 13) “無賓主의 차노유” 『禪茶錄』, p.308. 가 되는 것이다.
이로써 리큐가 와비를 가리켜 ‘깨달음의 불세계를 나타내고 불심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한 의미는 성립된다.
선은 일체 만물에 대한 절대적 평등의 입장에 있다. 일체 만물은 不二적 관계로 존재하며 그 각각의 본성은 한 마음(一心)으로 동등하기 때문이다. 일심과 일미는 다르지 않다. 일심으로 평등하기 때문에 일미, 즉 다선일미가 성립된다. 와비차의 모든 구성요소들, 손님, 주인, 각각의 도구들은 일심의 본질세계이자 일심의 형상물이다. 그렇기에 작은 찻잔에조차 최고의 존경을 표할 수 있다. 리큐는 “차노유(茶湯)라는 명칭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茶와 湯의 相應이 가장 중요하다. (중략) 茶湯이라고 말하는 명칭이 깊고 깊은 도리를 담고 있음을 알아야만 한다.” 14) 『南方錄』, pp.269-27. 고 했다.
리큐가 말하고자 하는 차와 탕의 상응의 도리란 차와 탕의 不二적 관계 속에서 한 마음에 상응하여 작용한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응의 관계는 차와 탕이 각각의 본질이 일심으로 평등한 것이며, 주체와 객체라는 二分적 경계를 초월하여 경계가 허물어진 和이며, 진정한 평화를 의미한다.
당시는 오랜 전란으로 인해 무사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모든 이들이 극도의 긴장감과 피로감에 휩싸여 서로에 대한 不信이 만연했던 시대였다. 리큐는 그러한 인간 내면에 와비차를 통해 진정한 평화의 뜻을 심어주고자 하였다. 선을 바탕으로 완성된 와비의 정신은 그대로 변신과 행위, 장식의 요소로 다시 연결되며 평등, 평화정신이 투영된다.
와비차의 구성요소라고 할 수 있는 草庵이라는 다실, 露地정원, 다실로 들어가는 문인 니지리구치(躙口), 다실내의 장식물 등의 유형적 요소뿐만이 아니라 주인과 손님의 관계, 손님과 손님의 관계, 사람과 도구의 관계는 평등과 평화, 和의 정신이 유형, 무형의 선문화로 창조되었다.
15) 리큐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하에서 신분의 타파, 일체 존재의 평등한 관계 구현을 와비차라는 문화적 접근을 통해 이루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리큐가 고안한 초암, 로지정원이라는 공간은 비일상적 공간으로 청정한 佛세계를 나타내는 곳을 의미한다. 그러한 깨달음의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불성을 가지고 있는 평등한 존재가 된다. 그곳에는 신분의 고하는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리큐는 그러한 평등한 관계를 실현시키기 위해 신분이 높은 사람(貴人)과 하급무사(下人)들이 각각 별도로 사용하도록 구분되어 있는 구조물(조즈바치<>쓰쿠바이, 귀인구치<>니지리구치 등)들을 하나로 통일시켜 동일하게 사용하도록 하였고, 다실에 들어갈 때 무사들이 칼을 소지하지 못하도록 설정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다실은 평화의 공간이라는 것을 인지하도록 했다. 이는 당시가 오랜 전란 중이었다는 것과 무사들의 권력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다는 것, 더구나 리큐는 중인인 상인의 신분이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큐는 와비차를 통해 자신의 평등, 평화의 사상을 자연스럽게 관철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와비차와 ‘和’>
와비차에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주요 키워드는 ‘和’이다. ‘和’라고 하는 단어는 조화, 화합을 뜻하는 사전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일본’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는 일식을 ‘和食’, 일본과자를 ‘和菓子’, 일본옷을 ‘和服’, 일본풍을 ‘和風’ 등으로 표현한 용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또한 ‘大和’라고 사용하여 일본 정신을 나타낼 때도 사용되고 있다. 16) 大和魂, 大和心 등은 일본 민족 고유의 정신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이 ‘和’ 정신의 기원은 6세기 聖德태자의 17조 헌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성덕태자는 일본불교를 중흥시키고 관료제를 정착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로, 불교가 일본에 뿌리내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7조 헌법의 제1조는 ‘和를 귀하게 여길 것’, 제2조는 ‘불교를 숭상할 것’으로 명시하고 있다.
17) 604년 성덕태자에 의해 일본에 처음으로 등장한 통치규칙. 근대의 헌법과는 달라서 관료제의 재편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호족들에 대한 정치적 복무규정이나 도덕적 훈계라고 할 성격이 담겨 있다. 儒佛의 사상을 그 기반으로 하고 있다. 제1조는 화를 존중할 것, 제2조는 불교를 숭경할 것, 제3조는 천황에 복종할 것, 제4조는 예법을 기본으로 할 것, 제5조는 소송에 대해서는 공평하게 판결할 것, 제6조는 권선징악을 철저히 할 것, 제7조는 각자의 직장을 잘 지킬 것, 제8조는 일찍 출근하여 늦게 티근할 것, 제9조는 신을 의의 근본으로 삼을 것, 제10조는 화를 버릴 것, 제11조는 관인의 공적과 과실에 의해 상벌을 주재할 것, 제12조는 국사, 국조는 백성으로부터 세금을 부당하게 징수하지 말 것, 제13조는 관리는 관사의 업무를 숙지할 것, 제14조는 타인을 질투하지 말 것, 제15조는 사심을 버릴 것, 제16조는 인민을 사역할 때 시절을 고려할 것, 제17조는 사물을 독단으로 판단하지 말고 의논할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후대의 국법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 (원익선, 「(일본 불교 강의록)일본고대불교의 이해를 돕기 위한 몇 가지 설명」, 『일본불교사공부방』3,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2006, p.73.
성덕태자가 화를 제1조로 내세우며 강조한 것은 당시 불교의 유입을 두고 崇佛派와 排佛派의 오랜 政爭 때문으로, 화합을 중시하여 명기했다고 한다. 불교가 일본에 전래되면서 神道와의 마찰이 있었고 이는 神佛습합의 과정을 거치며 일본의종교로 정착되었다. 이러한 습합사상의 밑바탕에는 성덕태자의 ‘화’의 정신이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和’란 화합을 의미하는 용어이자, 외래문물을 받아들여 일본화시켜가는 원리이며, 그 자체로 일본, 일본의 정신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화’라고 하는 용어는 와비차의 태동을 알리는 무라타 수코의 「心の文」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 글은 최초의 다도론 18) 筒井紘一, 『茶書の硏究』, 淡交社, p.339. 으로 여겨지며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제자에게 전하는 글인 「心の文」은 대체적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내용으로 적고 있지만, 그 가운데 차도구와 관련한 내용으로 ‘和와 漢의 경계를 허물어 조화롭게 사용하라(此道の一大事ハ、和漢之さかいをまぎらかす事、肝要肝要、ようじんあるべき也。)’고 가르치고 있다. 이는 당시 귀족풍의 화려한 서원차에서 중국의 차도구(唐物)만을 귀한 것으로 여기던 것을 경계한 것으로, 중국(漢)의 차도구와 일본(和)의 차도구를 잘 조화시켜 사용해야 올바른 와비차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외적인 것을 중요시한 것에서 내적인 마음의 수양을 중시한 것에서도 와비차의 시작을 의미하지만, 또한 중국풍의 차도구와 일본의 차도구의 조화로 일본의 독특한 차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독창적 일본 차문화, 와비차가 탄생되었다고 평가된다. 슈코의 글을 통해서도 和는 일본을 지칭하는 용어이자, 조화(和)를 통한 차문화의 일본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슈코가 和와 漢의 차도구의 조화를 강조하면서 차의 일본화를 알렸다면, 리큐는 와비차에 화의 마음, 화의 정신을 심어놓으며, 화의 사상적 깊이를 더했다. 리큐의 화는 和合, 調和의 和이자 일체 만물의 평등에 입각한 一心의 和’를 의미하는 것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리큐의 화의 마음은 일본의 차정신인 茶禪一味, 和敬淸寂의 차정신으로 연결된다. 와비차는 일본의 차문화이다. 와비차가 완성되어가는 과정은 곧 일본이 중국의 문화, 조선의 문화, 선종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일본화시켜가는 과정이다. 여기에 ‘화’의 마음, ‘화’의 정신이 작용하고 있다.
‘화’의 마음이 일상생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살펴보면 ‘배려’의 문화를 들 수 있다. 배려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화’를 실천하기 위한 덕목이 된다. 비단 와비차 뿐만이 아니라 모든 차문화는 주객의 만남 속에서 이루어진다. 만남이라는 것은 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의미하고 조화, 화합의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과 행동의 실천이 필요하며, 와비차에는 배려를 실천할 수 있는 요소요소들이 구체적 행위로 담겨있다. 이러한 와비차가 오랜 역사적 전통을 가진 대중문화로 자리잡은 것은 곧 화의 마음과 그에 따른 행동양식이 일본인들의 생활 속에 은연중에 자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3. 한국의 차문화 전개와 草衣
한국의 차문화가 유입된 것은 사료에 의한 기록으로는 7세기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興德王 3년(828) 唐에 사신으로 갔던 大廉이 귀국길에 차종자를 가져왔는데 왕명으로 지리산에 심었다는 내용과 더불어 차가 이미 7세기 善德女王(재위 632-646)때부터 있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성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7세기 선덕여왕 재위시에 이미 차가 유입되어 있었고 이는 9세기에 이르러서는 왕명으로 차밭을 만들 정도로 차문화에 대한 인식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역사에 있어서 차문화의 융성기는 고려시대이다. 삼국의 차문화는 그대로 고려로 이어져 더욱 발전하였다. 각종 국가 행사의 일환으로 차 의례가 시행되는가 하면 차와 관련한 일들이 제도적으로도 완비되기에 이른다. 왕실에서는 왕의 하사품으로 사용되었고, 각종 왕실 의례에 사용되었는데 吉禮, 嘉禮, 賓禮, 凶禮 등의 의식을 행할 때, 進茶儀式으로 시작하였다. 19) 진다란 술과 과일을 임금께 올리기 전에 임금이 먼저 차를 청하면 신하가 차를 올리는 것으로 宮中儀式茶라고 할 수 있다.
또한 燃燈會와 八關會 등의 국가적 불교 행사에도 차가 등장하였다. 왕실과 관련된 차 전담하는 곳으로 茶房이라는 관청을 두기도 했다. 다방에는 茶軍士라고 하여 다구와 짐을 나르는 군인이 별도로 있어 왕이 행찰 할 때에 함께 수행하였다.
불교와 차는 서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역사 속에서 함께 등장하고 있다. 고려는 불교국가로 불교가 성할수록 차문화 역시 흥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고려시대 승려들을 중심으로 茗戰이라고 하여 일본의 투차와 비슷한 차와 샘물을 품평하는 문화가 있었으며, 茶村이라는 사찰주변의 차농사 지역이 있어 승려들의 차생활을 더욱 풍요롭게 했다. 고려 중기 이후가 되면 문인들과 학자들이 차와 시로 교유하며 차문화를 발전시켰고, 백성들의 제사의식에도 사용되는가 하면, 茶店을 통해 손쉽게 차를 마시거나 구매할 수 있을 정도로 보편화되었다.
그러나 갈수록 차의 고급화를 추구하고 사치 풍조가 만연해지면서, 그러한 폐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의 몫으로 돌아왔다. 이규보는 과도한 차의 고급화와 사치 풍조를 비판하여 백성들의 고혈을 짜낸다고 비판하며 ‘일천 가지를 망가뜨려 한 모금의 차를 마련한다’고 하면서 ‘산과 들을 불살라 稅茶를 내지 않게 된다면 백성들이 편히 쉴 수 있을 것’이라고 노래하기도 했다.
한국 차문화의 역사에 있어서 침체기는 조선시대를 들 수 있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음다 풍속이 어느 정도 이어지기도 했으나, 쇠퇴의 흐름을 거스르지는 못하였다. 왕실행사에 차가 사용되었던 것이 점차 줄어들고, 차 대신 술이 사용되었으며, 茶房, 茶時 등도 존재하기는 했으나 이름만이 존재했을 뿐 실제로 차가 사용되지는 않고 형식적으로만 남게 되었다. 조선후기 초의를 중심으로 중흥기를 맞이하게 되지만, 그 역시 오래가지는 못하였다.
조선시대 차문화가 퇴조한 원인으로 살펴보면 첫째, 排佛崇儒의 정책을 들 수 있다. 조선시대는 유학을 정치 이념으로 하면서 불교를 배척하였고 시기에 따라 그 강도가 달라지기는 했지만 排佛은 전 시기에 걸친 공론이었다. 20) 김용태, 『조선후기 불교사 연구』, 신구문화사, 2010, p.307.
조선왕조의 억불정책으로 수많은 사찰들은 통폐합되었고 승려들은 환속 당했으며 그나마 존속한 사찰과 승려들은 양반관료제 사회에서 온갖 수탈을 겪어야 했다. 21) 韓相吉, 「朝鮮後期 寺刹契 硏究」,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p.19.
한때 普雨(1505-1565)의 노력으로 승과가 부활되고 선교양종의 체제를 재확립하는 등 일시적 중흥을 보였으나, 이내 다시 보우는 유배되고 선교양종은 폐지되는 등 불교탄압은 계속되었다. 주지하다시피 차문화는 곧 불교문화이다. 불교와 차문화는 운명공동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국가주도하에 의도적으로 불교적 색채를 배제시키는 상황에서 차 역시 쇠퇴의 길로 들어서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러나 대중적 생활문화로 자리잡은 차문화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어서 일부 양반들의 개인적 취향으로 이어지기는 했다.
둘째로 언급되는 이유로 과도한 차세금과 차공납이다. 이규보의 시에서도 나타났던 것처럼 차의 고급화가 추구되면서 백성들은 점점 차세금의 압박을 받게 되었다. 또한 병자호란 이후 청으로 보내는 과도한 차공납으로 인해 차는 점점 더 기피대상이 되었다. 또한 실제 차밭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기록에만 의해 차세가 부과되기도 했다. 이는 점필재 김종직이 ‘차를 조정에 올려야 하는데 우리 군에는 생산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해마다 백성들에게 차를 공물로 바치라고 한다. 백성들은 전라도에 가서 차를 사 와서 공물로 바치는데, 쌀 한 말을 가져가면 차 한 홉을 살 수 있다.’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김종직은 그러한 폐단을 알고 군의 돈으로 차를 사서 공물로 바치기도 했고, 차나무를 찾아내어 차밭을 일구도록 하는 등 차세금에 따른 폐단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셋째, 임진왜란 이후 정치적, 경제적으로 피폐한 상황은 백성들을 더욱 궁핍하게 하였고 당연히 차를 마실 수 있는 여건은 조성되지 못했다.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불교를 이단시하고 배척하는 경향이 다소 완화되면서 차문화 역시 서서히 살아나는 경향을 보였다. 배불의 경향이 완화된 것은 중기 이후 조선이 본격적인 성리학 시대로 접어들면서 이미 제반분야에서 성리학의 가치가 불교를 압도하여 더 이상 경계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며, 22) 김용태, 앞의 책, p.312. 또 한편으론 西學(천주교)의 확산으로 공동 대응이라는 의식이 작용한 측면도 있었다. 23) 趙成山, 「19세기 전반 노론계 佛敎認識의 정치적 성격」, 『韓國佛敎學硏究叢書-朝鮮後期 佛敎政策, 佛敎系 動向(2)』145, 불함문화사, 2004, p.83.
즉 집권층의 최고의 경계 대상이 천주교로 바뀌면서 불교에 대해 상대적으로 유연한 태도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외에도 존립을 위한 불교계의 노력으로 유학자들 사이에서 불교에 대해 친화적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을 살필 수 있다.
이러한 시대적 사회적 배경은 초의가 선사로서 茶, 詩, 書, 畵 등의 다양한 활동을 하며 유학자들과 交遊를 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고, 초의는 차문화의 중흥을 이끌 수 있었다. 초의의 文集, 詩集 등에는 洪奭周와 申緯의 서문을 비롯해, 많은 유학자들과 주고받은 詩와 편지가 수록되어 있다.
또한 초의가 정약용에게 詩와 儒書를 배우고, 또 김정희와는 평생의 知己로 함께 하면서 茶와 詩, 그리고 佛敎에 대해 서로 담론했음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초의의 차가 확산되는 데는 추사와 신위의 역할이 컸다. 그들은 자신의 주변 인사들과 초의가 교유할 수 있도록 해 추사의 제자들 및 다산의 자제들, 홍현주와 그 형제들, 신위, 박영보 등 많은 사대부들이 초의차를 애호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만들어 주었다. 24) 박동춘, 『맑은 차 적멸을 깨우네』, 동아시아, 2012, p.292.
당시 이들과의 교류는 茶와 詩를 매개로 이루어졌는데, 초의는 차를 만들어 사대부들에게 전하고 차를 맛본 그들은 시에서 초의 차의 우수함을 칭송하곤 했다. 또한 초의는 홍현주의 부탁으로 한국차의 다경이라고 불리는 東茶頌을 저술하였는데, 이로써 차를 더욱 알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선사는 손수 만든 차를 지인들과 나누며 차를 보급하고 제다법을 정리하였는데, 金命喜가 초의가 직접 만든 차를 받고 “죽순 껍질로 싼 鷹爪茶 손수 열어보았네. (중략) 이 비법 5백년 만에 비로소 헤쳐 내었으니” 25) 「奉和山泉道人謝茶之作庚戌 附原韻」, 『艸衣詩藁』, 『韓佛全』10, p.860b. 라고 언급하고 있음에서 잎차[散茶: 葉茶] 제다법이 초의에 의해 정리되고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초의의 차가 마치 금루옥대처럼 귀하게 대접받은 지도 이미 오래되었다.’는 박영보의 시 구절에 의해 초의 차가 많은 이들에게 名茶로 알려졌음을 엿볼 수 있고, ‘요즘 들어 차가 나는 산지의 사람들이 차를 따다가 끓여 마신다’고 한 신위의 구절에서 차산지에서 조차 흔적을 살필 수 없을 정도로 쇠퇴했던 차문화가 조금씩 확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대부들의 이러한 후원은 초의가 차문화를 중흥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고, 조선후기의 차문화는 차츰 음다층을 형성, 확산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양상은 후대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18,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서서히飮茶 풍습이 되살아나는 듯 했으나 일제강점기로 다시 침체되었고, 일본인들에 의해 차의 생산과 보급 등 우리 차에 관한 연구 진행되었다. 그들은 한국의 차에 대해 연구한 것 역시 식민지배를 위함이었다. 광주 무등無等茶園, 정읍 小川茶園, 보성 寶城茶園 등이 일본인에 의해 조성되었고, 식민교육의 일환으로 1930년대부터 여자고등학교와 여자전문학교에서 茶道 교육이 진행되기도 했다.
1970년대 이후 경제성장과 더불어 茶는 본격적으로 확산 보급되기 시작했으며 또다시 차문화 부흥을 이루게 되었다. 특히 초의선사가 거주했던 一枝庵의 복원은 차문화 발전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초의의 차정신에서 비롯된 ‘中正’을 한국차의 정신으로 규정하였다. 1992년부터는 초의선사를 기념하는 초의문화제가 시행되고 있다.
초의의 차정신은 동다송에서 “採茶 시에는 妙를 다하고, 造茶시에는 精을 다하며, 물은 참된 것(眞水)을 얻고, 泡茶 시에 中을 이루면 體와 神이 서로 조화롭고 健과 靈이 함께 아우른다. 이 경지에 이르면 다도를 이룬 것이다.” 26) 『東茶頌』, 『韓佛全』10, p.876a. 고 한 문구에서 비롯되었다.
이 글귀를 바탕으로 하여 한국의 차정신은 ‘中正’으로 대표되고 있는데, 이는 위 글귀 중 ‘中’에 근거한 것이다.
현재까지 연구된 초의의 차정신은 크게 ‘다선일미’와 ‘중정’으로 정리되고 있다. 다선일미는 초의의 선사상에 내포되 不二의 선관에서 비롯된 것이고, 중정은 초의가 직접 저술한 동다송에 나타난 용어이다. 이 중 ‘중정’의 의미를 불교의 중도와 유교의 관점으로 보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
또한 유교의 중도로 해석하는 한국의 차인들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중정에는 양쪽의 의미를 모두 담고 있다고도 볼 수 있고 그런 여지 또한 충분하다. 그러나 초의의 선과 차를 아우르는 전반적인 사상을 고려해 볼 때, 中正은 不二사상의 다른 이름인 불교의 중도로 보아야 한다. 불이사상이 곧 중도이며, 이는 中으로 표현되었다. 초의가 말한 중은 다도에 이르는 법칙이자 다도의 지극한 경지이고 바라밀이다. 여기에는 ‘다선일미’의 중(中)의 원리와 ‘수처작주’의 정(正)의 실천이 모두 내재되어 있다.
1983년 당시 문화공보부에서는 전통차를 보급계획을 발표하는데, 이는 ‘86 아시안게임 및 88 서울 올림픽’에 대비하여 전통생활과 문화개발 계획의 일환이었다. 국제적 규모의 행사를 기획함에 있어 차문화는 전통문화로서 대표되는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었다. 당시 발표문에는 ‘전통차 및 다도를 개발 보급함으로써, 대내적으로는 국민정신 순화와 주체의식을 고취하고 대외적으로는 우리의 것을 선양하는 데 기여하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차문화의 활성화는 한국의 전통문화를 더욱 풍요롭게 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마음, 한국인의 정서의 순화를 유도할 수 있다. 이는 차의 기능이자 효과이다.
더불어 차문화라는 것은 곧 불교문화, 선문화를 의미한다. 차문화, 차생활의 보급을 통해 불교, 선문화는 한국사회에 더욱 뿌리 깊게 내릴 수 있으며, 더욱 넓게 번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4. 나가는 말
중국에서 전래된 한국과 일본의 차문화는 비슷한 전개를 보이다가, 14세기 무렵을 기점으로 서로 다른 양상을 띄게 되었으며, 16세기에 이르러서는 더욱 극명한 차이를 보이게 된다. 이러한 차이에는 당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배경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리큐(利休)에 의해 완성된 일본의 차문화는 막부의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더욱 성행하였고, 문화적으로도 예능의 한 분야로 자리 잡았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선종의 영향으로 한층 깊이를 더하였다. 일본의 차문화는 평등사상을 바탕으로 한 和의 마음과 배려의 실천적 덕목을 갖추며, 일본의 대표적 전통문화이자 생활문화로 안착되었다.
한국의 경우, 불교와 더불어 차문화가 융성하였으나 조선시대에 들어 점차 침체의 길을 걸었다. 이는 국가의 억불정책으로 불교와 명운을 함께 한 것이 큰 이유겠으나, 이외에도 과도한 차세금과 공납으로 인한 폐해가 컸고, 또한 임진왜란 이후에 더욱 궁핍해진 당시의 생활상으로 인해 차문화는 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에 이른 것이었다. 조선후기 초의선사에 의해 차문화는 일시적으로 중흥의 모습을 띄기도 하는데, 당시 지배계층의 排佛에 대한 인식의 완화라는 시대적 배경으로 유학자들과의 활발한 교유를 통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南方錄』
-『山上宗二記』
-『東茶頌』
-『艸衣詩藁』
- 김용태, 『조선후기 불교사 연구』, 신구문화사, 2010.
- 박동춘, 『맑은 차 적멸을 깨우네』, 동아시아, 2012.
- 熊倉功夫 외, 『資料による茶の湯の歷史』上, 主婦友社, 1994.
- 林屋辰三郞 編注, 『日本の茶書』1, 平凡社, 1988
- 筒井紘一, 『茶書の硏究』, 淡交社.
- 戶田勝久, 『武野紹鷗』, 中央公論美術出版. 2006.
- 박전열, 「도요토미 히데요시 다도의 정치적 요소」, 日本思想제19호, 한국일본사상사학회, 2010
- 원익선, 「(일본 불교 강의록)일본고대불교의 이해를 돕기 위한 몇 가지 설명」, 『일본불교사공부방』3,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2006.
- 韓相吉, 「朝鮮後期 寺刹契 硏究」,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정영희
박사, 동국대 불교대학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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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南方錄』
-『山上宗二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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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艸衣詩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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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熊倉功夫 외, 『資料による茶の湯の歷史』上, 主婦友社,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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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韓相吉, 「朝鮮後期 寺刹契 硏究」,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정영희
박사, 동국대 불교대학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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