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할아버지의 재주를 물러 받아서인지 손재주가 제법있었다.어릴 때"아마 국민학교 1학년때"부터 토끼 몇마리를 기르기 시작했다.어느날 어머니께 사정해서 처음에는 토끼 한쌍을 샀다.그후 학교에 갔다 오면서 토끼풀을 뜯어 와서 토끼에게 주면 아삭아삭 씹어 먹는 것을 보먼서 신기 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다.다 먹으면 동네 뒷산에 올라가서 또 뜯어왔다.내 생각과 눈은 온통 토끼풀에 쏠려 있었다.
그 어린 고사리손으로 어머니가 사주신 옛날 사과상자의 가운데에 칸을 막고 먹이주는 문을 별도로 만들고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못질 하다가 잘못하면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장도리로 찍어 다치기 일쑤였다.그러면 어머니는 조심하라면서 다시는 안사주겠다고 했지만 내가 잘하겠다고 떼쓰면 또 사주셨다.이렇게 해서 토끼집도 세개가 되었고 토끼도 6마리로 늘었다.어느덧 몇번 새끼처서 팔기도 하면서 늘어난 것이다.그런데 어느날 우리 마을과 반대편인 청용리에 사는 박종선이가 우리 마을 친척인 운섭이집에 놀러왔다가 우리집에 와서 밥을 먹고 자기가 오리를 많이 기르고 있으니 오리 세마리와 토끼두마리를 바꾸자고 한것 이다.아마 그때값이 그정도가 되었나 보다.그 어렸을 때 우리는 물물거래를 한 것이다.그때가 아마 국민학고 4학년때쯤 인것 같다. 이로 해서 우리는 더 친해졌다.방과 후에는 종선이는 자기집에 가지 않고 오리 보러 온다고 우리집에 자주왔다.그러면서 그는 "사실 오리본다는 것은 핑게고 너의 집에 가면 항상 쌀밥과 감자.고구마가 많이 있어서 먹으러 갔다.너는 그야말로 왕자님이었지.우리도 너보고 왕자님이라고 했잖아?"했다.후일 종선이를 만나면 그런 말(왕자님)을 자주 했지만 나는 그것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오리 보러 온 것만 기억 하고...
그런데 오리의 특성이 어릴 때는 잘 넘어지고 또 넘어지면 못일어나서 죽는다고 밖으로 데리고 나갈 때는 주의하라고 일러 주었다.그래서 아침 저녁으로 밖으로 나갈 때는 조심스레 집앞 바다로 데리고 나갔다가 30분쯤 있다가 데리고 오곤했다.
어느덧 오리는 잘도 커서 삼년 후쯤에는 20여 마리로 불어났다.오리 집은 처음에는 집 문지방밑을 사용했으나 오리와 토끼 또 닭까지 길러 집왼쪽 마당에 아예 큰집을 지었다.이 공사는 너무 커서 친척인 고성현이 형에게 어머니가 부탁해서 지었고 나는 심부름만 해주었다.성현이형은 당시 배뭇으러 다니는데 조수로 따라 다니고 있었다.한편 종선이는 또끼를 가지고 가서 며칠만에 죽었다는 것이었다.
중학교 2학년초 광주로 올 때 오리는 30여 마리였는데 그것을 팔아서 용돈을 만들었다.
몇년후 고향에 가서 보먼 오리가 수백 마리로 늘어나서 이때쯤은 제법 소규모 오리농장이 되었다.
나중에 서울로 와서 내가 대학교 다닐 때 종선이는 중구 신당동 달동네에서 살면서 공장에 다니고 있었는데 가끔 만나면 "석홍아.너는 오리 잘 길러서 대학교까지 다니는데 나는 토끼 잘못길러서 공장뜨기가 되었다.우리가 비록 토끼.오리 사돈간이면서도" 하면서 웃었다.
실로 종선이는 아주 똑똑한 아이였다.후일 영등포구 신림동에서 "희망의 섬(완도를 바라본다는 뜻)"이라는 상호로 횟집을 크게 했고 돈도 제법 많이 벌었는데,건강이 좋지 않아 낙향했고 지금은 논밭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1989년쯤이었다.우리는 강남 도곡동에서 성내동 주택으로 이사와서 15년정도 살면서 가까운 곳.중흥교회 옆에 삼층 신축중인 집이 있어서 부부가 맘에 들어 계약하자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전날 꿈에 그옛날 종선이 집에서 데리고 온 오리 세마리가 문지방쪽으로 아장아장 걸어오고있는데 내가 문턱을 내려오면서 실수로 오리를 밟아 버렸다.나는 너무도 깜짝 놀라 발을 떼는 순간 그 오리 세마리가 수십마리로 새끼처서 마당에 쭉~~펼쳐지는 것이었다.그래서.아~~이것은 길몽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꿈이야기를오전에 하면 복이 달아난다는 속설이 생각나서 꾹 참고서 계약을 끝낸 후 집에 와서 집사람에게 꿈이야기를 했더니 아내도 돼지꿈을 꿨는데 똑 같은 생각으로 말을 하지않았다고 했다.
그집에는 방이 12개 있었는데.삼층 3개와 옥탑방을 우리가 쓰다가 아내가 피아노 전공을 했기 때문에 나중에 아래쪽 방 3개까지 합처서 "전윈 피아노"라는 간판을 걸고 20여년간 피아노 학원을 운영했다.그 당시는 거의 대부분 학부모들이 피아노를 가르치는 것이 흐름이었다.학생들이 많을 때는 70-80명정도 되었고 월수입도 500여만원 정도 되었다.당시 나는 풀무윈 이사였지만 급여는 200만원 남짓되었다.그래서 내가 당신보다 수입이 두배도 더되니 나를 상무라고불러요라고 하면서 웃기도 했다.
1989년 당시 내 차는 르망이었고, 아내는 포니2였고,3억 짜리집,월수입 부부 합산해서 700만원 정도였다.완도 섬에서 태어나서 방한칸 50만원 전세에서 시작해서 25년만에 이룬 노력의 결과였다.그보다 훨씬좋은 결과를 이루어 낸 사람들도 많지만 주위의 어떠한 도움도 받지 않고 이루기는 결코 쉽지 않다.이것이 종선이 말대로 토끼와 오리의 중매 결과가 아니였을까?지금쯤 종선이 만나 옛날이야기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