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란봉 클럽을 한두 회 보다가 지난 녹화방송까지 모두 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보는 가운데, 북에서 장교였던 자가 탈북해서, 게스트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진행자가 “어디서 근무했습니까?”라고 물으니, 우리나라 인제 근처의 휴전선에서 근무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근무하던 당시에 대해 묻는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보내는 대북방송 이야기를 하면서, 그 때 들었던 노래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최진희 씨의 사랑의 미로, 조용필 씨의 허공, 노사연 씨의 만남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들으면서, 그 당시에 저도 철책에 있었는데, 그 때 만났다면, 적으로 만났을 텐데, 이제는 하나가 되었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아마, 그 사람과 만나면, 여러 이야기들을 나눌 것 같습니다.
한 여인을 간절히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여인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설레었고, 하루종일 그 여인만 생각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용기를 내어, 여인에게 청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현재 모습으로는, 여인이 거절할 것 같아, 아버지를 내세웠습니다. 그는, “내 아버지의 재산이 300억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연세가 많아 얼마 사시지 못하실 겁니다. 그러니,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 그 재산은 나의 것이 됩니다”라면서, 청혼을 했습니다. 이 남자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여인이, 일주일의 시간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일주일을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게,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드디어,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 여인이 뭐라고 대답할 지에 대해 잔뜩 긴장해 있는 가운데, 여인이 “결혼하겠어요”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남자는 세상을 모두 얻은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여인이 말하기를, “나는 당신과 결혼하지 않고, 당신의 아버지와 결혼하겠어요”라고 했답니다. 세상의 만남에는, 돈이 중심이라는 것을 풍자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많은 이들과의 만남을 갖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도 여러 만남이 있습니다. 교회와의 만남, 교우들과의 만남, 목회자와의 만남이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가장 중요한 만남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하나님의 부르심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먼저 찾아오십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의 이러한 부르심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데,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나 열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옥토에 떨어지지 않은 씨앗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은, 조금 자라다가 가시덤불에 막힘으로 더 이상 자라지 못합니다. 길 가에 떨어진 씨앗들은, 새들의 먹이가 됩니다. 돌 위에 떨어진 씨앗은, 뜨거운 태양의 열기에 타 버리고 맙니다. 오직, 옥토에 떨어진 씨앗만이, 곧게 자랄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는, 매 순간마다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하나님과 모세와의 만남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 만남을 위해, 모세가 양을 치던 호렙산에 친히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모세를 찾아간 것입니다. 마치, 에덴에서, 아담이 범죄한 뒤, 나무 뒤에 숨어 있을 때,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냐?”라며 찾아오신 것처럼, 오늘도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찾아가십니다. 호렙산에서, 뜻하지 않던 하나님과의 만남은, 모세의 생애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떨기나무에 임한 불꽃 가운데, 하나님을 만난 모세의 삶을 살피며, 우리에게도 우리를 찾고 부르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절을 보시면,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라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일상에서 충실할 때,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를 때, 쉬고 있는 자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바쁘게 일하는 자를 불렀습니다. 엘리야가 엘리사를 부를 때, 엘리사는 소로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기드온을 찾아갔을 때도, 기드온은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일에 충성하는 자를 부르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인간적으로 모세는, 영웅이라기보다는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임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친근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할 때, 태어났습니다. 더구나 모세가 출생할 때는, 애굽 왕 바로가, 히브리인의 남자 아이는 모두 죽이라는 명령까지 내린 상태였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모세의 어머니는, 석달동안 숨겨 키우다가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어서, 갈대상자에 모세를 담아 나일강에 띄웁니다. 그런데, 기다렸다는 듯, 강가에 목욕하러 왔던 공주와 궁녀들의 눈에 띄어, 건짐을 받아, 바로의 궁에서, 바로의 손주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모세”라 하였습니다. 곧, “물에서 건져내었다”는 말입니다. 헌데, 이 이름이 우리말로서는 그 의미가 자세하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이는, 수동태가 아니라, 능동태라는 것입니다. 곧, “앞으로 건져낼 자”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이는, 모세가 앞으로 누군가를 건져낸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세가 어떤 인물이 될 것임을 준비하셨던 겁니다. 그리고, 그 준비하신 일을 이루기 위해, 오늘 본문을 보시면, 모세가 목축을 하는 호렙산으로 하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본문의 “양 떼를 치더니”라는 말은, “계속 양 떼를 먹이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는, 모세는 애굽의 왕자들과 자랐기에, 양치기라는 일은, 힘들고, 비천하고, 수모스러웠지만, 또, 양 치는 일은, 수시로 가족과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하는, 고독하고 위험한 일이었지만, 모세는 자신의 일에 충실했고, 몰두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게으르고, 핑계거리가 많거나 나태한 사람을 부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주변을 돌아보며, 비교하는 자도 부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맡기는 일에 있어서, 언제나 말과 핑계를 앞세울 것이고, 완수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앞서서 예로 들었던 엘리사, 또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 주변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비교하지도 않았습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충실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또, 요셉도 마찬가집니다. 그도, 보디발의 집에서 종의 신분으로 있었지만, 자신의 억울함만을 앞세운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충실하였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하나님은 그를 애굽의 총리로 세우셨습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만남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찾아가는 것에서 시작하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 은혜를 찾아 움직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단지, 우리에게 주어진 일에 충성하는 겁니다. 우리가 가정에 있든, 사업장에 있든, 직장에 있든 어디에 있든 예기치 않는 그 곳에 하나님은 찾아오십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가 자녀를 대할 때, 나는 너희와 함께 있겠다. 너희가 집에 있을 때, 나는 너희와 함께 있겠다. 너희가 교회에서 예배하며, 봉사할 때, 나는 함께 하겠다”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눅 12: 40이하를 보시면, 주인이 모든 소유를 종에게 맡기고 타국에 갔다가 불현듯 왔을 때, 종이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지 않을 것을 보게 되자, 벌에 처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맡은 바 양 떼를 잘 치던 모세와 같이, 우리의 생업과 사명에 충실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2절을 보시면,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고 합니다. 떨기나무에 하나님의 불이 붙었습니다.
하나님의 불이 붙었던 “떨기나무”는, 시내 광야와 같은 사막지대의 경사지에서 많이 자라는 덤불입니다. 키는 2-3m 정도이고, 밑에서부터 잔 줄기가 좌우로 뻗어서 자라는 “가시덤불”입니다. 그래서, 이 나무는, 주변에 있는 나무들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앙상하고, 꾸불꾸불 휘어져 볼품이 없기에, 귀한 재목이 될 수 없는 가시떨기요, 천덕꾸러기 나무입니다. 그야말로, 불쏘시개로 밖에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 나무는, 건조한 기후와 사막의 열기로 인해, 가끔은 불을 안 붙여도, 서로가 부딪힘으로 인해, 불이 난다고 합니다. 그렇게 한번, 불길이 타오르다 푹 꺼지고 맙니다. 그런데, 이 떨기나무가 본문에서 상징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는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의 종으로, 아무런 주권도 없이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보잘것없고, 쓸모없는 가련한 민족일 뿐입니다. 또, 모세입니다. 애굽의 궁에 있을 때는, 왕자들과 함께 존귀한 자로 지냈지만, 이제는 도망자입니다. 또, 천한 양치기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과 모세를 상징하는, 본문의 떨기나무에 붙은 불은, 혼자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변에 있는 여러 나무 중에 하필이면, 볼품없는 이 나무에, 꺼지지 않는 불로 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하나님의 때가 되었기에, 모세의 시선을 주목시키셨던 것입니다.
세계적인 “니콜로 파가니니”가 프랑스에서 연주할 때였습니다.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은 쉽게, 타인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는 프랑스의 귀족들이었습니다. 한참을 연주하는 가운데, 줄 하나가 끊어졌습니다. 참으로, 안 되는 사람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했는데, 파가니니는 별 호의적이지 않는 귀족들 앞에서, 연주하는 것도 힘들었을 텐데, 줄까지 끊어졌습니다. 순간, 귀족들은 술렁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에 개의치 않고, 계속 연주했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가 끊어졌습니다. 이제는 줄이 두 개였습니다. 계속해서 연주하는 가운데, 줄 하나가 다시 끊어져서 하나의 줄로 연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연주를 마치자, 처음에는 호의적이지 않던 그들 모두가, 기립박수를 보냈다고 합니다. 이 일로, 파가니니에게는 “한 줄 연주의 기적”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니게 되었다고 합니다. 모든 조건이 맞아야만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우리는 성도로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그 분을 경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중심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중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이 되셔야 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모세의 모습에서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의 모습을, 또 자격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스라엘을 출애굽을 시켜 인도하는,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그것은, 떨기나무에 붙었던 하나님의 불이, 그와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어디선가, “연탄재라고 함부로 무시하지 말라. 당신은 연탄재만큼 한번이라도 뜨거웠던 적이 있었느냐?”라는 시를 본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적어도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서 한번 정도는, 불 붙었던 경험이 있습니까? 예전에 수련회서 캠프 화이어를 할 때, 화목을 잔뜩 쌓아놓고 불이 붙입니다. 그런데, 그냥 붙이면, 밤을 새워야 합니다. 그래서, 미리, 주유소에 가서 경유나 휘발유를 사옵니다. 그리고는, 캠프 화이어를 하기 전, 화목에다 기름을 잔뜩 뿌립니다. 그리고, 불을 붙이면, 처음부터 화목에 불이 붙어서 타지 않고, 먼저, 기름이 탑니다. 그러면서, 차차 화목에 불이 붙어서 타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바리새인과 서기관에 대해서는, 처참할 정도로 저주를 하셨습니다. 마 23장을 보시면, 한 장 전체가 이들에 대한 진노입니다. 이들이 왜? 이러한 진노를 들었을까요? 자신의 힘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이 곳의 4절을 보시면,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라고 합니다. 곧, 성령에 의지하지 않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지 않고,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빨리 지칩니다. 우리가 힘을 낸들 얼마나 내겠습니까? 그러니까, 즐거움과 감사의 동기에서 시작했다가, 지치고 피곤하고, 짜증으로 마치게 됩니다. 수련회를 할 때 보면, 모두가 기대로, 즐거움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마칠 때 보면, 두 부류가 됩니다. 한 쪽은 감사로 마무리 하고, 한 쪽은 지치고, 짜증으로 마무리 합니다. 그럼, 저는, 지치고 짜증나는 쪽으로 가서, 그들의 상한 감정과 육체의 피로가 다른 사람들에게 옮기지 않도록 몇몇 교사들과 함께 달래곤 했습니다. 성령을 의지하면서 행하는 것은, 마치, 화목에 기름을 잔뜩 부어놓고, 불을 붙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 화목보다 기름이 먼저 탑니다. 본문에 나오는 떨기나무는 가시덤불입니다. 불이 붙으면, 몇 초만에 후루룩 타고 꺼집니다. 그런데, 떨기나무에 붙은 불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나무도 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가슴에 성령의 불이 있습니까?
오래 전, 중량교 교회에서 목회를 하셨던 정양수 목사님께서는, “성령의 불이 꺼져버린 교회는, 암만 예배당이나, 크게 짓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불이 꺼져버린 설교는, 연설이지 설교가 아닙니다. 성령의 불이 꺼져버린 사명은, 힘만 들고, 능률이 없습니다. 성령의 불이 꺼져버린 찬송은, 음악은 될지언정 찬송이라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불이 꺼진 기도는, 웅변이지 하나님이 기쁘게 받지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바라기는, 오늘 우리에게도, 떨기나무에 붙었던 하나님의 불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또, 우리 신목교회에도 맹렬하게 붙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4 - 5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본문의 2절에서는 “여호와의 사자”라고 했는데, 4절에서는 “여호와”라 했고, 5절에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호칭에 변화가 있습니다. 이것은, 본문에 나타난 “사자”가, 일반적인 천사가 아님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하나님이 어디에 있으니, 찾아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있는 그 곳으로 하나님이 직접 가셨습니다. 그리고는, “모세야, 모세야”하고 부르셨습니다. 삼상 3: 10을 보시면, “사무엘아 사무엘아”하고 부르셨습니다. 또, 행 9: 4을 보시면, “사울아 사울아”하고 부르셨습니다. 참으로 인격적인 부르심입니다. 그런데, 두 번을 연거퍼 불렀다는 것은, 긴박성이요, 강조성입니다. 이는, 앞의 “불러”라는 말에서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카라”인데, 그 의미는, “외치다. 청하다”입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가 가까움으로, 그 일에 모세를 참여시키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에 대한 모세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내가 여기있나이다”입니다. 이 대답은, 창 22: 1에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아브라함이 대답했던 말입니다. 또, 삼상 3: 4에서는,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를 때 대답했던 말이며, 10절에서는,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대답했던 말입니다. 또, 사 6: 8에서는, 하나님이 이사야를 부를 때, 대답했던 말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실 때,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마 4장을 보시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를 때, 부름을 받은 제자들은 한결같이, “곧 따르니라”고 하였습니다. 마 8장을 보시면, 한 제자가 예수님을 따르기는 하겠지만, 부모님께 대한 효도를 먼저 지키게 해달라고 할 때, 다른 이들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바라기는,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모세야! 모세야!”라는 음성을 들은 것처럼, 우리도 생활하는 가운데, 낙심의 소리를 듣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원망과 불평하는 얘기,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얘기, 세상 속의 얘기 속에서, 마음에 상처를 받고 죄를 지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찬송가 540장을 보시면,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사랑한단 말일세 믿는 맘으로 주께 가오니 나를 영접하소서 내가 매일 십자가 앞에 더 가까이 가오니 구세주의 흘린 보배 피로써 나를 정케하소서”라고 합니다. 이 가사처럼 날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심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면, 가시덤불 같은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심으로, 많은 병자가 치료되었고,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떨기나무와도 같았던 모세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심으로,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원하기는, 모세를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