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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량을 지니면 능력은 길러진다.’ ‘능력은 [극복]을 낳지만 역량은 [비전]을 제시한다.’ ‘[잘하는 것]이 능력이라면 [좋아하는 것]이 역량이다’ ‘능력을 지녔다고 역량이 저절로 발휘되는 것은 아니다.’ ‘능력만 있는 경우는 있을 수 있으나 역량만 있는 경우는 없다.’ ‘능력은 [앎]의 문제에 강하다면 역량은 [삶]의 문제에 더 강하다.’ ‘능력은 [객관식]에만 강하지만 역량은 [주관식, 서술형]에도 강하다.’ ‘능력이 [인지적 요소]를 중시한다면 역량은 [정의적 요소]를 중시한다.’ ‘능력은 환경 변화에 무너지지만 역량은 변화된 환경을 극복하게 한다.’ ‘능력이 [나의 문제]에 집중한다면 역량은 [우리의 문제]로 발전하게 한다.’ ‘능력은 [외부]로 나타나지만 역량은 그 사람의 [내면]에 숨어있는 속성이다.’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능력이라면 역량은 삶의 [목적]에 도달하게 해준다.’ ‘능력은 패턴을 통해 길러질 수 있으나 역량은 일관된 패턴을 지닐 수 없다.’ ‘공부를 잘 해서 1등하는 것이 능력이라면 노벨상 받게 하는 것이 역량이다.’ ‘단기적인 결과에 집착하는 것이 능력이라면 역량은 과정중심의 장기전이다.’ ‘능력이 [무엇과 어떻게]에 머문다면 역량은 [왜]라고 묻는 것으로 나아간다.’ ‘능력은 있는데 역량이 부족하거나 역량은 있는데 능력이 없는 경우도 있다.’ ‘능력이 [머리와 손발]이 기능하는 수준이라면 역량은 [마음과 자세]로 작동된다.’ ‘능력은 [개인적]으로 길러질 수 있지만 역량은 [집단의 협력] 속에서만 길러진다.’ ‘능력은 일을 [감당해 낼 수] 있는 힘이고, 역량은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 힘이다.’ ‘기술을 익히는 것이 능력이라면 역량은 성취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지니는 것이다.’ ‘무엇을 [아는 것(명제적 지식)]이 능력이라면 무엇을 [할 줄 하는 것(방법적 지식)]이 역량이다.’ ‘능력은 어떤 일을 해 낼 수 있는 에너지의 총칭이라면 역량은 우수한 성과를 창출하게 하는 내적 속성이다.’ ‘[아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능력 있는 교사라면 재구성을 통해 [알아야 할 것]을 가르치는 것은 역량 있는 교사이다.’ ‘능력이 [의존적]이어서 타인의 결정에 의지하지만 역량은 [능동적]이어서 자신의 생각에 대한 반응으로 선택한다.’ |
‘능력(ability)과 ‘역량(competence)’
‘무능력(無能力)’이라는 말은 있어도 ‘무역량(無力量)’이라는 말은 듣지 못했다. 역량은 유무(有無)의 문제가 아닌 탓이다. 능력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역량이 없는 수준은 ‘무역량’이 아니라 ‘무능력’일 것이다. 그 반대로 역량이 있으면 ‘(유)역량’일 것인데, ‘무와 유’로 대응할 수 없으니 굳이 ‘유’를 필요로 하지 않아 ‘역량’만으로도 충분했으리라는 짐작을 해 본다. (능력 또한 ‘유능력’은 없고 ‘무능력’만 있는 것도 같은 이치가 아닐까?)
‘깜냥’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일을 가늠해 보아 해낼 만한 능력을 말한다. ‘능력’에 가깝다기보다는 ‘역량’에 붙어야 어울리는 말로 들린다. 문제의 해결 여부를 저울질하는 단계에서 주로 쓰이는 말이다. 그런데 ‘깜냥’은 대체로 역량이 부족한 사례에 쓰인다. ‘깜냥도 안 되면서~’ 식이다. 그렇기에 역량을 논할 자리가 되려면 먼저 ‘능력’을 지닌 이후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 무엇을 ‘잘 한다’는 것은 대체로 ‘타고난 측면’이 우선한다. 타고났으니 축복 받은 사람이다. 그 다음은 ‘노력’이다. 노력하면 얼마든지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용을 써 봐도 도저히 안 되는 경우도 있다. 힘들게 가르쳐 주면 알아듣기는 하는 것 같은데 해보게 하면 할 줄을, 아니 하려고 하지를 않는다. 강요하면 강요할수록 고통만 안겨주는 꼴이 된다. 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기 때문에 하지 않는다고 느낄 때쯤에 가서야 ‘포기’를 선언하게 된다. 물론 알아도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부끄럼’ 때문이다. 그런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하려고 달려드는 아이도 있다. 그러면 면박을 주기보다는 그 자체로 예뻐 보인 경우가 많다. 어디에서든 잘 살아남을 것 같아 보여 칭찬해 주게 된다. 비록 ‘능력’은 없어 보이나 ‘역량’을 키우면 능력이 길러질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능력(ability)과 역량(capability)은 비슷하기는 하지만 뜻이 조금 다르다. 어떤 훈련을 통해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까지 도달할 수 있는 것은 능력이다. 혹독하고,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더 좋은 결과를 발휘하게 할 수 있는 힘이 길러진 셈이다. 그러나 역량은 장기적으로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리킨다. 능력이 솜씨나 수완의 범주라면 역량은 장래성, 가능성에 가깝다. 청소년기의 공부 목적은 능력(ability)을 키우는 데 있다기보다 역량(capability)을 키우는 데 있어야 한다. 주어진 시간에 많은 문제를 풀어내는 능력도 중요하지만 나아가 새로운 문제에 도전하기를 좋아하는 역량을 키우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아는 것은 힘’이라고 한다. 그런데 ‘모르는 것이 약’일 때도 있다는 말이 있다. 이 두 문장이 ‘능력’과 ‘역량’의 차이를 단적으로 말해 주는 것 같다. 아는 것은 지식이어서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을 가릴 수는 있지만 이것을 어떤 구체적인 상황과 연결하였을 때에는 밝히는 것보다 덮고 가는 것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리는 것이 바로 역량이라고 할 수 있다. 최진석 교수가 말한 ‘진-선-미’의 순서보다 ‘미-선-진’이 더 높은 단계의 판단 기준이라는 점과 비슷한 이치인 듯싶다.
‘안다’는 것은 능력의 범주에 속한다. ‘알다’는 ‘(사실이나 대상을) 의식이나 감각으로 느끼거나 깨닫다, (상황이나 대상을) 교육이나 사고를 통하여 정보나 지식을 갖추다, (일을) 어떻게 할지 정하거나 판단하다, (어떤 대상을 다른 대상으로) 생각하여 그렇다고 여기다, (일을) 수행하는 능력이나 기술 등을 가지고 있다, (상대편의 어떤 명령이나 요청에 대하여 그대로 하겠다고는) 동의한다, (어떤 점이) 그렇다고 생각하거나 믿다.’와 같은 맥락이다. 왠지 수동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 무엇의 주체라기보다 객체인 듯한 인상이 강하다.
그 대신, ‘한다’는 것은 역량의 범주에 속한다. ‘하다’는 (어떤 일을) ‘행위로 실현하다, 만들거나 짓거나 마련하다, (어떤 특징이나 자격이 있는 것으로) 삼거나 만들거나 되게 하다, 갖추거나 차리다, 관리하고 운영하다,(경영하다) (특정한 분야의 일을) 맡거나 책임지다, (무엇을 어떻게) 다루어 문제가 없도록 마무리를 짓다, (무엇을 어느 방향으로) 정하여 향하다, (사람이 기대에 걸맞은 일을) 행동으로 드러내다, (무엇이라고) 이르거나 말하다, (어찌하기로) 일을 정하다.’와 같은 맥락이다. 이를 한 마디로 줄이면 능동적이고 주체적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인식의 수준, 시선이 머무는 위치가 능력과 비교하여 한 단계 높아 보인다.
능력을 키우는 공부와 역량을 기르는 공부의 차이는 뭘까? 문제 해결의 속도가 빨라지고, 또한 실수를 줄이는 것은 능력의 범주이다. 아는 것이 늘어난 것이다. 하지만 역량은 그 능력을 통해 알아야 할 것이 느는, 모르고 있는 것이 많아지는 결과를 낳게 된다. 능력의 마지막이 ‘끝’이라면 역량의 마지막은 ‘시작’인 셈이 된다. 모르는 부분을 더 학습해야 하고, 새로운 문제점을 찾아보는 것, 친구들과 함께 문제의 지점에서 탐구하는 것은 역량을 키우는 활동이다. 대입에 성공하는 것은 능력을 발휘한 결과이다. 또한 각종 대회에서 수상을 하거나 1등급을 받는 것도 능력이 뛰어남을 증명 받은 셈이다. 주어진 틀 안에서 길러진 화초인 셈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틀을 박차고 나가라는 말은 아니다. 기본적인 능력도 갖추지 않고 틀을 벗어나면 보호받지 못한 탓에 잡초로 인식되어 ‘제초제’의 쓴 맛을 경험하기 쉽다. 역량은 능력을 기르는 환경 속에서 차츰차츰 길러지는 것이 낫다는 말이다.
반면, 능력을 바탕으로 보다 어려운 문제,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은 역량을 키우는 것이다. 역량은 기본적으로 도전과 용기를 수반한다. 처음 하는 일임에도 과감하게 시도해 보도록 격려하는 것은 역량을 키우는 것이다. 나아가서는 알고 있는 지식을 친구들과 공유하며 협력하는 것이나 세상 여행을 하며 다양한 친구를 사귀고, 많은 책을 읽는 것은 역량을 키우는 최고의 활동들이다. 자기주도적 학습을 일상화 하고, 인문적 사고를 바탕으로 문제의식을 지닌 사고를 즐기며 공감력을 기르는 것은 역량을 키우는 매우 중요한 활동이다.
능력은 기르되 발휘되는 시기가 현재가 아닌, 앞으로 10여년의 뒤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능력이 역량에 잇닿지 않고 거리를 두고 갈 필요도 있다. 설익은 열매는 맛이 대체로 시다. 하지만 잘 익도록 놔두면 ‘나도 모르게’ 단맛을 내는 때가 있을 것이다. 시선을 높게, 멀리 향하다 보면,(3,200자. 2019. 7. 14)
첫댓글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