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의 초장지 분석
박정해(한양대학교 동양문화학과 교수)
사도세자의 초장지 분석
단종과 사도세자는 조선시대 비운의 인물로 회자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단종은 어려서 삼촌인 수양대군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 죽임을 당한 인물이라면,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은 인물이다. 둘 다 제대로 꽃을 피워보지 못하고 삼촌과 아버지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면서,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불러왔다. 사도세자의 죽음과 그의 무덤터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효자였던 정조가 명당을 찾아 이장하는 모습이 극적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흉지에 묻혀있던 사도세자를 안타까워만 하다가 왕위에 오르자 사도세자의 묘를 명당을 찾아 이장하는 모습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그림이 한편의 서사시처럼 비치는 것도 많은 사람들을 감동하게 만들었다.
사도세자가 죽은 후 첫번째 후보지로 거론된 곳은 현재의 동구릉이 우선 거론되었다. 길지라 해서 효종을 안장했던 녕릉이 있던 자리인데, 그 빈터를 사도세자의 무덤터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노론들의 반대로 인해 영조는 이곳의 사용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후 다시 거론된 곳이 배봉산 자락이다.
이곳을 선정하는데 관여한 풍수가들은 한결같이 명당이라 주장한다. 사도세자묘도소감의궤 산론별단(山論別單)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먼저 안재건은 “삼각산으로 부터 출맥하여 갑묘로 행룡을 하고, 갑좌는 자손이 조상과 짝하는 법이다. 그 밑으로 임해방으로 맥이 떨어지는데 즉, 갑좌의 생방이 된다. 의릉주산 밑으로 오이나 등나무가 똬리를 틀듯 성봉을 일으키고 평지에서 굴곡을 하여 도두에 이르고 건해맥 또한 갑좌의 생기다. 들 가운데서 높이 일어난 용이 형세를 전환해서 오정맥이 되니 갑좌의 후천이고, 정방의 맥은 갑좌의 息효가 되며, 입수맥은 묘룡이니 갑좌의 쌍산이 된다. 뇌후가 중후하여 혈은 토성체의 혈을 만드니 이것이 소위 방서에서 말하는 목성이 흙을 뚫는 것이다. 용혈이 지극히 묘해서 신들이 논의한 바 지난날에 비해 특별함이 있는데 자세함을 어찌 다 아뢸 수 있겠습니까?”라고 한다. 이어 관상감 교수 박상순은 “미천한 신이 보건데, 용은 삼각산으로 부터 수유현을 낮게 지나 의릉의 과협을 지나가는 법은 구불구불하고, 크게 솟았다 엎드린 형국은 화락하고 조용하며 용세는 단정하고 혈성은 풍륭하다. 조대는 수려하고 수세는 감싸고 있어 모두 이치에 부합된다. 십리에 걸쳐 서리고 얽혀있는 것이 회룡고조형이며, 물이 현무를 감고 있다. 형국은 비록 작으나 역량은 커서 상등 극길지라고 일컬을 만하다.”라고 한다. 김정상은 “미천한 신이 산천을 자세히 살펴보면 삼각산으로 부터 행용하여 3번 평지와 계곡을 지나 들판 가운데서 특별히 성봉을 일으켜 험한 살기를 벗은 용으로 국세는 회룡고조의 세가 된다. 혈형은 단정하고 묘하며, 물은 굽어 혈을 감싸니 헤아려 봤을 때 모든 법에 부합된다. 물은 현무를 감싸고 조대는 수려하며 나성은 좌우로 벌려 땅은 비록 작지만 세는 또한 지극히 크다. 명승대길지로 오래갈 땅이다.”라고 한다. 좌향에 대해서는 “우선정룡 묘입수 갑좌경향 경인경신분금 정득수 임파”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세명의 풍수사들은 모두 길지라고 극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조 자신도 이곳을 명당이라 극찬하고 있다. 일성록에 따르면, 정조는 범인(凡人)의 눈으로 보아도 용세(龍勢)와 형국이 사면을 에워싸고 있으니 참으로 하늘이 만든 터라 할 만 하다고 하고, 또 참석한 좌의정 홍낙성과 판부사 김익 등 대신들 또한 산세(山勢)에 대해서는 “신들의 어리석은 소견으로 말씀드리더라도 참으로 태평만세의 땅이니, 더욱 기쁘고 다행스럽기 그지없습니다.”라고 하여 대단한 길지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영우원을 흉지라 판단하고 이장을 하겠다는 정조의 의지가 강하게 나타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성덕임)의 죽음이다. 대가 끊기는 것은 물론 사랑하는 성덕임의 죽음은 정조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고 이곳이 명당이 아니라는 인식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천장은 자연스럽게 거론되었는데, 박명원의 상소는 천장을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아, 병오년 5월과 9월의 변고를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성상께서 외로이 홀로 위에 계시며 해는 점점 서산으로 기울어 가는데 아직까지 뒤를 이을 자손이 더디어지고 있습니다. 옛날 영종 대왕 7년 신해년에 장릉(長陵)을 천장할 때, 대신과 여러 재신(宰臣)들이 무신년 이후로 중외(中外)에 공경하고 삼가야 한다는 마음이 있다 하여 주문공(朱文公)의 혈식 구원(血食久遠)이란 말을 이끌어 어전으로 가서 다시 길지(吉地)를 골라 천장해서 국운을 장구하게 하기를 건의하였는데, 실로 지금까지 그 덕을 힘입고 있습니다. 이미 선왕조의 고사(故事)가 있고 보면 더욱 오늘날에 천장할 수 있는 분명한 증거가 됩니다. 바라건대 조정에 있는 신하들에게 널리 물으시고 지사(地師)들을 널리 불러 모아 길흉을 물으시어 신도(神道)를 편안하게 하시고 성상의 효성을 펴시어 천추만대의 원대한 계책이 되게 하소서. 正祖實錄, 정조13년 7월 11일(乙未)
영조 4년(1728년) 효장세자(孝章世子)가 사망하자, 영조 7년(1731) 인조의 장릉을 천장한다. 이후 영조 11년(1735) 사도세자가 탄생하게 되는데, 이를 명당에 천장을 함으로써 가능한 일이라 생각한 것이다. 따라서 명당을 찾아 천장을 하면, 다시금 왕자가 태어나는 등 종묘사직을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이 상소의 주된 내용이다. 이후 정조는 사도세자의 영우원이 명당이 아닌 흉지라는 정반대의 시각을 드러내게 된다. “용・혈・사・수에 하자가 많고 길격이 없으며, 외형은 형국을 이루지 못했고, 지하는 재환(災患)이 염려된다.”고 한다. 또 “대저 혈성(穴星)은 생기(生氣)가 없는 사토(死土)다. 지극히 말하기 어려운 근심이 있으니, 앞의 관성(官星)과 뒤의 귀성(鬼星)이 이미 격을 이루지 못하였고, 조산(朝山)과 조수(朝水)는 더욱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안으로는 갑좌(甲坐)가 되고 밖에는 묘좌(卯坐)가 되며, 신방(辛方)과 술방(戌方)이 득수가 되고 해방(亥方)이 파문이 되며, 갑(甲)・묘(卯)가 모두 목(木)이다. 신방과 술방의 물은 이른바 황천득수(黃泉得水)이고 내당(內堂)에는 물이 없으니, 한쪽에 있는 물만 가지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하여 극히 부정적으로 바뀌게 된다. 더욱이 물이 현무를 감아 도는 것은 길격이라고 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박명원조차 흉지라고 주장하게 된다. 이때 정조는 비통한 심정을 드러내게 되는데, 현륭원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아, 이 불초한 소자(小子)가 하늘에 사무치고 땅 끝까지 뻗치는 원한을 품고서도 멍청하고 구차하게 흙처럼 바위처럼 오늘까지 죽지 않고 있던 것은 자식으로서 뒤를 이어 중대한 책임을 지고 부모님의 크나큰 축원을 대신이나마 이루어 볼까하는 기대에서였습니다. 弘齋全書 卷之16, 誌
정조는 효심으로 가득한 모습을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문효세자(文孝世子, 1782-1786)의 죽음을 비롯한 자손의 번창이 없음을 안타까워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풍수를 활용코자 하였다. 자신의 바람을 실현키 위해 명당으로 이장하고픈 맘이 컸던 만큼, 이를 확보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다.
그런데 우연에 일치이겠지만,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를 화성으로 이장(정조 13년, 1789)하고 그렇게 바라던 자식이 그다음 해인 정조 14년(1790)에 태어난 것이다. 이를 풍수적인 관점에서 보면, 명당으로 이장이 곧바로 자손의 탄생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이를 입증할 방법이 현재로서는 없다. 다만 이를 무시하기도 어려운 것이 사실인 바, 우리가 풍수를 사랑하고 공부하는 이유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억지스러운 논리로 포장하면 풍수가 가진 장점을 제대로 부각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에 내몰린다는 점에서 조금은 자제할 필요가 있다.
왕세자 즉 훗날의 순조는 1790년 6월 18일에 태어났는데, 이해는 공자가 탄생한 노양공(魯襄公) 22년(기원전 551)과 똑같은 경술년이다. 또 태어난 날은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가 태어난 날과 똑같은 6월 18일이라고 하는 등 조금은 호들갑을 떨고 있다. 그렇지만 정조는 원자의 탄생을 기뻐하며, “나라의 형세는 유지해 나아갈 기쁨이 있고 전궁(殿宮)은 손자를 안는 경사가 났으니 그 기쁨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다. 이때 정조는 원자의 탄생이 곧 아버지 사도세자를 명당으로 천장한 결과라는 믿음을 강하게 드러낸다.
2. 사도세자의 초장지 확인
사도세자의 초장지에 대해 살펴보면, 현재의 서울 중랑구 휘경동 29-1번지가 사도세자의 초장지로 추정할 수 있다. 이곳에는 현재 삼육대학교 병원이 들어서 있다. <조선일보> 1968년 11월 21일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첫번째 무덤 영우원(永祐園) 휘경동(徽慶洞) 뒷산서 발견(發見)’이라는 보도가 있다. 보도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0일 뒤주에 가두어 굶겨 죽였던 사도세자(思悼世子, 21대 영조의 아들이며 정조의 아버지)의 첫번째 무덤이었던 영우원(永祐園)터가 발견되었다. 이날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29의 1번지 서울위생병원 뒷산 간호학교 신축지를 닦다가 지하 5m지점에서 돌상자(길이 1m, 폭 50cm, 높이 75cm) 두 개를 발견, 열어보니 그 돌상자 속에 납석으로 된 상자가 또 있었고 그 안에 상아쪽에 쓰인 천릉문(遷陵文)이 적혀 있었다. 왕조실록에 보면 영조 38년(1762년)에 죽은 세자는 중랑천 위 배봉산에 묻었다가 그 후 수원 융릉(隆陵)으로 이장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봉분(封墳)을 하지 않았기에 그 장소를 몰랐던 것이다. 이날 이 출토물을 보고 고증한 문화재위원회 위원장 김상기(金庠基) 박사는 동 공사장이 사도세자의 천릉 전의 능인 영우원임을 확인하고 왕릉을 옮기는 제도연구에 최초며 귀중한 자료로서 뜻이 있다고 말하였다.<조선일보> 1968년 11월 21일자.
조선일보의 보도 내용을 중심으로 초장지를 살펴보면, 삼육대병원 뒷쪽의 간호대 건물터가 초장지라는 것이라는 것이다.『홍재전서』에는 사도세자의 묘를 천장하고 관련 부장품을 천광한 자리에 그대로 묻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석물등은 청룡자락 바깥에 역시 묻었다고 하는 내용과 부합한다.
당시 사도세자의 초장지를 그린 영우원도와 일제때 지적도 등을 바탕으로 사도세자의 초장지를 유추하면 현재의 삼육대병원 자리가 해당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