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 속 보르헤스 외 4편
홍정미
내 가방 속에는
보르헤스의 미로로 가득하다
둥글둥글 낯선 미로, 우물우물 복잡한 미로
흥미로운 소문에 갇혀버린 미로
시간의 무한한 갈라짐으로 속수무책인 미로
앞뒤가 맞지 않는 초고가
뒤죽박죽 엉켜 있는
가방 속,
보로헤스의 미로는 백 년 내내 어둡고
익숙하지 않은 문장처럼
고요하다
아버지의 복도
홍정미
봄이 오면 일어나서
걸어 나갈 수 있을 거야
밭에 감자도 심고 고추도 심어야지
감자가 여물어 가는데
그는 없다
석양과 도시의 변두리를 좋아하더니
그곳에서는 노을 하나 소유했을까
너무 아름다워 서러운 노을 하나 차지했을까
그의 저물녘은 어둡고 악몽 같은 복도였고
현기증 일으키는 깊숙한 층계였으므로
해줄 수 있는 일은 감자를 캐서
그의 복도와 층계를 채우는 것이다
어두운 복도에 등불을 단다,
그는 나로부터 자유로이 날아
봄이고 여름이다
목련을 훔치다
홍정미
살금살금 다가갈 때
흐드러지게 핀 바람이 헛기침 몇 번 하고 지나갔을 뿐
구부러진 어휘로 가득 찬 정원은
아득한 향기에 취해 있었다
고양이 발가락으로 내려온
흰 꽃봉오리들,
운율과 동음반복과 은유로 유혹해
발가벗은 몸뚱어리를 필사하고 있을 때
먼 곳에서 들려오는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운수골
홍정미
칡꽃 향기에 취해
늘 비틀거렸다
다래나무이거나 산뽕나무이거나
내려오는 바람은 따로 있어 골짜기를 꿈틀꿈틀 기어 내릴 때
가난한 휴가의 밥 짓는 냄새가 가득 메웠다
두고 온 도시의 쓸쓸함이 일어
자꾸 눈을 비비다가
개울물 소리에 끌려 물속을 종일 들락거렸다
나뭇잎 쓸리는 소리에 놀란 새 한 마리
저무는 그림 속으로 사라지자
더위도 비켜나갔다
그리운 것이 많아
서글픈 곳,
운수골 골짜기에 여름이 깊다
백일홍의 시간
홍정미
비밀투성이의 세계,
오래되고 셀 수조차 없는
어떤 새벽으로부터 도착했습니다
어제,
유프라테스 강가를 거닐던 바람이
반짝이는 송이를 하늘 가득 펼쳐놓았습니다
제 몸 흔들며
무리 지은 백일홍
쪽빛 하늘을 밝히는 백일홍의 시간,
아내의 정원에 여름이 왔습니다
홍정미
1966년 강원도 춘천에서 출생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강원대학교 국문학과 석사 졸업
온라인중고서점 ‘자작나무’ 운영
당선소감
홍정미
걸었습니다.
집집마다 장미 덩굴이 담장을 덮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향기를 담장 밖으로 내보내고 싶었겠지요.
햇살이 장미의 빨간 꽃잎을 간지럽히는 오후,
연인들의 사랑처럼 강렬한 색깔로 세상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붉은 꽃잎은 서로 겹쳐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중심으로 갈수록 농도가 짙어지며 매력을 발산했습니다.
향기 따라 걷다 보니 붉은 그리움을 숨긴 채
얼마나 오랫동안 걸어왔는지 보였습니다.
그 그리움이 담장을 넘어 골목으로 스며들었습니다.
제 시는 그 그리움의 골목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골목에는 달콤한 공기와 사각거리며 흔들리는 삶의 무늬들과
절뚝거리는 바람, 모험심으로 무장한 고양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군상들이 저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습니다.
울프가 말하길, 여성이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연간 500파운드의 수입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런 공간을 가질 수 없었고, 집안일과 육아
끊임없이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어느 날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머리가 희끗했습니다.
시가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벅찼습니다.
시를 쓰지 못해 고통스럽고 외로운 순간도 있었지만,
그 시간이 저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제 작품을 읽어주신 안현심 선생님 사랑합니다.
부족한 작품을 선택해주신 반경환 주간님 감사합니다.
누나의 뒤엉킨 삶에 손을 잡아 준, 시인 동생 홍정문 고맙습니다.
또한, 끊임없이 응원해준 가족과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진솔하고 감동적인 시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겠습니다.
홍정미 강원도 춘천시 세실로 208번길 12-3번지 3층
이멜 주소; mrilk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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