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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운동을 단순히 운동에 그친 것으로 축소시켜서는 않된다.
왜내하면 동학운동의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오늘의 한국의 기조가 뿌리하고 있기 때문이고
세계의 모든 약소국가들 특히 이민족지배하의 중국, 300년 식민지배의인도, 동남아 . 아랍의 군소민족이
국가로서의 발돋음을 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 우녿ㅇ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동학군은 조선의 관굱은 물론이고, 청국군, 일본군을 상대로한 3개의 국가정규군과 잔쟁한 군대이기 때문에
마땅히 전쟁이라는 이름이 붙을 만 하다.
조선봉건사회는 지주·전호제를 토대로 하고 봉건적 신분제를 상부구조로 하면서, 신분에 따른 차별적 인간관계를 옹호하는 성리학을 지배이데올로기로 하여 성립되고 유지되고 있었다.
17세기 후반 이래 경작기술의 발달과 보급, 수리시설과 농기구의 개선, 새로운 경작조직 및 경작술을 담은 농서보급 등이 이루어지면서 조선의 농업생산력은 꾸준히 늘어났다. 그에 따라 초보적 형태의 시장이 발달하는 등 화폐경제적 요소도 점차 도입되었다. 이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격동을 경험한 조선사회에는 서서히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올 씨앗들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농민 가운데 계층분화가 일어나 토지를 잃고 소작농으로, 나아가 아예 토지에서 떨려나 유민으로 전락하는가 하면, 토지를 집적하여 부농으로 상승, 고용노동을 바탕으로 한 광작경영으로 나아가는 사람도 생겨났다. 다른 한편으로는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상당한 규모의 상업자본을 축적하는 계층이 나타나 사상도고(私商都賈)로 성장하였는데, 이들 가운데 일부는 선대제(先代制) 등 자본주의적 상업체제의 요소를 도입하기도 했다. 또한 수공업과 광업 부문의 경영에서도 자본제의 싹이라 할 만한 질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부를 축적한 평민들은 신분적 특권을 사들여 납세자의 자리를 벗어났고 반면에 많은 농민이 몰락하여 걸인이나 다름없는 유민이 되었다. 양반 계층은 비록 오랫동안 관계에 진출하지 못하여 평민보다 더 못한 처지로 몰락하였더라도 담세의무를 지지 않았으므로, 담세의무자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여기에서 세금을 가로채는 등 중간관료들의 부패와 농간까지 가세하자, 봉건국가는 경제적 기초를 확보하기 위해 남아 있는 전호농민들에게 점점 더 많은 부담을 지웠다.
봉건국가와 지주, 그리고 그들로부터 이중의 부담에 짓눌린 전호농민 사이에는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적대감의 골이 깊어갔다. 농민들은 자본제적 생산관계의 싹이 자라남과 함께 봉건제의 껍질을 깨고 나가야 할 신흥세력들과 더불어 서서히 봉건제적 모순을 해결할 역사적 담당자의 자리로 나아갔다.
기존의 신분제와 그것을 토대로 한 조세체계를 이완시키고 나아가 봉건적 체제 자체를 동요시키며 새로운 사회를 이끌어낼 세력을 형성시키는 이 변화의 과정은 18세기를 지나 19세기에 이르면서 점점 더 빨리, 폭 넓게 진전되어 체제 전반을 뒤흔들었다. 각종 미봉적 조치로 기존의 체제를 보완하려는 무력한 지배층의 안간힘 속에 모순은 오히려 깊어만갔다.
19세기로 접어들자 세도정치가 자행되어 소수 문벌관료집단이 국사를 좌우하는 가운데 통치체제는 완전히 이완되었고, 이에 편승한 봉건지배세력들은 착취의 강도와 범위를 더욱 넓혀갔다. 이에 따라 수취체계는 극도로 문란해지고 국가 재정은 궁핍해졌으며 농민은 겨우 그날그날을 이어갈 뿐 내일의 일을 알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조선 봉건통치체제의 말기적 증상은 전정, 군정, 환정 즉, 삼정의 문란으로 대표된다. 농토에서 산출되는 수확에 대해 세금을 거두는 전정과 군역에 나가지 않는 사람에게 대신 군포를 받는 군정, 재난을 당한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 제정되었던 환정은 모두 관리들의 축재 수단이 되었다. 삼정을 이용한 관리들의 돈벌이 수법은 더 갈 곳이 없을 만큼 비열하고 가혹했다.
한편, 안정적인 원자재 공급지와 상품시장을 찾아 전 세계를 더듬던 자본주의 열강의 손길은 18세기 후반 이래로 조선에까지 미쳤다. 19세기 중엽에 들어서면서 더욱 자주 ‘이양선’을 타고 조선 해안에 나타난 그들은 통상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군사적 침략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병인양요(1866, 프랑스)와 신미양요(1871, 미국)가 일어났으며, 민씨 일파가 세력을 잡은 이후인 1876년에는 조선과 일본이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를 맺기에 이르렀다. 이는 조선이 맺은 최초의 근대적 불평등 조약이다. 조선은 그 뒤를 이어 미국, 중국, 독일, 영국,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와 차례로 통상조약을 맺어 마침내 여러 자본주의 열강의 본격적인 침탈 앞에 놓이게 되었다.
밀려 들어오는 외국자본과 상품의 물결 속에서, 18세기 이래 조금씩 성장해오던 조선의 자생적 자본제의 싹은 익사하거나 성장을 억제당했다. 특히 가장 먼저, 가장 깊이 조선에 침투한 일본은 강화도조약 이후 부산, 원산, 제물포, 경흥 등 항구를 차례로 개항시키고는 직물을 비롯한 각종 상품을 유럽에서 가져와 엄청난 폭리를 남기며 팔아 넘겼다. 1890년대로 들어서면서는 이윽고 자기 나라의 상품을 조선의 시장에 풀기 시작했다.
일본산 면직물이 쏟아져 들어오자, 농가의 부업이나 가내수공업으로 생산되던 조선의 면제품이 밀려나고 잇달아 조선의 면화 농사도 회생하기 힘든 타격을 받았다. 또한 일본은 막대한 양의 쌀을 조선에서 사들여 자기 나라에 가서는 다섯 배의 값을 받고 팔았다. 이렇게 대량으로 쌀이 유출됨으로써 조선의 쌀값이 오르자, 세금을 내거나 고리대를 갚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헐값으로 일본인에게 쌀을 판 조선의 농민은 다시 비싼 값에 쌀을 사먹는 악순환에 빠져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처럼 나라 안팎에서 조여드는 질곡 속에서, 살길을 찾으려는 민중들의 크고 작은 몸부림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민중의 자각과 역량은 점차 성숙되어, 화적이 되기도 하고 무리를 지어 양반 집을 습격하거나 중앙으로 운반되는 세금을 탈취하는 등 고립분산적인 저항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분산적인 저항의 시기를 거쳐 1812년의 관서농민전쟁(홍경래난)이나 1862년 삼남지방을 휩쓴 임술농민항쟁처럼 지속적이며 지역적 연계와 조직을 가진, 그리고 어느 정도의 이념성까지 지닌 저항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관서농민전쟁은 당시 성장하고 있던 사상인층과 몰락 양반이 연합하고 농민들이 주축이 되어 약 넉 달 동안 평안도 일대를 장악하고 봉건정부와 맞선 투쟁이다. 이 농민전쟁은 조선 최초의 대규모 농민투쟁으로서 그후의 농민투쟁에 큰 영향을 주었다. 임술농민항쟁은 진주 병사 백낙신의 탐학을 계기로 진주, 단성, 함양 등지에서 일어난 후 인근 전라도 지방과 충청도, 제주도, 함경도, 황해도까지 번진 전국적 규모의 투쟁이었다. 이 밖에도 19세기는 농민항쟁의 시기라 할 만큼 전국 각지에서 농민의 봉기가 자주 일어났다.
이 가운데 민중의 삶 속에 스며들어 고단한 삶을 위로하고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이념적 구심역할을 하던 정감록의 예언이나 미륵신앙, 후천개벽사상 등 민중사상의 여러 갈래들은 19세기 중후반에 이르러 동학이라는 큰 줄기로 모아졌다. 동학은 그간의 여러 민중사상을 수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학으로 대표되는 외세에 대한 대응자세까지를 포괄하는 것이었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의 외침은, 그것을 종교로서 받아들이는가 아닌가를 막론하고, 무언가가 일어나 이 기막힌 상태를 끝내고 숨통 트이는 세상이 열리기를 갈망하던 사람들 사이로 대숲의 바람처럼 소리를 내며 재빨리 퍼졌다. 동학에 들어오는 사람은 점차 늘어갔는데 이들 가운데는 종교로서의 동학보다 변혁의 기미를 찾아 모여드는 사람이 많았다. 이에 대해 최시형은 진정한 진리를 문답하려고 들어오는 자가 적다고 탄식하였다. 호남과 호서에는 동학도가 늘어났고, 갖가지 구실로 민중의 피를 우리던 지방 수령들은 동학을 믿는다는 것을 빌미로 하여 농민들의 재물을 빼앗았다.
동학도들을 포함한 농민들은 조금씩 뒤척이기 시작했다. 이 뒤척임은 조금씩 강도를 높여가다가 마침내 1894년 농민전쟁으로 이어질 것이었다. 1892년에는 서인주와 서병학 등의 주도로 공주와 삼례에서 동학도들이 모여, 억울하게 죽은 교조 최제우의 명예를 회복(교조신원)시키고 동학포교를 인정해줄 것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들의 교조신원운동은 그 자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상황에서 요구되던 사회운동의 실마리를 만들려는 것이었다. 삼례집회에 참석했던 농민 가운데 수천 명은 전주로 몰려가 감사에게 관리와 토호들의 불법과 탐학을 호소하며 감사의 시정 약속을 받아낼 때까지 감영문 밖에서 버티었다.
그러나 교조신원과 동학포교의 인정 등 종교적 범위로 목표를 국한하고 있던 북접계는 전라 감사의 회유적인 글을 받자 곧 해산하였다. 관리와 토호의 수탈 등 사회적 모순의 해결에 더 관심을 두던 남접계와 북접계 사이의 입장 차이는 이때부터 표면화되어 1894년 농민전쟁의 전 과정을 통해 따라붙으면서 투쟁의 발목을 잡게 된다.
다음해인 1893년 음력 2월(이하 날짜 표기는 모두 음력임)에 동학도들은 서울로 올라와 광화문 앞에 엎드려 교조신원과 포교 허용을 요구하는 상소운동을 벌인다. 이들은 ‘각자 집에 돌아가 생업에 종사하고 있으면 그 소원에 따라 시행’하겠다는 내용의 고종의 전교를 받자 상소를 중단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상소운동을 이 수준에서 마무리하려는 것은 최시형 등 북접계의 뜻이었을 뿐 남접계는 한양 거리에 ‘척왜양’(斥倭洋)을 외치는 괘서를 걸어 반외세의 뜻을 분명히 했다.
같은 시기에 전라도 삼례에서는 전봉준의 주도로 수천 명이 모여, 동학을 사도(邪道)로 칭하지 말며 외국 선교사와 상인은 나라 밖으로 쫓아내고 탐학한 지방 관리를 제거하라는 세 가지 요구를 전라 감사에게 들이대며 집회를 가졌다. 위의 요구들이 전라 감사의 권한으로는 다 해결될 수 없는 것임을 확인한 농민들은 20명의 대표를 뽑아 서울로 보냈다. 이들은 한양 거리 곳곳에 자신들의 요구를 적은 방문을 내걸었고, 이러한 운동은 전라도, 충청도, 그리고 부산까지 ‘척왜양’의 물결을 퍼뜨렸다. 이어 3월에는 충청도 보은과 전라도 원평, 경상도 밀양에서 각각 집회가 벌어졌다.
한양에서 상소운동과 척왜양운동이 있은 후 조선 정부는 각지에 동학을 금지하고 그 지도자를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를 빌미로 동학도에 대한 지방 관리의 탐학은 한층 더 심해졌다. 상대적으로 부유한 계층이 많았던 까닭에 관리들의 표적이 되어 나날이 생명과 재산을 위협받던 북접계 교도들에게, 포교를 인정받는 것은 이제 더욱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3월 11일, 북접의 최시형은 교도들을 보은으로 불러모았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은 각자가 놓인 처지와 성향에 따라 봉건정부에 대한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 보은 장내리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척왜양창의’(斥倭洋倡儀)라 적힌 기를 내걸어 신원운동의 차원이 아니라 반외세의 정치적 성격을 분명히 함을 드러냈다. 자기들이 생각한 범위를 넘어 일이 진행되는 데 당황하고 있던 북접계는 ‘각자 집으로 가 자신의 일에 충실하면 용서하겠다’는 선무사 어윤중의 회유문을 받자, 남접과 자기들은 다르니 옥석을 가려 다루어달라며 투쟁의 대오를 벗어났다. 이로써 보은집회는 맥없이 흩어졌다.
조소리에서 바라본 두승산정읍에서 고부로 가다 만나는 두승산은 높이 444m로 호남평야 일대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산 정상에 오르면 호남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에는 유선사라는 작은 절이 있다. 인연이 닿아 절에서 하룻밤을 묵는다면, 새벽녘 산 이쪽저쪽 마을에서 닭울음 소리가 들려오며 호남평야에 어둠이 걷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원평에서는 전봉준 계열이 주도한 집회가 열렸다. 전봉준은 휘하의 사람들을 보은으로 보내 방문을 내거는 등 보은집회의 성격을 반외세 정치운동으로 이끌어내는 한편, 곧장 서울로 진격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보은집회가 북접 지도부의 투항적 자세로 인해 해산되면서 이들의 상경은 불발에 그쳤고 원평집회도 해산되었다. 전봉준의 상경 계획에 따라 수만의 군중을 불러모았던 밀양집회 또한 보은집회가 해산된 후 흩어졌다. 보은, 원평, 밀양에서 벌어진 ‘삼남집회’ 이후 전봉준은 봉건정부의 수배를 받게 되었고 동학 교단에서도 위험인물로 주목받았다.
전봉준은 척왜양운동과 삼남집회를 총괄하면서, 더욱 강력하고 명확한 정치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준비를 진행하였다.
오늘날 고부는 정읍시에 딸린 면이지만 갑오년 당시에는 정읍보다 더 세력이 컸던 곳으로, 인근 지역 쌀의 집산지이자 상업의 중심지로서 넓은 평야와 28개의 주변 촌락을 거느린 가장 번성한 고을이었다. 줄포, 염포, 동진, 사포와 같은 주위의 나루들을 통하여 어선과 상선이 활발하게 왕래했고 주변에서 나는 농산물과 수산물이 이곳에 모였다. 지방 관리들의 학정과 탐학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이곳은 중앙 관리들이 뒷돈과 권세를 동원하여 서로 부임하려고 노리던 ‘물 좋은’ 고장이었다. 당연히 고부 농민들은 갖가지 세금과 잦은 부역에 시달리며 역대 수령들에게 이모저모로 뜯기느라 고달프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1892년 5월에 고부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오자마자 온갖 가렴주구를 일삼았다. 부잣집에는 공연히 시비를 걸어 부모에게 불효하고 동기간에 화목하지 못하다거나 간음을 했다며 죄를 뒤집어씌워 재산을 빼앗았다. 또 태인 현감을 지낸 자기 아버지의 송덕비를 세운다고 돈을 거두었고, 무고한 사람을 잡아들였다가 돈을 받고 풀어주었으며, 각종 세금을 부당하게 받아 가로챘다.
조병갑의 학정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것은 농민을 함부로 징발하고 남의 산에서 수백 년 묵은 소나무를 베어다 쓰면서 보를 쌓고는 물세를 거두어들인 것이었다. 원래 정읍천 아래에는 배들평 농민들이 쌓아 물을 끌어다 쓰던 만석보가 있었다. 조병갑은 그 바로 아래 정읍천과 태인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새로 보를 쌓게 하였다. 이 새 만석보는 쓸데없이 높아 홍수가 지면 오히려 범람하여 상류의 논들이 피해를 입었다. 거기다 가을이 되자, 첫해에는 수세를 물리지 않겠다던 약속을 어기고 좋은 논에서는 한 마지기당 두 말, 나쁜 논에서는 한 말씩 수세를 걷었다.
농민들은 수십 명씩 관아로 가서 보세를 감해달라고 진정했으나 오히려 난민(亂民) 취급을 받고 잡혀 들어가거나 쫓겨났다. 이러한 진정은 현실적으로는 아무런 성과도 거둘 수 없었으나 고부 군민들에게는 합법적 방법의 한계를 똑똑히 알려주는 귀중한 경험이었다.
1893년 11월 초순, 전봉준 등 19명의 농민 지도자들은 송씨 집성촌인 서부면 죽산마을(지금의 정읍군(현: 정읍시)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 송두호의 집을 도소로 삼고, 봉기의 당위성을 말하는 격문과 행동목표를 쓴 사발통문을 작성했다.
“······낫네 낫서 난리가 낫서 에이 참 잘 되얏지 그양 이대로 지내서야 백성이 한 사람이나 어데 남어 잇겟나 하면서 기일이 오기만 기다리더라······.”
이렇게 세상이 뒤바뀌기를 바라는 당시 민중의 심정과 4개항의 행동목표를 담은 사발통문은, 고부봉기 및 뒤이은 농민전쟁이 참다 못해 들고 일어선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라 애초부터 뚜렷한 의식을 가지고 계획된 운동이었음을 분명히 알려준다.
구체적으로 봉기를 준비하면서 날짜를 정하는 일만 남긴 상태에서, 11월 30일 조병갑이 익산 군수로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뜯을 것 많은 고부를 떠나고 싶지 않았던 그는 익산으로 가지 않고 뭉개더니 뒷손을 써서 한 달 뒤인 1월 9일에 다시 고부 군수로 부임했다. 고부 사람들의 입에서는 걱정과 울분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 때는 왔다. 전봉준은 이 계기를 낚아챘다.
1월 10일 밤, 배들평(梨坪) 말목장터에는 머리에 수건을 동이고 손에 손에 농기구와 죽창을 든 농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말목장터는 부안, 태인, 정읍으로 향하는 길이 교차하는 삼거리에 있어서 사람들이 모이기 좋은 곳이었고, 전봉준의 집이 있는 조소마을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었다. 긴장과 기대로 열이 오른 눈빛을 횃불 빛에 번쩍이면서, 그들은 두 패로 나뉘어 고부 관아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20여 리 떨어진 관아까지 가는 동안, 지나치는 마을마다에서 농민들이 합류하여 사람들의 수는 점점 더 불어났다.
1월 11일 새벽, 고부 관아는 쉽게 점령되었다. 조병갑은 이미 도망 간 후였다. 농민들은 옥문을 열어 억울하게 갇힌 사람들을 풀어주고 창고를 헐어 양곡을 나눠주고 무기를 나눠가졌다. 일부가 새 만석보를 무너뜨리러 달려가는 한편, 일부는 백산으로 가서 성을 쌓았다. 전봉준 등 지도부는 수백 명의 농민들과 함께 인근 고을을 돌며 봉기가 성공했음을 알리고 관헌과 토호를 선무(宣憮)하여 수탈한 재산을 농민에게 돌려주도록 했다. 이들은 1월 25일 지형상 공격과 수비에 유리한 백산으로 진을 옮겼다.
고부봉기가 일어나자 정부에서는 용안 현감이던 박원명을 고부 군수로 임명하고 당시 장흥 부사였던 이용태를 고부 안핵사로 겸직 발령했다. 이용태는 전봉준 군사의 위력을 겁내 병이 났다는 핑계를 대고는 전주 감영으로 토벌군을 받으러 가지 않고 뭉기적거렸다.
전봉준은 김도삼, 정일서, 최경선 등의 보좌를 받으며 고부군의 제반 일들을 처리했다. 이때 그는 관내 각 마을 동장과 집강 등 기존 행정망을 통해 조병갑의 악정을 조사하여 바로잡고 세금을 돌려주는 등의 일을 추진함으로써, 관의 하부 기관 인사들까지 끌어들이는 정치감각을 보였다. 이는 전주화약 이후 집강소 통치 때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2월 말에 고부에 부임한 신임 군수 박원명은 ‘모든 것이 고부군의 잘못이었으며, 조용히 돌아가 농사 지으며 편안히 지낸다면 뜻을 받들어 읍폐를 시정하겠다’고 유화책을 썼다. 이 유화책이 농민 사이에 먹혀들고 농번기가 가까워오자 많은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갔다. 3월 초, 전봉준과 다른 지도자들은 박원명을 만나본 후 군사를 해산하기로 결정하고, 그간 확보한 무기를 말목장터 부근에 숨겨놓고 고부를 떠났다.
1. 고부성을 부수고 조병갑을 목벨 것
2.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것
3. 군수에게 아부하여 인민을 침해한 탐학한 구실아치를 징치할 것
4. 전주 감영을 함락하고 서울로 곧바로 올라갈 것
안핵사 이용태는 전봉준이 군사를 해산한 뒤에야 8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부리나케 달려왔다. 그는 그동안 임무를 방기한 자기의 약점을 덮으려는 듯, 난민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고부군 관내를 구석구석 뒤지며 살인과 방화, 약탈을 자행하고 백성을 엮어 잡아들였다. 또 이 과정에서 이 사람 저 사람을 동학당이라고 몰아 돈을 우려내기를 잊지 않았다. 이용태의 만행은 흩어졌던 봉기 참가자들을 다시 들끓게 했다.
한편, 고부봉기를 해산한 후 전봉준은 더욱더 본격적인 기병을 준비하였다. 그는 무장현의 동학 대접주 손화중과 태인의 김개남, 원평의 김덕명 등 전라도 남접계의 주요 인물 모두를 설득하여 손을 잡았다. 그중에서도 손화중은 1892년에 선운사 동불암 마애불에서 세상을 바꿀 비결을 꺼냈다는 소문이 퍼진 후 그의 포로 사람이 몰려들어, 단일 접으로서는 전국 동학교단 가운데서 최대의 조직을 이끌고 있었다. 그는 무장, 고창, 부안 일대에서 조직을 넓히고 있었으며 인근 사람들 사이에 명성도 높았다. 손화중의 조직과 세력을 끌어들임으로써 농민군은 큰 세력을 얻게 되었다. 이때 손을 잡은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은 황토재 전투에 이어 장성 전투, 전주 점령 등 이후 농민전쟁의 전개과정에서 줄곧 행동을 함께했다.
마침내 3월 20일, 무장에 모인 4천여 명의 농민군은 호남창의소 이름으로 ‘탐학한 관리를 제거하여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음으로써 나라의 근본인 백성을 살려내는 것’이 거사의 목적임을 밝히는 창의문을 선포하고 군사를 일으켰다. 이것이 이른바 제1차 기병으로, 이로써 본격적인 농민전쟁은 시작되었다.
무장을 출발한 농민군은 태인의 최경선이 조직해놓은 300여 명을 합류시킨 후 곧장 고부로 짓쳐들어가 그날 밤으로 고부성을 점령했다. 이용태는 이미 달아나고 없었다. 농민군은 행정 사무를 장악하는 한편 옥문을 열어 이용태가 잡아넣은 사람들을 풀어주고, 군기고를 열어 무기를 거두었으며, 죽창을 만들어 총이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주었다.
3월 25일에는 다시 백산으로 본진을 옮겼다. 창의문을 보고 “옳다, 이제는 되었다. 하늘이 어찌 무심하랴” 하며 사방에서 죽창을 들고 몰려오는 농민군으로 인해 백산은 사람산이 되었다. 그들이 서면 온 산이 흰옷 입은 사람으로 덮이고 또 앉으면 손에 손에 쥔 죽창이 빽빽하였으므로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군사가 이렇게 늘자 전봉준은 그들을 본격적 군대로 재편성했다. 총관령에 손화중과 김개남, 총참모에 김덕명과 오시영, 영솔장에 최경선, 비서에 송희옥과 정백현이 임명되었으며 전봉준은 총대장으로 추대되었다.
농민군은 백산에서 군대의 행동지침인 4대 강령과, 일반 백성과 하급 관리들에게 동참을 권하는 격문을 발표한 후 3월 26일경 전라 감영이 있는 전주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보국안민’ 넉 자가 뚜렷이 적힌 총대장 전봉준의 대장기를 앞세우고 오색 깃발로 부대를 구별하며 각종 깃발의 움직임에 따라 행동을 통제하면서 절도 있게 행군해가는 농민군 대열을 향해, 멀리서 가까이서 사람들은 속속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무기는 죽창, 활과 화살, 창, 구식 화승총 정도로 변변치가 못했다. 농민군은 행군 도중에 지나는 고을 관아의 무기를 거두고 각 고을 관아와 부유한 자들에게서 조직적으로 군량과 무기, 군수물자를 징발하였다.
농민군 지도자 가운데 전봉준,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은 뒷날 체포되어 서울에서 재판을 받고 나란히 처형되기까지 그야말로 생사를 함께하였다.
세상에서 사람을 가장 귀하다고 여기는 것은 인륜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군신부자는 인륜의 가장 큰 것이다. 인군(人君)이 어질고 신하가 곧으며 아비가 사랑하고 아들이 효도한 후에야 나라가 무강의 역(域)에 미쳐가는 것이다. 지금 우리 성상은 어질고 효성스럽고 자상하고 자애하며 정신이 밝아 총명하고 지혜가 있으니 현량하고 방정한 신하가 있어서 그 총명을 보좌한다면 요순의 덕화와 문경의 다스림을 가히 바랄 수 있으리라.
그러나 오늘의 신하된 자들은 보국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한갓 녹위만 도적질하여 총명을 가리고 아부와 아첨만을 일삼아 충성되이 간하는 말을 요언이라 이르고 정직한 사람을 비도라 하여 안으로는 보국의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백성을 탐학하는 관리가 많도다. 인민의 마음은 날로 변하여 생업을 즐길 수 없고 나아가 몸을 보존할 계책이 없다. 학정이 날로 심하고 원성은 그치지 아니하니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윤리와 상하의 명분은 무너지고 말았다.
관자가 말하기를 ‘사유(四維)가 펴지지 못하면 나라가 멸망하고 만다’고 하였는데 오늘의 형세는 옛날보다 더욱 심하다. 공경부터 방백수령까지 모두 국가의 위태로움은 생각지 아니하고 한갓 자신을 살찌우는 것과 가문을 빛내는 데에만 급급하여 사람 선발하는 문을 돈벌이로 볼 뿐이며 응시의 장소를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으로 만들었다. 허다한 돈과 뇌물은 국고로 들어가지 않고 도리어 개인의 배만 채우고 있다. 국가에는 누적된 빚이 있으나 갚을 생각은 아니하고 교만과 사치와 음란과 더러운 일만을 거리낌없이 자행하니 팔도는 어육이 되고 만민은 도탄에 빠졌다. 수재(守宰)의 탐학에 백성이 어찌 곤궁치 아니하랴.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 근본이 쇠잔하면 나라도 망하는 것이다. 보국안민의 방책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밖으로는 향제(鄕第)를 설치하여 오로지 제몸만을 위하고 부질없이 국록만을 도적질하는 것이 어찌 옳은 일이라 하겠는가.
우리는 비록 초야의 유민이지만 임금의 토지를 부쳐먹고 임금의 옷을 입고 사니 어찌 국가의 존망을 앉아서 보기만 하겠는가. 팔도가 마음을 합하고 수많은 백성이 뜻을 모아 이제 의로운 깃발을 들어 보국안민으로써 사생의 맹세를 하노니, 금일의 광경은 비록 놀랄 만한 일이기는 하나 경동(輕動)하지 말고 각자 그 생업에 편안히 하여 함께 태평세월을 빌고 임금의 덕화(德化)를 누리게 되면 천만다행이겠노라.
갑오 3월 20일
호남창의소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4대 강령(1894년 3월 25일)
1. 사람을 죽이지 말고 가축을 잡아먹지 말라.
2. 충효를 다하고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라.
3. 왜놈을 몰아내고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는다.
4. 군사를 몰아 서울로 쳐들어가 권귀(權貴)를 모두 없앤다.
격문(1894년 3월 27일)
우리가 의를 들어 이에 이름은 그 본의가 결코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 속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다 두고자 함이다.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구축하고자 함이다. 양반과 부호 앞에서 고통을 받는 민중들과, 방백과 수령 밑에서 굴욕을 받는 소리(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라,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돌이키지 못하리라.
갑오 3월 27일
호남창의대장소 재백산
고부를 나선 농민군이 태인을 들이치고 부안 동헌을 공격하는 등 주변 고을을 석권하고 있을 무렵, 전라 감사 김문현은 감영군과 보부상패로 이루어진 연합군을 고부로 출동시키고 조정에서는 홍계훈을 양호 초토사로 임명하여 장위영 병정 800명과 신식무기를 주어 전함에 태워 군산항으로 파견했다.
4월 초, 감영군과 보부상군 1,300여 명은 거들먹거리며 약탈을 일삼고 한창 자라는 보리밭을 멋대로 짓밟으며 고부로 진격해왔다. 그러나 이 지역의 지형에 익숙한 농민군은 이들을 정읍군 덕천면의 황토재로 유인하여, 4월 6일 밤부터 4월 7일 새벽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완전히 쳐부쉈다. 이것이 농민군이 처음으로 관군과 맞붙어서 큰 승리를 거둔 황토재 전투이다. 관군의 시체는 황토재 논바닥에 널려 있었는데, 그들의 규율이 형편 없었음을 말해주듯 주머니는 오는 길에 약탈한 물건들이 가득했고, 전사자 중에는 남자로 변장한 여자도 상당수 섞여 있었다고 한다.
황토재 전투에서 농민군이 대승을 거두자 ‘조선은 전봉준의 손에 달렸고 세상은 동학군의 천지가 된다’, ‘전대장은 신출귀몰하는 재주가 있고 바람을 타고 구름을 타며 천하장사이며 세상에 다시 없는 영웅이다’, ‘전대장은 총검에 맞아도 죽지 않고 적의 총구멍에서 물이 나오게 하는 법술이 있고 조화가 비상한 사람’이라는 등의 풍설이 돌 정도로 농민군과 지도자 전봉준의 성가는 높아졌다.
1대 교주 최제우가 순교한 후, ‘최보따리’라는 별명이 생길 만큼 수도 없이 보따리를 싸는 도피생활을 하면서 동학교문을 넓히고 있던 최시형은 관변의 박해를 걱정하여 애초부터 무장봉기를 강력히 반대했었다. 황토재 전투에서 승리한 후 전봉준의 이름이 높아지자, 최시형은 다시 전봉준에게 ‘망동하지 말고 진리를 더욱 궁구하여 천명을 어기지 말라’는 경고문을 보냈다. 그러나 전봉준의 기치 아래로 들어간 동학 접주들은 교주의 말을 무시하고 전봉준과 함께 움직였다.
황토재에서 이긴 농민군은 그날로 정읍 관아를 점령하고 뒤이어 흥덕, 고창, 무장을 점령했으며 영광, 함평, 장성까지 내달았다. 농민군은 닿는 곳마다 관아의 무기를 접수하고 무고한 죄수들을 풀어주었으며, 원한을 산 토호들과 향리들을 처벌하고 부호들에게서 군량을 징발했다. 전라도 각 고을이 하나하나 농민군에게 점령되자, 이제 농민전쟁의 불꽃은 경상도와 충청도 지방으로도 번져갔다.
양호 초토사 홍계훈이 이끄는 800명의 경군이 인천에서 배를 타고 남하하다가 군산에 내려 임피를 거쳐 전주성에 입성한 것은 농민군이 황토재에서 승리를 거둔 4월 7일의 일이었다. 농민군의 위세에 눌린 홍계훈은 전주성에 틀어박혀 정부에 증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청나라 군사를 불러들여 폭도를 진압하자고 건의했다. 증원군을 보내겠다는 정부측의 전갈을 받고 홍계훈이 전주성을 나선 것이 4월 18일이었다. 머뭇머뭇 농민군을 뒤쫓아 내려온 그는, 4월 23일 장성 지역 농민군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300명의 선발대를 보냈다.
장성으로 파견된 경군 선발대는 황룡강 유역에서 농민군과 맞닥뜨렸다. 경군은 외국에서 들여온 쿠르프 야포, 회전식 기관총, 모젤 소총 등 지방군인 전라 감영군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월등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겨우 재래식 무기로 일부만 무장하였을 뿐인 농민군은 경군을 에워싸고 대나무를 엮어 만든 장태를 굴려 총알을 막으며 물밀듯 전진하여 경군을 물리쳤다. 이리하여 농민군은 관군에 맞서 두번째 승리를 거두고 야포를 비롯한 신식무기들을 노획했다.
고부 황토재 전투와 장성 황룡강 전투에서 승리하고 전라도 각 고을을 휩쓸면서 농민군은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밥을 해서 날라오는 사람이 줄을 이을 정도였다. 이는 경군이 폭도를 토벌한다는 구실 아래 약탈을 일삼고 심지어 부녀자를 욕보이기까지 한 데 비해, 농민군은 엄정한 규율을 세워 사람과 가축을 해치지 않았으며 12개조의 행동규칙을 정하여 지키며 민중 속에 든든히 뿌리 내렸기 때문이었다.
1. 항복한 자는 대접받는다.
2. 곤궁한 자는 구제한다.
3. 욕심 부리는 자는 추방한다.
4. 순종하는 자는 경복(敬服)한다.
5. 굶주린 자는 먹인다.
6. 간활한 자는 없앤다.
7. 도망 가는 자는 쫓지 않는다.
8. 가난한 자는 구해준다.
9. 거역하는 자는 효유한다.
10. 병자에게는 약을 준다.
11. 불효자는 죽인다.
12. 불충한 자는 제거한다.
황룡강 전투 승리로 어느 때보다도 사기가 높아진 농민군은 다시 북상하여 정읍, 태인, 원평을 점령하고, 마침내 4월 27일에는 별다른 저항도 받지 않고 전주성을 장악했다.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은 농민군을 뒤따라 다니느라 감영을 비우고 있었고, 전주 감사는 농민군이 밀려들자 달아났으며, 감영군도 겨우 포 한 발을 쏘고는 그대로 달아났기 때문이다. 호남 제일의 성인 전주성 점령은 농민전쟁의 전 과정을 통해 농민군이 거둔 최대의 승리였다. 전봉준은 감사가 집무하던 선화당에 지휘본부를 두고 성 방비 계획을 세웠으며 군율을 단속했다.
전주 풍남문갑오농민전쟁 최대의 전승지인 전주 그 어디에서도 농민전쟁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현 전북 도청 옆에 있는 풍남문과 근처의 경기전, 객사 등을 돌아보면서 당시 경군과 치열하게 접전을 벌였던 농민군들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다.
홍계훈의 경군은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다음날인 4월 28일에 뒤를 쫓아와 전주성 주변의 산과 골짜기에 진을 쳤다. 이날로부터 5월 3일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경군과 농민군 사이에 공방전이 벌어졌다. 어느 쪽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는 가운데 양편의 피해가 늘어갔다.
이 싸움의 와중에 홍계훈은 ‘너희들은······전봉준의 꼬임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빠져 여기에 이르렀으니 안타깝도다.······전봉준을 잡아다 바치는 자는 위에 보고를 올려 상을 내리고 모든 것을 용서해주겠노라’ 운운하는 효유문을 뿌리는 한편, 각 고을에 전령을 보내 증원군을 요청했다. 5월 3일의 싸움은 특히 치열해서, 농민군은 경군에게 큰 타격을 주고 거의 홍계훈이 있는 본영까지 밀고 들어갔지만 점령하지 못하고 5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전봉준도 왼쪽 허벅지에 총을 맞았다.
며칠간의 싸움에서 결말이 나지 않고 하늘같이 믿던 지도자가 부상을 당하는 등 피해가 늘자, 정식 훈련을 받은 적 없이 ‘새 세상을 보자’는 열망만으로 사방에서 모여들었던 농민군 사이에는 술렁거림이 일고 이탈하는 사람이 생겨났다. 한편, 5월 5일에는 어리석게도 원병을 요청한 조선 정부에 응답하여, 청의 군대가 아산만에 상륙했다. 조선에 군사를 들여놓을 기회를 이제나저제나 노리고 있던 일본도 조선에 대한 동시 출병권을 규정한 톈진조약의 조항에 따라 곧 상륙할 것이라는 소식이 알려졌다.
농민군 진압을 위해 출동하는 청병들무력한 민씨 정권은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함으로써, 호시탐탐 조선 침략을 노리고 있던 일본군을 불러들이고 국권을 유린당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부는 전주성 점령을 굳힌 후 곧장 서울로 진격하려던 계획을 일단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농민군 내부의 동요에 대응하고 청일 두 나라에 군사 주둔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정부와 화약을 맺기로 했다. 전봉준은 화약의 조건으로 폐정개혁안을 내놓았고,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었던 홍계훈은 그 조건을 전부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이렇게 해서 5월 7일, 전주화약이 맺어졌다. 모두 27개 조항으로 된 폐정개혁안의 내용은 오늘날 온전히 전해지지 않으며 기록마다 조금씩 다르다. 그 내용은 대체로 봉건적 경제의 불평등을 제거하고 봉건적 신분 차별로부터 해방시키며 부패한 중앙 및 지방관리를 몰아내고 정치를 개혁하라는 것이었다.
위봉산성농민군들이 전주성에 입성하자 전라 감사 김문현은 경기전에 있던 이성계의 영정을 위봉산성 안에 있는 위봉사로 옮겼다. 위봉산성에는 관군의 무기와 화약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2차 기병 때 농민군은 이곳의 무기와 화약으로 무장을 강화하였다.
5월 6일에 일본군 440명이 서울로 들어왔으며, 5월 9일에는 일본군을 실은 배가 인천에 도착, 그중 선발대가 5월 10일에 서울로 들어갔다.
전주화약이 맺어지자 농민군은 대부분 각자의 고향으로 흩어졌다. 승리자의 모습을 꾸미느라, 이미 농민군이 사라져버린 전주성에 굳이 수백 개의 사다리를 걸고 와와거리며 넘어 들어갔던 홍계훈의 경군은 뒷수습이고 뭐고 아랑곳하지 않고 곧 서울로 돌아갔다.
이제 봉건통치권력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호남지방에서는 집강소를 통한 농민군 통치라는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었다. 무장에서 기병한 이래 농민군은 점령한 고을마다 접주와 접사라는 직책을 두어 그 고을의 일을 처리하도록 해왔다. 집강소 통치는 여기서 발전한 것이다. 원래 집강이란 지방 행정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하여 면·리 단위에 두었던 수령의 보조 기구였고 또한 동학의 직책 가운데도 집강이라는 것이 있었으나, 전주화약 이후의 집강 및 집강소는 그것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농민군의 독자적인 지방 통치조직이었다. 전라도에서는 나주와 운봉을 제외한 모든 곳에 집강소가 두어져 폐정개혁안을 근거로 개혁정치를 시행했으며 경상도와 충청도에서도 부분적으로 집강소 통치가 시행되었다.
당시 전봉준은 금구현 원평을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강경노선을 걸으면서 가장 많은 농민군을 휘하에 거느렸던 김개남은 남원을 거점으로 하여 전라좌도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손화중은 광주와 장성 일대를 중심으로 전라우도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 밖에도 크고 작은 지역대표들이 나타났고, 그 와중에 불량한 무리가 끼여들어 멋대로 행패를 부리기도 하는 등 일관된 지휘 통제에 혼란이 왔다.
이 상황은 각 고을을 단속하고 다닌 전봉준의 노력으로도 수습하기가 어려웠는데, 7월 26일 전라 감사 김학진과 전봉준이 제휴한 후 집강소 통치가 감사의 이름으로 공식적 인정을 받음으로써 차츰 수습되었다. 김학진은 모든 정치와 실질적인 지휘를 전봉준에게 맡기고 자신은 문서에 관한 일만을 하였다. 공문서는 전봉준의 재가를 받아 김학진의 이름으로 발행되었고 각 군 집강에 대한 통문은 전봉준의 이름으로 띄워졌다.
집강소 통치는 비록 전국적인 규모를 갖지 못하고 호남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만 실시되었으나,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농민이 자신의 힘으로 따낸 통치조직을 통해 스스로를 위한 정치를 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는 자못 크다.
농민군들이 집강소 활동에 매달려 있는 동안, 일본군은 6월 21일에 경복궁을 침범하여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친일 개화파 내각을 세웠으며 7월 1일에는 청나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농민군과 조선 정부 사이에 화약이 맺어졌건만, 농민전쟁을 구실로 출병한 청일 두 나라 군대는 철수하기는커녕 오히려 우리나라를 저희들의 싸움판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더욱 뚜렷한 일본의 침략행위는 조선 전국에 불안과 분노를 몰고 왔으며 각지에 흩어져 있던 농민군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9월 4일, 삼례에는 전봉준 직속의 농민군 4천여 명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나라를 구하고자 일어났다는 의미에서 자신들을 의병이라고 불렀다. 삼례에 설치된 투쟁본부에서는 각지로 통문을 날려 군사를 불러모았다. 또다시 사방에서 농민군이 몰려들었고 ‘서울로 곧장 올라가 권귀와 일본군을 축출한다’는 깃발을 내건 이들은 전봉준을 대장으로, 손화중과 김덕명을 총지휘로 추대하였다. 이 무렵에는 호남뿐 아니라 충청도, 경상도,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 등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조선 각지에서 일본군의 경복궁 침입과 청일전쟁 도발에 분개해 농민군이 일어났다.
그러나 농민군의 움직임을 종교적 차원에만 묶어두려는 북접 교단과의 해묵은 노선 갈등은 이때에도 불거져나와 투쟁의 발목을 잡았다. 서로 맞붙어 싸우는 데까지 나아갔던 남북접간의 갈등은 거의 한 달을 끌다가 9월 하순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해결되었다.
10월 9일, 호남 농민군과 호서 농민군은 논산에서 합류하여 공주로 진군했다. 농민군이 남북접간의 갈등으로 삼례와 논산에서 거의 한 달을 허비하는 동안 충분한 준비를 갖춘 관군과 일본군도 남하하여 공주로 모여들었다. 농민군에게 공주성 공격의 성공 여부는 서울로 진격할 수 있느냐 없느냐 를 판가름하는 일이었다. 관군으로서도 공주가 뚫리면 그만큼 서울까지 밀릴 우려가 커지므로, 공주성 전투는 양쪽 모두에게 사활이 달린 싸움이었다.
농민군의 공주성 공격은 10월 23일 이인 전투에서 비롯되어 다음날의 대교 전투, 또 그 다음날의 효포·웅치 전투, 그리고 마침내 최후의 항전인 11월 9일의 우금치 전투로 이어졌다. 농민군은 공주성 공격의 주공격로로 잡은 우금치를 돌파하기 위해, 1대가 쓰러지면 2대가 밀고 나가고, 그들이 무너지면 또 그 다음이 달려나가는 불굴의 투지로 40∼50차례를 싸웠다.
공주 우금치 동학혁명 위령탑서울로 향하는 주요 길목인 공주를 차지하려던 농민군들은 수많은 희생자를 내며 싸웠지만 일본군과 관군의 우세한 화력에 밀려 결국 물러서게 되었다. 농민전쟁의 최대 격전지였던 이곳에 세워진 위령탑은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정권이 ‘농민전쟁을 계승한다’는 뜻으로 세운 것이다.
그러나 강력한 화력을 지닌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세력 앞에, 끝내 우금치는 뚫리지 않았고 농민군 전사자는 늘어갔다. “2차 접전 후 1만여 명의 군병을 점고(點考)하니 남은 자는 3천여 명을 넘지 않았으며, 그후 다시 2차로 접전한 후 점고하니 500여 명을 넘지 않았다.” 전봉준은 우금치 전투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일본군과 결탁한 개화간당이 국권을 농락하는 현실을 직시하고 척왜척화하여 조선민의 자주자립을 도모하려던 농민군의 큰 뜻은 우금치를 넘지 못하고 꺾이고 말았다.
공주대회전이 끝난 뒤 물러난 농민군은 논산과 원평, 태인에서 벌인 전투를 끝으로 해산했다. 그 뒤 장흥과 보은 일대에서 국지적인 소규모 전투가 벌어졌지만 상황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점차 차가워져가는 11월 말의 찬바람 속으로 농민군은 뿔뿔이 흩어졌고, 지도자들은 추적을 피해 숨어들었다.
그 뒤에 남은 것은 관군과 일본군의 무자비한 소탕작전이었다. “갑오 12월부터 조선 남방은 관병과 일병의 천지가 되고 말았다. 동리동리에 살기가 충천하고 유혈이 가득하였다.······동학군으로서 관병, 일병, 수성군, 민포군에게 당한 참살 광경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피해자를 계산하면 무릇 30∼40만의 다수에 달하였고, 동학군의 재산이라고는 모두 관리의 것이 되었고, 가옥 등 물건은 죄다 불 속에 들어갔으며, 기타 부녀자 강탈, 능욕 등은 차마 다 말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오지영, 『동학사』).
12월과 다음해 1월에 걸쳐 김개남과 최경선, 전봉준, 손화중이 차례로 체포되었다. 재판도 없이 전주에서 목이 잘린 김개남을 제외한 나머지 지도자들은 서울로 압송되어 1895년 3월 29일 모두 교수형을 당했다.
갑오농민전쟁은 실패했다. 그러나 그것은 안팎의 모순을 지양하고 스스로 발전의 길을 찾아가려는 우리 민족 역량의 커다란 저수지로서, 거기서 흘러내린 물줄기는 일제하 의병전쟁과 항일무장투쟁을 거쳐 오늘날까지 맥맥히 이어지며 우리 역사의 고비고비를 적시고 있다.
삼례는 같은 전라북도의 원평, 충청북도의 보은과 함께 농민군의 전략적 거점이었다. 이곳들은 모두 역로를 끼고 있는 역촌으로, 그 가운데서도 삼례역은 부속 역이 12개나 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전라북도 농민군의 활동 가운데 많은 부분이 이 삼례역로를 따라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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