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3월12일(日)晴▲조계산(曺渓山)(3)(송광사-송광굴목재-천자암-선암굴목재-선암사)
해봉산악회(47명)
♠참 고
▲조계산(曺渓山)
* 전남 순천시 송광면(松光面) 주암면(住岩面) 일대의 도립공원.
내용 출처:두산세계대백과
면적 27.4km2, 조계산(884m)을 중심으로 선암사(仙巌寺)․송광사(松広寺) 등을 포함하며,
1979년 12월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노령산맥에서 갈라져나온 산줄기에 속하며, 산
세가 수려하고 해양성 기후의 영향으로 겨울에도 따뜻하다. 관광의 중심인 송광사는 승
보사찰(僧宝寺刹)로 유명하며 가람의 규모도 국내 유수이고, 뛰어난 문화재가 많아 문화
재의 보고를 이룬다.
송광사의 개산 당시에는 송광산이라 하였는데 그 후의 개창(開創)과 더불어 조계종(曹渓
宗)의 중흥 도량(道場)으로 삼으면서 조계산으로 바뀐 것이다.
♥송광사(松広寺)
개요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松光面) 조계산(曹渓山) 서쪽에 있는 사찰.
종파: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
창건시기:신라 말기
창건자:혜린
소재지: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내용 출처:두산세계대백과
한국의 삼보(三宝)사찰 가운데 승보(僧宝)사찰로서 유서 깊은 절이다. 《송광사지(松広
寺誌)》에 따르면 신라 말기에 혜린(慧璘)이 마땅한 절을 찾던 중, 이곳에 이르러 산 이
름을 송광이라 하고 절 이름을 길상(吉祥)이라 하였는데, 사찰의 규모는 불과 100여 칸
에 지나지 않았고 승려의 수효도 겨우 30~40명을 넘지 못하였다. 처음에 이렇게 창건
된 뒤 고려 인종(仁宗) 3년(1125)에 석조(釈照)가 대찰을 세울 뜻을 품었다가 세상을 뜨
자, 1197년에 승려 수우(守愚)가 사우(寺宇) 건설을 시작하였다. 3년이 지난 뒤 보조국
사(普照国師) 지눌(知訥)이 정혜사(定慧社)를 이곳으로 옮겨와 수선사(修禅社)라 칭하
고, 도(道)와 선(禅)을 닦기 시작하면서, 대찰로 중건하였다.
이 사찰을 안고 있는 조계산은 이때까지는 송광산이라고 했는데, 보조국사 이후 조계종
의 중흥도량(中興道場)이 되면서부터 조계산이라고 고쳐 불렀다. 조계종은 신라 때부터
내려오던 구산선문(九山禅門)의 총칭으로, 고려 숙종(粛宗) 2년 대각국사(大覚国師) 의
천(義天)이 일으킨 천태종(天台宗)과 대칭으로 이렇게 부르기도 했다. 보조국사의 법맥
을 진각국사(真覚国師)가 이어받아 중창한 때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약 180년 동
안 16명의 국사를 배출함으로써 승보사찰의 지위를 굳혀 왔다.
경내에는 이들 16 국사의 진영(真影)을 봉안한 국사전(国師殿)이 따로 있다. 수선사를
언제 송광사로 개칭하였는지에 관하여는 기록이 없다. 임진왜란 때 일부가 소실된 뒤 한
동안 폐사 상태였는데, 뒤에 응선(応禅)을 비롯한 승려들이 복원하고 부휴(浮休)를 모
셔 다시 가람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러나 1842년(헌종 8) 대화재가 일어나 모든 건물이
전소되고 삼존불(三尊仏)․지장보살상(地蔵菩薩像)․금기(金器)․대종(大鐘) 및 기타 보
물과 《화엄경(華厳経)》 장판(蔵板) 약간만을 건졌다. 이후 승려와 신도의 노력으로
1943~1956년에 차례로 복원하여 옛모습을 되찾았다. 1948년의 여수․순천사건과 6․25
전쟁으로 사찰의 중심부가 불탔는데, 그후 승려 취봉(翠峯)․금당(錦堂)의 노력으로 현
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한때 80여 동의 규모였던 대가람이 현재는 50여 동의 건물밖에
없으나 그 면모는 여전하다.
특히 긴 역사와 함께 가장 많은 사찰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목조삼존불감(木彫三尊仏
龕:국보 제42호), 《고려고종제서(高麗高宗制書:국보 제43호)》, 국사전(国師殿:국보 제
56호)을 비롯하여 《대반열반경소(大般涅槃経疏)》(보물 제90호), 경질(経帙, 보물
134), 경패(経牌, 보물 제175호), 금동요령(金銅揺鈴:보물 179), 《묘법연화경(妙法蓮華
経)》 관세음보살보문품 삼현원찬과문(観世音菩薩普門品三玄圓賛科文:보물 204), 《대승
아비달마잡집론소(大乗阿毘達磨雑集論疏)》(보물 205), 묘법연화경찬술(妙法蓮華経讃述:
보물 206), 《금강반야경소개현초(金剛般若経疏開玄褻)》(보물 제207호), 하사당(下舎
堂:보물 263), 약사전(薬師殿:보물 302), 영산전(靈山殿:보물 303), 《고려문서》 즉 노
비첩(奴婢帖), 수선사형지기(修禅社形止記:보물 572)가 있다. 이 밖에도 능견난사(能見
難思) 등 지방문화재 8점이 있으며, 추사(秋史)의 서첩(書帖), 영조(英祖)의 어필(御
筆), 대원군의 난초 족자 등 많은 문화재가 사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계종의 발상지로서 현재는 선수행(禅修行)의 도량으로서 조계총림(曹渓叢林)이 있다.
♥선암사 (仙巌寺)
개요
전남 순천시 승주읍(昇州邑) 조계산(曹渓山) 동쪽에 있는 사찰.
종파:대한불교 태고종
창건시기:542년
창건자:아도
소재지:전남 승주군 승주읍 죽학리
내용 출처:두산세계대백과
《선암사사적기(仙巌寺寺蹟記)》에 따르면 542년(진흥왕 3) 아도(阿道)가 비로암(毘盧
庵)으로 창건하였다고도 하고, 875년(헌강왕 5) 도선국사(道詵国師)가 창건하고 신선이
내린 바위라 하여 선암사라고도 한다. 고려 선종 때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중건하였는
데, 임진왜란 이후 거의 폐사로 방치된 것을 1660년(현종 1)에 중창하였고, 영조(英祖)
때의 화재로 폐사된 것을 1824년(순조 24) 해붕(海鵬)이 다시 중창하였다.
6․25전쟁으로 소실되어 지금은 20여 동의 당우(堂宇)만이 남아 있지만 그전에는 불각
(仏閣) 9동, 요(寮) 25동, 누문(楼門) 31동으로 도합 65동의 대가람이었다. 특히 이 절
은 선종(禅宗)․교종(教宗) 양파의 대표적 가람으로 조계산을 사이에 두고 송광사(松広
寺)와 쌍벽을 이루었던 수련도량(修錬道場)으로 유명하다.
주요문화재로는 보물 제395호인 삼층석탑 2기가 있으며, 대웅전은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41호로 지정되어 있다.
※선암사 승선교(仙巌寺昇仙橋)
< 요 약>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죽학리(竹鶴里) 선암사에 이르기 전 조계산(曹渓山) 계류 건널
목에 놓인 돌다리.
지정번호 : 보물 제400호
소재지 : 전남 순천시 승주읍 죽학리(竹鶴里) 선암사
시대 : 조선
종류 : 돌다리
본문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보물 제400호. 한 개의 아치로 이루어졌고, 전체가 화강암으로 조성되었으며, 기저부에
는 별다른 가설(架設)이 없고 자연암반이 깔려 있다. 홍예(虹)를 중심으로 하여 양쪽 냇
가와의 사이에 자연석을 쌓아 석벽을 이루고 있다. 윗면은 평평하게 정지하여 통식(通
式)의 교량을 이루고 있다. 좌 ․우 측면의 석축에 약간 보수를 가한 흔적이 있을 뿐 홍
예는 원형 그대로이며, 주위의 석축도 난석(乱石)쌓기로서 시멘트에 의한 보강이 전혀
없어 자연미를 잘 살리고 있다. 선암사는 창건(創建)과 중건(重建)이 통일신라시대와 고
려시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되어 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60년(현종 1)에 중창
한 것을 영조(英祖) 때의 화재로 1824년(순조 24)에 다시 중건하였으며, 이 돌다리도 임
진왜란 이후 사찰을 중창할 때에 가설한 것으로 추정된다.
승선교의 치석(治石)과 홍예의 결구(結構)가 벌교홍교의 것보다 고식(古式)을 띠고 있으
며, 그 구조도 웅장한 점으로 보아 영조(英祖) 때 조성하였다는 벌교홍교보다 조성연대
가 앞서는 것으로 추정된다.
♣산행 코스
주차장(11시)--송광사(11시20분)--송광굴목재(12시20분)--천자암(12시45분)--갈림길,
식사(13시40분)--초가집휴게소(14시30분)--선암굴목재(14시47분)--선암사(15시30분)--
주차장(16시5분) 총 5시간5분
☞☞93년 7월, 95년 3월 두 번이나 산행하며 촬영하였지만 이번 산행은 조계산 자락의
송광사 말사의 천자암의 천연기념물 제88호인 곱향 쌍 향나무 촬영이 주목적이었다. 시
민회관 앞의 거의 만원된 버스에 올라 배기사와 신 회원에게 비디오테이프를 전하고 산
행안내도를 촬영한다.
남해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정 대장이 안내방송을 하고 다리고 나온 부인과 어린남매가 재
롱을 피운다.
문산휴게소에 들려 잠시 용무를 보게 하고 송광사 주차장에 도착한 게 10시50분.
각자 산행준비를 하며 하차.
11시, 인원파악과 상견례를 마치고 곧 출발한다. 매표소를 지나 왼편의 하마비(下馬碑)
앞을 거쳐 일주문을 통과하여 왼편으로 개울위에 있는 우화각(羽化閣)을 통과하여 사천
왕문으로 빠져 대웅전 앞에 당도하여 주변을 촬영한다.
시간이 없어 국보 제56호인 국사전은 출입금지, 담 너머로 줌렌즈로 촬영하고 정교하게
맞추어놓은 석축을 촬영한 뒤 대웅전안에 선남선녀들이 불상 앞에서 합장하며 큰절을 올
린다. 무엇을 기구했을까?
바쁘게 되돌아 나오는데 왼편으로 작은 비닐봉지에 쌀을 포장하여 쌓아놓고 쪽지에 ‘공
양미 5,000원’이라고 써 부쳐놓은 게 시선을 끈다.
우화각 밖으로 나오니 정 대장이 기다리고 있다 등산로를 따라 올라간다. 왼편으로 대나
무 숲을 바라보며 올라가다 통나무 다리를 건너
11시40분, 조계산과 송광사굴목재로 빠지는 국토순례코스 갈림길 이정표 앞에 당도한다.
조계산 연산봉 쪽으로 올라가는 팀은 이미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고 국토순례 팀은 후미
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다.
정 대장에게는 이미 이야기를 했고 오늘의 후미담당 하 군과 그의 친구등 10여명이 조
회장이 앞장서 10여명이 출발한다.
바위돌과 그 사이에 때때로 눈얼음이 박혀있지만 포근한 봄기운에 가벼운 마음으로 완만
한 널찍한 등산로를 따라 올라간다.
12시7분, 대피소 이정표(송광사2.3km 선암사4.3km)를 지나 가파른 오르막을 탄다.
조회장이 깔딱 고개라는 통나무를 잘라 세워 만든 계단을 올라서니
12시22분, 송광사굴목재 이정표(송광사2.7km 선암사3.9km 천자암1.2km)가 나타난다.
12시33분, 임, 김 회원등 후미를 다리고 올라오는 하 군을 기다리다 천지암 쪽으로 간다
는 두 장년등산객에게 물으니 1.2km이지만 왕복 3,40분이면 충분히 갔다 올수 있다고 한다.
곧 올라온 하 군, 그의 친구와 셋이서 오른편, 천자암 쪽으로 빠진다. 좌우 산죽 군락
지, 산죽이 짓밟혀 있는 희미한 등산로를 따라 완만한 경사를 올라
12시46분, 천자봉에 당도한다.
뒤돌아보니 연산봉을 비롯하여 밋밋한 장군봉이 한눈에 들어와 캠코더로 촬영하고 내려
간다. 완만한 내림을 거쳐
13시3분, 헬기장 옆에 스테인리스 판에다‘선암사5.5km'라고 쓴 산행도 안내간판 앞에
당도한다.
오른편으로 널찍한 임도를 따라 내려가니
13시10분, 스님들이 한가로이 해바라기 하고 있는 천자암에 당도한다.
풍경이 바람에 흔들리는 대웅전 뒤편 언덕에
거대한 곱향 쌍향수가 스테인리스 환봉의 철책으로 보호되어 괴기한 모습으로 버티고 서
있다.
백과사전에 설명한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는다.
[松広寺-香-双香樹]
( 천연기념물 제88호. 면적 1,983m2. 수량 2그루. 1962년 12월 3일 지정. 추정수령 800
년. 지정사유 노거수. 송광사 소유.
나무높이 12.5m, 가슴높이 줄기둘레 4m 및 3.24m이다. 가지퍼짐은 남쪽의 것이 동쪽
5m, 서쪽 3.8m, 남쪽 5.8m, 북쪽 3.5m이고, 북쪽의 것은 동쪽 3m, 서쪽 4m, 남쪽 3.8m,
북쪽 3.5m이다.
송광사가 있는 조계산(曹渓山)에 천자암(天子庵)이 있고 그 경내에 2그루의 향나무가 근
접한 상태로 자라고 있다.
전하는 말로는 보조국사(普照国師)와 담당국사(湛堂国師)가 중국에서 수도를 끝내고 귀
국할 때 짚고 온 지팡이를 나란히 꽂은 것이 이 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담당국사는 왕자
의 신분으로 보조국사의 제자가 되었다.
이 나무들은 줄기가 실타래처럼 꼬여 있어 특이하다.
이 나무에 손을 대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말이 있어 찾는 사람이 많다.
눈높이 줄기둘레가 각각 3.10m, 3.85m로서 쌍향수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먼저 캠코더로 바쁘게 주변과 쌍향수를 촬영하고 캐논을 꺼내어
두 사람과 별도로 기념촬영 하는데 그 사이 거의 10분이 걸렸다.
갈 길은 멀고 시간이 없어 천자암은 제대로 촬영 못하고
13시23분, 왔던 길로 되돌아 잰걸음으로 올라간다.
13시40분, 천자봉 못 미쳐 갈림길, 지름길에서 늦은 점심식사를 한다. 천자봉 허리를 돌
아 산죽과 작은 바위 길을 거쳐
14시13분, 선암사로 이어지는 국토순례 길에 오른다.
학생들의 나라사랑정신을 길러주기 위해 부친 이름인 모양인데 완만한 등산로는 어린 학
생들에게 안성맞춤이다.
왼편으로 연산봉과 장군봉 능선이 부드럽게 이어지고 등산로도 넉넉하게 이어진다.
14시20분, 대피소 이정표(송광사3.3km 선암사3.3km)가 나타난다. 그러고 보니 송광사와
선암사의 중간지점이다.
14시30분, 조 회장이 민속주와 보리밥과 반찬 맛이 그저 그만이라고 극찬하든 초가 음식
점 지붕을 오른편으로 내려다보며 지나가는데 뒤따라오든 두 젊은이는 구경하고 오겠다
며 아래로 내려간다.
등산로 아래로 관리가 제대로 안되어 육각정이 망가져 가고 있다.
‘장군봉 작은굴목재’표지를 지나 선암사 방향표지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니 작은 개울
이 나타나고 개울을 건너 올라가는 등산로가 보이는데 개울아래 두 젊은이가 올라오고
있다.
철도 침목 계단이 이어지는데 그 사이 막걸리를 한잔 했다며 하 군이 숨 가파하며
“우리 끼리 해서 죄송 합니더. 그 벌을 받는지 숨이 가빠 죽겠심더.”
하며 올라온다.
14시47분, 선암사굴목재 이정표(송광사4.4km 선암사2.2km 정상1.5km)가 서있는 삼거리
고개에 오른다.
잠시 촬영하며 숨을 돌리고 캐논으로 기념촬영하고 있는데 선암사 쪽에서 어린이들을 앞
세운 가족등산객들이 올라온다.
다시 철도침목을 깐 계단을 내려간다.
등산로 변에 있는 고로쇠나무에 수액을 채취한다고 페트병을 매달아 놓았다.
가나오나 요즈음 고로쇠나무, 거제수 나무가 수난을 당하고 있다.
바위돌이 산제한 등산로를 내려가는데 장년등산객이 무릎에 통증이 오는지 다리를 두드
리고 있다.
개울을 건너면서 서쪽으로 넘어가는 햇살에 반사되는 물이 너무 보기 좋아 하 군에게 세
수하라 연출시키고 반짝이며 부서지는 물과 시원하게 세수하는 하 군을 촬영한다.
다시 오르막을 거쳐 내려가는데 오른편으로 장군봉을 바라보며 자라는 측백나무 조림지
대가 나타난다.
시원시원하게 10여m 뻗어 올라간
측백나무 군락지대에서 다시 캐논으로 기념 촬영한다.
대승암 갈림길 이정표를 거쳐 왼편으로 꺾어져 다리를 건너고 봄의 전령사인 버들강아지
를 촬영하며 가다
15시30분, 스테인리스 판에다 ‘정상2.55km 선암굴목재2.3km'라고 쓴 이정표를 거쳐 선
암사 경내로 들어서 위로 올라간다.
동백꽃이 탐스럽게 피어있는 곳을 거쳐 적묵당(寂黙堂)앞의 종가시나무가 우뚝 선 곳을
거쳐 작은 반송나무를 촬영하고 문창살의 꽃무늬가 섬세한 원통각(圓通閣)을 촬영한다.
선남선녀들이 왕래하는 대웅전 앞의 유리 시주함이 시선을 끈다.
일부 파손된 보물 제395호인 한 쌍의 삼층석탑, 일주문 밖의 거대한 고사목은 여전하
고, 5년 전 보다 훨씬 깨끗하고 활기찬 경내를 둘러보고 내려오면서 보물 제 400호인 돌
로 쌓은 홍예다리 승선교(昇仙橋)를 촬영하고 곧장 내려가다 주차장을 지척에 두고 두
사람에게 산행소감을 묻는다.
먼저 하 군의 친구가 캠코더 앞에서 느닷없이
“조계산에 조개가 없네!”
하며 장난기를 발동하고,
하 군은 좀 긴장된 표정으로
“오늘 송광사를 출발하여 천자암에 들려 천연기념물 제 88호인 쌍향수를 봤는데 너무
좋았고... 이런 테마가 있는 산행을 자주 했으면 좋겠습니더.”
한다.
16시5분, 주차장 도착. 5시간5분의 산행이 끝난다.
어묵잔치는 끝 난지 오래고 먹다 남은 식은 어묵국물과 무우 파와 소주 반잔으로 속을
채우고, 차량정체를 예상한 집행부에서 예정시간 보다 20분 빨리
16시30분, 급 발진 사고가 발생하여 어수선한 주차장을 빠져나간다.
정 대장이 마이크를 잡고 인사를 한다.
“지금 뒤에서 이 진복 총무님이 고로쇠 한잔씩을 드리고 있는데 김 형필 회원님이 산
것입니다. 고맙다는 뜻으로 박수를 보내드립시다.”
박수소리 속에 버스는 지난번 의상봉 산행 시 촬영했든 비디오를 보며 가볍게 달린다.
승주I/C로 빠져나와 남해고속도로 상에서 배기사가 본사의 시외버스 기사들과 통화하여
교통정보를 얻어 진성I/C에서 국도로 빠진다.
그리고 집행부에서 오늘 회원 중의 한 노장회원이 생일이라고 도중에 가게에 들려 소주
와 안주를 사서 생일축하를 해 준 것까지는 좋았는데 마산을 지척에 두고 다시 정체하
여 버스가 머물자 뒤에서 한 일일회원이 냅다 고함을 지른다.
“어이, 대장님! 왜 빠른 고속도로를 놔두고 멋대로 국도로 들어와 못가는 거요? 한 사
람의 생일축하를 위해 이래도 되는 거요!”
정 대장과 조회장이 변명을 하고 심지어 운전 중인 배 기사까지 마이크를 잡고 해명을
했지만 막무가내다.
“나도 00산악회 회장을 해 봤지만 이런 경우는 없었어요! 이건 너무하지 않아!”
하며 기고만장이다.
보다 못해 일어서 뒤로 돌아보고
“우리가 산을 타는 건 산의 너그럽고 느긋한 심성을 배우기 위해서인데 국도로 들어온
것은 어느 특정인을 위해서 들어온 게 아니고 기사님이 고속도로가 막혔다는 정보를 얻
고 들어왔으니 너그럽게 이해하세요!”
했더니 아무른 반응이 없고 조용해진다.
한참 후 핸드폰으로 여기저기 문의 하는 모양이고 아무튼 창원터널로 빠지는데 우리보
다 남해고속도로로 앞서 달리든 관광버스는 이제 마산T/G를 빠져나간다는 소식을 접한다.
19시55분, 서부산T/G를 빠져나오면서 생각에 잠긴다.
한 사람의 몰이해와 허세는 모처럼 기분 좋은 산행을 우선 본인부터 스트레스와 마음에
흙탕물을 뒤집어쓰게 되고 주변의 여러 사람들에게 정신적으로 피해를 준다.
아무튼 오늘 산행코스는 사랑스러운 어린자녀들과 함께 자연을 음미하고 대화하며 단란
하게 산행하기에 안성맞춤이라는 느낌을 받은 산행이였다.
산 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