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가 비서 오선직을 야산에게 보내다.
1949년 여름, 김구가 잠시 공주 마곡사에 거처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김구는 자신의 제자이며 개인비서인 오선직을 야산에게 보내 이런저런 일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그러면서 은연중에 야산과 합작하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마침 야산은 태극지하종교연합회를 결성해 많은 단체와 함께하고 있던 터였다. 이런 이유로 김구는 자신의 입지를 단단히 하기 위해 야산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더 나아가 합작 의사까지 내비친 것이다.
그러나 야산은 자신은 일개 연구가일 뿐인데 어찌 정치에 간섭할 수 있겠느냐며 거절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오선직이 재고해달라고 다시 애기를 꺼냈다. 야산은 "자고로 작당지폐는 사화의 원인이라. 마땅히 임천에 누워서 음풍영월하고 소요자적을 누리며 후진양성에 힘쓰리라" 하며 거절의 뜻을 거듭 내비쳤다. 그러면서 다음 글을 적어주었다.
구름이 모여 비를 내리는데
금수에서부터 모든 초목에 이르기까지
한쪽은 기뻐하고 한쪽은 슬퍼하네
미친개가 고깃덩어리를 보면
범이 가까이 있어도 알지 못한다네.
김구의 신변을 염려한 글이다. 이글을 주며 지금은 때가 아니니 앞으로 5년은 들어가 있으라고 전했다.
이 일이 있고 얼마 후 야산은 회갑을 맞는다. 회갑을 며칠 앞두고 가족과 제자들이 잔치를 준비한다며 부산하게 움직이자 낌새를 눈치챈 야산이 강화만을 데리고 슬그머니 이리 묵동에 갔다. 묵동에는 박씨 부인이 계속 살고 있었는데 참기를을 내다 팔며 고달프게 생활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느닷없이 방문한 야산을 반갑게 맞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왜 환갑을..
========================================================================================
이승만은 양녕대군의 18세손이라 한다. 태종의 장남 양녕이 차남 효녕과 함께 충녕, 즉 세종에게 왕위를 양보했다는 일화는 지금도 미담으로 전한다. 일설에 따르면 양녕대군이 후손들에게 "내가 죽거들랑 상석이나 비석도 만들지 말고 겸손하게 하라"고 유언했다 한다. 하지만 먼 훗날의 후손들이 비석을 세웠는데 일제에게 강점되기 전날, 벼락이 쳐 그 비석이 깨졌다 한다. 이러한 양녕과 효녕의 미덕을 담은 이 시는 주역을 지은 문황의 아버지였던 왕계도 태백과 중옹 두 형의 양보로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함께 전하면서 양녕의 후손인 이승만은 어째서 조상의 절개를 잇지 못하는지 비판한 것이다. 앞서 야산이 복벽문제로 고초를 겪었다 했는데 이 시를 보면 그가 전혀 뜻을 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