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원이라고 ?
김 광수
간만에 무더운 여름날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선배는 활동적이고 인맥도 넓었다. 지금은 지방 대학교수를 하고 있다며, 혹 늦은 공부 생각 없냐는 것이었다. 삶은 평생 공부하는 것인데 학위도 있고해서 굳이 학위가 더 필요할까 망설였다. 2년만 고생하면 된다면서 굳이 먼 곳 지방까지 내려오지 않아도 가능한 인터넷 강의라고한다. 물론 학위도 주고 젊은 동기생 모임도 있으니 관심 있으면 응시하라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강의 중 원격시험이 없는 것은 아니며, 과목에 따라 현장 실습도 있다는 것이다. 정규 대학과정의 사회복지학과 학생이 된다는 것이다. 교육 비용은 일반 대학의 절반도 안되며, 최소한 1년에 2회 이상 해당과 교수님들과의 미팅이 서울에서 실시되다한다. 경비 또한 디지털 대학측에서 부담한다고 하였다.
그렇게 인터넷으로 주로 밤 시간을 할애하여 시작한 공부가 1년 6개월이 지나고 있었다. 현장 실습 후 레포트를 꼭 제출해야만 되는 필수 코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땅히 그런 분야에 인맥이 없던터라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마침 1년에 1~2 번씩 추수절이나 연말이면 옛 대학 동기생들 10여년간 요양원에 레크레이션 봉사를 한 것을 떠 올렸다. 전화를 드렸더니 안면이 있었던 원장님께서 방문을 허락해 주셨다.
어깨 너머로만 보아오던 요양원 각 룸을 살펴보고, 부대 시설 및 요양에 필요한 절차에 대하여 설명해 주시면서 차차 배워가면서 하면 어렵지 않다고 하셨다. 25일간 현장실습 과정으로 어르신들 식사 수발과 목욕 해드리기, 식사 배분과 운반의 일부분을 다른 요양사 분들과 협업하게 되었다. 출퇴근하면서 무료로 노력 봉사하는 것이지만 귀가후 레포트를 정리하곤 하였다. 한 2주동안은 꽤 힘들었다.
바깥 사회에서 바라보는 요양원에 대한 시선은 크게 두갈래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누가나 나이가 들면 도움이 절실한 것이다. 자식들이 부양하는 것이 과거로부터 당연한 것이었다. 삶의 형태가 바뀌면서 가정의 책임으로만 내몰 수 없는 것이 현실이 되었기에 그 대안으로 지정된 시설과 인력을 통하여 해결하고자 생긴 것이다. 선별적 무료 또는 약간의 비용지불을 통한 요양원 또는 양로원인 것이다. 몸 상태가 심해지면 마지막으로 갈 수도 있는 곳이 유료 요양 병원으로까지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어르신들을 케어하는 요양이라는 업무가 주로 인력으로 행하는 과정이기에 누군가는 3 D업종 중의 하나라고한다. 초기에는 돈이 되는 사업이다 싶어 뛰어든 분들도 많았다고한다. 그렇다보니 이윤 추구라는 벽에 요양사 분들에 대한 박봉과 신분에 대한 긍지를 갖지 못하는 과정에서 외국인 인력이 대거 투입되기도 하였다. 제대로된 교육 기간도 없이 현장에 투입 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어떤 어르신은 눈탱이가 부불어 오르거나 기저기를 5장 이상 깔고 있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뉴스마다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초기 정착 과정에서의 잡음을 도외시하자는 것은 아니다.
실습과정에서 어르신들을 시설에 의지할려고 방문하시는 분들을 살펴보면 각양각색이라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이곳을 무슨 호텔로 생각하시는지 방문객 본인의 재력 자랑을 거하게 하시는 것이다. “제가 사업상 무척 바쁘다보니, 부득이하게 어르신을 이곳으로 모셔온 것이니 내 부모님이라 생각하시고 극진히 모셔 주세요“,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라며 악수까지 청하는 것이다. 과연 그분은 이후 얼마나 이곳을 찾을지 궁금해진다. 어느 요양사분이 아마 실습생은 실습기간 동안이라도 그분 다시는 못 볼걸라며 의미 있는 미소를 짓는다. 그렇게 재력 있고 부모를 위하시는 마음이면, 여기보다 시설 좋은 보증금만 수억원에 매달 수백만원 내는 실버타운으로 모시지 않고 참 알다가도 모를 일 같다.
우리는 뉴스를 접하면서 간혹 단면만 보는 경향이 있다. 스코트렌드의 어느 작은 요양원에서 죽음을 맞이한 할머니가 남긴 유품 중 시 한편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였다. 줄거리의 핵심은 자신을 쓸모없는 노인으로만 보았냐는 것이다. 한때 사랑의 감정도 있는 사람으로서 멍든 상태로 제발 세상을 떠나게하지 말라는 것이였다. 그분도 역시 여자 분이셨기에 곱게된 모습으로 천국에 가고 싶은 마음일 것이었다. 서양의 복지사회를 동경해 오던 우리들에게는 큰 충격인 것이다. 그곳은 오래 전부터 핵 가족사회에 접어든 곳이지만, 동양처럼 자식들과의 유대 관계가 깊지 않다는 것을 전제하여야한다.
동양에서는 한방의학의 대가인 허준의 스승님이 작고하실 때, 스승님께서 남긴 글로 산 속 어느 동굴로 자신을 찾아오라고 유언하셨다는 일화가 있다. 그 당시 고려장이라면 부모님이 작고시 자식이 업고가서 산중에 놓고 오는 것으로 짐작된다. 허준 스승님 또한 어찌 죽음이 두렵지 않겠는가? 결국 산 짐승의 먹이가 되든 사후 문제일 것이다. 그러기에 당시로서는 절대로 꿈도 꿀 수 없는 해부학의 장을 허준에게 마지막 내어준 의술의 경지가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당시에 자식 등에 업혀서 산중 깊은 곳으로 버려진다는 것을 알고 가면서도 자식이 혼자 산을 내려가는 길을 잃을까 손이 닿는데마다 가지나무를 꺽었다는 일화도 있는 것이다. 모든 부모님들의 마음일 것이다. 비록 자신은 집 안의 퇴물로 고려장을 맞이해도 마지막 가는 길, 자식 등에 얻혀 간다는 것에 만족함을 느겼던 것이다. 한편 자식을 먼저 떠나 보내게 되어 부모가 자식을 품에 안고 산에 오르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 마음은 애 간장이 녹아 내리는 형국일 것이다. 막상 그때는 세상이 원망스럽고 누구의 이야기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좌충우돌의 시간이 지나고나면 더 단단해지는 마음의 평화가 깃들기를 우리 모두는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늙어 아프면 “요양원이라고” 이야기를 꺼내면 많은 어르신들 분이 펄쩍 뛴다. 저런 후레 자식이라고 까지한다. “지놈 어릴 때 똥기저기 갈아주고 시집 장가 보내 주었더니 은혜를 갖지는 못할 망정 갖다 버릴려고해, 참 세상 말세로구나 !, 귀신들은 무엇하는지 저런놈 먼저 잡아가지”라며, 삶에 애착을 강하게 느끼는 분도 있다는 것이다.
어떤 어르신은 요양원에서 말썽을 자주 부리고, 심지어는 요양사한테 손지검과 욕까지 다반사로 하는 것이다. 또 다른 어르신은 일부러 바지에 오줌을 누거나, 물건을 흔들기도 까지, 상상 못할 일들이 생기기도 한다고한다. 그럴 때면 베테랑 요양사 분들이 다가가서, 어르신 또는 “자기야 ~, 오늘은 내가 이뻐 보여 어때? 우리 자기 사탕 나누어 먹을까, 같이 동요 부를까? 하면서 아이들 다루듯이하면 해결된다는 것이다. 관심을 받고싶어 하시는 행동이 더 많다는 것이다. 식사 시간에도 옆자리 식판에 단무지가 한개 더 많다고 화가 나서, 밥 안먹는다며 식판을 휙 던져 버리는 할아버지, 할머니도 종종 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저 할머니분도 한때는 레스토랑에서 와인 잔 한손에 들고 스테이크 드셨을 것이다. 그런 시절이 겹쳐져서 그런가? 아니면 애가 되가서 그런가? 매사에 누구한테나 닥치는데로 짜증이시다. 나이 많으신 분들을 이제와서 밥상머리 교육을 다시 받게할 수도 없는 것이고, 이런 환경만 아니라면 주먹이 운다는 표현이 순간 스쳐간다. 아참 이건 아니지? 여기서 근무하시는 요양사 분들이나 원장님을 보노라면 백의 나이팅겔이며 사랑을 실천하고 계시는 마더 테레사 수녀님이 환생하시어 온 것 같다. 정말 존경 받을 분들만이 영위하시는 직업인 것이다.
오랫동안 참아오던 요양사 분이 어르신 그러시면 이곳에 더 계실 수 없어요. 제가 자녀분께 전화 드려야겠네요하면, 그처럼 천방지축이던 분이 순한 양이 되어서는 "제발 내 새끼들한테는 전화하지 말아" 달라며 요양사의 팔에 매달려 우시는 것이다. "자녀분이 그렇게 무서우세요"라고 여쭈어보면, 아니 자녀들이 걱정할까봐 그러니까 한번만 봐달라는 것이다. 그래도 여기 있어야 자식들이 내 걱정 아니하고 잘 사는 것이 보람이라고 말씀하기도한다. 어르신들 대부분이 자식들한테 연락하는 것을 제일 무서워 하신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경우가 있겠지만 한가지 사례를 적어 본 것이다. 이따금 정신줄 놓을 때는 요양사 분들이 진땀을 뺀다. 몸도 마음도 정신도 아프니 이곳에 오신 것인데 그분들이 요양사 마음에 들게 행동하기를 조금이라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사치인 것이라 생각된다. 참으로 부모의 마음은 한 없이 퍼주는 우물 속 보다 깊은 것을 볼 때, 비롯 육신은 세월에 묻쳐 갈 망정 마지막 잡고 있는 정신 줄은 인간만이 갖을 수 있는 은혜인 것이다. .
원장님께서 실습 기간 동안 나이가 꽤 많으신 어르신 한분을 지정해 주시면서 그분에 대하여 관심있게 살펴보라고 하셨다. 식사도 힘들어 하실때는 떠 먹여 드렸다. 흘리시는 밥알이나 국 건데기를 말끔히 치운곤 했다. 옷도 갈아 입혀드리고 했다. 평소부터 말씀이 거의 없으신 분으로 원내에서 통하고 있었다. 과거 교편 생활을 하시면서 교장까지 하셨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드시고 여기 저기 아파서 이곳에 의지하게 되었다는 것을 10일 쯤 지나서 어르신을 통하여 더욱 알게 되었다. “왜 자네는 나에게 이렇게 매번 신경을 써주는 것이야, 난 자네한테 바란 것도 없고 줄 것도 없다”고 하셨다. 그냥 어르신이 제 부모님을 뵙는 것 같아 그럽니다. 교장 선생님 편히 말씀하세요 라고하였다. “이봐 자네, 나 이제 교장도 선생님도 아니야, 이 나이에 누구를 가르치겠어, 이곳에 왠 선생님과 사모님이 그리도 많은지 모르겠어라고 하신다. 죄다 한자리씩 못해서 안달이지, 그 나이 되면 내려 놓는 법부터 알아야지, 다들 옷장마다 옷이랑 잡동사니가 가득이야.
그냥 이름만 불러주어도 땡큐지, 아니 그런가? 내가 자네 이름을 불러도 되겠나” 하기에, 그래도 됩니다라고 말씀 드렸더니 기쁘게 웃으시는 것이었다. 여기 와서도 안달난 사람들 보면 참으로 딱해 보여, 나보기 역겨워 가실 때는 사쁜히 지려발고 가라고 하면 될 것을, 악을 쓰며 잡고 있는 줄이 썩어가는 동아줄이라는 것을 모르니 불쌍해 보인다는 것이다. 과거의 영광과 추억을 이미 내려놓고 계신 모습이 다른 어르신들과 달라 보였다. 일출의 모습이 아닌 일몰의 모습에서 애잔함이 밀려드는 한편의 영화를 본 것 같다. 혹 그분한테 누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한 것은, 실습기간이 끝나면 이곳을 거의 오지 않을덴데 마음에 상처를 드리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보았다. 이곳 직원 분들이야 오래 계시므로서 그럴 우려는 없으실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도 있었다.
과연 나도 삶의 마감 시간이 다가 오고 있을 때 발버둥 치지는 않을까 그려본다. 이번 학습의 기회를 통하여 학위를 하나 더 얻는 것보다 삶의 다른 면에 서보는 값진 기회였던 것이다. 과거의 열악한 환경에서 묵묵히 일해오신 요양사님들과 관계인들 덕분에 이제는 사회에 제대로 뿌리 내린 요양원이나 양로원이 많다는 것은 다행이다. 그런데도 요양 병원을 찾는 가족분들 중에는 이곳에서는 의사 또는 간호사라는 직함에 눌려서인지, 요양사나 양로원 종사자에 대한 태도에 있어도 이중적인 잣대로 대하는 것을 자주 목격하기도 하였다. 어찌보면 요양사 직업이 3D 업종이란 말이 괜스레 생긴 것 같지는 않았다. 무슨 사정으로든 이곳을 이용하게 되는 어른신 분들을 위해서라도 요양사분들과 원장님을 대하는 우리들의 정성이 더욱 필요하다는 것을 체험한 과정이었다. 언젠가는 우리도 누군가의 도움으로만 움직일 수 있는 과정을 격을 때 슬퍼하지 않을 것 같다.
2024.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