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랑스 혁명(Revolution Franc aise)(3) - 바렌사건(Varennes,Affair)
다. 루이 16세의 망명(亡命)실패 - 바렌 사건(1) 이길상
(1) 개혁과 재정보충
베르사이유에서 파리의 튈르리궁전(Tuileries,Palais des)으로 자리를 옮긴 프랑스 왕실은 파리 국민군(Garde national)에 의해서사실상 연금(軟禁)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왕실에 뒤 이어 파리로 이동한 국민의회는무니에 등 반혁명 세력들이 스스로 살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에 혁명파의마음대로 헌법을 제정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따라서 국민의회로서는 더 이상의 혁명은 바라지도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왕권을 제한하고 영국과 같은 의회 중심의 입헌 왕정을세우는데 반대할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의회는 신체제의 건설에 착수하여 주(州)를 폐지하고83개의 현(縣)을 설치하는 등 수많은 행정 ·사법상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삼부회 개최의 실질적 요구사항이었던 적자재정은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1789년 10월 10일, 오툉의 주교(主敎)로서삼부회에 진출한 괴승(怪僧) 탈레랑은 교회의 토지와 재산을 처분하여 적자 재정을메우자는 파격적인 주장을 하였다.
의회는 즉시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시가 30억 리브르에이르는 교회재산을 분할 매각하고, 망명 귀족들의 토지를 몰수 처분해서 파산의 위기는모면하였으나, 그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았다. 카톨릭의 왕국에서 다른 사람 아닌성직자가 성직을 모멸하는 이런 주장을 받아 들이기에는 종교적인 이유말고도 현실적인어려움 또한 많았기 때문이다.
교회 재산이 없으면 제대로 교회를 운영할 수가 없다.그렇다면 지금까지 교회에서 취급하고 있던 호적(戶籍) 사무를 누가 대신하며, 결혼과장례 등 의례(儀禮)에 관한 집전(執典)은 누가 어떻게 해야 되고, 교황의 허락없이단행된 이런 사실을 두고 모든 성직자들이 순종할 리가 없는데, 그렇다면 이들을어떻게 대우해야 하는가?라는 것들이 새로운 문제로 대두된다.
고심 끝에 의회에서는 이들 성직자들을 관리(官吏)로임명하고, 국가가 봉급을 지불해야 한다는 타협적인 안건을 가결하였다. 그렇게 되면성직자도 관료로서 국가와 의회에 선서(宣誓)를 해야 되는데, 사제(司祭)의 1/2,사교(司敎) 135명 중 7명은 1791년 초까지 그럭저럭 선서를 했지만 나머지는 한사코반대했다.
혁명의 칼날이 이들 교회와 성직자들을 가장 먼저겨냥했다면 지금까지 있었던 그 잘잘못은 덮어두고 제 1신분 위치에서 존경받던 것이하루 아침에 버림받는 꼴이 되고 만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도 현실적으로이를 받아들이기에는 그 준비가 너무나 촉박했던 것이다. 이래서 이들은 혁명진영에서떨어져 나간 최초의 이탈자가 되었고, 자연적으로 반혁명 대열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들의 이탈(離脫)은 카톨릭을 깊이 신앙하고 있었던시민과 농민을 혁명에서 이반(離反)시키기는 계기를 만들었고, 또한 토지의 매각과정에서 돈 많은 사람들은 많은 토지를 사들여 더욱 부자가 되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상대적으로 더욱 가난을 느끼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봉건특권이 폐지되었다고는하나 농민들이 영주들의 토지를 사들여 자작농이 된다는 것이 아직은 꿈 같은 일이었다.
여기에 또 하나 악성 인플레이션을 야기시켜 많은사람들을 어렵게 만든 것이 아시냐(assignat)라는 불환지폐(不換紙幣)의 발행이었다.1789년 12월 프랑스 정부는 수도원과 귀족으로부터 몰수한 토지를 담보로 5 %의 이자를주기로 하고 공채(公債) 4억 리브르를 발행하여 할당하고 그 돈으로 재정에 보충하였는데,이를 아시냐라고 한다.
당초 아시냐 공채는 강제 통용력이 인정되지 않았기때문에 화폐라고 할 수 없고 이름 그대로 채권(債券)이었으나, 이듬해 4월부터 발행된4억 리브르는 강제 통용이 인정되고, 이어 같은 해 9월 8억 리브르를 무이자로 발행하여마침내 화폐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아시냐의 잇따른 남발은 발행총액이 담보 토지가액을넘게 되고, 급기야 불환지폐가 되어 경제를 혼란에 빠트렸다. 다시 말하면 실질가치에비해서 터무니 없이 높은 명목가치는 결국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기형적인 발행권(發行卷)구조를초래하여, 액면가로는 1천리브르짜리가 실제로는 3리브르 정도로 통용되었다는 것이다.결국 아시냐의 남발은 그 가치를 곤두박질 치게 만들었고, 이것이 많은 사람들에게피해를 입혔던 것이다.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국민의회에서는 시에예스의제안에 따라 국민들을 납세액을 기준으로 능동적 시민과 수동적 시민으로 분류하고,투표권은 능동적 시민에게만 부여하는 제한 선거제도를 채택하였다. 당시 프랑스의성년 남자는 약 7백만 명, 이 가운데 능동적 시민은 4백 30만 정도, 이들에 의해서선출되는 선거인 수는 약 4만 내지 5만, 이들 소수의 선거인들 만이 의원 선거에관여할 수 있었다.
납세액의 고하에 따라 참정권을 차별화 시켰다는 것은부르주아지 식성에 꼭 맞는 제도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맞추기 위해서는 많은돈을 벌고 고액의 세금을 내야 사람대접을 받게 된다. 이런 시류에 편승해서 자유주의경제를 원칙으로 많은 규제를 철폐하였다. 이렇게 되자 유통(流通)과 생산에 대한규제로 보호받고 있던 도시의 서민들과 공동 방목(放牧)이나 이삭줍기로 연명하던농민은 갑자기 생활에 위협을 받게 되고, 이런 위협은 또 다른 불만을 만들었다.그렇다면 국민의회 안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는가?
(2) 자코뱅 당(Jacobins - 黨)의 성립
국민의회가 파리로 이동한지갓 하루가 지난 1789년 10월 20, 시테섬에서는 민중들에 의해서 식품가게 주인의목이 잘려 가로등에 걸리는 참사가 벌어졌다. 이유는 빵을 감쳐두고 팔지 않았다는것이다.
가게 주인이 자기 물건을 팔지 않았다는 이유로 목이잘리고, 시체가 거리에 나뒹굴게 된다면 혁명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고, 이런 민중의힘이 이제 와서는 귀찮은 존재에 불과하다.
이런 무정부 상태의 혼란을 계속 방치할 수는 없다.그래서 국민의회에서는 바로 그 날 유사시에는 파리 시청에 붉은 기를 세워 1차 경고하고,그래도 소요가 계속되면 무력으로 진압한다는 일종의 계엄 법령을 채택하였다.
이런 법령의 위력(威力)인지 아니면 이해 가을은 오랜만에 풍년이 들어 식량 사정이 많이 좋아진 탓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민중들의 소요는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고 파리는 조용하였다.
지금까지 국민의회를 주도했던 브르통 클럽은 왕정파가다수 탈락하고 그 세력이 현저히 줄었다.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갈 세력의 결집이필요하다. 이런 배경에서 브르통 클럽의 연장선상에서 다시 자코뱅(Jacobins) 클럽이등장하게 되었다.
1789년 11월, 튈르리 궁전의 좁은 방 하나를 의회로사용하던 국민의회 의원들에게 의회와 가까운 생토노레 거리에 있던 자코뱅 수도원에서는수도원의 식당을 이들의 집회 장소로 사용할 수 있도록 빌려 주었다.
여기에 브르통 클럽의 멤버들을 위시한 다수의 국민의회의원들이 모이고, 이들은 뜻 있는 시민들과 합세하여 회원 200 여명으로 수도원의이름을 따서 자코뱅 클럽을 만들었다. 클럽의 목적은 "헌법을 제정을 위한 친구들의모임"이었고, 중심 인물은 라 파예트를 비롯한 혁명적인 인사들이 많이 포함되어있었다.
우리들과는 풍속과 문화가 전혀 다른 지역의 역사를정확히 이해하기란 참으로 어렵고, 간과(看過)하기 쉬운 오류도 수없이 많은 것은어쩔 수 없는 일이다. 프랑스 혁명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자코뱅당을과격파라고만 알고 있는 이미지 역시 잘못된 인식이라 할 수 있다. 왜냐 하면 자코뱅클럽(黨)은 보수적인 왕정의 지지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이런 자코뱅당이 1790년대초기, 입법의회 때는 지롱드 당이라는 온건 공화파로, 다시 산악당이라는 급진적인세력으로 변신하는 등 수 차례에 걸쳐 성격을 달리 한다.
그리고 아무리 혁명이라고는 하나 곧 바로 시민들의세상이 될 수는 없었다. 살롱문화에 몰입되어 있던 인사들이 혁명을 화려하게 장식하고있었고, 삼부회가 시작된 5월 5일부터 왕실이 파리로 옮겨지는 10월 6일까지, 봉건적특권이 부정되고, 인권선언이 발표되었지만 정치적 주도권은 여전히 귀족들이 쥐고있었다.
또 하나, 프랑스 국민들의 정서(情緖)를 이해하는데는우리들로서는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걸핏하면 폭동을 일으키고, 사람의 목을잘라 이를 창이나 대검에 꾀어 달고 다니는 만행(蠻行)을 보고도 부녀자를 포함한일반 시민들이 외면은커녕 냉소적인 찬사를 보냈다면 코피만 흘려도 지레 겁을 내는우리들의 입장에서는 더욱 난해한 일이며, 수 만 명이 단두대의 작두 칼에 목숨을잃게 되는 다음 대목에서는 다만 경악(驚愕)을 금하지 못할 뿐이다.
국민의회의 의장만 하더라도 베르사이유에 있었던6월부터 8월까지 8명이 교체(交替)되었고 그 중 6명이 귀족 출신이었으며, 파리로옮긴 79년 8월 하순에서 91년 가을까지 약 2년 사이에 무려 46명이나 교체되었는데그 가운데 25명이 특권 신분 출신들이었다는 것은 매우 흥미 있는 일이다.
약 30개월 동안 54명의 의장이 자리 바꿈을 했다면,이들의 산술적인 평균수명은 불과 20 일도 못된다. 이것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은보는 사람들의 견해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정치가어렵다고는 해도 조금씩만 양보하고 타협했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그 절반 이상이 특권신분 출신이었다는 것은 어지러운 사회를 통합하는 수단으로입헌군주제도를 선호하고 있었음을 의미하고, 그러면서도 이를 반대하는 모순에 빠져들고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것이 프랑스 혁명이다.
(3) 새로운 실력자들
이런 기류(氣流)에서 단연 두각을나타낸 것은 당시 33세의 귀족 출신 라파예트였다. 파리 국민군 사령관이었고, 인권선언초안(草案)에 깊이 관여했으며, 베르사이유에 있던 국왕과 국민의회를 파리로 옮기는데단연코 수훈(首勳)을 세웠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잘 풀려 나가고, 정치적 실세로서프랑스의 제 1인자가 되었지만 그 자신이 왕이 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왕권을 빌려자신의 세력기반을 굳혀야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왕권에 대한 충실한 옹호자임을밝히고 왕실에 신임을 얻어야 한다.
앞장서서 왕권 제한에 온갖 짓을 다했던 그가 이제는그 왕권에 기생하기 위해서 안달이 났다. 그러나 라파예트가 이런 난제를 풀기 위해서는고도의 정치기술(?)이 있어야 되지만, 이를 요리할 수 있는 예리한 정치감각이 그에게는부족했다.
우선 왕실에 대해서는 자신이 주도하는 혁명파와 손잡기를 촉구하고, 10월 5일에서 6일 사이에 있었던 파리에서 베르사이유까지 그야말로가관이었던 행진의 책임을 오를레앙 공(公)에게 뒤집어 씌우고, 사절(使節)이라는이름을 붙여 그를 런던으로 사실상 추방해 버렸다.
그리고는 사람을 왕비에게 보내어 10월 6일, 민중의폭행을 직접 목격한 후 자신은 왕실에 충성하기로 마음을 돌렸다는 것을 전하고,각서(覺書)라는 형식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이런 내용을 왕실에 제출하였다."......국왕은 고등법원이나 지방의 할거주의(割據主義)와 더 다툴 필요없이 신민(臣民)의자유로운 찬동에 의해서 권위를 가지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이른바 민중들의 10월 행진으로 국왕이튈르리궁전에 연금된 것은 자신과는 전혀 무관한 사실로서, 이는 왕위 찬탈을 노린오를레앙 공(公)의 술책이며, 입헌 왕정을 옹호하는 자신이 있는 한 국왕은 누구의눈치도 살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얄팍한 라파예트의 잔꾀가 그 말 많은 사회에서그대로 통용되고 무사히 넘어 갈 리가 없다. 우선 자신이 몸담고 있던 자코뱅 클럽(당)내부에서 반발이 일어났고, 자주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1790년 4월, 이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라파예트는자코뱅당을 떠나 팔레 루아얄(Palais - Royal)에서 자코뱅 당(黨) 보다 연회비가비싼 보수적인 "1789년 클럽"이라는 걸 만들었고, 시에예스 등 많은 인사들을여기에 참가하였다.
이렇게 다시 세력을 확장하자, 이를 두고 미라보는궁재(宮宰 / majordomus)가 나타났다고 빗대어 비난의 화살을 라파예트를 향해 마구쏘았고, 왕실에서도 생각조차 하기 싫은 10월 행진에서 석연치 못했던 그의 태도가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라파예트를 신임하지 않았다. 궁재가 무엇인가? 프랑크왕국에서메로빙거 왕조를 무너뜨리고 카롤링거 왕조를 연 샤를 마르텔과 그 후손들을 지칭한것이다.
프랑스 혁명이라는 같은 길을 걸었던 라파예트와 미라보사이에는 왕실과의 신임 경쟁에서 벌써 라이벌 관계로 벌어지고 있었다. 곰보 주제에갖가지 추문으로 바람을 몰고 다녔던 미라보는 바스티유 점령 후 왕정에 입각(入閣)을원했고, 이를 추진하기 위해서 왕비에게 접근했다가 거절당하고, 네케르에게 추파를던졌으나 역시 거절 당했다. 그러나 그는 정치라는 마술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일은 철저히 비밀로 감추고, 겉으로는 여전히대중들에게는 인기 있는 혁명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면서 라파예트의 발목을잡고 늘어지자, 라파예트는 미라보에게 투르크 대사(大使)라는 매력있는 직책과 많은돈을 주고 흥정했으나 돈만 받아 먹고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주는 돈은받되 투르크 대사가 되어 외국으로 쫓겨가는 신세가 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그런 한편, 국왕은 현직 의원 가운데 각료(閣僚)를임명해야 한다는 안건을 의회에 제출했다가 비난을 받게 되자 측근을 통해서 왕실의협력을 요청했고, 1790년 5월, 왕실에서는 그를 왕실 고문으로 임명하고, 1 주일(週日)에2회 씩 의견을 제출하는 조건으로 6천 리브르의 월급(月給)과 개인적으로 진 빚 20만리브리를 갚을 돈을 한꺼번에 주었다.
왕실에서 이런 거액을 그에게 주었다면, 그 반대급부역시 대단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흥정의 속 내막은 알 수 없고, 다만 이런파격적인 대우로 미라보는 집을 호화롭게 치장하자 사람들은 그를 배반자라고 몰아부쳤다. 그러나 그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바로 이 지음, 스페인이 영국과의 전쟁 위험에 휩싸이게되자, 선전(宣戰) 및 강화(講和)에 대한 권력을 국왕과 의회 중 누가 가져야 하는가라는중대 현안이 등장하였다. 다시 말하면, 당시 부르봉왕가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스페인과이탈리아에서도 그 왕위를 가지고 있었고, 이들 부르봉왕가들, 즉 프랑스와 스페인과이탈리아는 1721년 "가족 협약"이라는 것을 체결하여 다른 외국과의 전쟁에서공동으로 대응하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스페인이 영국에 선전포고를 한다면 프랑스도자동적으로 영국과 선전포고를 해야 한다.
이 문제를 두고, 왕실과 손 잡은 미라보는 자코뱅당을떠나 1789년 클럽으로 가서 선전과 강화에 관한 대권(大權)은 국왕이 장악해야 된다고열변을 토했고, 그 반대파에서는 이는 당연히 의회가 가져야 한다고 맞섰다.
표결 결과, 국왕은 선전 및 강화를 제안(提案)할 뿐이고,그 결정은 의회(議會)가 한다는 것으로 귀착되었다. 사태는 이렇게 왕정파에 불리한쪽으로 점점 몰리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파리에서는 연맹제(聯盟祭 / f?te de laF?d?ration)라는 이름의 화려한 축제가 열렸다.
(4) 낭시 사건과 왕정파와 혁명파의 대립
1790년 7월 14일, 전국 각처에서 올라온 국민군 대표들이파리의 육군사관학교 연병장인 샹드 마르스(Champ de Mars)에서 바스티유 점령 1주년기념행사를 가졌다.
이 자리에는 국왕과 국민의회 의원들, 그리고 국민군과시민 등 약 30 만 명이 모였고, 지방 대표자들의 깃발 83종, 파리의 각 구역별 깃발60 종, 동원된 악사(樂士) 1800 여명, 미사를 집전할 성직자 약 400 명 등이 참가한대 집회를 열었다.
국민(國民)의 군대(軍隊), 즉 국민군(Garde national/ national army)이란 국왕의 군대인 상비군(常備軍 / Standing army)이나 돈을 받고전투를 치루는 용병(傭兵 / mercenary)과 구분하기 위해서 붙여진 명칭이며, 바로1년전인 1789년 7월 12일, 파리의 선거인 회의가 귀족들의 음모에 대처하기 위해서만들어진 일종의 민병조직이었고, 이것이 전국적으로 확산 조직되어 있었다.
당시의 국민군에는 일정 액 이상의 재산을 소유한유산시민(有産市民)들 만이 입대 자격이 있었고, 청, 홍, 백의 삼색 기장을 표지(標識)로삼아 프랑스 혁명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이런 대집회에서 파리 국민군 사령관 라파예트는 미사가끝나고 전체 국민군 대표로 등단하여 다음과 같은 일장의 연설 겸 선서(宣誓)를 하였다.
"국민과 법, 그리고 국왕에게 영원히 충성을바칠 것, 국민의회가 제정하고 국왕이 승인한 헌법을 유지할 것, 인신(人身) 및 재산의안전과 국내의 곡물 및 모든 식료품의 자유로운 유통과 현행의 국세(國稅) 징수를법이 명하는대로 보호할 것, 영원불멸의 우애(友愛)에 의해서 프랑스인 전체와 합심할것을 여기서 선서(宣誓)한다"........
라파예트의 뒤를 이어 비슷한 내용의 국민의회 의장과국왕의 선서가 끝나자, 군중들은 라파예트에게 접근하여 그의 손이라도 한 번 잡으려고야단 법석을 떨었다. 이것이 화제(話題)의 대 연맹제로서 라파예트 생애의 최고의날이기도 했다. 그러나 라파예트의 인기는 이 날을 고비로 빛을 잃기 시작했는데,그 발단이 된 것이 이른바 낭시사건이라는 것이다.
1790년 8월, 프랑스 북동부의 낭시(Nancy)에서는 국왕의군대인 상비군 내에서 차남(次男)이하 귀족들의 자제들로 구성된 장교(將校)들과제 3신분으로 구성된 하(부)사관 및 사병들과의 충돌이 일어났다. 문제의 발단은장교들의 공금횡령을 사병들이 추궁하자 장교들은 사병들을 부당하게 억압했고, 사병들을동정한 낭시의 시민들과 국민군은 문제의 장교들에게 벌금을 강요했다.
한편 사병들은 이런 사실을 국민의회에 호소하기 위해서대표를 파리에 보냈다. 그런데 라파예트는 사병들의 대표를 체포하고, 다시는 이런사병들의 반항이 없도록 그의 종형(從兄)에 해당하는 부이에 장군을 낭시로 보내고철저하게 진압할 것을 명령했다.
8월 31일, 낭시에 도착한 부이에 장군은 격전 끝에문제의 반항 사병들을 진압하고, 체포된 20 여명을 교수형에 처했다. 이런 일련의사태를 두고, 왕실과 의회의 일부 의원들은 라파예트와 부이에 장군에게 찬사를 보냈다.하지만 이런 일이 무사히 넘어갈 수는 없었다.
9월 3일, 국민의회 앞에서는 낭시의 사병들을 지지하는데모가 벌어지고, 라파예트를 비난하던 무스타로라는 젊은 저럴리스트가 과로(過勞)로쓸어지자 자코뱅당 내에서는 이미 군중 선동에 일가견을 확보한 말더듬이 젊은 변호사데물랭이 다시 라파예트를 비난하는 독설(毒舌)을 내 뱉기 시작했다.
라파예트의 명성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 틈에 미라보는다시 자코뱅당으로 들어가 라파예트를 비난하기 시작했고, 라파예트 역시 1789년클럽에서 인기를 잃게 되자 자코뱅당에 환심을 사려고 애를 썼는가 하면, 연맹제에참가하기 위해서 런던에서 귀국해 있던 오를레앙 공(公) 역시 심복(心腹)을 보내어자코뱅당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했다.
말하자면 자코뱅당이 정치의 구심체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것이고 이들 실력자들 모두가 자코뱅당의 지지를 얻고자 했을 정도로 그 위상이 높아졌다는것이다. 이런 혁명파의 아성(牙城)인 자코뱅당에 라파예트나 미리보, 오를레앙 공을역 이용해서 그 위상을 더 높이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보수적인 라파예트와 미라보, 그리고 오를레앙 공등 이들 세 사람을 언제나 비난했던 급진적인 또 다른 세 사람, 즉 파리 귀족 출신의라메트 백(Lameth, Alexandre Theodore Victor, de comte, / 1760 ~ 1829)과 파리고등법원출신의 뒤포르(Duport Adrien), 그리고 그르노블의 부르주아지 출신 바르나브(Barnave,Antoine Pierre Joseph Marie / 1761 ~ 1793.11.29)가 이들인데, 사람들은 이들 세사람을 3두파(triumvirate)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들이 거물급에 속하는 라파예트와 미라보,오를레앙 공과 맞서기에는 힘이 겨웠다. 그래서 젊은 공격수를 포섭하고 이를 앞장세웠는데 이가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 Maximilien Fran?is Marie Isidore de/ 1758 ~1 794. 7. 28)라는 급진적인 인물이었다.
공포정치 시대의 대명사처럼 등장하는 로베스피에르에대한 평가는 냉혹한 흡혈귀(吸血鬼)에서부터 고상한 성자(聖者)에 이르기 까지 매우다양하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말하기 좋아 하는 사람들의 치사(致辭)일 뿐, 그 역시성실하게 살기를 원했던 한 인간에 불과했다.
프랑스 북부 아라스 출생인 그는 열 살이 되기 전에어머니가 사망하자 변호사였던 아버지는 자취를 감추었다. 불행한 소년시절을 겪은뒤, 파리의 루이르그랑학원에서 법률을 배우고 살롱이 아닌 루소의 저서를 통해서자유주의 사상에 몰입하게 되었다.
1781년 23세 때 아라스에 돌아와 변호사와 아카데미회원 등으로 활약하며 지방 귀족의 살롱에 출입하고 시작(詩作)도하였다. 1789년봄, 삼부회(三部會) 의원에 당선되고, 혁명이 일어나자 브르통 클럽 및 자코뱅당(黨)에가입하는 한편, 청년 변호사 데물랭의 소개로 살롱에 출입하면서 "나는 성실하다"라는테마를 가지고 사교계를 누비고 다녔다고 한다.
무명의 청년으로 삼부회에 진입했던 초기, 누구도그를 눈 여겨 보지 않았다. 이런 그가 자코뱅당 안에서나 의회에서 급진적인 발언을도 맡으면서 유명해 지기 시작했는데, 그 가운데 국민군의 자격을 유산시민으로 제한했던것을 의회가 다시 이를 승인하려 하자, 그 결정에 반대하고 당시 의장이었던 미라보와크게 충돌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을 때 마다 로베스피에르를 앞장세워 보수파를 공격했던 3두파가 어느 사이 미라보에게 매수되어 어느 누구의 편인지알 수 없을 정도로 변신해 버리자 로베스피에르는 3두파까지 공격의 대상으로 삼았다.이를 즈음 1791년 4월 미라보가 죽었다.
미라보가 죽자 그에 대한 각 가지 좋지 못한 소문들이나돌고, 왕실과의 검은 뒷 거래가 폭로되고, 이런 이중적인 미라보의 행동에 격분한군중들은 그의 저택을 불질렀고, 왕실은 3두파에게 미라보의 역할을 대신 맡겼다.
왕실과 손을 잡은 3두파는 혁명파를 멀리하고 논의가거의 끝난 헌법을 보수적으로 수정하기 시작했다. 1791년 5월, 로베스피에르는 3두파를정면으로 공격했지만 의회에서 로베스피에르의 세력이 아직은 미미했다. 다수의 힘으로왕권의 회복을 추진한 3두파는 자신만만 하게 선언했다. "혁명은 끝났다...평등을제한하고, 자유를 억제하며, 분별 없는 여론을 통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이미 세상은 궁정파와 혁명파로 크게 갈라지고,궁정파에 반대하는 절대 다수의 혁명지지 세력이 규합하는 경우, 사태는 어디까지악화될지 알 수 없는 긴장과 불안이 뒤 따랐다. 이런 혁명세력을 규합하기 위해서의회 내에서는 로베스피에르가 열변을 토하고 있었고, 의회 밖에서는 당통(Danton,Georges Jacques / 1759 ~ 1794. 4. 5)과 마라(Marat, Jean Paul / 1743 ~ 1793.7. 13)가 이를 지원하고 있었다.
세상 인심은 다시 험악해 지고, 죽은 미라보의 저택이습격 당하고, 3두파는 공격을 받고, 왕실은 불안 속에 휘말리고, 결국 국왕은 비밀리에진행 중이던 파리에서의 탈출을 서두르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