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녹동서원중건기(鹿洞書院重建記){녹동서원지}
- 존양사 : 녹동서원 신실 -
祀賢之有書院所以尊其人象其德而興起斯文也仁祖庚午湖南章甫創建書院于靈巖以祀藝文舘直提學烟村崔先生乙巳以其孫山堂公配食肅宗甲戌我文谷文忠先祖列享于左辛卯以農巖文簡公配食癸巳賜額鹿洞高宗辛未戊辰因朝令見撤今當一百餘載矣多士之嚮慕者愈久愈切乃於丙辰之春詢謨僉同鳩財募工建若干楹不日而告訖崇奉如禮院儒崔和烈洛定要潤東記其事竊惟四先生狀行己蕙於恩侑可以華袞百世矣不必重疊而今日再建己廢當院斯豈非四先生德義之盛感人者深歟鳴呼一院之廢興而一世之隆替可卜矣磋磋承學德玆以涉母怠母荒益母忘四先生之訓迪是所心說遂不揆僭妄而爲之記
丙辰秋七月小晦
文谷先生十一世孫安東金潤東謹記
서원에서 어진 사람을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까닭은 서원에 모신 분의 덕(德)을 숭상함으로 인하여 유학이 더욱 융성하게 일어나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다.
인조 경오년(1630)에 호남의 선비들이 영암 고을에 서원을 설립하고, 예문관 직제학 연촌(烟村) 최 선생을 배향하여 제사를 모셨는데, 을사년(1665)에 그의 손자 산당공(山堂公)도 함께 배향하였으며, 숙종 갑술년(1694)에는 나의 문곡공(文谷公) 시호 문충공 선조도 그 왼쪽에 함께 배향하였고, 신묘년(1701)에는 농암공(農巖公) 시호 문간공도 배향하였으며, 계사년(1713)에는 녹동서원(鹿洞書院)이라는 사액이 내려졌으나, 고종 신미년(1871)과 무진년(1)에 국가의 법령에 의하여 철폐되어 벌써 100여 년이나 지났다.
서원은 비록 철폐되었으나 많은 선비들이 우러러 흠모하는 마음만은 오래토록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1976년(병진) 봄에 여러 사람이 함께 의논하고 건축에 필요한 재물을 모아서 몇 명의 기술자를 불러다가 집을 세우게 하니 며칠 아니 되어 다 지이어서 예절에 맞추어 제사를 올릴 수 있게 되었는데, 서원에 소속한 선비 최화열(崔和烈)과 최낙정(崔洛定)이 나 윤동(저자)에게 그 일에 관하여 적어서 기록으로 남기라고 하였다.
가만히 생각해 볼 때 네 분 선생의 뛰어난 행실은 이미 나라로부터 은혜를 입어서 사액까지 받은바 있으니, 그 제사가 가히 화려하였다고 할 수 있었으며, 그 영광이 영원히 이어가게 될 것이므로 내가 중첩하여 다시 거론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오늘 이미 철폐된 서원을 재건하였으니, 어찌 네 분 선생들의 덕의로 인한 무수한 감명이 사람들에게 깊이 새겨지지 아니하겠는가?
아아! 하나의 서원이 일어나고 없어지는 것을 통하여 한 세상이 흥하고 망하는 것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니, 선생의 학덕을 이어받아 연구함에 있어서 지나치지 말 것이며, 게으르지 말 것이며, 거칠어지지 않도록 잊지 말고 네 분 선생의 가르침을 계승하는 데에 마음을 두어 말씀하신 바를 따르고 스스로 마음대로 헤아리지 말라고 분수에 넘치도록 망령되이 이와 같이 적는다.
1976년(병진) 가을 7월 그믐(말일) 전날.
문곡(文谷) 선생 11세손 안동김씨 김윤동(金潤東) 삼가 지음.
* 각주 ----------------------
(1) 1868년. 서원 철폐는 1865년 시작되어, 1868년에는 국가에서 서원에 하사한 토지에 세금을 매겼고, 1870년에는 사액서원이라 하더라도 철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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