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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132:1-18) 세 가지 법궤
1. 여호와여 다윗을 위하여 그의 모든 겸손을 기억하소서
2. 그가 여호와께 맹세하며 야곱의 전능자에게 서원하기를
3. 내가 내 장막 집에 들어가지 아니하며 내 침상에 오르지 아니하고
4. 내 눈으로 잠들게 하지 아니하며 내 눈꺼풀로 졸게 하지 아니하기를
5.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 하였나이다
6. 우리가 그것이 에브라다에 있다 함을 들었더니 나무 밭에서 찾았도다
7. 우리가 그의 계신 곳으로 들어가서 그의 발등상 앞에서 엎드려 예배하리로다
8.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권능의 궤와 함께 평안한 곳으로 들어가소서
13.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14.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15. 내가 이 성의 식료품에 풍족히 복을 주고 떡으로 그 빈민을 만족하게 하리로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세 가지 법궤>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성전으로 올라가며 부르는 노래가 계속 됩니다. 성전에는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법궤가 있습니다. 법궤는 하나님께서 강림하시고 임재하시는 곳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매개물입니다. 좀 더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이 창조주로 하늘과 땅을 지으셨고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이 창조주와 피조물이 어떤 공식적인 입장과 관계를 떠나서, 창조주 하나님께서 나를 1:1 인격적으로 만나주시는 유일한 장소가 법궤가 안치되어 있는 성막이었습니다. 이제 성전으로 올라가면 법궤가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하게 됩니다. 성전으로 올라가는 순례자들의 법궤에 대한 바른 태도를 지금 노래하고 있는 것이에요.
법궤는 세 가지가 아니지요. “잃어버린 법궤를 찾아서”라는 영화도 있었습니다만, 영화의 내용에서 처럼 세 가지 중에 어느 한 가지를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법궤는 하나예요. 우리가 어떤 태도로 법궤를 대하느냐에 따라서 세 가지 양상을 띠고 나타나는 겁니다. 그래서 세 가지 법궤라는 말을 했어요.
나는 어떤 법궤로 대하고 있는가?
법궤는 하나님이 내 삶에 오셔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함께 하시기 위한 매개물이에요. 그럼 이제 이 땅에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기준으로 세 가지 태도가 있다는 것이에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세 가지 태도는 첫 번째, 다윗의 태도요. 두 번째는 본문 6-7절에 “우리가 그것이 에브라다에 있다 함을 들었더니 나무 밭에서 찾았도다.”라고 나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법궤를 상실했던 이야기를 지금 여기서 하는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법궤를 상실했던 적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 상실했던 때에 법궤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가짐이고, 6절이 암시하는 바로는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가져다가 어떻게 대했는가 하는 법궤에 대한 태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태도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매개물이 법궤인데,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이 세상에서 나와 동행하신다는 그 사실에 대해서 어떤 태도로 대하는지 신앙을 점검해 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자, 먼저 법궤를 잃어버렸을 때의 태도를 우리가 한 번 생각해보시지요. 사무엘상 5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에벤에셀에서 진치고 있다가 블레셋과 싸움을 벌이게 됩니다. 첫 번째 싸움에서 이스라엘 군인 4,000명이 죽는 참패를 당하게 돼서 의논하기를 법궤를 가지고 와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전쟁을 이기도록 하게 하자고 합니다. 굉장하지요. 4,000명이 죽고 사기가 떨어져서 온 이스라엘 진영에 우울함의 먹구름이 아주 짙게 드리워져 있을 때에 법궤가 진영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 군인들이 얼마나 크게 환영하고 기뻐했느냐면 땅이 울렸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블레셋 진영에서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냐고 하는데 정탐꾼이 이스라엘이 법궤를 가져왔다고 합니다. 광야에서 기적을 일으키고 애굽을 멸망시켰던 그 신이 이들과 함께 한다고 하면서 블레셋 사람들이 벌벌 떨었어요. 이때 블레셋 대장이 떨지 말고 용기를 갖으라고 독려해서 전쟁이 붙었거든요. 이스라엘의 사기가 하늘을 찔렀어요. 이번에는 작살을 내리라고 마음먹고 붙었는데 웬걸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어요. 그리고 법궤를 탈취당합니다.
법궤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상징물인데 어떻게 쉽게 잊히고 아무런 힘도 못쓰고 이렇게 되어버리고 맙니까? 여기서 잘못 된 것이 뭡니까? 뭐가 잘못되었는지 여러분이 한 번 대답해 보세요.
법궤를 앞세우고 갈 때에 정말 그 사막에서 다가오는 모든 죽음의 힘을 이겨냈고,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정복을 할 때도 법궤를 앞세우고 제사장들이 걸어가면서, 열세에 있던 이스라엘이 강대한 가나안 왕국들을 다 정복해 들어갔는데, 왜 이렇게 법궤까지 빼앗기게 되는 일이 벌어졌는지 생각을 한 번 해보시지요. 환호하고 기뻐했어요. 마치 대 부흥회를 연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마음속으로 한 번 짐작을 하시면서 다윗의 이야기를 볼까요?
다윗이 3-5절에 “내가 내 장막 집에 들어가지 아니하며 내 침상에 오르지 아니하고 내 눈으로 잠들게 하지 아니하며 내 눈꺼풀로 졸게 하지 아니하기를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 하였나이다.”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법궤를 안치하는 성막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성막이 지어지기 전까지는 내 처소에 들어가서 먹고 자는 일을 하지도 않을 것이고 눈꺼풀로 감기게 하는 것도 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좀 더 의역해서 말하면 8절에 “주의 권능의 궤와 함께 평안한 곳으로 들어가소서.”라고 하는데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내 삶에 아주 편안하게 머무실 수 있도록 하기 전까지는, 장막에 들어가서 밥 먹고 사는 일도 안 할 뿐 아니라, 졸려 죽겠어도 침상에 누워서 잠도 안 자겠다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러면 이 다윗의 태도와 블레셋과 전쟁을 할 당시의 이스라엘의 태도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입니까? 여호수아 시절의 전쟁을 보면 하나님의 법궤 앞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싸우라고 하면 싸웠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을 좀 더 다른 말로 바꾸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정복이라고 하는 대 과업을 수행해나갈 때에, 그 전쟁을 하느냐 마느냐를 판단하고 전쟁의 필요성을 느끼는 주체가 이스라엘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쟁이고 그들이 살 땅을 정복하는 일이었지만, 그 필요를 느끼는 주체가 하나님이었다는 거예요.
여호수아가 전쟁을 치를 때에는 반드시 법궤 앞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듣습니다. “여리고 성을 내가 멸절 시키리라, 아이 성을 내가 무찌르리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고 했다가는 여호수와도 패배했어요.
블레셋과 전쟁해서 법궤를 뺏길 때의 문제는, 자기들이 블레셋과 싸워야 될 필요를 느끼고 스스로 전쟁을 벌여놓은 다음에 하나님을 모셔온 거예요. 하나님이 임재할 필요를 느낀 겁니다.
‘내가 먼저 전쟁을 해야겠다.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해야 되겠다. 내가 내 삶의 필요를 느낀 다음에, 내가 판단한 다음에 내가 어디를 가야 되겠다. 오늘 무엇을 사야 되겠다.’라고 내가 필요를 느낀 다음에 ‘하나님 좀 잘되게 해주세요.’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법궤는 종잇조각에 불과하게 하나님이 방치해 버리십니다. 다시 말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절대 함께하지 않으신다는 거예요.
반면에 다윗의 태도를 한 번 보세요. 장막에 들어가서 추위를 피하고 밥을 먹고 침상에 올라가서 잠을 자야 되는 것은 원초적인 필요입니다. 그런데 4-5절에 '내 눈으로 잠들게 하지 아니하며 내 눈꺼풀로 졸게 하지 아니하기를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 하였나이다.'라고 합니다.
잠은 절대 필요예요. 그렇지만 먹고 자는 이 일보다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게 여호와 하나님이 나와 함께 거하시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법궤를 안전한 곳에 안치하는 것은 법궤가 하나님이 내려오시는 장소이므로 하나님께서 내 삶 한 가운데에서 나와 함께 하시는 일이 내가 잠자고 먹는 것보다 더 급하고 더 필요한 일로 생각하고 더 앞서는 일이라고 믿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법궤가 참으로 법궤가 되려면, 하나님이 이 땅에 진짜로 내려오셔서 나와 함께 하시려면 우리가 느끼는 필요는 어떤 필요라야 됩니까?
‘하나님! 돈이 필요한데, 우리 자식이 좋은 대학 들어가야 하는데, 내가 바이어를 만나서 설득시켜야 되는데’라고 하는 필요를 느끼기 이전에 ‘먼저 내 안에 하나님이 계셔야 하는데, 하나님이 충만하게 내 마음 가운데 임하셔야 하는데’라는 이 필요를 느끼는 거예요. 잠자지 말라는 거예요. 먹지도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내 안에 평안히 거하시는 것이 확인되지 않는 한, 먹지도 말고 잠자지도 말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다윗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니까 하늘의 평강이 내 마음에 차지도 않고, 주어진 환경과 상황에 대해서 감사도 없고 기쁨도 없어요. 그건 하나님이 내 마음에 차지 않았다는 말인데 내가 필요를 느낍니다.
‘누구한테 전화를 해야 되겠구나. 전화해서 설득시키고 납득시켜서 돈이라도 좀 빌려달라고 해야지. 누구를 납득시켜서 내 필요를 채워달라고 해야지’라고 결정했어요.
어느 은행 지점장님에게 전화해서 대출 승인을 받으려고 결정했어요. 그게 내 필요로 확인이 됐어요. 그 다음에 기도합니다. ‘하나님 내가 전화걸 때에 능력주시고, 지점장님의 마음을 강권적으로 변화시켜서 대출이 가능하게 해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게 터무니없다는 거예요. 내가 먼저 블레셋과 전쟁을 벌려놓고 실패했습니다. 그 때 깨닫습니다. 우리가 앞서 세운 이 모든 계획들이 잘 되려면 법궤를 가지고 오자고 하는데 이건 아니란 말입니다.
사무엘상 5장을 보면 기가 막혀요. 법궤가 들어올 때에 땅이 진동하도록 환호를 합니다. 그런데 그 법궤가 그 상황에서 뭘 말하느냐하면, ‘우리가 소원하는 전쟁의 승리를 약속해 주리라.’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법궤 안에 말씀이 들어 있는데, 그 말씀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어떻게 들렸냐면 ‘우리가 먼저 결정해서, 우리가 느껴서, 우리가 필요를 실감하며 시작한 이 전쟁을 승리의 전쟁으로 바꾸어 주리라.’라는 것과 같은 거예요.
이런 것과 같아요. 내가 먼저 건강의 필요를 느끼면 이 때 말씀이 주어집니다. 건강하게 해주실 것이라고 할 때에 아멘! 아멘! 하는 것과 똑같아요.
내가 먼저 필요를 느껴서 일을 해 놓고, 그 소원하고 계획한 일들이 잘 되게 해달라고 할 때에 부흥사님들이 ‘네 소원대로 되리라.’라고 합니다. 그러면 아멘! 할렐루야! 하고 땅이 진동하는 거예요. 블레셋 사람들이 겁을 먹었어요. 너무 소리가 크니까.
여러분 이런 기독교는 없어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다윗의 태도를 보세요. 잠자는 것과 밥 먹는 것의 절대필요보다 앞서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먼저 편안히 내 마음에 거하실 수 있어야 된다고 믿는 겁니다.
그리고 세 번째 태도가 블레셋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법궤를 빼앗았어요. 법궤가 노획물이 되었습니다. 다곤 신전 안에 들여놨어요. 이게 뭐냐면 이스라엘 사람들을 출애굽 시켰던 강한 신이 우리 다곤 신에게 붙잡혀서 노획물이 되었다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나의 강함을 드러내는 하나의 장식물이 되었습니다. 나의 높음과 나의 잘남과 나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하나의 장식물이 되어버렸어요.
이게 중세시대 때 교회가 세상적인 힘을 갖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된 모든 행동들이 교회의 강함을 드러낸 것이에요. 어떤 장로님의 명함에 ‘어느 회사 대표이사 / 서울 모 교회 장로’라는 말이 새겨져있어요. 이런 게 다 그런 것이에요.
100억 1000억씩 들여서 수입한 이태리제 화려한 대리석으로 바닥을 깔아놓은 교회에 가는 이유가 뭐예요? 그곳에 생명이 있어서 갑니까? 정말 그래요? 생명이 뭔데요? 생명이 뭔 줄 알아요? 그럼 왜 가요? ‘그 교회 굉장하던데. 그 교회 휴게실이 뭐 강남에 있는 카페보다 더 화려하던데.’라고 합니다.
제가 섬기던 어느 교회에서 새신자들에게 조사를 했어요. 왜 이 교회에 왔느냐고 물었더니 기가 막힌 대답을 합니다. 절반이 넘는 비율이 시설이 좋아서 왔대요. 바로 이러한 태도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강함을 드러내고 나의 잘남을 드러내는 하나의 계기가 되는 거예요. 이때에 하나님이 다곤 신상의 목을 부러뜨리고 팔목을 부러뜨리고 그 온 땅에 독종을 창궐하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노획물이 아니고 장식품이 아니에요. 나의 잘남과 나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하나의 장식물이 아니에요. 목사님들 중에 그런 분들 계세요. 저도 그랬어요. 뭐냐? ‘온 세계를 복음으로 덮어버릴 수 있는 전도자가 되게 해주시옵소서.’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내 인생의 꽃을 피우기 위한 장식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이건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위대함을 전하고 다니는 것이지요. 이런 세 가지 태도가 있다는 겁니다.
다윗의 태도를 본받아야지요. 잠자고 먹는 절대 필요보다 더 앞서서 필요한 게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실 수 있을까? 예수님이 그러셨어요. 네 가지 밭을 말하시면서 가시밭을 뭐라고 하시냐면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라고 했어요.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은’ 자식 걱정, 미래 걱정, 건강 걱정, 직장 걱정, 사업 걱정 이런 걱정들이 세상 걱정인데 세상 걱정을 왜 해요? 내가 필요를 느끼는데 그 필요가 주어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 아닙니까? ‘내 자식 성적이 이 정도는 필요한데, 내 자식이 어느 대학은 들어가야 하는데, 내 건강이 이 정도는 필요한데, 내 사업이 이 정도는 돼야 하는데.’라고 하는 이게 가시방석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들어와 계시기에 가시방석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들어와 계시려면 이 땅에 대한 어떤 필요에 앞서서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는 것입니다.
잠자는 것 얼마나 필요합니까? 그 필요를 나무랄 사람이 누가 있어요? 그런데 그 잠자는 필요보다 먼저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법궤가 안치될 수 있는 장막을 발견하기까지는 내가 잠도 안 자겠다는 다윗의 말이 우리의 생활 속으로 들어오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이 세상에 대한 걱정들에 대해 다 죽겠다. 그래서 가시가 다 제거 되고. 왜냐하면 세상걱정이 다 가시니까. 이 세상 걱정이 가시이고, 재물의 유혹이 가시이고, 돈 걱정하는 게 가시라고요. 어떤 가시? 하나님의 엉덩이를 찔러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없게 만드는 가시.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만이 우리 마음의 가시를 제거합니다. 다 죽어야 돼요.
‘걱정하는 대상들이 다 죽어서 하나님이 편안하게 내 마음 안에 거하실 수 있기 전까지는 먹지도 않고 잠도 안자겠다. 일도 시작하지 않겠다.’라고 말하면 거창한 것 같아요?
아침에 일어나서 홈 채플 하시면 됩니다. 저 목회하면서 그럽니다. 어떤 교인이 삐친 것 같아요. 마음에 걸려요. 김 집사님 마음에 걸리고 박 집사님이 마음에 걸려요. 그러면 전화해서 말로 설득하고 사이를 좋게 하고 싶잖아요. 필요를 느끼는 거예요. 필요를 느끼고 행동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마음을 움직여 주세요.’라고 하는 건 사기라는 거예요. 이건 목회가 아닙니다. 먼저 그 삐친 것 같은 김집사님에 대한 걱정이 마음에서 죽는 거예요. 목사가 목회 현장에 대해서 죽습니다.
오늘 14절에 말씀하신 것 같이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라고 하는데 시온이 하나님에게 그렇다는 겁니다.
이제 우리 마음이 시온이 되어야 돼요. 하나님이 거주할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시장에 가신다든지 추석이라서 뭐 사러가고 음식을 만들고 이런 모든 필요 이전에, 하나님이 내 안에 충분히 충만하게 거하시는 것에 대한 필요를 먼저 느끼시고,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셔서 내 마음이 온전한 평강과 감사로 차기 전까지는 추석 일 하지 마세요. 잠도 자지 마세요. 아침에 일 시작하지 마요. 밥 먹지 마요. 한 시간 기도하면 그렇게 돼요. 그리고 나면 내 삶의 필요를 내가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느끼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그런 말이 있잖아요. 하나님이 시온에 들어오시는 것처럼 들어오셨더니, 15절에 “내가 이 성의 식료품에 풍족히 복을 주고 떡으로 그 빈민을 만족하게 하리로다.”라고 나옵니다.
필요한 것들을 채워 주신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내 안에 거시하시는 것이 우선적인 필요라고 느끼는 거예요. 하나님을 충만히 모시기 전까지는 마음가짐을 갖지 마세요. 여러분에게 빕니다. 제발 갖지 마시고 하나님으로 먼저 충만해지세요. 그 다음에 하나님이 느끼시는 필요를 따라 움직이세요.
세 가지 법궤 중에 다윗의 법궤.
법궤는 하나님이 내려오시는 곳이에요.
다윗의 법궤에 대한 태도, 그 태도로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이제 그만하게 해주시옵소서. 내가 필요를 느끼고 이래야 되겠다. 저래야 되겠다. 어디를 가야 되겠다. 무엇을 사야 되겠다. 누구에게 연락을 해야 되겠다. 하나님! 내가 느끼는 필요대로 움직이면 내 인생이 점점 왜곡됩니다. 먼저 주님의 십자가 바라보며 한 가지 행동을 하기 이전에, 단 한 가지 사소한 마음가짐을 결정하여 갖기 이전에 하나님이 내 안에 평안히 들어와 계시는가를 묻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