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태신앙인데 왜 더 못해!(허송연, 클라라, 아나운서)
저에게 하느님은 제 세상의 전부이십니다.
모태신앙인 저에게 하느님께서는 태어나기 전부터 저의 세상이셨고, 세상에 나온 후에도 제가 만난 세상의 전부이셨습니다. 집 현관을 열면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십자가와 성모상, 그 앞에서 늘 초에 불을 붙이고 기도하시던 보고 싶은 할머니, 하느님께서 주신 탈렌트에 감사하고 봉사하며 살라고 늘 말씀해주시는 부모님 덕분이었습니다.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점으로 떠오르는 추억이 있습니다. 어렸을 적 매주 가던 주일미사, 미사 중에 멋진 보좌신부님을 누구보다 가까이 보려고 미사 시간보다 한 시간 먼저 가서 성전에 좋은 자리를 맡아놓고 성당 마당에서 친구들과 뛰어놀던 제 모습인데, 돌이켜보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납니다.
이런 제가 성장해 사회에 나가보니 하느님을 모르고, 부정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한 번도 의문을 갖지도, 부정하지도 않았고 너무 당연하게 믿어 온 하느님과 예수님에 대해 “본 적 있어?”, “왜 믿어?”라는 식의 질문을 서슴없이 할 때 저는 말문보다 숨문, 숨이 턱! 하고 막힙니다. 이내 겉으로는 의연한 척 “난 모태신앙이야”라고 말합니다. 그때는 잘 대답했다고 생각합니다. 대개 ‘모태신앙’이라고 하면 고개를 끄덕이고 ‘그렇다면 이해해’라는 눈빛을 보냅니다. 어찌 보면 이때 저는 마음 깊은 곳에서 ‘곤란한 상황을 모면했다’라는 생각을 품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순간들이 마음 한가운데 무겁게 쌓였습니다. 더 많은 이들이 하느님을 알 수 있는 축복의 기회를 저는 모태신앙이라는 한 단어로 더 이상의 대화도 교류도 없이 끝맺은 것에 대해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몹시 부끄러웠습니다. 좋으신 하느님을 나만 알고자 하려던 욕심은 아닙니다. 갑자기 그런 질문을 받으면 당황스러워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어렵고,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흔히 당연함 속에서 소중함을 쉽게 잊어버리듯 저 또한 그랬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당연하다고 해서 남에게도 당연한 것이 아니므로 제가 모태신앙인으로서 책임감을 갖고 더욱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그것을 의심하는 토마스에게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라고 말씀하십니다. 살다 보니 제 눈으로 보고 믿었던 사실, 제 편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사람들을 다 믿지는 말았어야 할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제 눈앞에 직접 나타나시지 않아도, 제 믿음에 대해 후회한 적도 배신당한 적도 없습니다. 오히려 믿음과 사랑을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순간은 헤아릴 수없이 많습니다. 그 조건 없는 사랑을 알기 때문에 오히려 이렇게 부족한데도 당당한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보이지 않아도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는 ‘모태신앙인’인 저는 행복합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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