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문성공 묘소를 찾아서 시향을 모셔야한다는 여론이 일어나자 자연히 연촌공 묘소 아래에 있는 고려시대 양식의 석축방분이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없었고, 지식인들이 조상의 묘소는 근거 없이 함부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설득했지만 비등하는 여론을 잠재울 수 없었으므로 1795년(정조 19) 문성공대종회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여러 종중으로 통문을 보내 주덕산에 있는 사각묘를 발굴하여 지석을 확인하고자 하니 각 종중에서는 대표자를 보내서 참관해 달라고 통지 하였다.
일반인들의 심정적 믿음과 지식인들의 이성적 의심 사이의 깊은 간극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물증을 통한 입증밖에 없었으므로, 결국 석축방분을 발굴 조사하여 지석을 확인하자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동치보(1864) 문성공 행장>
묘소에 관하여 본시부터 근거로 삼을 만한 기록이 없고, 옛날 족보나 새로 만든 족보에도 역시 기록된 바가 없는데, 전주 소양면 주덕산 참의공(월당공) 묘소 앞 가장 아래 에 있는 큰 무덤이 혹시 문성공 묘소일지도 모른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는지라,
墓所本無可據新舊譜牒亦無懸錄而全州所陽面周德山參議公墓冣下節有一大塚人或傳疑於文成公墓云故
정조 20년(1796)에 영남과 호남의 여러 일가들이 지석을 확인하여 물증으로 삼기로 합의하여 봉분을 열고 발굴 조사를 하였으나 오직 광 위에 넓은 돌이 하나 덮여 있을 뿐 물증으로 삼을 만 한 것이 없는지라 옛날 모습 그대로 복원 보존하기로 하였다.
正宗二十年丙辰嶺湖諸宗合議欲見誌石之的證開審封瑩則只有一廣石覆壙上餘無可驗故依舊還封
결국 발굴 조사를 통하여 물증을 발견하지 못하였으므로 양측의 의심은 조금도 해소되지 않았다.
자그마치 150년 동안이나 묘제파와 단제파로 나누어져 서로 비난하고 헐뜯어 온 역사가 있기 때문에 묘제파는 묘제파대로 단제파는 단제파대로 서로 욕하고, 헐뜯는 이야기가 할아버지 입을 통해 손자의 귀에 전해지게 되었다. 이제 종중이 화동한지 10년도 넘었으므로 모든 오해를 털어내고 서로 화합을 이루어야 할 것인데, 할아버지로부터 들은 전설을 부정하는 것이 어디 쉽겠는가? 하지만 그 의심을 해소시켜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바로 오래 동안 종중의 역사를 연구한 如水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묘제/단제 사건은 당쟁의 불씨가 종중으로 옮겨 붙은 것이다.
오늘은 묘제/단제 사건이 아니라 완동구제가 종대로 바뀌게 된 경위를 설명하는 자리이므로 이정도로 그치고 훗날 전주최씨의 역사에서 묘제/단제 사건만 따로 장을 만들어서 하나하나 근거를 들어가면서 자세하게 설명하여 오해를 풀어 드리겠다.
나온 김에 하나만 짚고 넘어가자면, 묘제파 가문에는 연촌공 묘소가 문성공 묘소 위에 있는 것이 사건의 주요 원인이라고 왜곡되어 전해오고 있으나, 조선시대는 조상의 묘소 위에 후손 묘소가 있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고, 기록에 의하면 사건 당시 연촌공 묘소 바로 위에도 연촌공 후손 묘소가 있었다.
율곡 이이 묘소도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신사임당 쌍분 바로 위에 있고, 조선 예학의 거두 사계 김장생 묘소도 할머니 묘소 바로 위에 있다. 부안 연곡리 석동 부안종중 선산이나, 정읍 장순리 고부종중 선산은 말할 것도 없다.
의심나면 한 번 가보기 바란다. 종중을 이간질하는 황당한 전설은 이제 그만 우리 세대에서 끊어 더 이상 후손에게 물려주지 말아야할 것이다.
<동치보(1864) 문성공 행장>
다음해 1797년(정조 21) 그곳에서 북쪽으로 멀지 않은 장소에 제단을 쌓고 비석을 세운 다음 매년 3월 3일을 제사일로 삼아서 제단에서 제사를 모시고 있다.
翌年丁巳設壇立碑於其北數弓許每年以三月三日仍爲設享於壇
사각묘를 발굴 조사한 결과 지석이나 유품 등 고증할 만한 유물이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으므로, 결국 의문은 조금도 해소되지 못했고, 석축방분은 문성공 묘소인지 의심스러운 무덤, 즉 문성공 의총(文成公疑塚)으로 정의하여 보존하기로 하고, 제단을 쌓고 제사를 모시기로 결정했으나 석축방분이 문성공 묘소일 것이라는 심정적 믿음만은 아직도 사각묘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문성공 제단은 주덕재 뒤편 현재 중랑장공파 제단자리에 1797년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지금은 2세 중랑장공 최용봉과 3세 동정공 최을인 제단이 있지만, 당시에는 문성공 제단 하나만 설치되어, 문성공만 1797년 3월 3일부터 제단에서 시향을 모시기 시작하였다.
중랑장공과 동정공 제단은 묘제/단제 사건으로 종중이 분열된 이후 1875년(고종 12) 처음 설치되었으며 그해 3월 3일부터 세 분을 함께 시향을 모셔오게 되었다.
제단각에 중랑장공과 동정공 제단을 설치하고 시향을 모시기 시작한 것은 묘제/단제 사건 이후의 일이다.
그 이전에는 문성공 제단만 있었고 문성공 시향만 모셔왔다.
시향을 모시기 전에는 60년에 한 번씩 족보를 만들 때나 종인들이 모여서 모임을 가지면 되었기 때문에 종대, 즉 종친회관 같은 시설물은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시향을 모시기 위해서는 제물(祭物) 준비, 제관(祭官) 집사(執事) 분방(分榜) 등 종중대표들이 모여서 회의와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지금처럼 호텔이나 모텔 같은 대중숙박시설이나 회의를 할 수 있는 대중회관 같은 시설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회의를 하고, 제사를 준비할 장소도 필요했지만 특히 전국에서 모여 든 종중 대표들이 며칠간씩 머물면서 숙식을 해결할 장소가 필요하였다.
마침 전주 시내에 개인 살림집이 아닌 완동구제가 빈집으로 전해오고 있었으므로 자연히 종중 대표들은 완동구제에 모여서 회의를 하고, 제사를 준비하게 되었다.
그 일이 해마다 반복되다보니 1800년 무렵에는 저절로 종대라고 부르게 되었다.
처음에는 문성공 제사 준비를 위한 시설로 사용되었으나 약 60년 후 묘제/단제 사건으로 묘제파와 단제파로 나누어지므로 인하여 결국 중랑장공파 종대로 바뀌게 되었으며 그 때부터 중랑장공과 동정공 시향도 모시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완동구제가 1800년 이전에는 중랑장공파 종대이었는가? 아니다.
왜냐하면 묘제/단제 사건 이전에는 시조 문성공을 제외한 선조들의 시향을 모시지 않았으므로 중랑장공파 역시 종대는 필요가 없었다.
즉 완동구제는 그냥 조상이 물려주신 빈 집으로 전해 오다가 1800년 무렵에 문성공 가문 종대로서 역할을 하게 되었고, 1857년 묘제/단제 사건으로 종중이 분열된 후에 중랑장공과 동정공 시향을 모시게 되므로 인하여 저절로 중랑장공파 종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완동구제가 연촌공파 종가 교도공(계손)파 가문으로 흡수되지 않고, 연촌공파 재산으로 존속한 이유는 영암종회 지분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연촌이 말년에 거처하다 돌아가신 완동구제가 종대로 바뀌게 된 과정과 근거를 설명했는데 아직도 이해가 안 되거나 의심이 남는 분은 별도로 연락 주시면 충분한 자료를 제공해 드리겠다.
그리고 앞에 인용한 <가경보>는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전질(全帙) 소장되어 있고, 인터넷에서 누구나 검색하여 볼 수 있도록 <영인본>이 올라 있다.
또 전주 종대에도 한 질이 있었으나 지금은 다 없어지고 수권(首卷) 1책만 남아 있는데, 그 책에도 서문을 비롯하여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은 모두 있으므로 가서 확인해 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