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과 물리학] 31. 이해와 믿음
- 주·객으로 나누기 이전의 세계에서는 -
- 매개없이 빛보다 빠르게 이심전심 -
‘…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라고 설한 후 경전은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라고 새로운 차원의 세계를 설한다. ‘공’중에는 ‘지혜’라 할 것도 없고 ‘얻는다’는 것도 없으며 얻은바가 없으므로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는 고로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다.
집착하는 마음에 ‘아’를 만들고 ‘아’를 만들자 모든 것이 주와 객으로 나뉘니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집착이 만든 꿈이다. 보통 사람들은 모든 것을 이것과 저것으로 나누어 보고 있다. 심지어 ‘아’마저 분열되어 있다. 두뇌의 한쪽에서는 이것을 행하겠다고 작정하고 있는데 두뇌의 다른 쪽에서는 저것을 행하려고 작정한다. 이렇게 해서 보통사람들은 갈등속에 괴로와 한다.
반면에 ‘조견오온개공’을 한 사람 즉 견성을 한사람에게는 즉 모든 것이 하나로 통일된 사람에게는 갈등이 있을 수 없다. 꿈을 깨어 모든 것이 하나임을 체득하니 지혜라 이름붙일 것도 없다. 저것이 이것이고 이것이 저것인데 거기에 무엇을 따져 얻을 것이 있겠는가? 저것과 내가 남일 때 따지고 얻을 것이 있는 것이지 그대로 하나인데 무엇을 얻겠는가? 그저 꿈을 깨면 그만인 것이다. 그래서 꿈을 깬 보살은 반야에 의해 걸림이 없어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이 나 즉 대아(大我)인 것이다.
수학과 물리학의 재미있는 점은 이 두 학문 모두가 사람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는 데에 있다. 물리학의 불확정성 원리가 인식의 한계 즉 인식의 불확실성을, 수학의 불완전성 정리가 이성의 불완전성을 밝히므로써 사람이 알음알이 지식으로 본 것이 사실은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히므로써, 수학과 물리학은 반야심경의 내용중 절반을 지지하고 있다. ‘오온개공’으로부터 ‘…이무소득고’까지를 수학과 물리학이 긍정하고 있는 것이다. ‘의반야바라밀다…’부터는 수학과 물리학으로 따질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얘기다.
견성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제부터 믿음이 있어야 한다. 믿음없이 ‘…의반야바라밀다…’
는 허망한 얘기이다.
수학과 물리학은 철저하게 분별지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학문이기에 종교적 신앙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반야지를 가정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추론을 해볼 수는 있다. 대표적인 예로 ‘텔레파시’ 또는 ‘이심전심’을 들 수 있다.
‘이심전심’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직접 생각하는 바를 전한다는 뜻인데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이 없이도 정보가 전달되고 정보가 전달되는 데에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고 흔히들 얘기한다. 주·객으로 나뉘어진 세계에서만 본다면 ‘이심전심’은 물리학의 기본법칙에 어긋나는 일이다. 모든 정보는 반드시 매개체 를 필요로 하고 모든 정보는 빛보다 빨리 전달될 수도 없다. 그러나 주·객으로 나뉘어지기 이전의 세계라면 정보전달이 반드시 매개체를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고 정보전달이 빛의 속도보다 빠르지 말라는 법도 없다.
이미 설명한대로(15회) EPR의 패러독스는 이 정보전달이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남을 설명해 주고 있다. 아인슈타인처럼 세상을 주와 객으로 나누어 본다면 이심전심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보아처럼 세상을 하나로 보고 설명한다면 이심전심은 물리학의 법칙에 어긋나지 않는다. 너와 내가 그대로 하나인데 거기에 무슨 매개체가 필요하고 정보전달에 무슨 시간이 필요하겠는가?
물론 실험결과는 보아가 옳다는 것을 밝히고 있지만 이미 ‘아’에 집착되어 있는 보통사람들은 ‘공’으로 합일된 경지를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견성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 믿음은 맹신과는 다르다. 사물을 예리하게 관찰하여 얻은 수학과 물리학의 내용을 이해하고 이 이해를 바탕으로 믿음을 갖는 것이기에 이 믿음은 수행의 밑거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을 갖고 경전의 후반을 읽기로 하자.
김성구 <이화여대 교수.물리학>
[출처 : 부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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