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전> 종류 : 풍자소설. 한문단편소설. 성격 : 풍자적 문체 : 산문체. 역어체. 문어체 시점 : 전지적 작가시점 사상적 배경 : 18c 실학사상과 평민의식의 성장 시대적 배경 : 상업의 발달과 농업 생산력의 발달로 평민부자들이 등장 - 신분제도의 동요 와 경제질서의 개편 주제 : 양반들의 무위무능과 위선적인 생활, 특권남용에 대한 비판과 풍자 인물 : 몰락하는 양반, 부상하는 평민 창작동기 : 양반들의 개혁의식 고취, 양반 사류의 참모습을 되찾겠다는 절박한 심정. 연대 : 정조 때 출전 : <연암집> 제8권 방경각외전(放 閣外傳) 구성 : 발단-전개-결말의 3단 구성 의의 : 현실 생활에서 소재를 취함. 근대적 서민 정신과 산문 정신을 구현함. 풍자적 내용으로 풍자 문학의 전통이 됨. 내용 : 조선 후기 양반들의 경제적 무능과 허식적인 생활 태도를 폭로하고 비판한 한문 소설이다.
♣ 작품의 줄거리 조선 정조 때의 문인이자, 실학자인 박지원의 한문 소설로, 《연암집》<방경각외전>에 수록되어 있다. 저작 연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지은이의 초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작품에 대하여 박지원은 <방경각외전>의 자서[自序-지은이가 책머리에 스스로 적는 서문]에서, "사(士)는 천작[天爵-(하늘이 준 작위란 뜻으로)남에게 존경을 받을 만한 타고난 덕행이나 미덕을 이르는 말]이니 사(士)와 심(心)이 합하면 지(志)가 된다. 그 지(志)는 어떠하여야 할 것인가? 세리[勢利-세력과 권세, 권세와 이욕]를 도모하지 않고 현달하여도 궁곤하여도 사(士)를 잃지 말아야 한다. 명절(名節)을 닦지 아니하고 단지 문벌이나 판다면 장사치와 무엇이 다르랴? 이에 <양반전>을 쓴다."고 그 저작 경위를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천작을 팔고 산 정선 양반과 상인인 부자를 풍자한 것으로 허위 부패를 폭로한 것이다. 이 작품은 처음 만든 문권에 나타나는 양반의 형식주의, 두 번째 만들다가 만 문권에서 볼 수 있는 양반의 비인간적인 수탈 등이 매우 구체적이고 희화적으로 서술되고 있다. 이 점에 착안하여 <양반전>은 양반의 위선적인 가면을 폭로하고 봉건 계급 타파를 주장한 소설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이 작품은 부농이 등장하여 경제력에 의한 양반 신분 획득의 가능성이 나타나고, 관료 사회의 부정이 깊어졌으며, 몰락 양반의 비참한 모습이 드러나는 등 조선 후기의 역사적 상황이 작가의 간결한 필치로 잘 그려진 작품이다. 또한 사이사이에 끼여 있는 교묘하고 익살스러운 표현은 독자의 웃음을 유발하며, 속된 표현이라 하여 당대에 많은 비난을 받았으나, 후대에는 그런 표현 때문에 더 높은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감상 '양반전'은 '허생전', '호질'과 함께 널리 알려진 연암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당대의 현실을 날카롭게 풍자하여 연암의 작가 의식을 잘 드러내고 있다. 내일의 생계를 마련하지 못하면서도 독서만 하고, 또 손님 접대와 군수 초대 등으로 놀기만 하는 양반, 양식이 떨어지면 관곡을 타다 먹는 양반들의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생활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첫 번째 양반 문권(文券)에 규정된 엄격한 준수 사항은 형식과 가식에 얽매여 꼼짝도 할 수 없게 된 양반 사류(士類)의 모습을 희화화하였고, 보상을 요구해서 2차로 작성한 문권은 양반들이 자행한 작폐를 보여줌으로써 양반 사회의 비행을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작자는 이 작품에서 양반 사회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관점은 보이지 않았지만, 양반 사류의 진정한 모습을 되찾아야겠다는 작자의 절박한 심정을 엿볼 수 있다.
♣ 요점 정리 ① 몰락하는 양반들의 위선적인 생활 모습을 비판 풍자함 ② 전대(前代)에는 불가능했던, 평민 부자로 대표되는 새로운 인간형을 제시함. ③ 독특한 풍자와 해학으로 근대 의식을 보여 줌 ④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학 사상을 문학 작품 속에 반영함 ⑤ 소재를 현실 생활에서 취하고 사실적인 태도로 묘사함 ⑥ '도둑놈'이라는 표현을 통해 전횡을 일삼는 양반을 풍자적으로 고발함.
◈ 참고 사항 ◇ 박지원 소설의 특징 ; 연암 소설의 두드러진 특징을 이루는 것은 풍자적 성격과 사실주의적 특성이다. 연암에 있어 풍자란, 중세적 봉건 사회가 무너져 가고 그 속에서 새로운 사회의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하는 역사적 변화의 시대에 살면서, 그 모든 추이들을 직시했던 비판적 태도로 나타난다. 또한, 그는 서민들의 삶의 세계를 향하여 새로운 의식 세계를 확장하면서 당대 평민층의 모습을 생생하게 포착하는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뛰어난 소설적 성과를 이룩했다.
1) 작가연구 박지원은 1737년 서울에서 태어나 1805년까지 약 70년간 18세기 후반기 한국의 정치적·사회적 격변기를 살았다. 연암의 선조들은 대대로 국가 요직에 앉았지만, 아버지 대부터 몰락하여 집안이 가난했다. 덕분에 그는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하다가, 16세에 이보천의 딸과 혼인하게 되면서부터 처음으로 학문에 접하게 된다, 처숙인 이교리에게 <신육군전>을 빌려보면서부터 3년 동안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한 채 정치·경제· 천문·지리 등 다양한 독서에 전념했다. 24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31세에 아버지마저 잃어버린다. 34세에 감시에는 합격했으나 회시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이후 다시 과거를 보지 않았던 것은 그의 사상이 당시의 국가적 이념과는 그 이념이 달랐기 때문이다. 36세에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가족을 처가로 내려보냈다. 41세에 홍국영의 정치적 숙청을 피하여 연암협에 피신하기도 했다. 44세에 삼종형 박명월을 따라 청나라에 들어갔던 견문기록이 <열하일기>이다. 이 견문록이 그를 근대사상의 중요 인물 가운데 하나로 부각하게 되었다. 50세 늦은 나이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이라는 국가 공무원이 되어 64세에 양양 부사로 끝나기까지 뚜렷한 벼슬 한 번 못한 채 노환에 시달리다가 69세에 하직했다. 60세에 정조에게 <과농소초>(課農小抄)란 농업 관계 저서를 올려보기도 했으나, 끝내 정계에 발탁되지 못한 채, 외곽의 비판 세력인 벌열(閥閱) 층에서만 의기를 화합했다. 연암은 뒤늦게 학문에 접하게 되었으나, 그의 혜안과 통찰력은 당시의 사상적 흐름을 선도하였다. <열하일기>에 나타난 그의 과학적 자각은 그를 실학파의 핵심 인물로 추켜세웠다. 그것은 당시 주자학과 갈등되기 때문이기도 하여 정계에 기용되지 못한 몇 가지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된다. 조선 후기 사회에서는 '사회경제' 개념이 시민의식을 갖고 부각되기 시작했다. 대동법(大同法)의 시행과 화폐의 유통을 배경으로 한 상업자본의 발달과, 상업적 농업의 발달, 봉건주의에 대항하는 인권의 해방, 노동의 가치, 부의 분배 등에 대한 의식이 팽배해지기 시작했다. 연암은 홍대용(洪大容) 등과의 토론 속에서 진보적인 사상을 아우르기 시작했다. 과거 시험을 기피한 이유는 다른 벌열 층 지식인들과 같이 당시 국외자들의 비판적 분위기에 동조한 것이다. 연암의 소설에 주인공으로 자주 나타나는 것은 일반 서민들이었다. 예컨대 소리패·지게꾼·걸식패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서민의식과 인간성 해방이 당시의 봉건주의 사회사상에 수용되기는 어려웠다. 더구나 그의 <과농소초> <열하일기> 등 저서의 문체조차 정통 한문에서 어긋난다 하여 정조(正祖)에게 지적 당하기도 했다. 이것은 그의 손자인 박규수(朴珪壽)가 나중에 영의정이 되었는데도 문집 발간을 못한 이유가 된다.
2) 작품연구 (1) <허생전>의 근대사상 '허생'이란 주인공이 아내의 독촉에 못 이겨 과거시험 준비를 포기하고 아내가 원하는 돈벌이 계획을 위해 나선다. 맨 처음 낯모르는 장안의 재벌 변씨를 찾아갈 만큼 당시의 우유부단한 선비들과는 다르게 당돌하고 행동적이다. 그는 빌린 돈 일 만 냥으로 과일-말총-쌀 등을 매점 매석하는 방법으로 몇 년만에 일 백 만 냥을 모으는 데 성공한다. 이것은 탁상 공론의 양반보다는 실천에 의한 행동을 보인 허생의 현실적이고 과학적인 생각 때문이다. 또한 그는 시장경제 법칙에 의해 번 돈으로 전국의 도적들을 무인도에 모아 살도록 해 주고, 빈민들을 도와주기도 한다. 그리고 빌린 돈 만 냥을 열 배로 쳐서 갚아주고, 정작 본인은 원래의 빈 손으로 누추한 자기 집으로 되돌아온다. 그 뒤 어영대장과 국가 정책에 관해서 토론하던 중, 고위 정책자들의 경직된 관료의식과 보수적 사고방식에 분노한다는 줄거리이다. 현실적인 시장경제의 가치와 실리를 행동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 허생전>은 '3인칭 서술자 시점'으로 극적인 사건을 점철시키는 기법으로 전개해 나갔다. 사건적이고 입체적으로 구성한 소설미학은 당시의 관념적이고 단순한 소설들과는 달랐다. 그러나 주요사건의 우연성 남발과 상투적인 진행은 다소 리얼리티를 상쇄하기도 했다. 그것은 연암이 자기의 사상을 소설에 일방적으로 주입시키는 데에만 서둘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중심적 주제사상은 선진적이고 근대적인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다. 허생의 모델은 천태산인의 <조선소설사>에서도 언급되어 있는데, <허후산문집>의 <신용선생유사>를 들어 허호의 행적을 작품화한 것이다. <옥갑야화> 중의 <허생전>이 야담집인 <청구야담>에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작가는 전승설화를 정리한 것이다. 그는 일반 서민들 사이의 떠도는 얘깃거리를 소설화한 것이다.
(2) <호질>의 주제사상 <호질>(虎叱)은 <관내정사>(關內程史) 속의 다른 수필들과 같이 배열되어 있는 것으로 약 30매(2백자 원고지) 정도의 분량이다. <관내정사>는 중국 산해관으로 부터 연경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이다. 1780년 7월 24일부터 8월 4일까지의 기록으로서 그 중 <호질>은 7월 29일부터 8월 1일까지의 견문록이다. 중국 옥전현의 심유붕의 점포에서 벽 위에 걸린 <기문>(奇文)을 베껴 온 것이다. 여기에서 연암이 <호질>을 쓰게 된 이유가 있다. 이 얘기를 전해 주어 갓끈이 끊어지고 입안의 밥알이 튀어나갈 정도의 웃음거리를 만들어서 당시 유학자들을 조롱해 보자는 것이다. 위선과 허위에 찬 조정의 유학자들을 '북곽선생'이란 선비와 '동리자'라는 과부를 내세워 풍자한 것이다. 그 중 인용문에서 '중원의 혼란이 맑을 때까지 기다릴 뿐'이란 의미는 청나라의 지배하에 있는 우리의 옛 땅을 회복하자는 뜻이며, 또한 당시 조정이 바른 정치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 민옹전>(閔翁傳)에선 중심 권력층에서 제거된 당시 지식인들의 구심체인 '벌열층'(閥閱層) 들이 보여주는 한탄과 울분의 세월을 주제로 했다. 끝 부분에 '오호라 민옹이여, 괴상하고 기이하고 놀랍고 깜찍하고 기쁘고 노엽고 또한 얄밉다'고 하여 두꺼비와 코끼리의 비교로서 빈부의 대조를 우화적으로 다룬 것이다. 연암의 <열하일기>라는 방대한 문집은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견문록을 집대성한 것이다. 당시에 유행했던 '얘기꾼"에게서 소재를 얻었다으며 그것을 실사구시에 입각하여 소설화시킨 것이 많다. 18세기 중반으로 넘어오면서 풍부한 소설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우리 소설사에서 18-19세기는 중요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 소설의 독자층의 확대되었다. 연암의 소설을 비롯한 한문 단편이 쏟아져 나오고, 판소리가 등장함으로써, 우리 문학사도 진정한 소설시대를 맞이한 감이 있었다. 이 시기에 '이야기꾼'은 전문적인 직업인 예능인으로 활발한 활동을 보였던 점이 특이한 현상이다. 이러한 이야기꾼의 활동과 연관되어 소설도 새로운 발달을 보였던 것이다. < 허생전>에선 종래의 설화에다 윤영에게서 들은 이야기 그리고 전기수의 <허생전>에서 유추하여 소설화시켰으며, <양반전>은 중국의 <동방>을 모방한 작품이고, <호질>은 심유붕의 가게에 걸린 <기문>을 소재로 한 것이다. 민병수 교수는 <마장전> <민옹전> <김신선전>의 1인칭은 바로 작자 자신을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예덕선생전>이나 <광문전> <열녀함양박씨전>등은 작자 주관에 따라 기술한 전기적인 수필형식이라고 했다.
3) 문학적 리얼리즘 문제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실학사상을 주장하는 연암이 정작 자신의 문집이나, 문학 작품을 굳이' 한자'로 표기한 이유에 대해서는 다소 의문이지만, 연암 자신이 시대감각에 맞는 글을 써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글이란 사실에 진취가 있다. 하필이면 고대를 취할 것인가 한문은 지금과 다르고 풍속도 중국과 다르다. 반고(班固)가 지금 나왔다한들 옛것을 그대로 본받지는 아니할 것이다. 신자(新字)는 만들기 어렵다하지만 어찌 고법(古法)에만 구속되겠는가." 고법에만 구속될 필요가 없이 그 시대 감각에 맞는 사실 그대로의 묘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또한 작품에서도 순수한 독창성을 강조했다. "옛 것에만 본 받는 사람들은 옛 것에 구속되어 벗어나지 못함이 근심되고, 새 것을 창조하는 사람들은 그 불경(不敬)됨을 근심한다. 진실로 능히 옛 것을 본 받으면서도 변화할 줄 알고, 새것을 창조해 내면서도 능히 이전 것의 가치를 안다면 이 시대의 글이 옛 것의 가치와 같게 될 것이다." 또한 <열하일기>에는 속담, 격언, 민요, 방언 등이 많으며 봉건사상에 저항하는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대체 천하의 대의를 떨치고자 하면 먼저 천하의 호걸들과 사귀지 않고서는 되지 않는 법이고, 딴 나라를 치려면 먼저 간첩을 쓰지 않고서는 안되는 법이오. 지금 만주가 천하의 주인이 되었으나 아직 중국 본토와는 화친하지 못하였으니... <허생전>에서.. 선륭 십년 구월 모임에 증서를 만드니 천석의 관곡을 갚기 위하여 양반을 판다. 원래 양반이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글만 읽는 이를 선비라고 하며, 정치에 관여하면 대부가 되고.... <양반전>에서.. 이놈 가까이 오지를 말라. 선비놈은 간사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과연 평소에 있어서 모든 욕은 나에게 쏙아 놓더니 그런 것은 잊은 듯 지금와서는 처지가 급하게 되어 내 눈 앞에서 아첨하는 꼴이라니... <호질>에서..
4) 작가정신과 문학사상 연암의 작가 정신이 형성하게 된 당시 사회는 유교사상에 대한 반발이었다. 고려 말에서부터 발흥되기 시작한 주자학은 조선시대 5백년의 지배적 정치-사회 사상이 되었다. 그러나 조선조 중기의 임-병 양난으로 인한 시민의식과 민중의식의 싻틈은 조선조 말기 실학사상을 바탕으로 하나의 전환점을 이루었다. 주자학은 주지하듯이 고려말 신흥사대부 계층에 의해 신봉된 유교사상의 한 맥이었다. 당시 신흥 군벌인 이성계 일파의 실세와 결합됨으로써, 마침내 조선왕조의 정치적 이념이 되었다. 조선 건국에서부터 시작한 주자학은 국교적인 권위로 횡포를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조 후반기 상업. 공업을 바탕으로 한 서민자본의 유통구조 형성은 민중경제의 부상을 가져와 전통적인 선비들의 '허위의식'에 대한 저항을 가져왔다. 말하자면, 연암의 실학사상은 주자학과는 정면으로 충돌되는 민중의식을 가져왔고, 그의 문학작품에도 주제의식으로 침전된 것이다. 이러한 실학사상은 홍대용,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과 의기가 상통하면서, 소위 '벌열층' 실학파들과 밀착되기 시작했다. 그의 세계관은 자연과 우주에 대한 '과학적'인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그의 천체론은 홍대용의 '지전설'(地轉說), 김석문(金錫文)의 '삼환부공설'(三丸浮空說)을 거쳐 스스로 발전시킨 '천원방천동지정'(天圓方天動地靜)이 있다. 이것은 독특한 우주관을 천착한 것으로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사상이었다. 연암의 문학사상을 논하는 자리에서는 흔히 사마천이 글을 쓰게 된 심정을 비유한다. 도는 어린아이가 환상적인 나비를 잡으려다 잡지 못한 '부끄러운 듯, 성난 듯한 심정'에 비기기도 한다. 잡지 못하고, 잡히지 않는 서운함과 불만족스러움에서 그의 반사회적 저항의 동기를 찾아볼 수 있겠다. 그는 이상적인 민주사회인 '민중 나비를 잡을 수 있는 사회'에로의 변화를 기대하면서 그린 작품들이다. 연암의 실학사상은 당시의 국가에 기용될 수 없는 혁명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평생을 불만족과 불우한 생활로 보내게 된 이유가 된다. < 허생전>에선 이상적인 학문만 추구하여 독서만 하는 선비, 허생으로 하여금 실제적인 장사를 하게끔 내몰아서 현실적인 인식을 시킨다. 허생은 매점매석의 방법으로 거부가 되지만, 변 부자에게 빌린 돈을 갚고는 다시 남산 밑 초가로 돌아간다. 말하자면, 다시 선비로 돌아간다는 결말 처리에 대해 주제 의식에 대한 새로운 의문점이 제기된다. 원래 선비인 허생이 실학적인 사고방식으로 큰 부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다시 초라한 선비가 되게끔 결말 처리한 이유가 무엇일까. 곧 전통적인 뿌리를 완전히 무시할 수 는 없다는 점이다.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해서 점진적인 개방-개혁을 하자는 주제이다. < 양반전>에서 상놈(천부)가 돈으로 가난한 선비의 '양반권'을 사게 되면서, 지켜야 할 양반규칙에 대해 그 천부는 양반됨을 포기하게 된다. 인간의 본성을 무시한 '권위와 허위'의 화신인 양반에 대한 기피는 인간 본성의 자유와 해방을 의미한다는 주제 의식이다. <호질>에선 북곽 선생이란 사회 저명인사가 동리자 과부와 놀아나다가 그 아들들에게 정사현상을 들키게 된다. 그 밤에 도망치다가 호랑이를 만나 호통을 당한다는 풍자를 우화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당시 정치적 권력자들의 부도덕성을 야유해 보인 것이다. < 민옹전>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비리와 울분을, <예덕선생전>은 똥지게를 질망정 정의롭게 살아가는 예덕 선생의 모습을 강조했고, <김신선전>은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신선이 될 수 있다는 암시를 주었고, <우상전>은 진실하고 위대한 숨겨진 인물을 소개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개별 주제를 종합한다면, 박지원은 당시 사회를 비판하는 고발문학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연암소설의 진정한 가치는 이러한 사회비판적인 작품에 있다고 하겠다.
5)근대소설로서의 사상적 가치 연암소설은 그의 실학사상이 작가정신으로 깔려있다. 당시 전통적인 고전소설의 유형에서 연암소설이 근대문학적 요소를 갖추게 된 이유는 그의 실학사상이 '현실과 과학'에 개혁적 시각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 대부분의 소재가 일반 시민들의 실생활에서 취재했고, 주인공들이 일반 서민들이었다는 점이다. 그 주요인물이 서민들이요, 사건이 실생활에서 일어나는 갈등 구조이기 때문에 근대의식이 강하게 부각되는 것이다. 그리고 과학성이란 그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인물들의 의식과 행동이 과학적인 합리성과 필연성으로 연결되었다는 점이다, 우연성이나 운명론적이 아닌, 분명한 인간의 의지와 행동을 보여준다. 이러한 현실성과 과학성의 작가 정신이 이전 고전소설류의 단순하고 평면적인 전개 방식과는 대조적이다. 그는 안성에 머물면서 대추. 밤 .배. 감류. 귤. 따위 등속을 모두 싯가의 배를 주고 샀다. 따라서, 국내에서 과일이 없어져서 제사를 못 지내게 되었으며, 얼마 안 있다 허생에게 판 과일을 도리어 십 배를 주고 사가니, 허생은 길게 한숨을 쉬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만냥으로 나라를 뒤흔들 수 있다니, 이 나라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겠구나" <허생전> 관문은 매우 가난하여 비렁뱅이 노릇을 하였다. 그는 이름이 실상에 지나쳤으나 이름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몰라주는 거지 아이들은 그를 오히려 죽이려고 하였다. 그는 도적의 혐의를 입었으나, 변명하지 않았다. <광문자전> 첫째, 박지원의 문학에 나타난 근대성의 문제는 다음과 같다. <허생전>에서 매점매석으로 십 배의 이익을 남기는 사건 설명이 잘 묘사되어 있고, <광문자적>에선 광문의 어짐과 진실성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그러한 사건의 극적 묘사와 인물의 성격암시가 작품 전개에서 필연성으로 나타난다. 둘째, <양반전>의 천부가 양반권의 매입 과정에서 양반이 지켜야 할 조목을 열거할 때의 천부의 언행에서, 똥 푸는 예덕선생의 진실과, 거지광문의 어짐에 대한 역설의 풍자에서, <마장전>과 <우상전>의 에피소드, 그리고 <호질>과 <민옹전>의 우화에서 우리는 연암의 근대문학적 소설기법과 표현양식의 새로움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을 불러서 내 논밭을 먼저 갈게 하는데, 어느 놈이든지 감히 말을 잘 듣지 않으면, 코에 잿물을 먹이고, 상투를 붙들어 매고, 수염을 자르는 등 가진 형벌을 해도 감히, 원망을 할 수 가 없는 것이다. 천부는 이러한 내용을 듣다가 질겁을 하고, '아이구, 맹랑하옵니다 그려, 나를 도적놈으로 만들 심판이란 말이오'하고, 머리를 흔들고는 한평생 양반이란 말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양반전> 손을 비비며 머리를 숙이고 있다가 문득 우러러 보니, 동쪽 하늘이 이내 밝아지고, 호랑이는 사라져 버리고, 밭에 나온 농부들이 "아니, 선생님은 이른 아침부터 어디다 대고 이렇게 절하고 계십니까"하고 물었다. 북곽 선생은 "하늘이 높으니 우러러 보고, 땅이 넓으니 구부려 봐야한다는 말이 있네, 나는 이것을 실천해 보는 것뿐일세"하며 쓴웃음으로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호질> < 양반전>에서 천부가 양반의 관례적 행위를 듣기에는 도둑놈 심보같이 밖에는 보이지 않아 양반됨을 포기한다는 풍자를 보여주었고, <호질>에선 저명 인사인 북곽선생의 위선적 행위를 우화적으로 조롱한 것이다. 연암 소설에선 이러한 풍자성과 우화성이 풍부하여 근대문학적 소설기법과 함께 그 문학사상도 새로운 민중사상이 아닐 수 없다. 연암은 문학의 사회학적 기능과 작가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 진작부터 소명의식이 강했다. 그는 문학을 통해서 인간의 평등과 사회적 비판의식을 개진했다. 그것이 문학사적으로는 전통적인 고전작가와는 다른 근대적 작가의식이 된 계기이다. 곧 참여문학으로서의 고발 문학이다. 인간의 평등 사상에 대한 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하늘이 인재를 낼 적엔 차별을 두지 않습니다. 넘어진 둥치에 돋는 가지에는 불필요하게 뻗는 곁가지도 골고루 우로의 혜택을 줍니다. 썩은 그루터기와 더러운 거름 흙에서도 새싻이 돋아나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인이 정치를 할 때에도 인재에 귀천과 차별을 두지 않습니다. 하늘은 본래 인간의 평등을 말했다. 인간에게 신분과 계급의 차이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그의 소설에 나타난 등장인물은 똥푸는 엄행수. 만담가. 거지 광문등이다. 여기에 대칭되는 인물들이 위선적인 선비나 양반들이다. 그의 소설이 인간의 모순과 사회적 비리를 추적하고, 현실을 비판함으로써 리얼리티를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전소설적인 낭만주의에서 벗어나 근대적인 사실주의에 접근할 것이다. 그러한 사실주의 관점을 또한 그의 '김황원의 시' 비판의식에서도 엿볼 수 있다. " '용용'이란 큰 강을 표현함에는 부족한 시어이며 '동두'와 '점점산'이란 표현은 부벽루에서 바라보는 대동강변이 불과 4십여 리 밖에 되지 않는데 어찌 '대야'라고 부를 수 있느냐." 고 지적했다. 사실이나 사물 자체를 과장 없이 있는 그대로를 표현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곧 정확한 언어와 표현으로써 리얼리티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연암의 실학정신은 현실사회에서 실용적이고, 이용후생적인 사상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인식과 철학은 그의 문학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연암이 정치와 사회에 대한 비판세력에 가담했던 것은 앞에서 지적한 바와 마찬가지로 벌열층이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연암이 살았던 시대는 조선조 말기로서 신구 사상의 대립이 표면화되기 시작한 때였다. 전통적인 주자사상에 대한 실학사상의 돌출은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인 충돌을 가져왔다. 양반들이 군림하던 전통적 봉건사회에서 서민 상업자본의 발달로 인한 시민의식과 평등의식이 부각되게 된다. 특히 연암이 구심체가 되었던 '벌열층'을 중심으로 한 신진들의 실학사상은 신선한 충격과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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