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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간은 제19분 법계통화분입니다. 법계를 한꺼번에 모두 교화한다. 이런 내용이구요.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 대천 세계에 가득 찬 칠보로써 널리 보시한다면 그 사람은 그 인연으로 많은 복을 얻겠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사람은 그 인연으로 아주 많은 복을 얻을 것입니다.”
“수보리야, 만약 복덕이 진실로 있는 것이라면 여래가 복덕을 많이 얻는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지만, 복덕이 본래 없는 것이므로 여래가 많은 복덕을 얻는다고 말한 것이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삼천 대천 세계에 가득 찬 칠보, 아주 귀한 보석으로 널리 보시한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많은 복덕이긴 한데. 그 복덕이 진짜로 있는 거면 부처님이 많은 복덕을 얻는다고 말하지 않았을 거라는 거예요. 그런데 복덕이 본래 없는 것이므로 부처님은 복덕이 많다,라고 했단 말이지요. 진정한 복덕.
이렇게 삼천 대천 세계를 칠보로 장엄한다,라는 것은 우리 중생들의 머릿속에서 이해할 때 가장 크게 복을 짓는 것. 여러분들 누가 어떤 사람이 복을 많이 지었다. 이런 얘기 들으면 주로 이런 내용이잖아요. 어디 가서 돈을 얼마큼 베풀었다더라. 어디 가서 뭐 무상으로 얼마를 보시했다더라.
이런 것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복이다 보니까, 이런 현실적인 비유를 들어서 얘기한 것이지요. 그런데 진정한 복은, 내가 복을 지었다. 우리도 딱 그렇잖아요. 실제 누가 복을 짓고 잘하고 좋은 일을 했어요. 했는데, 했는지 안 했는지도 모르게 그냥 조용히 하고 스윽 가면 참, 괜찮은 사람 같잖아요?
그런데 찔끔 보시를 하긴 했는데, 좋은 일을 하기는 했는데, 너무 티 내면서 뭐 내가 잘했다고 하고, 자꾸 이렇게 너무 티를 내면. 괜히 보시해놓고 스스로 왜 저럴까? 싶은 생각이, 우리가 보기도 인상이 찌푸려지잖아요. 진정한 보시는 진정한 복덕을 짓는 것은 내가 복덕을 짓는다,라는 생각, 복덕을 짓는다,라는 상, 그게 없이 지어야 되는데.
내가 복덕을 짓고 나서 복덕을 지었다,라는 상을 가지는 이유는 뭐냐 하면, 복덕이라는 뭔가가 진짜로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그래요. 내 돈이 있어. 너희들 돈이 있고 내 돈이 있어. 이렇게 생각을 하면 내 돈이 따로 있으니까, 내가 너희들한테 돈을 준 건 얼마나 엄청난 일을 한 거예요. 얼마나 뿌듯한 일을 한 겁니까?
그건 ‘여긴 내 돈이 있고 저긴 너희 돈이 있다’ ‘내 돈을 기꺼이 나를 희생해서 주었다’ 이런 생각이 있어야만 복덕을 했다,라는 상이 생기는 것이지요. 그렇게 상을 가지고 ‘내 거를 이렇게 주었다’ 이렇게 생각한다,라는 것은 진정한 복덕이 아니라는 거지요.
그런데 그 생각이 없을 때, 그 생각이 없는 것이 진정한 복덕이라는 거예요. 제가 이제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삼천 대천 세계를 칠보로써 완전히 한순간도 빼지 않고 계속해서 보시를 하는 것과 비슷한 비유가, 이런 비유를 들 수 있을 겁니다.
공기가, 공기는 우리에게 모든 사람에게 이 우주에 있는 일체 모든 사람들에게 한순간도 빠지지 않고, 여러분 살아온 인생만큼 삶의 시간만큼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끊임없이, 끊임없이 공기를 불어넣어 주었지요. 거지요.
내가 들숨을 쉬고 싶을 때는 언제나 들숨을 쉴 수 있도록 항상 복덕을 짓고 있습니다. 매 순간 베풀고 있고. 이 공기를 우리에게 항상 무상으로 주고 있는데, 공기가 우리한테 뭐 외상값 받으러 온 적도 없고. 뭐 티 낸 적도 없고. 상을 내면서 ‘내가 너 숨 쉬게 해줬으니까 너를 살게 해줬으니까 나한테 뭘 좀 값 하라’ 그런 얘기를 한 적도 없습니다.
그러구 공기가 베풀었다,라고 생각은 할까? 우리들의 생각이지. 그냥, 그냥 여기서 왔다 갔다 했을 뿐이에요. 이처럼 진정한 보시, 진정한 복덕은 그 어떤 상을 낼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냥 인연 따라왔다가 인연 따라가는 것. 그 자체가 사실은 무한한 복덕인 것이지요.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이런 물 한 모금이 우리가 봤을 때는 그냥 단순하게 ‘물이 있으니까 먹는다.’ ‘정수기에서 물이 있으니까 먹는다.’라고 우리는 되게 쉽게 생각하지만. 만약에 지금이 전쟁이 났다든지, 전기가 다 멎었다든지, 그러면 이 물 한 모금을 구하는 게 하늘의 별 따기처럼 될 수도 있어요.
지금 뭐 인도 같은 나라에서는 깨끗한 물을 구한다는 게 쉽지가 않잖아요. 그러니까 완전 오염되고 벌레 득실거리는 물인 줄 뻔히 알면서도 먹을 수밖에 없어서 먹고살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항상 매 순간 먹고 있는 이 물이 사실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귀하고 고마운 일이지요.
그런데 이 물이 있기 위해서는 이렇게 깨끗한 물이 우리에게 오고, 우리가 매 순간 먹을 수 있기 위해서는 이 물을 만든 이 정수기를 만든 회사에서 수많은 사람들, 이 물이 오는 어떤 관로, 관로 만든 사람들,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음식을 유통하는 도매상, 소매상, 농사를 짓는 사람, 또 공장에서 그걸 가공하는 사람,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무수히 많은 도움들이 없으면, 우리는 한순간도 이걸 먹을 수가 없습니다.
마치 내가 아무리 열심히 돈을 벌어가지고 능력이 있어서 내 능력을 가지고 높은 자리 올라갔다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 공기를 확 뺏어버리면 단 한순간도 살지 못하는 것과 똑같이. 그 사람에게 물을 싹 뺏어버리면 그 사람은 며칠 못 살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 사람에게 입는 옷을 싹 다 뺏어버리면 그 사람은 그 일을 할 수 없는 것처럼. 사실은 공기가 우리에게 매 순간 이렇게 도움을 주는 것과 똑같이, 똑같이 사실은 이 세상 만물 만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위해서 또 각자, 각자 모두가 모두를 위해서,
공기가 나에게 무상으로 공기를 제공해주는 것처럼, 여러분도 여러분 삶으로써 이 우주 전체에다가 이러한 무상의 보시를 실천하고 있는 중입니다. 돈을 줘야지만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처한 자리에서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사실은 늘 보시를 베풀고 있는 것과 똑같은 것이지요.
여러분이 누군가를 위해서 회사에서 일을 하나 했다. 그게 누군가를 돕고, 또 그 누군가는 또 나를 위해 또 다른 사람을 위해 이렇게 중중무진으로 무수히 많은 사람들 사람들이 중중무진으로 연결되어 있고,
연기되어 있는 이 연기법의 세계를 보면 나도 이 세상에 무한한 도움을 주고 있고. 내가 삶을 사는 것을 통해서. 또 세상 모든 사람들 모든 존재들도 그들이 각자 처한 삶에서 각자 처한 자기의 일을 하는 것을 통해서, 이 세상 만물 만상에게 모두 무한한 도움을 주고 있는 중에 있다.
공기도 바람도 구름도 하늘도 비도 나무 한 그루조차 끊임없이 산소를 우리에게 공급해주고 있고, 이처럼 이 세상 모든 삼라만상은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고 있는 서로가 서로에게 무한정 베풀어주고 있는 중에 있습니다.
무한한 공덕이라고 말할 필요도 없이 공덕이라는 말이 필요도 없이 모두는 모두를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 중에 있지요. 무한한 베풂을 실천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아마 숲에 있는 산소가 숲에 있는 나무들이 숲들이 산소를 이산화탄소를 먹고 산소를 뱉어내주는 게, 우리는 너무너무 고맙고 감사한 일이지요.
그런데 나무 입장에서는 우리 인간들이 자기가 배출해내는 산소를 인간들이 먹구서 이산화탄소를 발산해주니까 얘네들은 또다시 이산화탄소를 또 먹을 수 있는 것이지요. 쟤네들은 우리에게 도움을 주고 우리는 쟤네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중에 있는 것이지요.
즉 숨 한번 쉬는 것조차 이 세상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지구라는 땅을. 요즘에 가이아(Gaia:그리스인들은 지구를 대지의 여신이란 이름으로 명칭 하기도 하였음),라는 말로도 쓰기도 하는데. 지구라는 하나의 생명이라는 것이지요.
나라는 존재가 이 몸뚱이가 사실은 하나의 지구와도 같은 어떤 가이아이고.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내 의식, 나라고 여기는 이것이 내 몸뚱아리에 있는 모든 세포 하나하나들이 느끼기에는 내가 바로 신인 것이지요. 얘네들의 신이지요.
내가 숨을 쉬어줘야 얘네가 살 수 있고, 내가 밥을 먹어줘야 얘네가 살 수 있고, 내 몸에 있는 모든 세포 하나하나는 정말 나를 위해서 정말 이렇게 돌아가고 있지요. 이렇게 사실은 이 세상 모든 삼라만상 모든 것들은 필연적으로 동체대비심을 늘 발산하고 있습니다.
둘이 아닌 한 몸이기 때문에, 공기와 내가 둘이 아닌 하나잖아요. 공기가 없으면 내가 없고, 내가 없으면 공기가 없으니까 그것과 똑같이 공기는 당장 없어지면 내가 바로 죽으니까 이해하기 쉬워서 공기의 비유를 든 것이지. 사실은, 우리는 누군가에게 모든 사람들에게 동체대비심으로써 그 모두를 살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티를 낼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나는 도움을 받고 있으면서 동시에 주고 있고. 누구나 저마다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을 통해서 세상을 살리고 있고. 그러니까 여기에 복을 짓는다, 복을 받았다, 안 받았다, 나는 더 많은 복을 지었다, 안 지었다, 이런 얘기를 할 수가 있습니까?
그런 생각이 있으면 그건 진짜 복이 아니에요. 그런 생각이 없을 때가 진짜 복이지요. 삶 자체가 복이고, 존재 자체가 복이고, 지금 우리는, 내가 이 세상을 향해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복덕, 복을 짓는 것. 그것이 무엇이냐? 주어진 나의 지금 이 순간에 주어진 나의 삶, 그 삶을 온전히 살아가는 일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삶을. 모든, 삼라만상 모든 것들은 정확히 있어야 할 자리에 정확히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정확히 필요한 곳에 정확히 필요한 것이 그 자리에 딱 있습니다. 나도 마찬가지예요. 공기가, 내가 공기가 필요할 때 정확히 지금 이 자리에서 나에게 공기를 매 순간 불어넣어 주는 것처럼,
공기는 지금 여기에 공기가 있어야 할 자리이기 때문에 있는 거거든요. 그것과 똑같이 나도,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게 지혜롭게 사는 것이냐? 무위자연으로서 사는 것이냐? 지혜로써 사는 것이고 복덕을 실천하면서 사는 것이냐?
공기처럼. 풀 한 포기처럼. 나무 한 그루처럼. 우리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그냥 이렇게 무상으로 주어지잖아요, 항상. 공기처럼 무상으로 언제나 이렇게 마음껏 주어지고 있어요. 그러면서도 상을 내지 않고 티를 내지 않고 잘난 척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이 자연처럼. 그래서 ‘무위자연으로 살아야 된다’ 하고 노자에선 얘기를 하고, 한 것이지요. 내가 했다,라는 생각 없이, 내가 돕는다,라는 생각도 없이, 도움을 준다거나 받는다,라는 생각도 없이, 자연처럼 사는 것이 가장 지혜롭게 사는 것이지요.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자연처럼 사는 것일까요?
우리는 한 명의 자연입니다. 이미. 하나의 자연이지요. 우리도 숲을 돕고 있고, 숲이 우리를 돕고 있는 것처럼. 자연은 어떻게 사느냐면? 그냥 삽니다. 그냥. 생각 없이. 해석하지 않고. 소나무가 옆에 있는 잣나무나 떡갈나무를 보고 질투를 하거나 미워하거나 비교하지 않는 것처럼. 그냥 주어진 대로 사는 거지요.
발밑에 있는 수많은 잡초라고 여기는 우리가 잡초라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제가 옛날에 나무, 숲, 이런 것들에 꽂혀있었을 때 그때 공부를 해보니까 모든 잡초라고 여기는 모든 풀들이 전부다 약초예요. 전부다 약초.
아, 진짜 하나도 안 빼고 전부다 약초입니다. 심지어 독초조차 약초로 쓰여요. 특정 병에는 그 독초가 약으로 쓰이고. 그러니까 너무 막 지천으로 펼쳐져 있는 모든 것들이 전부다, 다 자기의 이름이 있더라구요. 진짜 잡초는 없어요. 거의 없습니다.
왜냐면 제가 잡초를 찾아보려고 정말 노력을 많이 했는데, 그게 다 이름이 있고, 그 이름을 지닌 모든 것들은 이 책에 그 약초에 인간을 중심으로 이름이 쓰여 있지만, 그 약초의 효능은 어떻고 언제 피고 언제 지고, 다 이름이 있고 다 쓰임이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그냥 잡초라고 인간의 의식을 가지고 하지만, 그들은 그들 자리에서 자기답게 그냥 사는 거예요. 사람이 잡초라고 하든 말든 나를 짓밟든 말든 내가 내 자리에서 그냥 사는 것으로써 이 세상에, 이 우주법계에 엄청난 도움을 주고 있는 거지요.
잡초라고 여기는 것들이 없으면 나무가 없으면 산사태가 나고 그럴 거거든요. 우리도 그것과 똑같이, 사는 것이 바로 이렇게 복덕을 무위복을 짓는 삶이지요. 이 금강경에서 얘기하는, 복이라는 생각도 없이 복을 짓고 사는 것이지요.
부처님이 말씀하신 ‘복이 아니기 때문에 복이다.’라는 것이 바로 그겁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복을 짓고 살 수 있느냐? 아주 중요한 사실입니다. 진정한 복을 짓는 방법. 무위법, 무루법을 짓는 방법. 그것은 내가 복 짓는다,라는 티를 내지 않아야 된다.
이것도 맞는 말이지만, 나아가서 이렇게 생긴 이 능력밖에 없는 이것밖에 못 가진, 이렇게 부족하고 못났고 맘에 안 들고, 이런 나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 ‘능력 없다’ ‘못났다’ ‘부끄럽다’ 하고 속삭이지 않고, 나에게 저 사람은 저렇게 잘났는데 너는 왜 이렇게 못났느냐? 하지 않고.
풀 한 포기가 하는 이 지구를 살리는 역할과 나무 한 그루의 역할, 인간의 역할이 다르잖아요. 다르지만 서로 다른 일을 하는 것뿐이지, 그 모든 것들이 하나가 다 소중하지요. 꿀벌 하나는 어찌 보면은 아주 나약하고 별것 아닌 것일 수 있지만,
그 꿀벌 하나하나 하나가 사라져서 꿀벌이 사라지면, 뭐 꿀벌의 종말이 곧 인류의 종말이 된다. 뭐 이런 표현을 하는 사람들도 있더라구요. 그런데 그게 하나하나였을 때는 그게 별것 아닌 것으로 여기겠지만, 그거 자체가 사실은 인류의 생존에 너무나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거지요. 더 잘나거나 못났다,라는 것. 내가 이 세상에 더 큰 기여를 했다거나 더 작은 기여를 했다,라는 것. 내가 훌륭한 사람이라거나 훌륭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 그건 다 생각이 만들어낸 겁니다. 생각이.
옛날에 임금이면 다 훌륭했을까요? 예를 들어 임금이기 때문에 뭐 나라를 지켜야 되겠다, 해도 밑에 부하들을 죽이는 일도 많았겠지요. 전쟁으로 내모는 일도 많았겠지요. 그러면 옛날 수많은 임금들이 전쟁으로 국민들을 내몰아서 시민들을 내몰아서 막 죽게 만들었다.
혹은 정치를 하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밑에 사람들을 더 큰 국가의 안정을 위해서 좀 잘못하고 있는 사람을 내쳤다. 옛날에 내친다는 게 그냥 숙청을 하기도 하고 그러잖아요. 그랬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기가 나쁜 짓을 했다고 생각할까요? 국가를 위해서 한 일인데.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어쨌든 이게 다 역사는 승리자 입장에서 써진다, 이런다 하는데. 뭐가 맞다 틀리다, 맞는 입장도 있지만 또 틀린 입장도 있고. 틀린 입장도 있지만 맞는 입장도 있고. 그 입장을 우리가 알 수 없는 것도 있고. 즉 이 말은 신비입니다. 신비.
내가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의 삶이 훌륭한지 아닌지, 내가 잘났는지 못났는지, 내가 능력이 없는지 있는지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거는 모를 뿐이에요. 그 삶의 신비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 머리로는 알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것이지요.
맞나 틀리냐의 논리로 세상 모든 것을 재단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불교계의 오래된, 제가 여기 있으면서 받는 수많은 오래된 질문이 뭐냐면, 스님들이 전쟁에 참여해도 되느냐?
심지어 어떤 장병들은 이제 그런 얘기까지 했어요. 스님이 군법사로 있는 것은 전쟁하는 집단에서 그걸 돕겠다,라는 거 아니냐? 그래도 됩니까?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것이지요. 자신의 논리로는 그렇게 보는 것이지요. 뭐 굳이 대답을 한다면,
지금까지 역사가 증명해준 것이 인간들은 욕심, 자신의 욕심이 완전히 조복 받던 부처님이 사는 세상이면 모를까, 욕심과 집착이 있는 세상에 살게 되면 그 나라가 강대하지 않으면 강하지 않으면 쉽게 말해 군대가 강하지 않으면 옆의 나라에 침공을 항상 받아왔어요. 이런 얘기를 해도 되나 모르겠네?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이렇게 훈련을 해도 쉽게 말해서 공격하는 훈련은 아예 안 합니다. 그러니까 방어하는 훈련을 먼저 하지요. 방어. 왜냐하면 기본 교리 자체가 아, 이런 얘기를 해도 되나 모르겠네. 교리 자체가 우리나라는 침범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거의 모든 나라가 다 그래요. 즉 방어,
방어를 위해서 군대가 존재합니다. 즉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더 큰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 즉 쉽게 말해서 존재 원리가 전쟁에 이기기 위한 논리가 아니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한 이치, 평화를 지키기 위한 이치, 그걸 지키기 위해서 이런 조직이 있는 것이고.
또 사적으로 돌아간다면 자장 보살님은 지옥 속에 뛰어 들어간다고 하는 것처럼. 동사섭을 해야 된다,라고 하는 것처럼. 괴로워하는 중생들이 있는 곳에는 그것을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는 누구나 있기 때문에, 괴로움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거를 도와주는 사람이 수행자라고 했을 때,
그곳에서 같이 동사섭 하는 것이기도 하다. 뭐 이런 얘기를 했더니 되게 좀 헷갈려 하면서 본인의 어떤 종교적 신념에 의해서는 이게 아니다,라는 주입을 받아왔나 봐요. 그래서 본인은 군대에 올까 말까도 고민했었답니다.
그런데 이 얘기를 계속해서 제가 해주고 나니까 그 얘기를 듣더니 이게 틀린 말은 아닌데. 그럼 난 지금까지 뭐지? 지금까지 내가 틀렸다고 생각했던 그 교리는 뭐지? 하고 헷갈려 하는 거지요. 왜 그럴까요?
논리라는 것은 그냥 자기가 그렇게 만들기 나름이에요. 왜? 왜 그러느냐면? 절대적인 옳음 절대적인 틀림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절대적인 옳음이나 거름이 어떻게 정해져 있겠어요. 인간의 가치를. 우리 불교에는 그런 얘기가 있잖아요.
사람의 살점을 이만큼 떼서 짐승을 살리려고 해도 아무리 떼 봐야 안 되더라. 저울추가 안 맞더라. 사람이 통째로 올라가야 그 짐승을 살릴 수 있더라. 뭐 그런 표현이 그 어떤 차별이 있지 않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겉으로 보기에는 위대한 업적을 한 것 같은 사람과 그냥 시골에서 농사짓다가 죽어가는 사람과 존재의 가치가 다르지 않다는 것이지요. 왜 그럴까요? 그 안에 있는 부처는 다르지 않습니다. 부처는 언제나 해도 한 바가 없이 행하는 것이지요.
마치 공기처럼 풀 한 포기처럼 나무 한 그루처럼 그 어떤 비교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고, 비교 분별하는 그 마음이 중생이고. 그것 가지고서 내 비교 분별의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재단하는 것이 중생의 마음이지. 그렇게 정해져 있는 뭔가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가장 복덕을 지으면서 사는 것은 나답게 사는 겁니다. 지금 이대로 내가 하는 것을 하고 사는 겁니다. 이렇게 주어진 대로 이렇게 살 수 있는 대로. 그러나 더 많은 것을 하고 싶으면 그걸 하면 돼요.
그런데 해도 안 된다. 그러면 오케이! 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즉 내가 “만족하고 살아라.”라고 한다고 해서, 어떤 사람은 불교는 그냥 ‘만족만 하고 살아라.’ 그러니까 삶의 진보가 없다. 뭐 어떤 옛날의 유명한 목사님이 불교를 믿는 나라는 다 가난하지 않느냐?
그냥 만족만 하라고 하니까 발전이 없고 진보가 없고 다 불교를 믿는 나라는 천하의 가난하고, 이 종교를 믿는 나라는 부자다. 이런 얘기를 했어요. 그런데 제가 그것이 왜 틀린 말인지를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장문의 글을 써서 블로그에 올렸어요.
그랬더니 다음(Daum) 메인 뉴스로 떴습니다. 그래서 엄청 많은 사람들이 이제 봤는데. 제가 말했던, 그 밑에 댓글이 종교전쟁이 났습니다. 완전히. 뭐 맞다, 맞다 하면서 뭐 이런 사람, 뭐 하여간 욕하는 사람,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던데. 이게 이제 환경의 논리로 봤을 때 뭐랄까,
지금에 와서 반성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자연을 이렇게 오염시키면서까지 이렇게 변화 발전시키는 것에 대해서 오히려 지금 세계가 많이 반성을 하고, 그런 것들을 어떻게든 공존하고 조화롭게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을 지금 모색을 하고 있지요.
왜냐하면 그렇게 한 발전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라는 게 분명해졌기 때문에. 지금 이대로만 계속 나가면 지구가 머지않아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실을 알다 보니까 아, 지금까지 우리가 했던 이것이 어리석음, 무지몽매함에서 비롯된 무작정해왔던 발전이었구나,라는 것을 알고 자각하고 그것을 지금 바꾸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에 뭘 해도 친환경이 어쩌구저쩌구 하는 이유가 자연의 파괴를 최소화시키고 그러면서 또, 좀 더 한쪽에서는 자연을 살리는 노력을 계속해서 하고 있고. 그런 것들을 또다시 인간들이 하니까, 다시 이것이 균형을 조금씩 잡아가는 것이지.
그래서 그런 논리로 봤을 때는 그것이 아주 잘못된 어리석은 논리였다,라는 게 논문 같은 데서는 다 증명이 되었던 것들이거든요. 그래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내가 잘나고 못나고를 떠나서 지금 이대로 나에게 주어진 이대로의 삶을 최선을 다해서 사는 겁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만족만 하면서 ‘그냥 난 이렇게만 살다 죽을래.’ 가 아니고. 내 마음속에 마음이 일어나는 것을, 그거는 인연이 일어나는 거예요. 마음이 일어나는 거면 그냥 하면 됩니다. 또 외부에서 인연이 주어질 때도 있어요.
내 안에서 인연이 올라올 때도 있고 바깥에서 인연이 올 때도 있어요. 살다 보면 그러잖아요. 어느 날 갑자기 마음에서 ‘무얼 하고 싶어’ 하면 인연이 올라온 겁니다. 그럼 그걸 하면 됩니다. 집착 없이. 돼도 좋고 안 돼도 좋지만, 난 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와서 한다. 그건 인연 따라 사는 거예요. 집착하는 게 아니고.
또 밖에서 누가 “야, 이런 거 한번 해 볼래.” “저런 거 한번 해 볼래.” 넌 이런 거 하면 잘할 거 같은데 이런 걸 좀 도와줘. 어떤 인연이 다가온다. 그럼 외부에서 인연이 다가오는 겁니다. 그럼 그 인연을 응해서 하면 됩니다.
그런데 또 내가 영 마음이 불편하다. 그럼 안 하면 되는 것이고. 그런 방식으로 우리가 만족하고 살아도 삶을 액티브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삶의 변화 발전을 도모하면서 살아가게 돼요. 왜?
인연법은 인연 법대로의 법칙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두려움을 갖지 않고도 자기답게 사는 것을 통해서 이 세상에 우리는 매 순간 기여하고 있습니다.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남들과 열등감 느끼지 않고, 우월감 느끼지 않고,
지금 이대로의 나에게 온전히 허용해주고 허락해주면서 지금 이대로 사는 것에 대해서 완전히. 이것이 바로 내가 지금 이렇게 숨을 쉬고 사는 것이 공기가 나에게 도움을 주는 것과 똑같은, 칠보로써 삼천 대천 세계를 보시하는 이 사람이 짓는 공덕과 똑같은 공덕을, 내가 이 우주법계 전체에 복을 짓고 있는 것과 똑같습니다.
인연법을 환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다 보이진 않지요. 내가 당장 누구한테 물 한 모금 주고 밥 하나 사주는 것만 도움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것만 도움이 아니란 말이지요. 아까 말한 것처럼 숨 쉬는 것도 도움이고 대소변 누는 것도 도움을 주는 겁니다.
대소변 누는 것을 통해 그게 빠져나가가지고 어딘가에 또 재생되고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지금의 나로서, 있는 이대로의 나로서 온전하게 사는 것. 그게 바로 우리가 복을 짓고 사는 것이고 가장 지혜롭게 사는 것이다.
이색이상분(離色離相分)은 금방 끝나는, 지난번에 나왔던 거라, 빨리 끝내고 가겠습니다. 제가 지금 이번 달까지 끝내는 걸 계획해놔 가지고. 이색이상(離色離相)이라는 것은 제가 누누이 말하듯, 색도 여의고 모습도 상도 여읜 그것이, 색을 여의고 상도 여읜 그것을 바로 부처의 자리다. 이런 뜻이구요.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구족한 몸을 갖춘 것만 보고 부처라고 할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구족한 몸을 갖추었다고 여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구족한 몸은 곧 구족한 몸이 아니라 그 이름이 구족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가히 구족한〔32상〕상을 가졌다고 하여 여래라 할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구족한 상을 갖춘 것을 여래라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상이 구족되었다는 것은 곧 구족된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구족된 상일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은 32상 80종호를 구족했기 때문에 부처님이다. 이렇게 이제 부파불교에선 생각을 했습니다. 즉 다시 말해서 부처님은 우리와 우리 중생들과는 색과 상, 몸부터가 다르다. 몸 생김새부터가 다르다. 그러니까 부처님이지. 이렇게 생각했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부처님은 우리와 다르게 생겼을 거야. 우리와 다르게 거룩하게 생겼을 거야. 그런데 사실 32상 80종호에서 설명하고 있는 내용을 그림으로 그리면요. 거의 약간 괴물 비슷하게 그림이 그려져요. 혓바닥이 막 이렇게 내려오고, 막 손이 저 밑에까지 내려가고 희한한 사람이 돼버립니다.
그러니까 32상 80종호는 부파불교에서 만든 부처님을 이렇게 위대하다,라고 만들기 위해서 이렇게 만들어낸 그런 것들이지요. 사실 교리화된 것들은 주로 가 부파불교에서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공부할 때 그랬거든요. 옛날에.
부처님 10대 제자. 그런데 부처님은 10대 제자를 부처님이 이렇게 정했을까? 부처님은 분별하지 않는 분인데, 제자를 10명만 딱 집어서 너희들 10대 제자 이랬겠나? 이 생각이 들었거든요. 나중에 보니까 이게 다 부파불교에서 교리화시키면서 만든 것들이에요.
그렇게 사람의 머리를 가지고 이렇게 막 체계화시키면서 문제가 더 생기는 것들이 많더라는 거지요. 부처님은 32상 80종호를 구족했기 때문에 부처님이 아니라는 소리입니다. 32상 80종호라는 것은 그 구족이라는 것은 실제 말이 구족이지 이름이 구족일 뿐이다.
그 말은 무슨 얘기냐면 진정으로 부처님은 이러한 색과 상, 이색이상(離色離相) 색을 여의고 상을 여읜 분이 부처님이지. 특정한 모습 속에 부처님이 있느냐? 특정한 모습을 띤 사람은 우리가 거룩한 부처님처럼 큰 스님처럼 존중해드려야 되고. 그런데 달마대사 보세요. 우락부락하게 생겼을 수 있잖아요?
그런 얘기도 있듯이, 나이를 가지고도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뭐 특정한 종교를 가지고도 파악할 수 없고, 뭐 남녀를 가지고도 파악할 수 없고, 특정한 어떤 모습을 띠고 있느냐? 그거 가지고 파악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게 예를 들면,
이렇게 뭔가 상을 보고 자꾸 파악하는 것이. 큰 절에, 큰 절에 주지 스님이시면서 그 밑에 막 스님들이 쫙 계셔서 어디를 가도 스님들이 쫙 따라가고 이러면 멋있어 보인, 좀 쉽게 말해 요즘 말로 있어 보인단 말이에요. 있어 보이면 거기에 무슨 권위가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이런 말을 왜 하느냐면, 작은 절에 조만한 절에 스님이 약간 이상한 말을 하고, 나한테 뭐 자꾸 아는 소리하고, 뭐 해라 뭐 해라 하면 본인 스스로 판단해서 ‘아 이 스님은 이상한 스님이구나.’ 하고 딱 재껴버려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저한테 와서 질문을 했을 때 보면요.
어떤 부분들을 질문을 하느냐면? 자기 생각에 큰 절, 유명한 절, 이 절의 스님이 나한테 이렇게, 이렇게 했는데 그게 정법이 맞나요? 이런 걸 물어봐요. 그 말은 큰 절, 유명한 절, 이런 데는 일단 뭔가가 있을 거다,라고 이렇게 내 마음속에서 이렇게 생각을 하잖아요. 거지요?
지금의 시대가 제가 참 놀라운 시대라고 하는 것이 지금의 시대의 특징은, 옛날에는 권위가 그 사람을 증명해주던 시대였습니다. 명함, 학벌, 명함에 쓰여 있는 그것이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딱 드러내주었어요. 그리구 그런 사람만 인정을 받았습니다.
지금의 시대는 그런 것들이 깨지는 시대예요. 학벌 같은 거 자꾸 깨고 있지요. 요즘에 스타라고 하는 것도,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방탄소년단이 그렇게 뜨는 것도 유명한 회사에 있어서가 아니에요. 유튜브 스타들이 지금은 오히려 TV 스타들을 넘어서고 있어서,
TV 스타가 팬 무슨 사인회를 한다 그러면 몇 백 명이 온다면. 유튜브 스타가 사인회를 한다면 몇 천 명이 오기도 한다는 거지요. 그런데 그 유튜브 스타는 자기 분야에 자기가 잘하는 것뿐이지. 무슨 학벌이 좋은 것도 아니고 상관없어요. 인물이 잘난 것도 아니고.
그래도 그 분야에 자기가 그 분야에서 누군가를 감동시킬 수 있고 누군가를 끌어모을 수 있는 매력이 있으면, 그 사람이 스타가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 이제는 그런 권위, 종단의 권위? 요즘도 보면은 어찌 보면 옛날 같았으면 법륜 스님이 저렇게까지 잘 되기 힘들었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해요.
그런데 지금은 법륜 스님이 어찌 보면 대외적으로는 어쨌든 승적이 없으시다,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래서 오히려 법륜 스님에게 승적을 드리겠다고 종단에서 하는 데도 불구하고. 당신이 안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기존 종단 못지않은, 오히려 그보다 더 훌륭한 영향력을 행사하실 수 있는 것도 지금의 시대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지요.
지금은 그런 어떤 권위, 눈에 드러난 색과 상, 여기서 말하는 이색이상의 시대입니다. 색에 얽매이지 않고 상에 얽매이지 않는 저 시골에 혼자서 공부하는 스님이 훌륭한 스님일 수도 있고.
아무리 큰 절에서 많은 스님들이 막 구름떼처럼 몰려들어도 거기가 삿된 절일 수도 있어요. 그런 절을 저도 많이 봤기 때문에 알아요. 그래서 그런 상에 얽매여서 겉에 드러난 모습이 원만 구족하다고 해서 그게 원만 구족이 아니다,라는 것이지요, 첫째.
그래서 그런 상을 가지고 그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되고, 깨달음을 판단해서는 안 되고, 부처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라는 겁니다. 왜? 색과 상에 부처가 담겨있지 않기 때문에. 뭐 당연하겠지요.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부처님은 원만 구족한 분이 부처님입니다. 그럼 누가 부처라 그러겠어요?
내가 바로 부처입니다. 잘나면 잘난 사람 그대로 원만 구족한 것이고. 못나면 못난 사람 그대로 원만 구족한 것이지요. 아까 자연의 비유를 들었듯이 자연에 있는 모든 풀들이 다 그 밀림에는 필요합니다. 그래야 모든 생명들이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거처럼 잘난 사람은 잘난 사람대로, 못난 사람은 못난 사람대로, 색과 상에 얽매일 필요 없이 저마다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자기 생긴 대로, 자기 살아가는 방식대로, 자기 쪼대로, 자기대로 나답게, 나답게 살아가더라도.
그래서 불교에서는 그런 얘기를 해요. 자기답게 네가 하고 싶은 거 마음대로 해도 좋다. 다만 누군가에게 피해 주지 않는 선에서 무엇이든지 해라. 해 봐라. 이런 얘기를 합니다. 자기로서 피어난 한 분의 부처님입니다. 여러분들은.
모든 존재는 다 제각각 다 있는 그대로 원만 구족한 거예요. ‘내 성형수술해서 요것만 바꾸면 내가 원만 구족 해질 텐데’가 아니고. 많은 사람에게 인기 있는 사람은 그 나름대로 또 스트레스받는 게 있을 수도 있겠지요. 나는 내 남편, 내 아내에게, 뭐 그것도 아니면 나 자신에게, 내가 내 스스로 그냥 매력 있으면 되는 것이고. 내가 내 인생을 나답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법정 스님도 그런 얘기를 책에 많이 써놓으셨어요. 저는 그때 당시 그 말이 너무나도 가슴에 와닿고, 너무너무 좋았습니다. 불교는 부처님처럼 사는 것을 강요하는 종교가 아니다. 부처님처럼 사는 것이라는 게 딱 정해진 바가 없다. 나는 부처님처럼 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나는 그냥 나답게 살고 싶다. 나답게 사는 게 부처님답게 사는 겁니다. 왜?
부처님은 정해진 것이 없기 때문에. 정해진 바가 없어요. 어떻게 생긴 게 부처님이다, 이런 게 없고. 어떻게 행동하는 게 부처님이다, 이런 게 없습니다. 예를 들어 요즘에 젊은 친구들이 약간 욕 비슷한,
이게 욕도 아니고 욕 아닌 것도 아닌 좀 이런 격한 말들을 좀 쓰거나. 본인들끼리 우리가 보기에는 또 욕 같은데 본인들끼리는 욕이 아니라 요즘 유행하는 말이래요. 그런 말을 막 쓸 때, 우리 관점으로 우리들 생각으로 무조건 걔네를 혼내고 막 그런 말 절대 쓰지 말라고만 해야 되느냐. 그것도 또 아니더라구요.
요즘의 시대는 그냥 요즘 시대 나름대로의 어떤 또 방식이 있는 거 같애요. 이게 이제 우리의 관점으로 맞다 틀리다를 이렇게 할 수가 없게 되는 거 같애요. 옛날에는 게임 많이 하면 나쁘다 이랬는데. 지금 세대는 게임 많이 하면 나쁜 게 아니라 게임 잘 하는 건 엄청난 능력에 속하고,
게임을 가지고 게임 유튜버가 한 달 수입이 막 몇 억씩 받고 그런답니다. 한 달 수입이. 그리구 그렇게 유명하지 않은 게임 유튜버도 뭐 한 달에 몇 백만 원씩 버는 사람은 세고 셌대요. 장병들 하고 얘기하다 보면은 정말 새로운 시대를 알 수가 있어요.
옛날에 우리가 다 욕했던 일들이 지금에 와서는 그것들이, 옛날에 랩한다, 하고 그러면은 야, 그거 가지구 어떻게 먹고 사나? 이랬다는데. 지금은 랩 좀 잘하면 어마어마하게 돈을 벌 뿐 아니라,
작년인가 고등 래퍼에 보면 김하온이라는 우승한 친구가 명상을 한다고 그러면서 그 친구하는 말을 들어보면요. 자기가 명상을 배워봐야 얼마나 배웠겠어요. 고등학생이. 그런데 참 그 친구를 보면 제가 놀라웠던 점은 뭐냐면,
야 이게 뭔가 이렇게 영감이 뛰어나고 뭔가 어떤 예술적인 이런 것들이 있는 친구들은 이런 것들을 받아들이는 어떤, 이런 어떤 지혜를 받아들이는 자기만의 또 다른 감성이 있나 보다. 이런 느낌을 받았어요.
어른들에게 10년을 가르쳐줘도 그게 그렇게 체화돼서 나오지 못하는 이야기들이나 그런 말들이 얼마 공부하지도 않은 아이가 그냥 명상을, “나는 명상을 해” 이렇게 막 자랑하는 속에 나오는 게 아니라, 그냥 거기서 나오는 모습을 보니까,
저는 그 친구가 명상 래퍼라 이러면서 누가 알려줘서 그걸 보다 보니까 그걸 계속 보게 되더라구요. 그런데 이 친구가 참 진짜 신기하더라구요. 제가 무위법에 대한 얘기를 그렇게 많이 해도 어른들은 이걸 잘 이해를 못 하고, 잘 실천을 못하거든요.
그런데 이 친구가 거기서 나와서 뭔 얘기를 했냐면, 세상의 논리는 열심히 피땀 흘리고 노력하지 않으면 성공도 없다. 그래서 우리 모든 사람에게 피땀 흘리고 노력하고 막 고생하고 스트레스를 받고 막 젊은 날은 희생하더라도, 나중의 행복을 위해서는 지금을 희생해야 된다.
그래서 힘들지 않고서는 성공도 없다,라는 게 아주 진리처럼 이 세상에는 얘기되고 있는데.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 힘들게 애쓰고 노력해야지만 되느냐? 나는 노래를 하면서 원칙이 열심히 해가지구 성공해야 되겠다. 잘 해야 되겠다. 이걸 어떻게 해야 되겠다. 이런 생각 하면 아예 안 해버렸다.
그냥 나는 재밌고 즐겁게 놀고, 즐겁고 행복하기 위해서 음악을 한다. 음악을 할 때 힘들게 음악을 한 적은 없고 앞으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뭐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때 그런 얘기를 하면서 그 친구 하는 얘기가 왜 사람은 그것을 공식처럼 얘기하느냐?
누군가에게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게 말하자면 무위법이거든요. 애써서 성공하는 무언가도 있지만, 반드시 이게 필수인 거는 아닐 수 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이 친구는 되게 독특한 거지요.
독창적이고. 자기다운 뭔가가 색깔이 있는 것이지요. 지금 TV에서도 보면 자기다움, 독창성, 개성, 요즘 대기업에서도 면접을 2박 3일, 3박 4일씩 면접을 보면서 독특한 사람들을 뽑는답니다. 자기다운 어떤 개성이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이 돼야 독특한, 어떤 시대를 앞서가는 뭔가가 나온다는 것이지요.
지금의 시대가 상당히 이제 어찌 보면 세속화되고 물질화되는 거 같지만, 그런 급부가 있으면서 반대급부도 동시에 올라가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까 지금의 시대가 더욱더 어떤 명상이나 어떤 이런 지혜? 이런 것들이 더욱더 생겨나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가치들이 이제는 더 많이 이렇게 전파가 되지요. 아마도 방탄 소년단도 그렇다고 그래요. 그냥 옛날 일반 가수처럼 그냥 사랑 노래하고. 그냥 애들 젊은 사람들 호기심 가진 그런 이야기들을 노래 가사로 남들이 써준 거 그냥 이렇게 노래 부르고 하면서, 이렇게 했으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거다.
평론가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보니까, 뭔가 자기 스스로 자기네들 고민하는 것들을 우려내서 자신의 가사를 쓰고 노래를 쓰고, 또 어떤 이 시대를 위한 이야기들, 또 젊은 친구들, 힘든 사람들을 위한 어떤 응원의 이야기들, 이런 어떤 것들이 그 속에 이제 지혜가 담겨있고 그러다 보니까 그런 것들이 더 많은 어떤 울림을 가져다준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가장 자기다운 방식대로 그게 뭐 크고 작은 거는 큰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가장 자기다운 방식대로 나다운 방식대로 나다운 어떤 삶의 빛깔을 뽐내면서 내 주변에 있는 나와 인연 된 한 사람 한 사람을 뭔가 이렇게 살려주고 도움을 주고 또 지혜를 나누어 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원만 구족이고. 나로서의 원만 구족이지요.
왜냐하면 특정하게 원만 구족한 상이 정해진 것이 없으니까. 그 말은 뭐겠어요? 제법실상이라고. 지금 이대로의 내가 바로 원만 구족입니다. 이렇게 살고 있는 이 모습 이대로가 원만 구족이고. 뭐 하나 원만 구족에서 벗어난 것이 없다. 내 생각만이 그렇지 않다,라고 자꾸 속삭일 뿐이지.
그래서 여러분들은 지금 여러분의 인생을, 여러분의 외모를, 여러분 주변의 환경을, 하나도 바꾸지 않은 채로. 야, 내가 조금만 젊었으면, 내가 조금만 돈이 많았으면, 조금만 아들이 똑똑했으면, 뭐 이런 거 없이.
그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은 채로 지금 이대로 가장 최적화된 내 이름을 달고 있는 부처님이 지금 이렇게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불국토에서 원만 구족한 부처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분별심을 조복 받는 공부를 우리가 끊임없이 하는 이유는, 제가 지금 얘기하는 이것이 어떤 분은 어느 정도까지는 이해가 되고, 어느 정도까지는 이해가 안 되고, 어떤 분은 또 막 화가 날 수도 있어요.
왜냐면 세상에 안 좋은 부조리나 힘들고 이런 것들을 보았을 때 그게 도저히 이해가 안 되고 용납이 안 될 수 있거든요. 먼저 비판하기보다 이것에 대해서 꾸준히 공부를 하다 보면, 이것이 이제 점점 자기 것이 되어갑니다.
그래서 지금은 내가 이만큼은 이해가 가지만, 나머지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이 있겠지만, 이 분별을 놓아버리는 이 마음공부를 꾸준히 하면, 이게 조금 더 마음이 열리고 확장되어서 아, 내가 진짜 지금 이대로 부처라는 사실이.
괴로움을 없애고 나서 부처가 아니라 괴로움이 있는 이대로 부처라는 사실. 이 세상에 부조리가 없어지고 나서 불국토가 아니라 부조리가 있는 그대로 불국토라는 사실에 대해서, 왜 그런 얘기를 했는지에 대해서, 아마 점점 더 내가 깨달아 갈 수가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 여기까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성불하십시오. 박수〜
첫댓글 _()()()_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법우님_()_
하이얀마음부처님
예경찬탄수희공덕사바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