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수행이야기]〈36〉차향기와 선사의 멋스러움
茶 통해 고독 의인화, 수행 경지 표현
도반과 법담 나눌 여유 제공
다반사<茶飯事> 등 관련 공안 많아
평생 동안 수행만 한 노스님이 있었다. 스님은 평소에도 사람들과 왕래가 거의 없었고, 오로지 홀로 살면서 유일한 벗은 차 마시는 다구(茶具)뿐이었다. 스님은 당신께서 입적할 무렵이 되었음을 알고, 애지중지하던 다구를 불속에 던지며 이런 글을 남겼다.
“나는 본래 외롭고 가난해 송곳 꽂을 땅조차 없었다. 그런대 그대는 일찍이 나를 만나서 봄에는 산으로, 가을에는 물가에 함께 다녔으며, 울창한 소나무 숲속과 대나무 숲을 거닐었다. 이제 내 나이 팔십이 되어 몸뚱이가 쇠하여 수명이 곧 마칠 것이다. 내가 떠난 후에 세속의 손길에 남겨지게 될 그대도 아마 한이 남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그대는 화염 속의 삼매를 즐기며 떠나기 바란다. 아아!! 겁이 다하여 타오르는 불길 속에 털끝도 남은 것이 없고, 푸른 산은 옛과 같이 흰 구름 속에 서 있구나.”
열반 직전 쓰신 노스님의 글귀가 가슴 저리고 아프게 한다. 여기 노스님처럼 평소에 차와 ‘나’라는 존재를 떼어놓을 수 없을 만큼 차(茶)를 즐겨 마시는데다 소장하고 있는 다구에 애착이 많기 때문이다. 무소유를 강조하며 평생 물건을 소유하지 않으려 했던 법정스님께서도 마지막까지 애착이 끊어지지 않았던 것이 다구라고 말씀하셨다. 아마 ‘스님께서 늘 홀로이기를 원하면서도 차와 다구를 통해 쉼(休)과 벗을 찾는 여유가 아니었을까?’라고 망상해본다.
일본 어느 스님의 글속에서도 이런 비슷한 내용이 전한다. “오늘은 일생에 다시 오지 않는 날임을 생각하고 혼자 차를 마신다. 주위는 쓸쓸하여 말 상대로는 오직 차관 하나뿐이다.” 깨달음이 없이는 도달할 수 없는 선사의 경지이다. 이처럼 혼자 차를 마시는 자기도 승화되어 차관과 하나가 되는 경지가 바로 다도(茶道)의 한 일면이라고 할 수 있다. 차와 선, 차와 선사들은 떼어놓을 수 없을 만큼 도반이요, 가족이다.
스님들이 차를 마시는 습과 수행하는 경지를 하나로 여겨 다선일미(茶禪一味)가 정립되었다. 이 말은 원오극근(1063~1135) 선사가 처음 사용한 데서 비롯되었는데, 극근은 수행할 때 차를 즐겨 마심으로서 선과 차가 하나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더 발전되어 차향과 맛을 비유해 스님들은 깨달은 경지를 ‘선열미(禪悅味)’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다도란 찻물을 끓이고 차를 마시는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마치 참선하는 마음상태와 같으므로 선과 하나라고 보는 것이다. 당연히 차와 관련된 공안이 많이 있다. 대표적인 공안이 바로 조주종심(778~897)의 끽다거이다. 선사는 제자들이 처음 찾아와 불법을 묻거나 두 번째 와서 물어도 똑같이 그들에게 ‘차나 한잔 마시라(喫茶去)”고 하였다. 또한 수행은 밥 먹고 차 마시는 것처럼 일상생활 속에서 쉬운 일이라는 ‘다반사(茶飯事)’라는 말이 선에서 유래되었다. 절에서 맛있는 간식을 ‘차담(茶啖)’이라고 하고, 부처님께 차 올리는 그릇을 ‘다기(茶器)’라고 한다.
스님들이 차를 즐겨 마신 이유는 참선할 때 잠을 적게 하고 정신을 맑게 해주므로 나태함과 잠을 쫓고 의식을 집중하는데 도움이 되며, 차를 마시며 도반과 법담을 나누는 여유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조선초 함허 스님은 ‘이 한잔의 차는 옛날의 내 정을 표하는 것, 이는 조주의 기풍을 머금었나니 바라건대 그대는 한번 맛보시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요 근래는 분위기가 바뀌었다. 옛 도반들과 만나 차를 마시며 오랜만의 회포를 풀거나 삶과 수행, 어른 스님들의 행적을 논하는 여유와 멋이 없어진 것 같다.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사회 현상과 비슷하게 몇 년 전부터 스님들이 차보다는 커피를 즐겨 마신다.
선사들이 차를 통해 자신의 고독을 의인화하고, 수행의 경지를 표현하며, 도반과 법담을 나누는 정겨운 옛 풍토가 그리워진다. 괜한 망상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정운스님… 서울 성심사에서 명우스님을 은사로 출가, 운문사승가대학 졸업, 동국대 선학과서 박사학위 취득. 저서 <동아시아 선의 르네상스를 찾아서> <경전숲길> 등 10여권. 현 조계종 교수아사리ㆍ동국대 선학과 강사.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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