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은 게을러서 차떼기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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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경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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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사회부 법조팀 최경운 기자입니다.
작년 한해 검찰의 불법대선자금 수사로 비롯된 법원의 ‘줄공판’도 이제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이상수, 이재정씨 등 ‘노(盧) 캠프’와, 신경식 이재현씨 등 ‘창(昌) 캠프’측 정치인 상당수에 대한 1심 재판은 이미 끝났고, 안희정, 이광재, 최도술, 김영일, 최돈웅, 서정우씨 등도 검찰의 구형을 마쳤거나 앞두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들 정치인에게 돈을 제공한 한 기업인의 재판을 소개하겠습니다.
27일 거액의 불법대선자금을 한나라당측에 건낸 혐의를 받고 있는 강유식 ㈜LG 부회장에 대한 첫 재판이 열렸습니다. 지난 대선을 앞두고 현금 150억원을 ‘탑차(트럭)’에 실어 경부고속도로 만남의 광장에서 이회창 후보의 법률고문인 서정우 변호사(서 변호사는 김영일, 최돈웅 의원과 공모해 모금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에게 트럭째로 넘겨줬다는 이른바 ‘차떼기’ 혐의입니다. 굴지의 대기업 CEO와 국내 최고 클래스의 변호사가 합작해 만들어낸 차떼기는 대선자금 수사의 대표적 ‘상징어’가 됐지요.
이날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됐습니다. 혐의 사실 중 다투는 부분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첫 재판임에도 불구하고 1시간여만에 검찰의 구형까지 마쳤습니다. 쟁점이 거의 없었던 터라 강 부회장은 이날 재판장의 질문에 답하는 기회를 빌어 하고 싶은 말을 맘껏 했습니다. 그는 마치 직원들을 상대로 강연을 하는 CEO처럼 세련된 화법으로 우리 정치권의 검은 돈 관행에 대해 이야기해 나갔습니다.
강 부회장에 따르면, 그는 대선이 절정으로 치닫던 2002년 11월 당시 한나라당 재정위원장이던 최돈웅 의원으로부터 대선 자금 지원을 요청받게 됩니다. 그는 최 의원과의 만남을 아주 불쾌했던 만남으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최 의원은 사무실로 불쑥 찾아와서 ‘예년과는 다른 단위의 큰 액수가 필요하다’며 거액의 자금지원을 요구했습니다. 그의 대담성에 당황하면서도 강압적 태도에 몹시 불쾌했습니다.”
(물론 최 의원은 이같은 강 부회장의 진술에 펄쩍 뛰고 있습니다. 자신은 김영일 의원의 지시에 마지못해 LG측에 자금 지원을 요구했을 뿐이며, 따라서 강 부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그의 말처럼 거만하고 강압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김영일 의원은 그러나 자신이 최 의원에게 LG에 대한 모금 지시를 한 적이 없으며, LG측에도 돈을 요구한 사실이 없다며 최 의원의 주장을 극구 부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존심 센 국내 최정상 기업의 CEO도 정치인의 요구에는 ‘백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기업에 대한 ‘정치권’의 보복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당시에 ‘이회창 필승론’이 파다했습니다. 우리는 김대중 정권 하에서 ‘빅딜’이라는 정치 권력의 횡포로 LG반도체를 잃어본 경험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뭔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해 달라는대로 줬을 뿐입니다.” 깡패에게 이유없이 얻어 터지는데 신물이 난 부잣집 소년이 그저 맞지 않기 위해 돈을 줬을 뿐이라는 이야기로 들렸다면 지나친 말일까요.
자금 마련에 나선 강 부회장은 100억대 이상을 생각합니다. 최 의원이 구체적 액수는 제시하지 않았지만, ‘예년과는 다른 단위의 큰돈’이라는 그의 말을 100억대 이상으로 받아들인 모양입니다. LG가 큰 기업이긴 하지만 현금으로 100억대를 단기간에 뚝딱 마련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이래서 비자금 조성 의혹도 제기되지만, 그는 “회사가 보관하던, LG그룹 대주주와 그 일가(구씨와 허씨) 200여명이 갹출한 돈이 150억~160억 정도 있어 이 돈으로 마련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LG그룹 구조조정본부는 100~200명에 달하는 대주주 일가의 지분 등을 관리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해 이들을 묶어서 관리했는데 이 과정에서 대주주들이 갹출한 자금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돈을 준비한 강 부회장은 이상하게도 자금을 요구한 최 의원이 아닌 서정우 변호사를 전달 창구로 선택합니다. 그는 이 대목에서 최 의원에 대한 불쾌감과 극도의 불신을 다시 한번 나타냅니다. “당시 최돈웅 의원의 말하는 태도나 전체적 인상에서 ‘신뢰하기 힘들고 배달 사고를 낼 수도 있다’고 느꼈습니다. 부주의한 사람인 것 같아 (자금 제공 등 기밀이) 알려질 수도 있을 것 같아 다른 회사 간부의 추천을 받아 채널(전달창구)을 믿을 수 있는 서 변호사로 바꿨습니다.”
강 부회장의 ‘차떼기’ 설명을 한참 동안 듣던 재판장은 한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대기업에 대한 대선 자금 수사 이후 줄곧 따라다니는 의문이기도 한데요, 바로 ‘노 대통령이 속했던 민주당에는 과연 불법자금을 한푼도 주지 않았느냐’는 겁니다. 하지만, 그는 ‘영리한 민주당, 게으른 한나라당’으로 이같은 질문에 대해 명쾌하게 정리합니다.
강 부회장은 애초 지난 대선을 합법적 후원금만으로 치르려고 작심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가 밝힌 대로라면 LG가 2002년 당시 정치권에 제공할 수 있는 합법 후원금은 60억원 수준이었습니다. 정치권의 거센 정치 자금 요구가 빗발칠 ‘대선의 해’를 합법 후원금 60억원만으로 버텨내려 했다는 그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는 그해 8월까지 정치권의 거센 자금 지원 요구에 일체 응하지 않고 버텼다고 합니다. 8월을 넘긴 이후 이 60억 범위 안에서 한나라당에 30억, 민주당에 25억씩 나눠 제공했다는 것입니다.
“기업들이 정치자금을 즐거워서 주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못해 주는 것이죠. 이렇다보니 (자금 제공 규모는) 돈을 요구하는 측의 적극성과 집요함에 따라 달라지게 됩니다. 지난 정권에서 합법적인 후원금으로 민주당에는 146억을, 한나라당에는 26억을 줬습니다. 이 차이는 민주당이 영리하게 접근한 점도 큽니다. 민주당은 매년 LG 계열사들이 낼 수 있는 후원금 한도를 모두 알고 그 한도에 근접하는 돈을 요구했는데, 이런 점에서 한나라당은 게을렀습니다.”
한나라당은 게을러서 못받아 갔다는 그의 설명에 지난 정권에서 여당인 민주당으로 몰려가는 후원금 행렬을 보며 눈물을 삼켜야했다는 한나라당이 얼마나 동의할지는 모를 일입니다. 어쨌거나 지난 정권에서 민주당에 합법 후원금을 한나라당보다 120억이나 많이 줬기 때문에 균형을 맞추는 차원에서 한나라당의 요구대로 150억을 제공했다는 설명입니다.
그래도 재판장은 미심쩍은 듯 그에게 “결과적으로 한나라당에 30억을 더 준 셈인데 균형을 맞추려했다면 민주당에도 더 줘야하는 것 아니냐”고 재차 묻습니다. 그는 “민주당은 대선에서 공식 후원금 외에는 더 이상의 추가 자금을 요구하지 않았다”고 답했습니다.
검찰은 이날 강 부회장에 대해 “첩보 영화 같은 수법으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돈을 실은 차를 전달하는 등 죄질이 무겁다”며 정치자금법상 법정 최고형인 징역3년을 구형했습니다. 그는 최후 진술에서 “아무리 강압적 요구가 있었고 사회적 관행이었다해도 부당한 정치권의 요구를 뿌리치지 못한 자신이 부끄럽다”고 말했습니다. 이날 김영일 의원도 자신의 재판에서 “선거전(選擧戰)에서 현실의 벽을 뛰어넘지 못한 자신이 부끄럽고 죽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들은 이날 선거만 다가오면 의례 기업에 ‘협조하라’는 정치권의 행태와 ‘언제 보복당할지 모른다’는 기업의 피해의식이 만난 결과가, 정치와 경영에서 ‘선진국’을 앗아가고, 수치심과 때늦은 후회만 남긴다는 것을 다시 한번 자신들의 입으로 말하고 있었습니다.
(최경운 드림 code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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