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평구의 해석이 자의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역사학자 문일평 별세 직후 류영모가 쓴 글과 이 글에 대한 김교신의 소감을 보면 노평구의 관측이 빗나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먼저 『성서조선』 제124호(1939년 5월)에 실린 류영모의 글을 보기로 한다. 류영모가 1939년 4월 4일 문일평(1888~1939)의 자택을 방문했더니 전날 별세했더라는 것이다.
4월 4일 내자정(內資町) 호암 댁을 찾았다. 문기둥(門柱)에 조등(吊燈)이 걸렸다. 물어보니 어제 아침 주인이 별세했단다. 씨는 연전에 중병을 앓고 난 소감(重病後感)으로 말씀하시길 “예로부터 불교문화와 근래에는 기독교문화에 많이 영향받은 조선에서 두 종교의 깊은 조예가 없어 역사를 연구한다는 것이 허망하게(妄) 되었다”라고. 이제부터는 두 종교를 좀 더 알아야 역사학을 말할 수 있겠다고 하시고, 또 나더러 “형은 전도에라도 충실하라! 우리가 헛되이 사는(虛生) 것이 큰일났다” 하시던 씨가 드디어 가셨도다.
1930년대의 대표적인 민족주의 역사학자인 문일평이 생전에 류영모를 만나 종교를 모르는 역사 연구는 허망하다고 토로했다는 이야기다. 역사 연구를 위해서라도 종교의 깊은 조예가 꼭 필요하다고 했다. 문일평은 근대적 지식인이면서 전통적인 지사(志士)의 풍모도 겸비했던 역사학자다. 김교신은 류영모의 글을 읽고 「운주(雲柱)와 화주(火柱)」를 썼다.
호암 선생이 ‘신앙 없는 생애를 헛되이 사는 것이 큰일 났다’라고 통탄하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우리는 ‘진정한 학구의 인(人)은 드디어 찾을 데까지 찾고야 마는구나!’ 하는 감탄을 마지못한 동시에 함석헌 형의 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 한 질을 보내 드리면서, 기필코 선생의 사안(史眼)에 커다란 변혁이 일어날 것을 은근히 기대하여 마지못하였던 터인데, 이제 선생의 새로운 사론을 읽기 전에 먼저 그 부음에 접했으니 애석한 일이요, 커다란 촉망과 적지 않은 사모를 품고서 한 도시에서 십수 년을 살면서도 진인(眞人)의 목소리에 접하지 못하고 영원한 이별을 했으니 원통하기 그지없다.
호암 씨는 52살(18,545일)로 가셨으니, … 생(生)은 순간이요, 사(死)는 영속한다. 생은 취생(醉生)할 수도 있으려니와, 사는 엄연하게 임한다. 피할 듯싶으면서도 피할 수 없는 길이요, 먼 듯 먼 듯하면서도 이마 위에 다다른 형세이다. 앞에 선 구름 기둥(雲柱)과 뒤에 뻗친 불기둥(火柱)을 누가 능히 안 보인다고 핑계하는가.
생선 같은 일평생에 머리 토막, 가운데 토막 다 부서지고 ‘꼬릴 잡고 뉘우친다’는 노인(류영모)도 계시거니와, 가운데 토막인 중년을 주님께 바치긴 아직도 아까울까? 머리 토막인 청년을 ‘맛없이 족쳐 버린 후’에 저 노인의 탄식을 반복해야 할 것인가? … 이때 영원한 나라, 항구한 진리를 위해 그리스도께 성한 덩어리 전체를 드리려는 형제는 없나, 자매는 없나? 형제자매여 들으세요, 바치세요.
김교신도 류영모의 ‘인생 세 토막론(論)’에 공감했음을 볼 수 있다. 삶은 술에 취해 몽롱하게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죽음은 엄연한 현실이다. 삶은 잠깐 스쳐 가는 ‘순간’이지만, 죽음 뒤에는 ‘영원’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생선 같은 일평생’의 ‘가운데 토막’을 최고 진리인 종교에 바쳐야 한다. 김교신은 불교와 기독교를 모르고서는 조선 역사를 연구할 수 없다는 문일평의 탄식을 접하고 ‘진정한 학자는 찾을 데까지 찾고야 마는구나!’ 하고 감탄한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않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로마서 1:20)”라는 바울의 말대로 자연 계시(역사학)를 통해 신적인 지식(종교)의 갈급에까지 나아간 것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김교신은 문일평이 종교를 연구해 새로운 역사적 시각을 갖기 전에 별세한 것을 아쉬워한다. ‘궁극의 지식’인 종교에 이르지 못한 것이 안타까운 것이다. 그는 인생이 짧음을 탄식하면서 ‘머리 토막’과 ‘가운데 토막’을 그리스도께 온전히 바칠 형제자매가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김교신 본인이 젊은 날부터 그런 결심으로 살았기에 할 수 있는 말이 아닐까. 아마도 그의 뇌리에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전도서 12.1)는 성경 구절을 떠올렸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